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90년 한대화
3점 홈런의 사나이이자 원조 해결사
한대화는 1990년 타율 0.335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타격왕을 차지합니다.현역시절인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이자 3루수로 평가받았고, 선동열,김성한 등과 함께 해태의 최전성기를 이끈 주역이었습니다.선수 시절의 등번호는 5번(OB)-8번(해태)-9번(LG)-8번(쌍방울)입니다.한대화는 1960년 8월29일 충청남도 대전에서 아버지 한상준과 어머니 차정숙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한상준은 손병희 선생과 친분이 깊었던 천도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같은 평안남도 출신인 김응용 감독이 나중에 그를 해태로 부른 데는 이런 인연도 있었다고 합니.대전신흥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한밭중과 대전고 시절 유격수와 투수로 활약했던 한대화는 원조 파워히터 유격수였지만 프로야구에서는 명 3루수로 이름을 날렸고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포지션도 3루수였습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성인야구 최고의 유격수 김재박이 있었기 때문에 3루수를 맡았는데 동국대에서 맡았던 주 포지션 은 유격수와 2루수였으며 프로야구에서도 선수생활 초기엔 유격수로 뛰었습니다. 어우홍 대표팀 감독이 4번 장효조 다음에 등장하는 5번타자로 대학 4년생인 한대화를 중용한건 그의 힘을 믿었기 때문인데 탄탄한 하체와 강한 허리힘으로 대학 선수로는 유일하게 국제용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대회에서 타격10위에 이름을 올린 한국선수는 한대화가 유일했습니다. 한대화는 동국대 1학년이던 1979년 4월 부산 시장기에서 12타수 6안타 타율 0.500을 기록하며 일찌감치 가능성을 보였으며 그 해 춘계리그에선 3번 타자로 활약,대전고-동국대 체육교육과(1979학번)를 졸업했습니다.그리고 대학 졸업반이던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선발, 사실상 결승이나 다름없던 일본과의 최종전(당시 쿠바가 불참한 가운데 9개 국가가 풀 리그로 대회를 치루었고 대한민국과 일본간의 최종전을 앞두고 공교롭게도 두 나라가 6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대한민국과 일본의 패배는 모두 이탈리아에게 당한 것으로,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그것이 유이한 승리였다.)에서 2-2로 맞선 8회말 2사 주자 1, 2루 상황에 타석에 나와 풀카운트 씨름 끝에 왼쪽 폴대를 강타하는 결승 3점 홈런으로 대한민국 야구 사상 2번째 세계 대회 우승(첫번째 우승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 월드컵 대회였고, 당시 김응용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을 이룩하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으며 이날 이후 한대화는 해결사 이미지가 굳어집니다.
한대화는 1983년 고향 팀인 OB베어스(당시 연고지는 대전이었음)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시즌 개막전에서도 3점 홈런을 기록하며 3점 홈런의 사나이라는 묵직한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그 해 타율 0.272에 5홈런이라는 평범한 성적에 그쳤고, 1984년과 1985년에는 오히려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뒷걸음질치며 팀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1985년 시즌 직전에는 고향 대전에서 개인훈련 도중 갈증을 해소하던 뒷산 약수터의 돌려쓰는 바가지가 화근이 되면서 간염이 발병해 체력 관리에 애로사항이 생겼고 거기에 척추 분리증을 앓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OB가 재일동포 출신 내야수 박창언을 영입하면서 한대화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상과 A형 간염으로 인해 김성근 감독의 강훈련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강압적인 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에 눈 밖에 나게 되고,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이 때 김성근은 한대화가 훈련을 하기 싫어서 꾀를 부린다고 여겨서 더 심하게 훈련을 시켰고, 한대화는 더욱 심각히 은퇴를 고민했다고 합니다.결국 1986년 시즌을 앞두고 양승호,황기선과의 2:1 맞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당초 한대화는 새로운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의 이적을 원했지만, 그 당시 빙그레 이글스는 신생 구단이라 선수층이 극히 부족했던 탓에 OB베어스로서는 한대화와 맞바꿀 만한 전력감이 없어서 결국 해태 타이거즈와의 트레이드를 적극으로 추진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한대화는 결국 임의탈퇴 공시되며 은퇴의 기로에 몰리기도 합니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임의탈퇴 사례이기도 합니다.
한대화는 은퇴의 기로에서 동국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김인식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의 설득 끝에 이적을 받아들였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후에는 OB베어스에 있을 때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며 대활약, 해태 타이거즈 왕조의 주전 3루수로 활약합니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였고 이적 초반에는 2루수로도 출전했으나 붙박이 3루수로 자리잡으면서 타격도 살아나고 수비도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기존 3루수였던 이순철은 중견수로 자리를 옮기고, 중견수였던 김일권은 벤치 신세로 전락하는 포지션 연쇄이동이 일어났습니다.한대화가 해태행을 거부했던 것은 고향 팀인 빙그레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긴 했지만, 해태 특유의 강도높은 팀 분위기와 김응용 감독의 철권통치를 두려워한 이유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대화가 해태 유니폼을 입자, 김응용 감독은 되려 한대화에게 훈련할 때 시간 맞춰 올 생각 말고 오후에 느지막히 운동장으로 출근하도록 지시했다고 하는데 이는 간염을 앓고 있던 한대화가 늦잠을 자고 몸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 김응용의 배려였다고 합니다.
