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전설 스토리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위대한 10년/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우리나라에서 국민타자라는 칭호를 붙여가며 이승엽을 사랑하는 것처럼,일본에서 세기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사랑받는 왕정치처럼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홈런왕은 바로 베이브 루스입니다. 단일 시즌 60홈런을 넘어 61홈런을 때려낸 로저 매리스나 통산 755홈런을 기록한 행크 애론도 아니며 신이라 불렸으나 약물로 타락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며 통산 홈런을 762개로 늘린 배리 본즈 혹은 양키즈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들 모두 팬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지만 베이브 루스의 위대함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위대한 것은 그가 기록한 홈런 개수에 그치지 않습니다. 일본의 왕정치처럼 868개의 홈런을 때려내지도 배리본즈처럼 단일 시즌 최고의 기록을 이젠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베이브 루스는 일본의 이도류를 지향하는 오타니 쇼헤이처럼 투수와 타자를 함께 하면서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 714개는 19살인 1914년부터 1919년까지 보스턴 레드 삭스에서 투수로써만 158경기에 출장하여 89승 46패 방어율 2.97의 수준급 성적을 거둔 이후 나온 성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916년에는 방어율 1.75로 투수 방어율 1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통산 방어율 역시 역대 14위로 투수로서도 일류급의 선수였지만 역설적으로 타자로 더 위대한 시즌을 보냈기 때문에 투수로서의 베이브 루스는 저평가 내지는 아예 언급조차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가 베이브 루스를 따라 하며 수준급 성적을 거두며 극찬 받지만 베이브 루스는 투수로써도 타자로써도 일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6년간 타자로도 출장했지만 상대적으로 타자로 출장한 햇수는 적으며 투수에 좀 더 비중을 둔 것을 알 수 있는데 타자로 총 391경기 출장하여 1.110타수 342안타 타율. 308 홈런 49개를 기록하는데 특히 1919년에 기록한 홈런 29개는 리그 신기록이기도 했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본격적으로 타자로 전향한 것은 보스턴 레드 삭스에서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면서부터이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홈런 사냥을 펼치게 되는데 이후 기록한 홈런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1894년 또는 1895년 미국 동부 볼티모어의 부둣가에서 피뢰침 제조업자와 술집 주인을 전전했던 독일계 이민 조지 허먼 루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둣가에서 살다시피한 조지 허먼 루스 2세는 1902년 가톨릭 수도사들이 운영하던 일종의 소년원인 센트 메리 공업학교에 입학할 즈음 이미 소문난 불량소년이었는데 루스는 20살까지 성장기의 12년을 보낸 센트 메리 공업학교에서 야구를 배웠으며 센트 메리 공업학교에는 8백여 원생들로 구성된 40여 개 팀의 작은 메이저리그가 구성돼 있었고, 루스는 그 속에서 금방 두각을 나타냅니다. 처음에는 캐처로, 다시 왼손 투수로 뛴 루스는 출소할 즈음인 1913년 무렵에는 아마추어 팀이 나 세미프로 팀에 초청받기도 했습니다. 만 21살이 되면 사회에 나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셔츠 공이 되어야 했던 루스는 차츰 인근에서 장타도 잘 날리는 왼손 투수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1914년 2월 오리올스에 스카우트되었습니다. 육중한 체구였던 스무 살의 조지 루스는 봄의 전지훈련과 시범 경기를 거치면서 가공할 장타력과 피칭 솜씨를 보여줬고, 기자들은 그의 이름 앞에 '어린애'라는 애칭 베이브를 붙여주는데 훗날 베이브라는 단어는 거구의 야구 선수 혹은 베이브 루스라는 풀이가 덧붙여져 사전에 오르기도 합니다. 루스 등장 이전에도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타격의 천재 타이 캅, 트리스 스피커, 에디 콜린스 등 강타자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야구는 사이 영, 월터 존슨, 글로버 알렉산더 같은 대투수들이 각광을 받던 시대였기에 홈런은 정통파를 자처하는 대부분의 야구인들로부터 야구의 정도가 아니라 하여 은근히 경멸 받던 것이 당시 메이저리그의 풍토였다고 합니다. 대신 번트와 도루, 치고 달리기로 1점씩 올리는 이른바 인사이드 베이스볼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소위 말하는 스몰볼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인 투수로 입단한 베이브 루스는 입단 첫해부터 홈런타자의 가능성을 엿보였지만 투수였던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 진출 이듬해인 1915년 18승, 1916년엔 23승, 17년 24승에 개막전 3년 연속 승리투수, 월드 시리즈 29이닝 연속 무실점의 우수한 좌완투수 베이브 루스를 타자로 전업시킨다는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잘 나가는 선수를 망칠 수 있는 일이기에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각인되어 있는 세기의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는 우연찮은 기회와 함께 다가옵니다. 핀치 히터로 나서며 간간이 괴력을 선보이던 루스가 타자로 전 게임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연봉 삭감에 항의하는 주전 외야수의 트레이드로 외야와 타선에 구멍이 난 1918년 5월이었습니다. 