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가장 터프한 길거리 맞짱 유도 파이터 콘데코마 마에다 미츠요
브라질리안 주짓수와 최강의 그레이시 가문을 탄생시키다
마에다 미츠요(Mitsuyo Maeda)는 콘데코마(Conde Koma)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일본 출신의 前 브라질 무도가이자 유도 7단이었으며 본명은 마에다 히데요였는데, 유도를 만든 도장인 강도관에 입문한 후 이름을 마에다 미츠요로 개명했습니다. 격투기 매니아라면 알만한 브라질리안 주짓수의 창시자 중 한명인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스승이었습니다.다만 카를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그레이시 가문 형제들과는 딱히 연이 없습니다. 물론 카를로스가 맏형으로 나머지 동생들과 서로 연구하며 만들어낸게 오늘날 브라질리언 주짓수입니다.일본 출신의 신격화된 무도가들 중 실전에서 가장 강했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무려 2000번이나 싸워 이긴 스트리트 파이터였는데, 이런 류의 무용담이 그렇듯 당연히 뻥도 좀 섞여있으며 실제론 유럽에서 레슬링 룰로 싸워 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나머지 커리어도 모이헤리 지고로 같은 다른 일본 무도가들처럼 이름 없는 선수들과 쌓아올리면서 만든 게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무술가 중에서 이렇게 싸우고 돌아다닌건 마에다 미츠요와 최영의 정도뿐이고 세계적으로 봐도 그다지 없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철저한 실전을 추구한 무도가였다고 합니다.
마에다 미츠요는 아오모리 현에서 태어나 1895년에 아오모리현 제일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 중학교(현재는 와세다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모 선수였고 그도 10대 시절 스모를 수련했지만, 작은 체격을 이유로 그만두었고 이때 야구선수 생활도 했었다고 합니다.스모 선수를 관뒀을 때 즈음, 그 당시 유도가 어전 유술 대회에서 고류 유술을 그야말로 박살내는 것에 감동하여 유도에 흥미를 느꼈는데, 때마침 도쿄 전문 학교(현재는 와세다대학)에 유도장이 생겼고 곧장 유도에 입문하게 되고 1897년 6월에 강도관에 입관합니다.마에다 미츠요는 입단할 때 관장인 가노 지고로에 의해 특별히 지명되어, 강도관의 4천왕 중에서 최단신이었던 토미타 츠네지로를 스승으로 삼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작은 키 때문이었습니다. 향간에는 그의 키가 164cm로 표현되는데, 아마도 이는 단위에 의한 착오로 보이는데 그 당시 164cm면 일본 평균 신장을 웃도는 키였습니다.그렇다면 마에다 미츠요가 키가 작은 걸로 유명할 리도 없을 것입니다.아마도 실제 키는 150대 중후반인 것으로 보입니다.가노 지고로는 유도에서 중요한 건 신장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토미타 츠네지로는 가노 지고로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받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었습니다.아무래도 마에다 미츠요의 재능이 심상치 않았던 모양인데 초단 심사를 받을 때는 가노 지고로에 의해 특별히 15인 연속 대련을 명받고 훌륭히 달성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현재의 브라질리안 주짓수 정도로 승급이 힘들었던, 당시의 유도 승급 체계에서 7년도 안돼 4단을 땄다는 건 그가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족으로, 웬만한 서구권 유도 체계의 경우 승급하기가 여전히 주짓수 만큼이나 힘든데,5년 정도를 투자해야 초단을 겨우 받으며, 2년 안에 초단을 단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재능이 있다는 뜻으로 통용되기도 합니다.
마에다 미츠요는 1904년, 유도 4단이던 시절 멀쩡히 잘 다니던 도쿄 전문 학교(현재의 와세다대학)을 관두고 그의 스승 토미타 츠네지로와 함께 유도 전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웨스트 포인트에서 유도 시범을 보이게 되는데, 토미타 츠네지로가 그만 레슬링 베이스의 선수에게 지게 되지만 마에다 미츠요가 그 레슬러를 포함한 모든 도전자를 제압해 버립니다. 또 일본 제국에게 호의적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에서 초청시합을 갖는데 그의 스승이 또 패배하자 이에 미츠요는 유도의 강함을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스트리트 파이트를 시작하게 됩니다.당시 미국의 치안상황은 19세기 중반과는 비교할 수없지만 그야말로 고담이나 다름없었는데 떼거리로 총, 칼, 연장을 들고 나오는 곳이기에 마에다 미츠요는 그런 고담 수준의 동네는 피해다녔다고 합니다.마에다 미츠요는 "나를 이기면 1000달러"라는 간판을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하는데 165cm도 안되는 동양 남자가 그런 간판을 걸고 다녔으니 반응은 "왠 미친놈이지"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에다 미츠요의 배짱도 보통을 넘어서 쫄지 않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그를 슬금슬금 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또 그는 실전 중심의 파이터여서 일정을 잡고 대련을 하는 것도 무척 싫어해서 밥먹듯이 싸우러 나갔다고 합니다.이렇게 명성을 쌓아간 마에다 미츠요는 미국의 스트리트 파이터계의 최강자 부처보이와의 일전을 갖게 됩니다.부처보이는 당시 190cm의 괴력의 소유자였고, 시합이 정해지자 마에다 미츠요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이는 당연한 예상인 것이 아무리 유도의 강자라고 하더라도 30cm가 넘는 키와 체급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경기는 마에다 미츠요가 유리하게 경기를 풀어나갔으며 링위에서 레슬링룰로 진행된 시합에서 애초에 천부적 그래플러인 마에다 미츠요에게 부처보이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몇번이나 메쳐져서 멘탈이 무너진 부처보이는 결국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데, 내심 스트리트 파이트를 기대하고 있던 마에다 미츠요는 그를 플라잉 암바로 제압해 게임을 끝내게 됩니다. 이 승리로 인해 미국에 유도의 강함이 널리 전파되게 됩니다.
