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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名將列傳

로마제국의 멸망에 일생을 건 "한니발 바르카스"

by 마음heart 2011.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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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영화 "한니발" 아니죠

 

 

 

 

 

오늘의 주인공은 카르타고의 명장(BC 247 북아프리카~BC 183경/181 비시니아 리비사)
 
한니발 Hannibal 이다.그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가끔 이런 상상을 한적들은 있을 것이다.
 
만약 충무공 이순신이 살아서 일본이나 중국을 향한 정복 전쟁을 펼쳤다면 어찌 되었을까?
 
대개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고구려의 영토까진 아니더라도 현재의 협소한 한반도 영토보단 좀 더 넓은 땅을 가지진 않을까 하는,
 
난 그 해답을 한니발에서 얼핏 보게 되었다.
 
국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지 못한 상태에세 로마 제국에 등에 비수를 꽂아 넣은 이 고대의
 
명장이 우리 상상속의 조그마한 실마리는 되지 않을까,
 
자.그럼 이제 부터 한니발의 세계속으로 빠져 들어보자
 
 
 
 
 
 
 
 
 
 
 
 
 
 
 
지중해의 붉은 심장 "한니발"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는 기운전 3세기 무렵 지중해 세계의 초강대국이었다.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안이들이 건설한(포에니 전쟁의 "포에니"는 페니키아를 지칭한다)카르타고는
 
현재의 튀니지 북쪽 해안의 카르트하다쉬트를 기반으로해서 지중해 연아 서부,아베리아,몰타,발레아레스
 
제도,코르시카,사르디니아,시칠리아의 일부까지 지배한 강력한 국가 였으며 서지중해는
 
"카르타고의 허락없이는 바닷물에 손도담글 수 없다"고 할만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여타의 국가들과 달리 해양을 지배하던(이들의 해양선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와 서아프
 
리카 해안까지 왕래할 수 있을만큼 강력했다.
 
한니발은 이런 강력한 제국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었다.
 
폴리비우스리비우스의 저서에 따르면 한니발은 그의 아버지가 스페인에 데려가서 이른 나이에
 
로마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키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BC 229(또는 228)년부터 BC 183년경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니발의 생애는 로마 공화정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가 가장 최초로 지휘권을 받은 것은 카르타고의 속주였던 스페인에서 하밀카르의 사위이며 후계자인
 
하스드루발로부터였다. 이때부터 한니발은 성공적인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BC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군은 나이 26세에 불과한 그를 총사령관으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
 
정부는 신속하게 그의 야전 사령관직을 승인했다.
 
한니발은 즉각 카르타고의 스페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스페인의 공주인
 
이밀케와 결혼하고 다양한 스페인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올카데족과 싸우고 그들의 도읍인 알타이아를 점령했으며 서북부의 바카이이족을 평정했다.
 
BC 221년에는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카르타고 노바, 카르타고령 스페인의 수도)를 기지로 삼아 타호스
 
강 지역에 있는 카르페타니족을 상대로 커다란 승리를 거둔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카르타고는 동지중해까지 세력을 넓히려 했다. 그 시작으로써 서쪽 절반만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중부 시칠리아 섬의 나머지를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뜻밖의
 
암초에 부딪히고 만다.
 
그리스 국가 중 하나인 에피루스의 왕이던 피로스가 카르타고의 야심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암초는 바로 로마였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성립되어 삼니움, 갈리아 등 이민족과 대결해 가며 차차 세력을 넓혔고,

 

3세기에는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의 마지막 장애물이 바로 에피루스의 피로스

 

였는데, 그는 카르타고와는 반대로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서쪽을 정벌해 세계를 통일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를 매섭게 공격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그 다음 원정에서 시칠리아의

 

카르타고를 무찌르고는 다시 로마와 겨루었으나 패퇴하고 그리스로 돌아갔다가 전사하고 만다.

 

 

피로스가 사라지자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카르타고를 막을 세력은 로마뿐이었다.

 

로마의 국력은 카르타고에 비하면 약세였고, 특히 육전에는 강해도 해전에서는 카르타고에게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도 동맹을 맺고 있던 시칠리아 동부의 도시들이 카르타고의

 

침략에서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과연 우리가 바다 건너 외국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하고 무척 망설였다고 한다.

