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를 거꾸로 들고 쳐도 3할 타자,리그 최초의 신인왕+타격왕 "양신"
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93·1993·1996·1998·2001 양준혁
양준혁은 KBO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좌타자이자 타격의 달인으로 은퇴 시점에서 3000타석 이상 타자들 중 KBO 통산 wRC+1위, 야수 WAR 스탯티즈, KBreport) 1위 자리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wRC+ 200을 2번 넘겨본 유일무이한 타자입니다.wRC+ 200은 이승엽이나 이대호, 이종범 등 쟁쟁한 타자들도 커리어하이에 못 넘긴 스탯이며, 82백인천(227.0), 15테임즈(222.3), 83장효조(215.4), 93양준혁(212.0), 03심정수(210.7), 96양준혁(207.0), 84이만수(204.6), 91장종훈(204.2), 97김기태(202.6)라는 단 9개의 사례만 있을 뿐입니다.이 중에서 두 번 넘겨본 선수는 오직 양준혁 밖에 없습니다.대표 별명으로는 타격의 신이라서 붙은 '양신'. 그리고 머리가 크다 하여 붙은 양대갈이 있습니다. 슬럼프를 겪었던 2002년과 2005년, 말년 노쇠화로 기량이 떨어지던 2008년과 2010년을 제외하고는 전부 3할대의 타율을 기록, 배트를 거꾸로 들고 쳐도 3할이라는 비유까지 만들어졌습니다.일명 "만세 타법"이라 불리우는 특유의 타격폼과 타구나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끝까지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던 모습은 양준혁의 트레이드 마크로 기억되고 있으며응원가는 따로 없이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위!풍!당!당! 양!준!혁!"을 외칩니다.2011년 7월 23일 올스타전에서 은퇴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선정한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합니다.
배트를 거꾸로 들고 쳐도 3할~!양신의 시작
양준혁은 남도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경운중 시절엔 주로 투수로 뛰었지만 팔꿈치 부상으로 야수로 전향했습니다. 경운중 3학년이던 1984년엔 체육부장관기에서 1루수로 타격상 0.714 을 받으며 미래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대구상고 시절엔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했습니다. 고교 3학년이던 1987년엔 삼성 입단을 희망했지만 박영길 당시 감독의 만류로 대학 진학을 택했습니다.당시 분위기 상 야수는 대부분 대학교를 진학하고 나서 프로로 오는게 트렌드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워낙 잘나갔던 양준혁은 진작 영남대로의 진학이 유력한 상황이었고 삼성 감독의 진학 권유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당시에는 연고지 선수 세명을 1차 지명으로 뽑을 수 있었으며 2차지명은 무제한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졸선수가 드물었기에 당시 삼성은 1,2차 지명에서 모두 6명을 뽑았고 이들은 모두 대학생 선수였습니다. 삼성은 쟁쟁한 야수가 즐비한 팀이었으며 유망주가 뛸 2군 리그도 없었기에 영남대에 진학한 양준혁은 1학년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는데 1988년 제43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11타수 6안타로 타격상을 따냈으며 이듬해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봄철리그에선 12타석 연속 출루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4학년이던 1991년에는 대학야구 최강타자로 입지를 굳혔습니다.데뷔하기 전 쌍방울 레이더스 2차 2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을 피하면서 상무에 방위병으로 입대해 논란이 되었으며 제대 후 쌍방울이 아닌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다시 한번 파문이 일었는데 훗날 양준혁의 군복무 기간 동안 삼성은 양준혁에게 용돈 명목으로 매월 100만원이라는 거액을 지급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논란거리 정도가 아니라 이는 KBO 신인 드래프트 제도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사건으로, 오늘날이면 프로 선수로 활동이 불가능했을 정도의 역대 최악의 입단 파문이었으나 당시 프로야구 규정/단속이 미비했던데다가 신생 구단 쌍방울의 발언권이 취약했고, 삼성 그룹 파워 등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논란의 여파로 신인선수 지명권 보유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되어 규정이 보완되었습니다.데뷔 시즌에 신인왕(입단 동기로 신인왕 경쟁자가 이종범,박충식,구대성,이상훈이었다)과 타격왕을 동시에 석권하였으며 아직도 양준혁 이후로 이 두 타이틀을 동시에 가져간 선수는 없습니다. 아예 고참 취급을 받아 신인왕을 놓쳐버린 장효조 정도를 제외하면 신인 자격으로 타격왕에 오른 선수 자체가 없습니다.그런데 괴물 류현진이 투수로 KBO 역사상 유일무이한 신인왕+MVP를 가져갑니다.그러다 앙준혁은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임창용 - 곽채진, 황두성, 양준혁의 3대1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고 2000년 다시 LG 트윈스로 넘겨졌다가 2001 시즌 종료 뒤에 FA 자격을 얻은 후 삼성 라이온즈로 돌아와 2010년 시즌까지 계속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습니다.그야말로 꾸준함을 대표하는 선수로 남았으며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있습니다.양준혁은 홈런 2위만 3번 기록했는데(1993 김성래 1위, 1996 박재홍 1위, 1997 이승엽 1위)그 해 전부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해 버립니다.
