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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94년 이종범_리그를 초토화시킨 야구천재 바람의 아들

by 마음heart 202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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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94년 이종범

리그를 초토화시킨 야구천재 바람의 아들



투수는 선동열이 가장 제일 잘하고, 타자는 이승엽이 제일 잘하고 
야구는 이종범이 제일 잘한다.
이종범은 10승 투수 2명과도 바꾸지 않는다.
                                                                             
                                                                 /김응용 해태 타이거즈 감독

 

이종범은 바람의 아들,야구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은 KBO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5툴 플레이어로 해태-기아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성구회 제4호 회원입니다. 해태 왕조 말년인 1993, 1996, 1997년 3차례 우승과 KIA 인수 후 첫 우승인 2009년을 포함해 총 4차례 우승을 이끌었으며 대표적인 수상기록으로는 통산 정규시즌 MVP 1회, 한국시리즈 MVP 2회, 골든글러브 6회, 미스터 올스타 1회. 또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야구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참가해 각각 금메달과 4강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1993년 양준혁과 프로야구에 함꼐 등장,야구천재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당시 이종범은 엄청난 주루 능력과 유격수라는 포지션(일본에서 복귀 이후 여러 포지션에 출전하게 되는데 외야수를 제외한 다른 포지션은 훈련을 제대로 받은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평균 이상의 소화 능력을 보였는데 결과적으로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뛴 적이 있으며, 96년에는 그야말로 경기 중에 갑자기 포수 마스크를 쓰고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인 이대진과 임창용의 공을 받았으며 40도루를 기록한 김재걸을 도루사 시키기도 했습니다.이종범의 최전성기로 평가받는 5년 동안 통산 홈런 2위라는 뛰어난 펀치력과, 통산 타율이 가장 높은 0.332를 기록할 정도로 정교한 컨택 능력을 자랑했습니다.이종범의 주요 시즌의 기록을 살펴보면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 113득점, 출루율 0.452(모두 시즌 1위)를 기록한 1994년은 이종범 야구인생의 정점이자, KBO 리그 역사에 남을 시즌이었는데 KBO 리그 단일시즌 야수 sWAR 1위(11.77)를 기록하기도 하며 1997년에는 타율 0.324, 30홈런(2위), 64도루(1위)로 30-30클럽에 가입하고 KBO 역대 최초로 트리플 쓰리(한 시즌 동안 3할 타율, 30홈런, 30도루를 기록하는 것. 정확성(타율)과 파워(홈런), 스피드(도루)를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KBO 역사상 41년 역사에 6명밖에 배출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기록)를 달성했습니다. 특히 1994년의 타율은 프로 원년인 1982년 백인천의 0.412 다음으로 최고 타율이며, 안타는 2014년 서건창이 201안타로 경신할 때까지 최고 기록이었습니다.경기수는 14년 서건창이 128경기 체제, 94년 이종범이 126경기 체제로 별 차이 없지만 타석수는 14년 서건창이 616타석으로 561타석의 94년 이종범보다 더 많은 타격 기회를 가져갔기에 타율은 94년 이종범의 훨씬 뛰어났습니다.그러나 일본 프로야구 진출 후 부상과 부진, 국내 복귀 이후 급격한 노쇠화에 의해 2004년부터 점점 하락세가 시작되어 말년의 기록은 전성기때 지표를 상당히 많이 까먹었고 전성기때 칭송받았던 이름값에 비해 통산기록은 많이 아쉬운 수준에서 그치는데 데뷔 이후 5년 동안 쌓은 sWAR이 42.16인데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11년 동안 쌓은 sWAR은 26.58에 불과한 것을 보면 전성기가 일찍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종종 비교되는 양준혁이 18년간 꾸준한 활약을 펼친 것에 비하면 약간 일찍 끝난 것도 있지만, 전성기에 해당하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시기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낸 부분이 KBO 통산 기록이 생각보다 빈약한 결정적 이유인데 실제로 이종범은 만 33세 시즌인 2003년에 3할-20홈런-50도루를 기록하며 2022년에 아들 이정후에게 경신되기 전까지 21세기 중견수 단일시즌 sWAR 1위(7.11)였던 기록을 남겼고 만 35세 시즌이자 꽤나 심각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2005년까지도 규정 타석 3할 타율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종범은 서림초등학교와 충장중학교를 우승으로 이끌 만큼 어린 시절부터 정상급 선수였는데 광주일고다 3학년이던 1988년 청룡기 결승전(對 군산상고)에서 연장 11회 끝내기 역전 2루타를 때리며 모교를 39년만에 우승시켜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습니다.고등학교 졸업 이후 건국대학교 경영학과(1989학번)로 진학하였는데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고교 졸업 후 프로 1차 지명으로 직행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겠지만, 90년대까지는 고등학교 때 잘 하던 선수라도 대학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뛰어난 재목이었던 만큼 연세대,고려대 등지에서도 스카우트를 하려 했지만,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고 연세대와 고려대에서는 이종범 1명만 원했으나 건국대에서는 동기 및 후배 선수들도 같이 받아주겠다고 하여 건국대를 선택했다고 합니다.이종범의 활약은 대학교 때에도 계속되었는데 1학년 때부터 레벨이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1989년 대학야구를 호령하던 국가대표 에이스 박동희는 3월 봄철연맹전에서 한 타자에게 2개의 홈런을 맞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 타자가 건국대 1학년 유격수 이종범이었습니다. 1989년 9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MVP도 건국대 1학년 이종범 차지였는데 당시 이종범은 일본대표팀의 '토네이도' 노모 히데오로부터 4타수 2안타 2도루를 뽑아내는 활약을 펼쳐 공동우승을 이끌어 냈습니다.1992년 결승전에서 고려대를 상대로 연장 11회 접전 끝에 건국대가 9-6으로 이겨 우승하며 이종범은 타격상과 홈런상에 최우수선수까지 선정되었습니다.

