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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초의 헬창_일본 와카키 타케마루의 괴력법(怪力法,1938)

by 마음heart 202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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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초의 헬창

일본 와카키 타케마루의 괴력법(怪力法,1938)



헬스 혹은 보디빌딩이라고 하면,멋진 몸매와 비상식적인 근육의 크기를 키우는 스테로이드도 떠오르고 약물로 얼룩진 세계라는 편견도 들며 과할 정도의 운동 강도와 단백질 섭취 등이 연상되기도 합니다.소위 21세기에 헬창이라고 하면 멋진 근육을 뛰어 넘어 헐크를 연상할 정도의 근육을 가진 남녀가 떠오르기 떄문입니다.그렇다면 소위 분할법이라던지,단백질로 근육을 증가하기 위해 보충제를 섭취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약물을 이용해서까지 신체의 근육을 증가시키는 현 시대에서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보면 내추럴 보디빌더들을 지금보다는 더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여기에 더해 동아시아 보디빌더의 처음은 어디였을까라는 의구심으로 좀 더 과거로 내려가면 1930년대 일본의 한 남자 와카키 타케마루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와카키 타케마루(若木竹丸(わかき たけまる,1911년 1월 20일생 - 2000년 1월 3일 사망)는 일본 도쿄 분쿄구 혼고 출신으로 신장 162 cm, 체중 69 kg의 작은 체구를 지녔던 인물입니다.와카키 타케마루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허약해서 중학교 시절 선배한테 왕따 등을 당했다고 합니다.불량배에게도 봉변을 당한 후 팔굽혀 펴기와 턱걸이 등 훈련을 시작하며 자신을 단련하기 시작했는데 17살 때 헌책방에서 일본에 번역되어 출판된 웨이트 트레이닝의 선구자 유진 샌도우의 체력양성법(体力養成法)을 접한 뒤 매료 당하게 됩니다.


Eugen Sandow(유진 샌도우.1867~1925);보디빌딩의 아버지

유진 샌도우는 힘보다 근육미에 초점을 맞춘 보디빌딩을 널리 알린 사람으로 현재 관점으로보면 왜소해보이는 육체미이지만 약물이나 보충제도 없던 시절 순수 내추럴이자 가장 이상적인 몸을 가진 남자로 자주 언급되었다고 합니다.독일계 영국인으로 본명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Friedrich Wilhelm Müller). 보디빌딩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보디빌딩을 체계화 하고 철제 운동기구를 판매&운동법을 보급한 인물이기도 합니다.보디빌딩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말부터 생겨났는데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효율적인 운동 수행능력이 아닌 인체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표현법으로 말입니다. 19세기 말은 스톤 리프팅 시기에서 웨이트 리프팅 시기로 전환되는 시기였는데 이 시기 유럽에서는 웨이트 리프팅이 오락의 한 형태로 발전하고 여기에서 strong man이 나타나기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말 미국인들은 근력에 관심이 높아졌고 이를 건강과 연관시키는 노력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신체 단련을 교육했던 사람들은 체력적 건강뿐 아니라 아름다움까지도 겸비해야함을 강조하여 유럽의 strong man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선수들의 조각상을 더 이상적인 것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신체 단련을 교육했던 사람들은 유진 샌도우를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롤모델을 삼았는데 유진 샌도우에 의해 당시 바벨과 덤벨 등의 운동기구 판매도 늘었고 자신의 책과 잡지 등을 팔아 총체적 산업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약물 사용이 논란이 되는 레그파크와 달리 확실하게 약물을 사용하지 않은 가장 자연스러운 몸의 롤모델로 평가받습니다. 왜냐하면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추출되기전에 사망했기 때문, 즉 약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물론, 그의 근육량이 네추럴의 한계라는 식의 주장은 걸러들을 필요가 있는데 현대 네추럴 보디빌더 수준으로도 산도프의 근육이 대단한 몸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체계적인 고립, 분할법이나 영양학과 스포츠의학이 자리를 잡기 전 이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비슷한 신장을 지닌 네추럴 보디빌더들은 그보다 더 큰 벌크를 지니기도 합니다.유진 샌도우는 단백질이 근육생성에 중요하다는 사실이 1950년대에 들어서 알려졌기 때문에 단백질 위주의 식단조차 하지 않은, 즉 단백질 식단없이 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성기 시절 그의 신장은 5피트 9인치, 체중은 180파운드(175cm에 81.6kg)였습니다.인생의 정확히 중간지점이었던 1896년 29살에 블랑쉬 브룩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2녀를 뒀으며 1925년 58살에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와카키 타케마루,극진 가라테 최영의에게 괴력법을 전수하다

십대 시절 와카키 타케마루-맨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훈련 1년 반이 지난 18세 때의 모습, 14세 때의 모습, 16세 때의 모습 그리고 괴력법을 낸 후의 모습

와카키 타케마루는 17살 때 유진 샌도우의 체력양성법(体力養成法)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보디빌딩을 단련하게 됩니다.당시 보디빌딩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하여 와카키 타케마루는 의자와 자전거,시멘트나 돌, 양동이, 철봉 등을 이용한 단련도구와 훈련방법을 자체 개발하는 등 운동에 열정을 불태웠는데 강박증이라 할 정도로 훈련 강도가 지독했다고 합니다.와카키 타케마루의 강박적인 훈련법은 스스로 여러 방법을 시험하고 기구들을 만들어가며 하루 12~15시간 동안 맹렬히 훈련을 했는데 때로는 실신할 때까지 단련했고, 매일 샌드백을 안고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또한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어질 때면 '지금 세계의 어디선가 너와 같은 놈이 너와 같은 훈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은가?' 하며 자신을 몰아세웠다고 합니다.여기에다가 종종 가슴에 살짝 닿을 정도의 역기를 놔두고 잤는데, 밤에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면 이 역기를 몇 회 들어 올린 후 화장실에 갔고, 돌아올 때는 근처의 판자나 도구들을 몇 차례 들어 올린 후 방에 돌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분할훈련법이라던지 보충제 등 과학적인 훈련 개념도 나오지 않은 시대고,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에 강함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소위 오버 트레이닝을 하게 만든 것 같지만 사실 비과학적이고 무척 위험한 훈련법이라 할수 있습니다.하지만 와카키 타케마루는 나날이 강해져 훈련한지 3년이 흐른 만 20세가 될 무렵에는 스모에서 관동제일이 될 정도로 힘이 강해졌다고 합니다.