양준혁은 데뷔 첫해인 1993년 KBO 신인상과 타격왕을 차지했는데 이는 삼성 구단 역사상 최초의 신인왕 수상으로 그 전까지 삼성은 당시 KBO 리그에 소속된 8개 구단들 가운데 유일하게 신인왕을 배출하지 못했는데, 양준혁이 1993시즌 신인왕을 수상하면서 비로소 삼성도 신인왕 배출 구단으로 기록되었습니다.물론 과거에도 삼성 소속으로 신인왕을 노릴만한 선수들은 많았는데 1983년 장효조는 타격 1위를 차지했지만 이미 유명해서 신인으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OB 박종훈에게 밀렸고, 1987년 류중일은 같은해 2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여 주목받은 빙그레 이정훈에게 신인왕을 내주었으며 1989년에는 강기웅이 타율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신인 최다승인 19승을 올린 태평양 박정현에게 ,이듬해인 1990년에는 이태일이 노히트노런을 포함하여 10승 이상을 기록했지만, 팀을 정규리그 1위로 이끈 LG 포수 김동수에게 밀렸습니다. 이렇게 삼성의 첫 신인상에 빛나는 양준혁은 1990년대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 타선의 한 축으로 활약하는데 1993년 23홈런-90타점-타율 0.341-출루율 0.436-장타율 0.598-OPS 1.035를 기록하며 타율, 출루율, 장타율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고 홈런 2위, 타점에서는 단 1개 차이로 2위를 기록하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습니다.게다가 이 시즌 양준혁의 WAR은 6.85에 wRC+ 는 무려 212.0으로 단일 시즌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괴물 신인이란 평가를 받으며 데뷔 첫해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양준혁의 1993년에는 이종범,박충식,이대진,구대성,이상훈 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데뷔했는데, 양준혁은 이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신인왕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이해 양준혁은 타율, 출루율, 장타율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고 홈런 2위 타점에서 단 1개가 부족한 2위를 기록한 가장 압도적인 타자였으나, 그해 홈런-타점왕을 앞세운 김성래가 MVP를 차지했는데 당시만 해도 신인에게 MVP까지 둘 다 안겨주는 것은 지나치다는 인식이 강했던 점도 작용했습니다. 이같은 인식 때문에 1996년 박재홍 역시 데뷔 첫해부터 30-30클럽을 기록하는 등의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투수4관왕을 기록한 구대성에게 MVP를 내주었는데 이처럼 신인에게 한 해에 MVP와 신인왕 둘 다 줄 수 없다는 인식은 2006년 류현진이 KBO 사상 최초로 이 둘을 싹쓸이하면서 비로소 깨져 버립니다.