이종범은 1993년에 1차 지명으로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에 계약금 7,000만원을 받고 입단하였는데 24년후인 2017년 넥센 히어로즈에 1차 지명된 아들 이정후 계약금이 2억원이었습니다.이종범은 같은 해 고려대 좌완투수 이상훈이 계약금 2억에 LG 트윈스와 계약하는 걸 보고 이종범도 협상하던 중 계약금 1억을 요구했는데,협상을 담당하던 해태 구단 실무자가 "광주는 서울보다 물가가 더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 받는 것보다 광주에서 7,000만원 받는 게 더 낫다"고 했다고 합니다.이종범은 데뷔 시즌부터 타율 0.280, 득점 1위, 안타, 도루 2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한 경기 도루 3개(최다), 총 7개(한국시리즈 최다 도루 타이)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지만 아쉽게도, 1993년은 양준혁,박충식,이상훈,구대성,이대진 등 훗날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이 많이 나온 해로 유명했었고, 신인왕은 MVP에 근접했던 양준혁이 가져가게 됩니다. 시즌 초창기에는 쟁쟁한 선배들이 너무 많다보니 기가 죽어 있었고 자신의 기량을 펼치지 못했던 이종범은 김성한과 한대화가 이종범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라운드에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세이프 될 자신 있으면 도루도 맘껏 해라. 아무도 너한테 뭐라 안 할것이다'라고 충고해줬고 이종범은 그말을 들은 뒤부터 날라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김응용 감독이 이종범에 그린라이트를 주지 않았으나 시리즈가 해태의 열세로 흘러가자 '에라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이 놈아'하면서 이종범을 자유롭게 풀어줬고 한국시리즈에서만 그것도 5, 6, 7차전에서 총 7개(7개 연속) 도루를 성공시켜 혼자서 원맨쇼를 펼친 끝에 우승을 차지했으며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망의 1994년,소포모어 징크스 시달릴 거라는 언론을 비웃기라도 하듯,0.393이라는 괴물같은 타율을 기록했는데 프로 원년 백인천의 0.412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었으며 196안타,84도루를 달성했는데 이때의 84도루는 지금까지 한 시즌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괴물같은 성적을 낸 만큼 정규시즌 MVP는 당연히 이종범의 차지였습니다.이종범은 1994년 당시 4할 타율, 200안타, 100도루 3가지를 한꺼번에 달성하려고 했다고 하며 이 때 조정 OPS가 2002년 이승엽보다는 낮고, 1992년 장종훈보다 높은데wRC+를 보면 1994 이종범은 2010 이대호보다 높습니다. 게다가 도루지표인 wSB은 역대 1위인데 이게 다 수비부담이 가장 높은 유격수로써 낸 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역대 WAR 기록 지표를 보면 1위 1994년 이종범(11.8), 2위 2015년 에릭 테임즈(10.9), 3위 2003년 심정수, 4위 1997년 이종범, 5위 1996년 이종범 순입니다.꿈의 타율 4할을 넘나들며 한 시즌에 84개의 도루를 성공시킬 만큼 놀라웠던 주루 능력과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완전히 빠지는 듯한 공을 낚아 내는 수비 능력까지. 당시 이종범은 1번 타자로 나와서 안타와 홈런을 치고 도루와 명품 수비까지하는 몬스터였다는 것입니다.