그해 베이브 루스는 0.484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외야수로 정착한 루스는 1919년 29개의 홈런으로 그때까지의 홈런 신기록을 깼으며 구단의 재정난으로 양키스에 12만 5천 달러로 팔려간 1920 시즌에는 다시 5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베이브 루스의 폭발과 함께 메이저리그는 폭발적인 베이브 루스의 홈런쇼에 열광했으며 그의 야구가 기존의 야구틀을 깨트리며 메이저리그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저리그 태동 이후 주류를 이루던 인사이드 베이스볼은 낡은 야구가 되어 버렸으며 베이브 루스에 이어 로저스 혼스비, 해리 하일먼 등 슬러거들이 속속 출현하고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구단주들은 투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대신 안타와 홈런에 열광하는 관중의 기호에 맞춰 메이저리그 규정을 개정하기에 이릅니다. 투수들이 당시까지 공인됐던 공에 흠집을 내 공에 심한 변화를 주던 투구를 금지당했으며 때리면 멀리 나가는 콜크심 야구공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 역시 이때부터인데 관중을 늘리려는 야구산업의 기술혁신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선수들이 도박사들의 돈을 받고 경기에 져준 블랙삭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1920년의 메이저리그 관중은 그 전해의 6백50만에서 9백10만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는데 스몰볼 시대의 작전 야구나 소량 득점 방식에서 베이브 루스에 의해 대량 득점이라는 야구의 새로운 매력이 추가된 덕분이었습니다. 타자로 본격적으로 전향한 베이브 루스는 1918년부터 1934년까지 17시즌 동안 12번 홈런왕에 오르며 1935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타율 0.342, 7백14개 홈런을 기록합니다. 1927년에는 최초로 한 시즌 홈런 60개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기록하며 1961년 로저 매리스에 의해 깨어질 때까지 한 시즌 최다 홈런은 베이브 루스의 것이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들 혹은 루스를 경배하는 이들은 베이브 루스가 한 시즌 1백54게임에서 60개의 홈런을 기록한 반면 로저 매리스는 1백54번째 경기에서는 59개였으며 마지막 162경기에서 61홈런을 기록했기에 오랫동안 로저 매리스의 기록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조차도 이제는 2001년 73개의 홈런을 쳐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에 의해 갱신됐지만 말입니다.
메이저리그 야구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폭격한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투수로써 황금기를 보스턴 레드 삭스에서 보냈다면 뉴욕 양키즈의 황금기를 홈런타자로 보내며 리그를 정복해 버립니다. 뉴욕 양키스는 1931년까지 아메리칸 리그 6번, 월드 시리즈 3번 우승으로 메이저리그의 양키스 왕조를 구축합니다. 왕년의 명문 보스턴 레드 삭스는 양키스에 주전 대부분을 팔아넘겨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메이저리그를 방망이 하나로 정복한 베이브 루스는 돈과 명예를 거머쥐며 향락적인 생활로 선수 생활을 갊아먹기도 합니다.1935년, 마흔 살의 베이브 루스는 예전 같지 않은 실력 탓에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방출 당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홈런왕 베이스 루스도 시간의 힘 앞에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은퇴와 더불어 감독을 원했던 베이브 루스였지만 야구계의 평판에 결국 감독직에는 오르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도 감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감독할 수 있겠는가?
조지 허먼 베이브 루스 주니어(George Herman “Babe” Ruth, Jr.) 1895.2.6 메릴랜드 주 출생. 외야수, 투수/좌투 좌타
1914-1919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
1920-1934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1935 보스턴 브레이브스(Boston Braves)
통산 성적
타자 - 2503경기 타율 0.342 2873안타 714홈런 2213타점 123도루
투수 - 163경기 94승 46패 방어율 2.28 1221,1이닝 488탈삼진 974피안타
수상 내역
올스타 선정 2회 (1933, 1934)
월드 시리즈 챔피언 7회 (1915, 1916, 1918, 1923, 1927, 1928, 1932)
아메리칸리그 MVP (1923)
아메리칸리그 타격왕 (1924)
아메리칸리그 홈런왕 12회 (1918-1921, 1923, 1924, 1926-1931)
아메리칸리그 타점왕 6회 (1919-1921, 1923, 1926, 1928)
아메리칸리그 방어율 1위 (1916)
뉴욕 양키스 주장 (1922)
등번호 3번 뉴욕 양키스 구단 영구결번
명예의 전당 헌액 (1936)
메이저리그 All-Century Team
메이저리그 All-Time Team
일본의 야구 천재 스즈키 이치로가 위대한 것은 몬스터급 성적을 10년 넘게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베이브 루스 역시 몬스터급 10년(보는 이의 관점에서는 타자로 활동한 17년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을 보내며 홈런왕을 독식하는데 1919년 보스턴 시절 29개의 홈런을 날리며 첫 홈런타이틀을 차지하지만 개인적으로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1920년 54개를 시작으로 1932년 13년간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며 이 기간 동안 6,392타수 2.275안타와 타율 0.356와 603홈런을 기록하고 타점 역시 1.788점을 기록 합니다. 안타는 연평균 175개, 홈런은 연평균 46.38개, 타점 역시 연평균 137.53점을 기록한 현재의 시점에서 봐도 경이로운 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년간 베이스 루스는 홈런 타이틀을 10회 수상하며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하는데 200안타도 3차례 달성하고. 0.370이상의 타율도 6차례 기록하는 등 슬러거는 저 타율이라는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 있는 타자이기도 합니다. 베이브 루스의 몬스터 시즌을 어느 시즌으로 잡을 것인지조차 힘들 만큼 각 시즌이 몬스터 시즌이었던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의 현재를 이끈 창조자이자 정복자였으며 수없이 많은 메이저리그의 슬러거들에게 영감을 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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