1994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는지 겨우 3할 턱걸이에(사실 1994년의 타율은 2할9푼9리7모로 삼할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사사오입으로 인해 기록상 3할로 간주한다.)홈런이 1개 부족해서 20홈런 달성에도 실패, 그나마 첫 한 시즌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고 타점왕도 차지했지만 입단동기이자 라이벌인 이종범은 이 해 어마무시한 활약을 펼치며 리그를 초토화시켜 버립니다.1995년에는 신인왕 이동수의 훌륭한 조력자로 활동,좌익수로 포지션을 이동하여 0.313의 타율, 137안타, 20홈런, 84타점, 6.68의 WAR을 기록하며 리그 전체 4위에 올랐습니다. 뛰어나면서도 꾸준하게 성적을 올렸지만, 이 때의 삼성이 포스트시즌에 계속 나가지 못하는 부진을 겪고 있었고, 프로 데뷔 동기인 이종범이 천하무적의 맹활약을 펼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게 됩니다.그러다가 양준혁은 1996년에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0.346의 타율과 151안타, 장타율 0.624를 기록하며 1위에 올랐고 28홈런, 87타점, 89득점, 23도루를 기록, 홈런과 타점 득점에선 모두 2위에 올랐으며 생애 첫 20-20 클럽 가입과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습니다. 이 해가 일시적으로 백인천 감독이 대구구장의 펜스를 현재처럼 99-120-99로 늘렸던 시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현대 유니콘즈의 신인 박재홍에 밀려 홈런왕을 놓쳤을 뿐 타자로서는 이종범을 능가하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이 해 싸이클링 히트까지 쳐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시즌 양준혁의 wRC+는 207.0, WAR은 8.56으로 144G으로 환산하면 9.78이라는 수치가 나오는데 양준혁의 커리어에서 가장 높은 WAR을 기록한 시즌이기도 합니다.지난해의 활약을 이어가 1997년에는 개인 첫 30홈런을 달성함과 동시에 2년 연속 20-20 클럽 가입과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는데 30홈런을 치고도 타점이 98타점으로 적었으며 홈런왕 수상에도 실패했는데 혜성처럼 성장한 팀 후배 이승엽이 32홈런을 치며 타점을 다 쓸어가는 바람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승엽에 밀려 2인자 자리를 구축하게 됩니다.
양준혁은 1998년 다시 지명타자로 포지션을 옮겨 .342의 타율과 .450의 출루율 156안타 27홈런 89타점으로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타율, 최다안타, 출루율 부문에서 1위을 기록하며 3관왕에 올랐고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합니다.한편 프로 입단 동기생이자 프로시절 내내 라이벌로 회자되는 이종범이 맹활약한 93년~97년에 유일하게 이종범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가 바로 양준혁인데 물론 이종범의 경우는 1995 시즌에 방위복무로 인해 홈에서 열린 63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고 1996 시즌 들어서도 4월 말에야 경기에 나설 수 있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양준혁은 1993년 방위복무중인 상태에서 데뷔시즌을 맞았고, 그 해 시즌 중반에 전역했습니다.양준혁은 1993년 데뷔 후 부터 97년까지 OPS 1.004 wRC+ 186.6, wOBA .443를 기록하면서 같은 기간동안 이종범과 비교했을 때, 홈런과 타점, 타격부분 세이버 스탯에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즉 같은 기간 타석에서 이종범을 능가하는 유일한 선수가 양준혁이였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삼성맨일 줄 알았던 양준혁은 1998년 시즌 후 강력한 마무리 투수 임창용을 원하던 구단에 의해 곽채진,황두성,현금 20억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당시 해태는 IMF 외환위기로 인해 모기업이 부도나 버려서 야구단을 운영할 여유조차 없었고,그나마 일본 주니치에 이적시킨 선동열과 이종범의 임대료를 운영비로 보태쓸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했습니다. 반면 당시 투수진이 부족했던 삼성은 우승을 위해서는 마무리 투수가 필요하다고 판단, 마침 해태 김응용 감독이 원하는 좌타자 보강도 할 겸 트레이드를 논의하여 카드를 맞췄고, 결국 엄청난 현금에 간판타자 양준혁까지 얹어 임창용을 영입하는 데 성공합니다.양준혁은 처음에는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밝혔고 그 다음에는 재트레이드 요청을 했으나, 이것들이 다 실패하고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아예 은퇴할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그러나 좌완에 피지컬이 좋은 선수를 굉장히 선호했던 김응용 감독의 설득과 1년 뒤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승낙했다고 합니다.