1995년도에는 방위병 규정 때문에 홈경기만 뛰어서 딱 시즌의 절반만 뛰었는데 해태는 95년도에 홈경기에서 38승1무23패, 순수 홈경기만 따지면 OB, 롯데랑 비슷한 성적을 내고도 원정경기에서 26승2무35패로 좌절하면서 역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8구단 이상 체제에서 4위를 하고도 가을야구의 좌절을 맛봅니다.하지만 1994, 1997년도만큼이나 1995년도의 이종범의 기록 역시 대단한데, 홈경기만 뛰고도 이런 기록이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훌륭했는데 63경기 동안 타율 .326 16홈런 32도루,WAR 5.03 wRC+ 181을 기록하면서 어지간한 5툴 플레이어들의 커리어하이급의 성적을 기록합니다.특히 1995시즌 홈런왕인 김상호가 25홈런을 기록했는데, 당시 이종범의 홈런 페이스였다면 홈런왕 경쟁까지 할 뻔 했다는 것입니다.또한 1995시즌 WAR 1,2위였던 양준혁과 홍현우가 각각 6.68, 6.53을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전경기 출장이 가능했다면 1994시즌 못지 않은 몬스터시즌을 보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시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995년도에 체력을 비축해둔 까닭에 1996년과 1997년에도 완전히 포효할 수 있는 체력도 얻었다고도 볼 수 있는 시즌이기도 합니다.1996년 박재홍의 등장 이전까진 장타보다는 주로 도루쪽에 비중이 컸지만 박재홍의 30-30 클럽 달성에 고무받아 1996년부터 장타에도 집중하고, 그 결과 1997년에는 천하의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펼치기도 합니다. 29개까지 기록했을 당시 이종범이 홈런 1위 고지를 밟고 있었는데, 8월까지 이종범은 홈런 29개에 타율 3할 5푼대의 끝판왕이었지만 후반기에 체력이 떨어지며 타율도 까먹고 홈런도 9월 15일에 겨우 하나 추가하며 30-30 클럽 가입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결국 1997년 시즌 홈런왕은 32개를 친 이승엽이 2개 차이로 가져가게 됩니다. 당시 이종범은 97시즌 KBO 역사상 한 시즌 최다 고의사구인 30개를 기록했는데 똑같은 홈런을 기록한 해당 시즌 양준혁이 27개 반면 이승엽의 고의사구는 4개에 불과했습니다. 타석으로 따져도 이종범과 이승엽은 같은 577타석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이종범이 30개라는 홈런을 기록하면서 94년보다 97년의 이종범이 더 5툴 플레이어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지만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들을 보면 오히려 이종범의 커리어하이는 97년이 아니라 94년으로 97년은 장타를 의식한 나머지, 장타율빼고는 오히려 전년도들보다 약간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93~97년까지 홈런 순위는 4-4-9-3-2위였고 도루 순위는 2-1-6-1-1로 홈런왕-도루왕 동시 석권을 했을 뻔한 유이한 선수였습니다.데뷔이후 맹활약한 이종범의 4.5년은 KBO 역사상 야수 중 가장 압도적인 기간 중 하나로 93년부터 97년까지 5시즌동안의 기록은 클래식 스탯만 따져도 .332(1위) 713안타(1위) 106홈런(2위) 315타점(5위) 310도루(1위) 1170루타(2위) OPS .954(2위) 로, 사실상 야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부스탯 역시 어마어마했는데, 4.5년간 sWAR 42.15(1위), wRC+ 176.8(2위) wOBA .423(2위)를 기록했고 특히 이 4.5년간 쌓아올린 sWAR 42.15는 2위인 양준혁과 상당한 차이가 나며 여타 이름있는 선수들의 통산sWAR을 가볍게 추월하는 수치였습니다.그리고 포스트시즌에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93년 말고도 96~97년 해태의 통합 2연패 주역 중 하나였으며, 97년에는 고비 때마다 홈런을 쳐내는 맹활약으로 2번째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합니다. 93년부터 97년까지 이종범은 포스트 시즌에서 .273, 3홈런(2위) 10타점(4위) 13도루(1위) 36루타(2위) 14득점(1위) sWAR 1.19(1위)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뚜렷하게 과시했습니다.