 

기원전 264년.원정대가 로마를 출발했고,

 

이로써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다

 

 

 

 

 

 

두 제국의 충돌,제1,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9년에 한니발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이베리아의 독립도시 사군톰을 공격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에 뒤이어 로마와 카르타고가 체결한 조약에서 에브로 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권의 북방 한계로 설정되었다.

 

사군툼은 실상 에브로 강 남쪽에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그 도시와 '친선'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에 대한 카르타고의 공격을 전쟁행위로 간주했다.

 

사군툼 포위전은 8개월간 지속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한니발은 심한 부상을 입는다.

 

카르타고에 항의하는 사절단을 보낸 로마인들은 사군툼이 함락된 이후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측에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측에서는 전적으로 한니발이 주도해서 싸웠다.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참전 했던 포에니 제 1차 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이 났고

 

로마에 패한 카르타고의 국력은 예전만 못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다시 로마와 자웅을 겨루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그러나 상황은 한니발에게 썩 유쾌한 정도는 아니었다. 

 

조국 카르타고는 전쟁의 후유증과 부정부패,정쟁에 시달렸고  민간인과 군인의 신분적 구분이 없던

 

로마와는 달리 직업 군인제도하의 카르타고는공로를 세운 군인이 있을시엔 정치인들의

 

질투의 표적이 되는 일도 잦았다.

 

이래 저래 본국의 적극적 지원을 받기 힘들어잔 한니발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조국에 승리를

 

안겨주고 싶어 했다.

 

한니발의 카르타고는 해상국가였지만 해전에 익숙치 않은 로마군에게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다.

 

한니발은 역으로 카르타고군을 이끌고 육전으로 로마군을 점령할 생각을 한다

 

 

 

BC 219년부터 BC 218년 겨울까지 한니발은 카르타헤나에서 보내면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전쟁을

 

벌일 준비를 했다. 동생인 하스드루발에게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방위를 위한 상당수의 병력을 맡겨

 

놓고 그는 BC 218년 4(또는 5)월에 에브로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로마인들은 이 소식을 듣기 직전에 전쟁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한니발의 군대는 9만 명의 보병과 1만 2,000명의 기병, 그리고 상당수의 코끼리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그러나 이 수치는 과장된 것이며 총병력은 4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피레네 산맥에서 그의

 

군대는 피렌 부족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이 저항과 일부 스페인 병력의 이탈로 군사가 크게 줄어들었으나 그는 갈리아 남부의 부족들로부터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론 강에 당도했다.

 

한편 로마의 장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반란 때문에 북부 이탈리아에 붙들려 있었던

 

그의 군대를 바다를 통해 마르실리아(마르세유)로 파견했다. 스키피오는 론 강 우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한니발이 이미 강을 건너 좌안에서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갈 계획인 것 같다고 깨달은 스키피오는 북부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로마의 젊은 영웅"스키피오"


 

일생의 라이벌리 되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카르타고군은 강을 건넌 뒤에 북부 이탈리아의 보이족을 우두머리로 하는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
 
지도자들을 영접했다. 보이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통로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니발의
 
계획에 귀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후에 카르타고군은 뒤랑스 강(또는 더 정확하게는 아비뇽 부근에서
 
론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그 강의 지류)을 건너 '섬'이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한니발의 군대는 콜드그리몬 또는 콜드카브르 계곡에서 알프스산에 접근해 뒤랑스강 분지를 지나
 
거나 아니면 주네브르 관문 또는 몽스니 관문을 지나 포 강 상류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적대적인
 
타우리니족의 영토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한니발은 그들의 도읍(지금의 토리노)을 습격했다.
처음에는 알로브로게스족이 한니발의 대열 배후를 공격하여 위협을 가했다.
 
횡단로의 중간지점에서는 다른 켈트 부족이 짐 나르는 가축들을 공격하는 한편, 높은 곳에서 아래로
 
돌을 굴려 사람과 짐승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가파른 길에서 실족하게 만들었다. 한니발은 대응조치를
 
강구했으나 이로인해 엄청난 병력손실을 입었다.
 