와카키 타케마루의 괴력법


와카키 타케마루는 만 26세였던 1938년에 이르러서는 신체 능력의 정점을 기록하는데 신장 163.2 cm에 머물렀지만 체중 65.6 kg(이후 69kg까지증가),가슴 둘레 132 cm,상완(上腕) 둘레 51 cm,플로어 프레스(floor press) 110 kg,벤치프레스 자체 최고기록 약 228 kg을 기록하기도 합니다.또한 레슬러 브릿지를 무려 147 kg를 기록했는데 특이하게도 현재의 케틀벨이 등장하는데 1800년대와 1900년대 서적에도 케틀벨이 등장한다고 합니다.와카키 타케마루는 벤치 프레스 237 kg (물론 렉에서 뽑는 것까지만 기준),프론트 홀드 250 kg (260 kg에서 기절했다 함)을 들었다고 합니다.

팔굽혀펴기(push-up)-특이하게 손가락을 세워서 하여  악력  증강 효과도 있다고 했는데 극진공수도 최배달 훈련법으로도 유명하다

와카키 타케마루는 결국 자신의 훈련과 성과를 담아 1938년에 괴력법이라는,어쩌면 동아시아 최초의 보디빌딩 서적을 선보이기도 합니다.당시 괴력법의 훈련법들은 지금에일본인들에게 생소한 것들로 많은 무술인들에게 관심을 받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최배달로 유명한 극진가라데의 최영의,유도의 기무라 마사히코에게 체력 증강과 관련해서 지도를 해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최영의가 와카키 타케마루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을 때는 그의 작은 키(162 cm)를 보고 조금 우습게 봤지만 팔씨름에서 자신이 쉽게 져서 놀라면서 와카키 타케마루의 괴력법을 훈련법으로 채택하게 됩니다.이후 최영의가 시범으로 자주 보여주던 손가락으로 동전 구부리기는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합니다. 최영의의 극진가라데는 힘을 바탕으로한 파워가라데로 최영의 본인 역시 175cm 80kg 정도의 신체였지만 파워는 놀라울 정도였다고 합니다.특히 최영의는 극진가라데를 힘>속도>기술이라고 자주 강조한 바 있는데, 와카기 타케마루의 영향이 있었다는 후문이기도 합니다.

딥스(담그기, dips)와 피스톨(pistol)
밴드 익스텐션(band extension)

와카키 타케마루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경했던 보디빌딩으로 자신을 단련,어느날 불량배가 시비를 걸어오자 헤드록으로 간단히 제압했으며 신장 163cm에 가슴 둘레 132 cm일 정도로 기형적인 몸매로 인해 거리에 나서면 여자들이 피하고 기형아 취급도 받았지만 미군들은 amazing!이라면서 악수를 청했다고 합니다. 

플로어 프레스(floor press)-자체개발한 역기로 212.3kg을 기록했다고 함
(좌)레슬러 브릿지(wrestler bridge)-성인남자 5명을 태울 수 있었다.(우)벤트 프레스(bent press)

또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복싱 체육관을 설립하고 피스톤 호리구치,사사자키,오기노 사다유키,오카모토 후지 등 유명한 파이터를 많이 훈련시켰으며 일본에서 "복싱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와타나베 유지로의 권투도장에 입문, 권투 기술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시 복싱 아마추어 챔피언을 비롯한 선수들의 스파링에서 쉽게 이겼다고 하며 1936년, 동일본 팔씨름대회에 출전하여 압도적인 격차로 우승했다고 합니다.여기에 유도의 강도관(講道館)을 찾아가서 "4단을 몇 명이나 이기면 5단이 될 수 있습니까?" 하며 도전했으나 강도관 측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이 이야기는 만화 격투맨 바키2부에서 비스켓 올리버가 경시청소속 유도선수들을 괴력으로 집어던져대며 도대체 몇명까지 던져야 검은띠를 줄거냐는 대목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시멘트, 양동이, 철봉 등을 이용한 와카키 타케마루의  역기  제작법

와카키 타케마루는 돌과 줄 등을 이용한 팔씨름 연습기가 제작했는데 일본식으로 완각력연습기(腕角力練習機)라고도 합니다.처음에는 37 kg으로 시작하여 10개월 후에는 130 kg으로 단련했다고 하는데 최첨단의 트레이닝 시스템을 도입하고 하루 온종일 팔씨름 트레이닝에 올인하는 현대의 암레슬러들도 이 기록에 미치지 못하므로 신빙성이 낮은 일화라 할 수 있습니다.와카키 타케마루는 나이 든 후에도 근육량이 줄어드는 것과 힘이 약해지는 걸 용납하지 않아 단련을 멈추지 않았고,마이크 타이슨과 싸워보고 싶다는 발언으로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아무리 줄어도 팔을 40 cm 이하로 하고 싶지는 않다.'며 치료와 재활훈련을 계속했다고 합니다.2000년 1월 3일 만 89세의 나이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근육이 너무 많은 나머지, 판매되는 표준형 관에는 옆구리가 걸려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니 소위 진정한 1세대 헬창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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