이종범은 1997년 한국 시리즈 세번째 우승을 거머쥔 후, 본인의 해외진출에 대한 관심이 자금난에 시달리던 당시 해태의 사정과 맞물려 이적료 4억 5천만엔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해태시절의 이종범이 기록한 5시즌간의 기록은 그야말로 야신이 따로 없는데 이종범은 매년 타출장 비율스탯 3/4/5를 찍고 50도루 이상씩 기록하는 초인적인 성적을 낸 1990년대 KBO 최고의 리그 브레이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야구천재라는 칭호를 받으며 1998년 일본 프로야구에 도전한 이종범의 일본 데뷔 후 첫 달은 엄청난 맹활약을 펼치면서 일본 열도에 충격과 공포를 동시에 선사했습니다. 용병답지 않게 친화력이 상당히 좋았고 온 몸을 던지는 허슬플레이를 비롯,호시노 센이치 감독도 매우 좋게 보았던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던 투쟁심 있는 모습, 당시 일본 야구관에 있어 유격수는 내야수비의 핵으로 타격은 약해도 팀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라는 인식이 주류였는데 시즌 초반부터 3할을 넘나드는 타격과 부상 전 기준으로 팀내 홈런 3위, 리그 10위 이내에 드는 생각 외로 뛰어난 장타력, 거기에 특유의 빠른 발로 도루부문 리그 1위를 질주하면서 주니치 팬들 뿐 아니라 모든 일본야구 팬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반면 부상 전까지 당시 팀 실책의 절반 가까이였던 11실책을 기록, 압도적으로 리그 1위를 달리며 수비쪽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비력을 선보이면서 '유격수는 뛰어난 수비수'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공포도 동시에 안겨주게 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첫째 이유는 이전의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가 탈세사건에 연루되어 출장 정지된 상태라 이종범을 대체할 유격수가 없었고, 둘째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시즌 초의 타격지표가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상위리그로 진출하는 타자들은 타격성적이 첫 해에는 급락하기 마련인데, 리그가 바뀌고 친 투수구장인 나고야 돔을 홈으로 쓰면서도 팀내 모든 부분에서 상위권을 다툴 정도로 공격력이 좋았기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를 반증하듯 부상 전 올스타전 투표에서도 유격수 부문 1위를 기록했는데, 2위와 두 배 이상 차이나는 득표를 받았을 정도였지만 흔히 말하는 '일본식 분석야구'에 공략당하면서 약점이 잡히기 시작했고,6월 초 들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이종범은 6월 중순에 타격감을 조금씩 회복해가며 부상 직전인 22일까지 두 개의 홈런을 포함한 7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감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올스타전 중간 투표에서도 센트럴리그 유격수 부분 1위를 차지하며 반등의 여름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1998년 6월 24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카와지리 테츠로 투수의 몸쪽 공을 무리하게 스윙하려다 오른쪽 팔꿈치에 투구를 맞아 골절상을 당하게 됩니다.이로 인해 남은 시즌을 거의 날리고 시즌 막바지에야 가까스로 복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부상 이후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다시 KIA에 복귀해서 준수한 외야수의 모습을 모여줬지만 압도적인 해태의 유격수 이종범의 모습은 여기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의 야구천재 이종범과 일본의 야구천재 스즈키 이치로