3일째 되는 날 그는 갈리아 부족의 마을을 점령하고 창고를 털어 2~3일분의 식량을 군대에 공급했다.
 
한낮에 높은 곳에서 지키는 갈리아 부족의 공격에 애를 먹은 데다 갈리아 부족 안내인들의 충성심도
 
믿음이 가지 않아 한니발은 드러나 있는 거대한 암벽에서 야영을 하면서 야간에 자신의 말들과 짐
 
나르는동물들이 아래쪽의 계곡으로 통과하는 것을 엄호했다. 통행로 정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이 더욱 위험했다.
 
전 해에 내린 눈이 굳어진 단단한 얼음 바닥 때문에 병사들이나 짐승들
 
모두 미끄럼질을 하면서 새로 내린 눈 속을 굴렀다. 산사태가 일어나 좁은 통로를 봉쇄했으며 그 길을
 
치우는 동안 군대는 하루종일 발이 묶여 있었다.
 
마침내 15일째 되는 날 카르타헤나로부터 5개월간 행군한 2만 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
 
그리고 코끼리 38마리 중 남은 소수를 이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그는 기후와 지형의 어려움,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부족들의 게릴라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족과
 
언어가 다양한 부대를 이끌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커다란 난관을 이겨낸 것이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한니발의 부대는 이제 스키피오의 군대를 대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최근에 창설된 플라켄티아(지금의 피아첸차)와 그레모나의 로마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포 강으로 돌진해왔다. 양군 사이의 최초의 접전은 티치노 강 서쪽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가 우세를 보여 스키피오는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로마군은
 
플라켄티아로 퇴각했다. 2번째 집전을 유도하기 위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스키피오의 연합군은 플라켄티아 남쪽의 트레비아 강 좌안에서 한니발을
 
맞이했으나 크게 패배했다(BC 218. 12).
 
이 승리로 갈리아족과 리구리아족이 모두 한니발의 편에 붙었고 그의 군대는 켈트족 신병들을 모집해
 
상당히 보강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뒤(이때 한니발은 눈병에 걸렸음) BC 217년 봄에 멀리 아르노
 
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로마의 2개군이 출동하여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는 아레티움에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를 책략으로 제압하고 파이술라이(지금의 피에솔레)와 페루자에 당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계획대로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는 무방비의 전투에 이끌려 들어왔다.
 
그들이 트라시메네 호의 북쪽 언저리와 맞은편의 언덕 사이를 지나갈 때 한니발의 부대는 준비된 위치에
 
서 공격을 가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나머지는 호수에 빠져죽게 만들어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가이우스 켄테니우스가 이끄는 약 4,000명의 기병대 증원군은 도착하기도 전에 중도에 습격을 받고
 
역시 궤멸당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너무 지쳐서 승세를 몰아 로마로 진군할 기력이 없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세력들이 이탈하여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실패한 전쟁,한니발의 꿈은 무너지고,

 
 
 
 
 
 
 

 

 

 

솔직히 지금까지 소개한 명장들이 불세출의 영웅임에는 분명하지만 한니발의 로마 공략에는

 

몇가지 아쉬움도 남는다.한니발 역시 군사적 전략,전술에서 당대느 물론 후대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친 뛰어난 군인이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대부분 용병이었는데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탈자가 발생하지 않을만큼

 

리더십과 조직 관리를 철저히 한 인물이었다.

 

한니발이 태생적으로 로마는 적,이라는 증오를 먹고 자랐지만 부하들고 먹고 자며 솔선수범하는

 

(물론 그것이 의도적이던 의도적이지 않던)지도자였기에 존경을 스스로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인이 그렇듯 전투전략에서는 능통했던 그는 정치 전략에서는 미숙했고
 
 
 
당대 최고의 강국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다.

 

 

원정군을 이끈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군에 비해 열세일 수 박에 없었다.하지만 한니발은 로마군에게

 

연승을 거두면서도 좀처럼 로마로의 진격을 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 반도 주변에서 17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만다.