김응용 감독이 처음 약속한 팀은 수도권 연고에 모기업의 지원이 받쳐주는 현대 유니콘스였는데 그래서 99시즌 중에 이숭용과 트레이드가 되나 싶었지만 현대와의 트레이드가 여의치 않자 김응용은 최대한 비슷한 조건을 맞춰주기 위해 서울 연고에 역시 모기업이 지원해주는 LG 트윈스로 보내줬다고 합니다. 이 때의 일화와 FA 미아 위기의 양준혁을 삼성이 재영입하도록 힘쓴 일로 아직도 양준혁은 김응용을 최고의 은사로 꼽고 있습니다.암튼 양준혁은 급작스러운 트레이드와 뒤숭숭한 환경 문제 때문인지 시즌 개막 직후 팀 적응의 문제로 그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부진했으나, 자리를 잡은 5월부터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해 결국 3할 타율에 30홈런과 100타점, 20도루를 찍으며 건재함을 과시해 유난히 타고투저였던 99년의 KBO에서도 강력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이때의 활약으로 99년 한일 슈퍼게임에도 출전하면서 급작스러운 이적임에도 훌륭한 시즌을 보냈으며 이후에 선수협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이 시기의 첫 3할-30홈런-100타점의 기록에 대해서 양준혁은 자신의 커리어하이이자 전환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의 1년을 뒤로하고 2000년 3월 약속대로 LG 트윈스로 이적했지만 선수협 활동으로 인해 연봉 협상과 시즌 준비가 늦어서 개막 후 3주만에 팀에 합류했으며 초반에는 2할대 초반 타율에 그치며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중반부터 맹타를 휘두르며 3할대 타율과 4할대 출루율로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초반에는 지명타자로 뛰다가 후반기에는 외국인 타자 스미스, 서용빈과의 포지션 중복 문제로 우익수, 1루수를 왔다갔다했습니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스미스와 함께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탈락에 일조했습니다.2001년 타격왕과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괜찮은 활약을 하긴 했으나 2001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을 때 선수협 사태등의 문제로 FA 미아설, 해외진출설, 은퇴설 등으로 말이 많았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2002년 시즌을 마치고 나서 FA가 되어야 했지만 연차가 9년으로 줄면서 2001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하고, LG 트윈스로에서 FA로 재계약 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4년 36억을 불렀고 선수협 활동을 열심히 한 전력 덕에 구단 입장에서는 조금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LG는 양준혁과 협상 포기를 선언해버립니다. 양준혁에 대한 LG 팬들의 인식과, 양준혁 본인의 LG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은 편이었고 엘지에서 주장을 맡은 해에 커리어하이급 성적을 찍은데다가 선수단에 좋은 영향을 줬기에 좋아할 수 밖에 없고, 본인 역시 서울이었다는 점과 해태와 비교해서 구단 대우 등이 마음에 들었는지 상당히 호의적인데 주장까지 맡게 되었고 좋은 성적을 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해설할때도 엘지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기도 합니다.양준혁은 FA시장에 나서 강력한 좌타자를 원하던 당시 삼성 감독 김응용이 양준혁을 거둬주면서 4년 총 23억 2,000만원에 계약에 성공,여기에 매년 100경기 이상 출장, 타율 0.305 이상, 80타점 이상을 모두 충족할 경우 매년 1억씩 추가로 받는 플러스 옵션, 반대로 규정타석 미달, 90경기 아래로 출장, 타율 0.270 미만, 60타점 미만 중 하나라도 충족될 경우 연봉 중 1억을 반납하는 마이너스 옵션도 있었다고 합니다.양준혁은 2002년과 2005년은 조건 미달로 인한 마이너스 옵션 발동으로 1억을 반납해야 할 상황에 놓였으나 두 해 모두 삼성이 우승하는 바람에 프런트에서 마이너스 옵션을 실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FA 최고액 기록을 세우며 4년만에 다시 삼성으로 돌아왔고,2002년 이승엽,마해영 등과 공포의 트리오를 이루며 우승 멤버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삼성 타선과 선수들의 중심축을 이루며 꾸준히 팀을 이끌어주었습니다.첫 우승 시즌인 2002년과 2번째 우승 시즌인 2005년에 상당한 부진을 겪었지만 그 이외의 시즌에는 A급의 활약을 해 주었습니다.