1998년 시즌 최종성적은 67게임에 출전해 .283 10홈런 18도루 OPS .873 WAR 3.3을 기록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용병으로서 무난한 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파고들면 상당한 공격력을 자랑한 시즌이었는데 당장 팀의 주전 중에 타율이 이종범보다 나은 선수는 부상 직전에는 이노우에 카즈키, 부상 후에는 .285를 기록한 세키카와 코이치밖에 없었으며, 홈런 수 역시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 전인 6월 2일 기준 팀내 1위,부상 직전 6월 21일 기준으로도, 11개의 홈런을 기록한 레오 고메스에 이어  야마사키 타케시와 함께 9개로 팀내 홈런 공동 2위를 기록하는 등 나고야 돔을 홈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드오프가 리그 10위 이내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시즌 종료 시점에서도 야마사키 타케시의 27개, 레오 고메스 26개에 이은 팀내 3위를 기록. 도루는 67경기만 뛰었음에도 98년도 센트럴리그 도루 부문 2위를 기록했으며, 부상당한 시점에서는 17개로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1번타자의 최고의 덕목인 볼넷과 출루율도 부상 직전까지 각각 센트럴리그 3위, 5위를 기록하면서 공격면에서는 확실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다 세이버스탯으로 들어가면 1번타자 유격수임에도 타자의 생산력을 나타내는 wRC+가 140을 넘겼으며, 기타 세부 성적도 wOBA .390, BB/K 1.09. WAA 2.2 등을 기록. 매우 좋은 타격 성적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타격 성적 때문에 이후 99년에도 호시노가 외야수로까지 컨버전시키면서, 시즌 내내 2할 5푼대를 전전하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 .238를 기록한 최악의 타격부진 속에서도 400타석 넘게 출전시킬 정도로 이종범에게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입니다.1999년에는 1998년 팔꿈치 골절 후 시즌 막판에 컴백하면서부터 외야수로 보직을 변경한 것이 이어져 외야수로 기용되어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시범경기에서만 4개의 데드볼을 맞으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더니, 정규시즌에 들어서는 시즌 내내 .250대의 타율을 기록하다 막판에 성적이 떨어지면서 결국 시즌 종료 시점에서 타율 .238/OPS .683 9홈런 33도루 24도루 WAR 0.7이라는 기록으로 리그 2위를 기록한 도루 부분을 제외하면 팀내 타격 성적에선 리그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주전 포수 나카무라 타케시 다음 정도의 부진한 성적에 그쳤습니다. 실책까지 7개를 기록하면서 외야 수비 또한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일단 출루하면 특유의 몸을 내던지는 슬라이딩과 일본에서도 인정받은 빠른 발을 이용한 주루플레이로 상대를 뒤흔드는 모습이 종종 나왔고, 이를 나타내듯 도루 성공율이 .774, Spd가 7.2를 마크하며 당시 주루 플레이에서만큼은 리그에서 손 꼽히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2000년에는 전년도 시즌에서의 부진과 비시즌간 호시노 감독과의 마찰로 인해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새 용병 데이비드 닐슨(등록명 딩고)이 시즌 초반 극악의 부진을 보였고, 팀도 연패에 빠지는 등 어수선하자, 바로 1군으로 콜업되어 마치 98년 전반기 모습같은 활약으로 팀이 10연승을 질주하는 데 기여합니다. 호시노 감독도 이 때 만큼은 "팀 분위기를 바꿔줄 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말로 이종범의 활약을 인정했을 정도. 연승이 끝난 이후 잠시 주춤할 때도 있었으나 8월 중순까지 주로 1,2,3,6번을 오가며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분전했고,외야 수비 역시 시즌 동안 실책 3개로 전년에 비해서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시즌 말미에는 호시노에게 좌익 수비는 리그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호평을 듣기도 했습니다.최종 성적은 113경기에 출전해 .275의 타율과 8홈런 37타점 11도루. WAR 2.2를 기록했는데 9월 들어서 막판에 힘이 빠진 탓에 타율이 여름에 비해 뚝 떨어졌으나, 전년도에 바닥을 찍었던 타격 성적보단 어느정도 일본 리그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2001시즌은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새 용병 듀오인 팀 언로와 아지 티몬스에 밀려 시범경기부터 선발 출전하지 못하고 대타와 대수비 등으로만 출전했는데 출장 기회를 확보하고자 외야수는 물론,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처음으로 3루수 준비까지 했지만 개막 얼마 후 2군행 통보를 받고 구단 대표와 담판을 지어 출전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퇴단하겠다고 통보합니다. 4월 24일 야쿠르트전부터 다시 1군에 복귀해 선발 3번타자 3루수로 기용되었으나, 이틀 연속으로 출루 한번 못하고 8타수 무안타를 기록해 다시 벤치멤버로 내려갔으며 이후 두 경기에서 대타, 한 경기에서 대주자로 기용된 후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 시즌까지 주니치의 붙박이 4번타자였던 용병 레오 고메스가 주니치와의 뒤늦은 재계약에 성공,컴백하게 되자 더 이상 1군에서 이종범이 설 자리는 없게 되자 결국 6월 1일자로 상호 합의하에 주니치를 퇴단하였습니다.