마에다 미츠요는 전 세계에 유도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1908년에 스페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다만 여기서 레슬링 룰 때문에 패배한 전적이 있지만 곧바로 훌훌 털고 그 이후 연전연승은 계속 됐고, 스페인에서도 마에다 미츠요의 명성은 계속되게 됩니다. 처음에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코마루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 코마루는 일본어로 '곤란해' 혹은 '곤궁해'라는 뜻으로 돈이 생기면 대책없이 막 써버리는 그의 경제 관념 때문에 마에다 미츠요는 돈이 떨어지면 말버릇처럼 '코마루 코마루..'하였고 주위 스페인 사람들이 그에게 코마루라고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하지만 그가 '곤란해'라는 별명을 좋아할 리 없었고 그래서 별명을 '코마'로 바꿉니다.이후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마에다 미츠요의 모습에 감명받은 스페인 사람들은 그에게 백작이라는 작위를 붙여 그를 콘데 코마라고 부르게 됩니다.세계를 유랑하던 그는 1915년에 브라질에 유도장을 차리고 정착하게 됩니다.하지만 브라질에서는 유도라는 이름 대신 유술이라는 이름으로 유도를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유도의 창시자,가노 지고로가 타류 유파와의 프로 시합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고 이를 어긴 마에다 미츠요가 스스로 강도관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유도라는 이름 대신 유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란 설이 있습니다. 또다른 설로는 이미 서구에 유도가 유술 즉,주주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기에(유도는 이후 퍼진 단어) 굳이 유도를 쓸 것 없이 유술로 홍보했단 설도 있습니다.하여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마에다 미츠요는 고류 유술을 가르쳤다고 오해하는데, 그는 뼛속까지 유도 기반의 파이터였습니다. 다만 지금의 유도를 토대로 상상하면 안되는 것이 당시의 유도는 펀치, 킥이 허용되는 무술이었고, 마에다 미츠요는 한발 더나가 실전 싸움을 통한 자기만의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에(예를 들자면 하단 태클) 그가 구사했던 유도는 지금의 유도보다는 오히려 MMA에 가까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브라질은 미국과는 달리 적극적인 이주 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1927년 일본기업들은 토마사수라는 아마존 유역에 대규모 일본인 이민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에다도 중요 인물로 참여하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지 계획은 좌절되고 마에다는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만을 하게 됩니다.마에다 미츠요가 브라질에 정착하면서 브라질의 유지들과 교분을 갖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가스타우 그레이시였습니다. 가스타우 그레이시는 일본인 이주에 많은 도움을 줬고, 마에다 미츠요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싸움을 일삼던 카를로스 그레이시를 가르치게 되면서 콘테 코마 마에다 미츠요의 전설은 브라질에 또 다른 전설을 잉태하게 됩니다.마에다 미츠요는 그 이후에도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말년을 브라질에서 보냈는데 항간에는 그가 일본에 돌아가지 못한 것은 강도관에서 파문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는 1940년에 일본정부에 의해 초청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가 일본행을 택하지 않은 것은 아내와의 의리 때문이었습니다.마에다 미츠요는 첫번째 아내와 사별한 뒤 44세에 두번째 아내를 얻게 되는데 그 당시 썩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던 브라질 사람과 결혼한 일본인이 일본으로 귀환했다가 종적을 감춰버리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허나 마에다 미츠요는 병약한 아내를 사랑했고,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일본행은 일생동안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결국 그는 브라질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사인은 신장질환,신장병이 생기게 된 건 열악한 브라질의 수질 탓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임종시에 유도복을 가져오라고 한 뒤 "아오모리의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고 영면합니다.
비록 브라질에서 숨을 거뒀지만 마에다 미츠요의 명성은 일본에도 자자했는데 브라질에서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와 대전을 치룬 유도천재 기무라 마사히코는 팔이 모두 부러질 때까지 끝까지 싸운 엘리오 그레이시에게 이 한마디를 남기는데 "과연 마에다 미츠요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엘리오의 투지야말로 일본 무사의 거울이다. 경기는 내가 이겼으나 승부에 대한 집념에서는 패배했다."고 극찬하기도 합니다.마에다 미츠요의 실전 유도는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뿌리가 되고 최강의 그래플러 그레이시 가문을 탄생시키는데 마에다 미츠요가 생존했던 시절,그의 무술과 무도에 대한 철학 등을 브라질 신문기사 등에서 찾기가 꽤 어려운데 그 이유는 마에다 미츠요가 브라질에 있을 때 아시아 무술이 브라질 및 언론에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60여년 전, Jornal do Brasil은 일본 무술을 조사하는 기사에서 마에다 미츠요의 희귀하고 값진 인용문을 발표했는데 마에다는 자신이 연습을 통해 성공했다는 무술철학을 설명하였습니다.
지속적으로 현명하게 공부하고 훈련을 즐겨라.
인간의 힘은 평가됩니다.
저를 공격하는 사람의 힘이 10과 같다고 생각해볼 때 제 힘이 7을 넘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만약 상대방이 전력을 다해 저를 공격한다면 모든 힘을 다해도 쓰러질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힘으로 맞서는 대신 그의 추진력이 담긴 공격하는 힘을
받아치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면 공격자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질 것입니다.
이 새로운 포지션에서는 그의 10의 힘을 상당히 잃게 되어 3정도로 줄어들 것이라고 가정해봅시다.
반대로 저는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7의 힘을 모두 유지할 것이고
유리한 포지션에서 모든 힘(7)을 쓰지 않고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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