4년만에 돌아왔지만 정규시즌에선 상당히 부진을 겪었는데 타율 .276에 BB/K가 0.70으로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1을 넘지 못한 시즌이지만 한국시리즈에선 최고의 활약을 펼쳤는데 무려 0.500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이승엽의 부진을 메꾸었고 삼성도 KBO 역사에 길이남을 이승엽-마해영의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고 양준혁도 첫 KS 우승 반지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2003 시즌을 앞두고 우익수에서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고질적인 어깨 문제 떄문이었으며 이승엽,마해영과 함께 역대 최고의 클린업으로 꼽히는 이마양 트리오를 이루며 127홈런 359타점을 합작해냈습니다. 양준혁은 33홈런을 때려내며 개인 최다 홈런을 경신했고 이승엽과 마해영이 무려 267타점을 쓸어갔음에도 92타점을 기록했습니다. 2003년 4월 15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지난 1996년에 이어 개인 통산 두 번째로 싸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는 역대 최고령 기록이기도 하였다.시즌 후 이종범,심정수와 함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였는데 이해에는 좌익수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합니다. 2004 시즌에는 이승엽과 마해영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1루수로 전향하여 28홈런 103타점 WAR 6.37으로 배영수와 함께 맹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으며 1루수 골든글러브도 차지합니다.이 골든글러브로 양준혁은 KBO의 유일한 외야수-내야수-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같이 가진 선수가 되었습니다.2005 시즌 양준혁은 타율 0.261에 홈런은 고작 13개를 때려내며 2002년에 이어 다시 부진을 겪었으나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맹활약했는데 특히 3차전에는 시리즈를 결정짓는 쓰리런 홈런을 때려냈는데 이 홈런 이후 삼성팬들을 향한 화려한 세리머니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2006년 재계약 이후 극악의 투고타저 속에서 지명타자로 나와 타/출/장 .303/.446/.447 OPS .923 13홈런 12도루로 3할에 두자릿수 홈런-도루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는데 주목할 부분은 역시 선구안인데 103볼넷 43삼진으로 볼삼비가 무려 2.40이었는데 이는 양준혁의 커리어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으로 덕분에 출루율은 .446으로 1위를 기록했고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했습니다.2007시즌 양준혁은 대부분을 지명타자로 출장하여 타/출/장 .337/.456/.563에 OPS는 무려 1.019를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최고령 OPS 1.0 이상이었으며 KBO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22홈런 20도루를 기록하며 당시 최고령 20-20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뛰어난 선구안으로 91볼넷 44삼진에 볼삼비는 무려 2.07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wRC+는 187.9에 WAR은 6.72로 지명타자로만 시즌을 뛰었음에도 이.정도를 쌓아올렸는데 당시 양준혁의 나이 39세에 기록한 성적으로 시즌 후 골든글러브를 받으며 2년 연속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에 성공했습니다.이 해 이현곤과 타격왕과 안타왕 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현곤이 .338에 153안타, 양준혁이 .337에 149안타를 기록하며 이현곤이 1리 차이로 타격왕과 안타왕을 차지하게 되며 양준혁은 모두 2위에 머물렀습니다.
2008년 2100안타 기록을 돌파했으나 전체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 2군으로 잠시 강등, 5월 30일 SK전에 다시 등장했는데 복귀 후에는 '역시 양신'이란 소리가 나올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어 시즌 초엔 1할대로 떨어진 타율이 2할 7푼 8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산 안타 역시 2200안타를 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삼성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으며 16년 연속 세자리수 안타는 성공했지만 16년 연속 두자리수 홈런은 이루지 못하여 홈런은 15년 연속 두자리로 끝나게 됩니다.2009시즌 초반 타격 슬럼프를 겪었지만 중반 이후 부활,삼성의 든든한 4번타자 역할을 맡았으나 LG전 내야안타를 치고 1루로 달리다가 부상을 당합니다.이 부상으로 17년 연속 100안타가 좌절되었으며 게다가 데뷔때부터 이어온 연속 규정타석 출전도 16시즌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규정타석 16시즌 소화는 역대 최초이자 2020년 기준으로 유일한 기록이지만 해외까지 합한다면 일본프로야구 규정타석 2시즌을 소화한 이승엽과 4시즌을 소화한 이대호가 총 16시즌으로 타이 기록입니다.물론 타국리그까지 합한거라 비공식입니다.이 해 양준혁은 7월 2일 통산 450 2루타 기록했으며 7월 14일 KBO 최초 350홈런 기록하고 2009년에 결성된 성구회에 2000안타로 가입하여 두 번째 멤버가 되었습니다.2010시즌 개막 라인업에 포함되었으나 점차 성적이 떨어지면서 주전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4월 30일 최초로 2300안타를 기록했습니다.또한 올스타전 최고령 홈런 기록을 쓰기도 합니다.