해태에서 KIA로 모기업이 바뀐 타이거즈에 연봉 3억 5천+ 엔터프라이즈 1대를 받는 조건으로 만 4년만에 국네에 복귀한 이종범은 2001년에는 유격수나 외야수가 아닌 타격에 집중하기 위해 3루수로 복귀했다가, 2002년부터는 일본 시절처럼 본격적으로 외야수로 뛰기 시작했습니다.비록 전성기만큼은 아니었으나, 꾸준히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축이 되는데 93-97 시즌의 이종범의 포스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이후에 부진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02-05 시즌까지는 2할5푼 이상, 06~20개의 홈런, 20개 이상 도루를 꾸준히 찍어주는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주전 외야수로 활약했던 02~05 4년 동안 통산 성적은 506G/569안타(3위)/61홈런(17위)/155도루(1위)/208타점/372득점(1위) .295(18위) / .374(19위) / .458 wRC+ 125.3(20위) WAR* 21.40(2위)으로, 04~05 때 비율스탯을 많이 까먹긴 했으나누적으로는 상위권인 성적이 많고 WAR*은 심정수에 이어 2위였습니다.팀 내에서는 장성호와 함께 타선을 이끄는 쌍두마차였으며, 동시대의 대표적인 외야수였던 이진영,박한이,이병규,박재홍보다도 WAR을 비롯한 타격 스탯이 좋을 정도로 굉장히 준수한 외야수였습니다.하지만 노쇠화의 기미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는데 2002년에는 위협구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고 그 여파로 한동안 일명 '검투사 헬멧'을 쓰고 타격에 나서기도 했으며 2003년에는 3할-20홈런-50도루-7점대 WAR로 전성기 못지않게 순항했지만 2004년부터 배트 스피드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 그 시즌 0.260의 낮은 타율을 기록하며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결국 시즌 종료 후 데뷔 첫 연봉 삭감이라는 수모를 당했고, 이후 배트를 짧게 쥐는 스윙으로 바꾸며 2005년에는 3할을 다시 치고 출루율은 4년 중에서는 제일 높았으나 대신 장타력이 급감해버렸고, 덕분에 OPS 역시 크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2002~2003년에는 S급 외야수였고, 성적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고 평가받는 2004~2005년에도 준수한 외야수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전성기 시절처럼 80도루를 하지는 못했지만, 주루 플레이는 리그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수비수의 태그를 피해 들어가는 고난도의 기술을 여러차례 보여주었는데, 당시엔 이종범만이 할수 있는 독보적인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런 창의적인 플레이가 상대 선수도 잘 속였지만 가끔 심판마저 속아서 태그를 피했다는 사실을 순간 인식하지 못하고 타이밍만 보고 아웃을 시켜버리는 적도 있었습니다.2005년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고, 2년 총 18억(계약금 7억, 연봉 5억×2, 옵션 총 1억)에 KIA 타이거즈와 재계약했습니다.리그에서 정상급 외야수였던 이종범은 2006년 3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차출되어 타율(.400)과 안타(10개) 1위를 차지하며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는 등 한국 대표팀을 이끌어 팀의 4강 진출에 큰 활약을 했습니다.