한대화는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반드시 실력을 톡톡히 보여 주는 글러치 히터의 면모를 과시하며 김성한,이순철과 함께 당대 최강의 타선을 이루며 1986년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6회 우승에 큰 공을 세웁니다. 3루 수비에 있어서도 좌우 수비폭은 넓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글러브 핸들링과 정확한 송구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던 한대화는 하지만 연봉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한대화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함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줄 것을 해태 구단에 요청하였으나, 구단의 대우는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해 관계가 좋지 못한 편이었는데 그 이유로는 원년 멤버이자 지역 연고 출신의 간판 스타였던 김성한과는 달리, 한대화는 비연고 출신에 트레이드로 합류한 '굴러온 돌'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또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 악화가 트레이드의 원인이라 보는 이들도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1993년 올스타전 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한것으로 당사자들은 그저 장난삼아 저지른 해프닝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카메라에 잡힌 장면을 보면 꽤나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한대화는 “당시 감독님이 오해하셨다. 슬라이딩을 하다 손을 다쳐서 아이싱을 하고 있었는데 대기타석에 없다는 이유로 태업을 지적하셨다. 나도 화가 났지만 이틀 뒤 전화를 하셨다. ‘내일 훈련 나와’라고. 그래서 훈련을 나갔다”고 설명했습니다.하여간 1994년 LG 트레이드는 이런 상황을 기반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다만, 삼성 라이온즈에서 김응용이 사장으로 재임했을 때 한대화를 코치로 영입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불화설까지 돌 문제까지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어쨌든, 한대화가 간염 때문에 OB 감독 김성근한테 버려지고 온 해태에서 성공적인 재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김응용 덕분이고, 이후 인터뷰에서도 김응용에 대한 감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대화는 1993년 시즌 종료 후 2:2 트레이드로 LG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1994-1995 LG는 최강의 팀이었고, 한대화 또한 알려진대로 팀 내 기강을 잡는 역할도 했지만 신바람 야구의 틀 안에서 후배들의 기둥 또는 큰형님 역할을 합니다. 유지현,김재현,서용빈 등 신인 3인방(유-김-서) 뒤에서 4번 타순을 쳤는데, 경기의 결정적인 순간에 앞에 살아나간 주자들을 묵묵히 큰거 한방으로 불러들이곤 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19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2타점 적시타와, 1995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선제 투런홈런입니다. 특히 95년 당시 1차전에서 LG가 자랑하는 에이스 이상훈,김용수가 난타당하면서 뜻밖의 7대 8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 팀 분위기가 급속히 가라앉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다음날 고참인 자신이 홈런으로 팀 승리를 이끌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중요한 순간마다 해결사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95년까지는 수비 또한 전성기 못지않았는데, 체력 안배차원에서인지 한대화가 처음 LG에 온 94년부터 이광환 감독은 송구홍 or 이종열 3루 - 한대화 지타 체제로 라인업을 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96년이 되자 정말로 수비에서 포구 실수 등 급격히 빈틈을 보이기 시작하며 팬들을 안타깝게 했고 결국 구단 입장에서 트레이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빌미가 됩니다.당시 경기 도중 중요한 시점에 한대화가 나오면 구장이 일순 조용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한대화에 대한 믿음이 컸는데 한대화가 찬스에 유난히 강했음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이런 이유로 인해 당시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이 해결사,그러나 한대화가 해결사였던 이유는, 다름아닌 타이거즈 시절 9시즌동안 wRC+150을 찍었던 당대의 초 강타자였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득점권의 사나이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해결사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입니다.이런 모습은 LG에서도 그대로였는데 특히나 94년~96년은 끔찍한 투고타저인데다 잠실구장을 쓰며 스탯에서는 좀 손해를 보았지만, 득점권에서는 정말 해태 시절과 비슷하게 결승 타점이 많았습니다.한대화는 홈런보다는 팀을 위해서 단타, 팀배팅을 할 줄 아는 선수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특히 해태에는 훌륭한 홈런타자였던 김성한,장채근같은 선수들과 같은 시기에 뛴 탓도 있지만 현역시절 한대화는 20홈런도 넘길 정도의 파워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대화는 1996 시즌 후 투수 신영균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되나, 당시 노장이었던 한대화에게 이전같은 3루 수비는 힘들었고 지명타자 슬롯도 마땅하지 않았는데 게다가 쌍방울 트레이드 당시 감독은 김성근으로 베어스 시절 갈등이 있었던 사이었는데 김성근식 훈련이 맞지도 않았고, 소화 하기도 힘들었던 한대화는 시즌 중 은퇴를 결심하고, 이에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리그 역사에 빛나는 명 3루수인 한대화에게 은퇴식을 준비해 주려 했으나,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에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은퇴식이냐며 거절,결국 한대화는 1997 시즌 후 쌍방울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됩니다.한대화는 KBO 한국 프로야구에서 1983~1997년까지 15시즌 동안 1,331경기에 출장하여 타출장 0.279/0.370/0.450에 홈런 163개, 타점 712개, OPS 0.820을 기록했습니다. 통산 타율과 출루율의 갭이 9푼이나 되고 그의 통산 BB/K가 1.07라는 것에서, 한대화가 얼마나 볼을 잘 골라내는 타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전성기인 86년~94년으로 한정하면 단 한번도 삼진이 볼넷보다 많은 시즌이 없으며, wRC+를 160 이상 기록한 시즌이 네번이나 될 정도로 생산성도 아주 뛰어났습니다. 또한 87년과 93년을 제외하면 매 시즌마다 타점 순위 10위 안에 그의 이름이 자리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붙여진 '해결사'라는 별명이 결코 아깝지 않은 타자였습니다. 단일 시즌 기준으로 최고의 해였던 1990 시즌에는 타율 0.335(그해 타격왕 수상-당시 빙그레의 이강돈보다 불과 타율 1만분의 1 차이로 앞질렀을 정도의 접전이었다. 이는 한대화가 골든글러브(3루수 부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수상한 개인 타이틀이었다.),홈런 15, 타점 86, OPS 0.937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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