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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과 1000대1로 맞선 동대문 홍길동_경성 피스톨 김상옥

by 마음heart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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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과 1000대1로 맞선 동대문 홍길동

경성 피스톨 김상옥



1923년 일본 기마대와 무장 경관 1,000여 명이 총동원되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고 종로경찰서 폭탄테러 범인을 잡기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 테러범이 단 한명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일본 경찰 천여명이 동원되고서도 잡지 못했던 한 단한명의 인물은 조선인 김상옥으로 동대문 홍길동 혹은 경성 피스톨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던 독립투쟁단체 의열단 단원이자 영화 암살에서 하정우가 분한 남주인공 하와이 피스톨의 모델이자 영화 밀정에서는 배우 박희순이 연기한 김장옥 역시 김상옥 의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었으며 만화 각시탈과 2012년 드라마 각시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김상옥 의사는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며 전설적인 무용담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3.1 만세운동 이전과 이후의 김상옥

김상옥 의사는 1890년 1월 5일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현재 종로구 효제동)에서 구한 말 군관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金貴鉉)과 독립유공자인 어머니 김점순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김상옥 의사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으며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개신교 신자가 되었습니다.1910년 경성영어학교를 다녀 국제 정세와 서양 문화에 안목을 넓혔고, 1912년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3년에는 정진주와 혼인도 하였습니다. 1917년 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하고 생산해 보급하였으며, 당시 말총모자 판매고로 3만~4만의 수익을 올리기도 합니다. 현재 기준으로 약 15억이 넘는 금액이기도 합니다.사업 수완이 좋았던 김상옥은 운영하던 철물점의 직원들이 어느새 50명까지 늘어난 철공소로 발전했고, 김상옥의 철공소는 각종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거점이 되기도 합니다.이 외에도 농기구, 장갑, 양말 등도 생산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데 앞장섰습니다.김상옥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이전에도 사회활동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설립한 영덕철물점이라는 곳을 기반으로 능란한 사업수완을 발휘해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당시 철물점 종업원들에게 요즘의 노동조합과도 같은 단체를 설립해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으며 단발령 이후 사람들 사이에 잘린 머리를 감추고 다니기 위해 모자가 유행했는데, 이것이 대개 수입산이지라 말총을 이용한 모자를 창안해 큰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또한 김상옥 생전 별명은 동대문 홍길동이었는데 영덕철물점을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함은 물론, 무장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기마경찰을 맨손으로 때려눕혀 검을 빼앗았을 만큼 무술에도 능했는데 일본 제국 기마경찰은 말에 타고 있었으므로 그가 훨씬 불리했음에도 제압하고 검을 빼앗은 것인데 그저 구전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며, 실제로 이때 빼앗은 검이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을 정도며 총을 다루는 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라 불릴 만큼 비범했다고 합니다.

거사를 앞두고 찍은 생전의 김상옥 의사 사진,특이하게 뒷짐을 진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손이 부끄러워 차마 드러낼 수가 없어 손이 보이지 않도록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 모습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도 재현되었다.

▤신출귀몰 동대문 홍길동 김상옥

김상옥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부터였는데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대량 제작해 배포했으며, 철공소 직원 50명과 함께 직접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4월 동대문교회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훗날 독립신문으로 발전함)를 발간해 독립 사상을 계몽하고 고취하기도 합니다. 1919년 12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고, 1920년 4월 한훈,유장렬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씨 등을 총살하였으며, 오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기도 합니다.1920년 8월 24일,미국 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1920년 5월부터 북로군정서 김동순,윤익중,신화수, 서대순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거사 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었고,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에 이릅니다.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이시영,조소앙,신익희 등과 독립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본격적인 독립운동과 함께 동대문 홍길동의 전설을 써내려가게 됩니다.

○1921년 7월, 만 31살의 김상옥은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1922년 11월,만 32살의 김상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휘,조소앙, 김원봉 등과 의논해 조선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 및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는데, 1923년 1월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도쿄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 발,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경성에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김상옥은 상하이를 떠나면서 농부 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면서 경비경관을 사살하였고,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이후 서울에 와서 김한, 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 일본 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총독 암살 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심장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다