2006년부터 이종범의 노쇠화가 급격해지기 시작되는데 시즌 시작 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차출됐을 때 엄청난 활약을 보였던 것과 다르게 시즌 개막 후에는 한눈에 봐도 노쇠화가 찾아왔다는게 보여질 정도로 망가진 시즌을 보냈는데 시즌이 한창이던 7월에는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인해 데뷔 처음으로 2군행을 통보받는 등 2006년에는 82안타 1홈런 10도루,21타점 41득점 .244/.302/.310 wRC+ 73.0 WAR 0.79로 크게 부진했는데 그나마 팀의 포스트시즌이 걸린 9월 이후에 활약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긴 했으나, 이종범의 이름값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활약이었습니다.2007년에는 더 심해져서 44안타 1홈런 3도루 18타점 23득점 .174 / .217 / .209 wRC+ 8.0 WAR -2.04로 가히 2022년 김헌곤을 연상시키는 역대 최악의 성적을 찍어버립니다. 2008년에는 90안타 1홈런 9도루(3실패) 38타점 38득점 .284 / .348 / .379 wRC+ 99.9 WAR 1.45로 전성기의 모습에는 많이 못 미쳤으나 2006, 2007년에 비하면 많이 나은 모습을 보여주며 명예회복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야구천재라 불리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한계와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타이거즈 팬들은 격려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습니다.2008년의 활약으로 2009년 시즌에도 예비 멤버로 뛸 수 있었는데 광주 삼성전에서 전준호에 이어 500도루를 달성했으며 장종훈,전준호,양준혁에 이어 역대 4번째 1000득점도 달성하는 등 2009시즌 성적은 105안타 6홈런 11도루 40타점 63득점 .273 / .346 / .379 wRC+ 82.0 WAR 0.86이었으며 시즌 후 FA 자격을 다시 얻었지만, 신청하지는 않았고 2억 6000만원에 연봉 계약을 마쳤습니다.2010시즌에는 역대 6번째로 1700안타 고지를 달성했으며 2011 시즌 42살의 적지 않은 나이의 이종범은 시즌 최종 97경기 출장하여 작년과 똑같이 97경기 출장에 65안타를 때려냈지만 작년보다 다소 적은 273타석만에 쳐낸 것이며, 사사구는 작년보다 더 많은 23개를 기록하면서 타출장 슬래시라인 0.277 / 0.337 / 0.387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냈습니다. wRC+도 91.7에 sWAR도 0.69로 나이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인상깊은 활약이었지만 이종범은 이해에 은퇴하기로 합니다.

선수 시절 화려한 전성기와 암흑기, 그리고 고난과 좌절을 견뎌내면서 커리어를 지켜왔던 이종범의 선수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며 은퇴식을 치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대진 선수가 이종범 선수의 아내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고 합니다.2012년 7월 20일 잠실에서 열린 한일 레전드 매치에 출전, 여전히 녹슬지 않은 주루플레이와 호수비 등을 보여주었으며, 이날 활약에 힘입어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경기는 한국 OB가 5:0으로 승리하였습니다.이종범은 이렇게 일본 프로야구에서의 4년간을 포함 프로 20년간의 여정을 마치게 됩니다.야구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만큼 국내에서의 5년간의 임펙트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지만 이후의 커리어 역시 프로 초창기 시절의 활약이 워낙 몬스터급이었기 때문에 평가절하될 뿐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무엇보다 이종범이 프로에 첫선을 보인 1993년 이후 무려 24년만인 2017년 한국 야구계는 또다른 유형의 타격천재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이종범의 아들이자 바람의 손자라는 별칭의 이정후가 그 주인공으로 이정후는 아버지와는 또다른 재능으로 한국 야구계를 이끌어가는 타격천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종범 통산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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