양준혁은 올스타 전 이후 가장 오래 된 연인의 품에서 은퇴하고 싶었다라고 은퇴를 시사했고 양준혁의 정에 부응하듯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성대한 은퇴식을 약속한 삼성은 9회가 끝나고 치러진 양준혁의 은퇴식을 성심을 다해 치러 줬습니다. 사용한 폭죽 양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는데 양준혁의 은퇴경기는 9월 19일 일요일 대구 홈경기로 치러졌는데 프로야구 예매 대행사이트인 티켓링크 서버가 1분만에 터졌으며 홈 방향인 3루 지정석 및 테이블석은 전부 매진되었고, 일반석마저 20분 경 모두 매진. 암표는 2만원에서 출발하여 10만원이 넘어갈 정도로 가격이 폭등하기도 합니다.양준혁은 KBO 한국 프로야구에 대졸 신인으로 입성한 이래 OPS 1.000을 무려 6차례, 20-20을 4차례 기록하였고, 특히 2007년 성적은 현재까지도 최고령 OPS 1.0 이상, 그리고 만 38세에 20-20 달성,도한 2,318 안타 중에 내야안타가 159개인데 양준혁은 타격 후 1루까지 전력질주하는 선수로 유명했는데 아웃 여부와 상관없이 1루 전력질주는 프로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고, 내야안타 159개가 없었으면 자신은 2할9푼대의 평범한 타자로 선수생활을 끝냈을 것이며 이러한 내야안타가 밑바탕이 돼서 9개 부문에서 통산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양준혁이 은퇴할 당시 통산 타격 9개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었지만 9개 부분 중에서 5개는 세기의 홈런왕 라이온 킹이 모두 경신하였고 최다 경기수는 정성훈에게 깨졌으며 8807타석 7332타수 2318안타의 최다 타석과 타수 및 최다 안타도 LG의 박용택에 의해 깨졌습니다. 사사구는 2위인 김태균이 1249개로 양준혁보다 131개 적은데 2020년 김태균이 은퇴하면서 현역 선수 중 통산 사사구 1위인 최형우가 413개의 사사구를 더 기록할 때 까지 1위로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여기 거론된 타자들 모두 병역면제를 받아서 대기록에 근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준혁이 정말 대단한 타자임을 알 수 있는데 양준혁의 대기록은 군복무를 해서 5년을 날리고 만 24세 다소 늦은 나이에 프로에 데뷔(방위 복무 중 데뷔)한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양준혁의 기록 중 당장 깨지기 쉽지 않은 것들이 바로 사사구인데 여기에 한 양준혁은 고의사구도 150개로 역대 1위인데, 이 기록은 향후 몇십 년 동안은 절대 깨지지 않을 역대급 기록으로 당장 KBO에서 고의사구를 100개 이상 기록한 선수는 양준혁과 김기태(129개)를 포함해 단 2명 뿐이고 심지어 90개 이상 기록한 선수도 이 둘 뿐이며 은퇴한 김태균이 통산 4위(86개)로 양준혁 기록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며, 통산순위 20위권에 들어온 이대호(5위, 84개), 김현수(9위, 73개), 최형우(10위, 72개)는 양준혁 기록의 절반을 조금 넘습니다.양준혁은 클래식 스탯으로도 대단한 타자이지만, 세이버 스탯으로는 더욱 위대한 타자인데 스탯티즈 기준 통산 WAR 타자 1위(87.22)인데 그 김태균이 69.94, 이종범이 67.74 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으로 현역 선수 중에선 최정이 72.31로 양준혁의 기록에 근접해가는 중이지만 이 기록 역시도 이승엽 앞에선 다소 빛이 바래는데 전성기 시절 해외에서 8년을 보내고도 72.08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또한 통산 wRC+ 3위(160.0)인데, 양준혁 앞에는 외국인 두 명(태임즈(188.8), 호세(173.7))만 있을 뿐 그 어떤 국내 타자보다도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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