김상옥의 나이 만 33살때인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은 독립투사 등을 강제 연행,고문하는 등 독립투사들에게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는데, 이 폭발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나게 됩니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경성검시국의 오하라 검사가 나서 수사했지만, 의거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경찰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월 17일 일본 경찰은 의거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는데,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으며 종로경찰서 우메다와 이마세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는데, 고봉근의 행랑방에 있던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난 것이었습니다.은신처가 탄로나자,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 20여명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한 다음에는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를 사살하고 다른 일본 경찰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에,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도주했는데 일본 경찰은 군대까지 불러 산을 포위했지만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교묘하게 산을 내려왔습니다.이때 김상옥은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어 안장사 방향으로 발자국이 향하도록 짚신을 신었다고 합니다.김상옥은 1월 18일은 무내미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월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동상도 치료하는 등,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김상옥이 전투에서 사용한 권총. 실물은 찾지 못했고, 증거품으로 찍힌 상단의 사진만 전해지는데 총열이 조금 더 짧다는 점과 방아쇠울이 다르게 생겼다는 점을 빼면 스미스 & 웨슨  38 DA Revolver 38 S&W와 비슷하다. 형태로 보아 은닉이 쉽도록 개인적으로 개조한 모양이다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이 진짜 김상옥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는데 김상옥 의사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의도의 주장이 아니라,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면 당연히 총독의 개인 경계도 강화될 것이 뻔한데 그런 거사를 힘들게 만드는 우를 범할 이유가 있었겠냐는 것이며 일제는 진짜 장본인을 찾지 못하고 김상옥의 소행으로 단정해서 그를 추격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일각에서는 당시에 암살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목표를 종로경찰서로 변경한 것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습니다.또한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투쟁에 사용하던 폭탄이 다소 만듦새가 조잡했던 것과는 달리,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은 위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당시 언론 보도에는 폭탄 제조자가 유태인이나 아랍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KBS 다큐 등에 따르면 폭탄의 제조자는 이태준 선생이 소개해 준 헝가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다만 이태준은 이미 1921년 죽었고, 사건은 2년 후의 일이므로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고성능 폭탄을 제조할 기술력을 지닌 독립운동 단체가 의열단밖에 없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김상옥의 의거로 보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일종의 실험적인 의거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제조된 폭탄의 위력이 실전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시험도 해 볼 겸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입니다.

▒일본경찰 1000VS1-김상옥의 의롭고 거룩한 죽음

1923년 1월 22일 새벽 김상옥은 마지막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맙니다.상하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 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실토하면서 은신처가 발각된 것으로 1월 22일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곳의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려졌으며 이때 김상옥을 잡기 위해 무장 경관 400여 명과 기마대 등 총 천여명이 동원되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왜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자 권총으로 무장한 다음 방 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사살했으며 그 다음 벽장과 붙어 있던 집 벽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으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습니다.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2자루로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마저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을 스스로의 머리에 쏘아 자결해 순국하였습니다.김상옥은 순국하고 나서까지도 일본군들을 떨게 했는데, 눈을 뜬 채로 사망하여 그의 시신을 본 졸개들이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일본 경찰은 김상욱의 어머니를 불러다 생사를 확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김상옥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확인한 결과 몸에는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김상욱은 10발의 총탄을 몸으로 받는 동안에도 뛰어난사격실력으로 쌍권총으로 소총을 든 일본인 순사 수백명과 대등이 싸웠다는 것입니다.김상옥에 몸에서 발견된 11발의 총탄 자국 중 자결에 사용한 두부의 1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인데 김상옥은 평소 신념은 총알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셈이었습니다.수백여 명의 추격을 받으며 3시간 반이나 총격전을 했음에도 피격당한 총알이 10발밖에 안 된다는 것도 대단했던 동대문 홍길동 김상옥 의사의 거룩하고도 의로운 죽음을 천재시인 이상의 친구로 유명했던 야수파 화가 구본웅이 중학생 시절 김상옥 의사의 순국 현장을 목격하였는데, 이때의 강렬한 영향이 그의 야수파 화풍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구본웅은 자신이 목격한 김상옥 의사의 죽음을 시화집 "허둔기"에 그림과 글로 남겼을 정도로 감격했다고 합니다.김상옥 의사는 이후 대한민 건국훈장 대통령장 및 독립장에 김상옥 의사를 추서했으며 그의 유해는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습니다.김상옥 의사는 1992년부터 선정/발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최초로 선정된 인물이기도 합니다.또한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의사가 순국한 곳이 있는 종로4가 북쪽 서울효제초등학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어 김상옥 의사의 숭고한 의지를 기리고 있기도 합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상하이를 떠나며 김상옥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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