 

추측이지만 아마도 한니발은 적은 병력으로 출혈을 감행하며 로마를 공격하는 것 보단 로마의

 

주변 도시국가들이 자신의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로마를 이탈하거나 반란하여 스스로 무너지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한니발은 피케눔에서 쉬면서 217년 여름을 보냈으나 나중에 풀리아해와 캄파니아를 공격해 파괴했다.

 

한편 로마군은 지연전술을 구사하여 양군 사이에서 소규모 접전만이 벌어질 뿐이었다.

 

BC 216년 초여름에 한니발은 갑자기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우피두스 강변에 있는 칸나이

 

(지금의 몬테디칸네)의 대규모 보급기지를 장악했다. 그곳에서 8월초에 칸나이 전투가 벌어졌다.

 

한니발 부대의 중앙선에 배치된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 보병대의 돌진을

 

막아내지 못하고 대열은 유지한 채 밀려났지만 리비아 보병대와 양 진영의 기병대는 굳건히 버티면서

 

로마군의 공격대열을 중복시키고 배후에서 포위하는 작전을 통해 승리한 로마 군단 병사들을 오히려

 

추격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육상전의 대승리는 바라던 효과를 가져왔다.

 

많은 지방들이 이탈리아 동맹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카르타고군의 전투력은 점차 약해져갔다.

 

이때 파비우스의 전략이 실행되었다. 그 내용은 로마에 충성을 바치는 도시들을 방어하고 기회가

 

닿으면 한니발에게 함락된 도시들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되, 적군이 싸우자고 할 때 싸우지 말고

 

카르타고군을 항상 모든 전장에서 긴장상태로 있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병력의 열세 때문에 로마군을 상대하기 위해 자기 부대를 산개시킬 수도 없고

 

집중된 병력으로 결정전을 벌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조심스러운(항상 성공적이지는 못한) 수세에 밀렸으며

 

카르타고의 본국 정부로부터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로마의 제해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익한 지구전을 벌이기 위한 지방 보급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타렌툼(지금의 타란토)을 점령한 것을 제외하면 한니발은 보잘 것 없는 승리를 거두는 데 그쳤다
 
(BC 215~213). 카르타고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BC 213년에 카실리눔과 아르피(한니발이 BC 216~215년 겨울에 점령했던 곳)가 로마군에게
 
수복되었으며 BC 211년에 한니발은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카푸아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해야 했다.
 
니발이 강력하게 요새화된 로마의 성벽에서 4.8㎞ 이내까지 빠르게 행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푸아는
 
그해에 함락되었으며 시칠리아에서는 시라쿠사가 무너졌고 BC 209년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이
 
다시 로마의 수중에 넘어갔다.

 

 
 
 
한편 스페인에서 로마군은 큰 전과를 올려 그곳의 카르타고 권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BC 208년에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주력군에서 분견대를 차출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러 가기 위해
 
형이 넘어간 길을 따라 알프스를 횡단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한니발의 군대와 합세하기 전에
 
북부 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에서 패배했다(BC 207년,메타우루스 전투). 이렇게 해서 중부 이탈리아에서
 
형세를 만회하려던 마지막 희망마저 무산되자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브루티움에 집중하고 그곳에서
 
남아 있는 동맹세력의 지원을 받아 이후로도 4년 더 로마의 압력에 저항하면서 버텼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를 타격하여 카르타고의 주요동맹세력인 마사이실리아의 누미디아인들을
 
분쇄하고 카르타고를 위협했다. 위험에 빠진 자기 나라를 지원하러 가기 위해 한니발은 BC 203년에
 
이탈리아를 포기했다. 이미 휴전협정이 선포되었고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들을
 
받아들인 상태였지만 한니발은 카르타고 군의 나머지 병력을 하드루메툼(지금의 튀니지 수시)에
 
집결시켰다. 평화협정 제안을 가지고 로마에서 사절들이 돌아오고 있던 그 순간에 카르타고군은
 
휴전협정을 파기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모두 각기 자신들의 누미디아 동맹세력과 합세하기 위해 바그라다스 강을 따라
 
자마레기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이때 한니발은 기병대가 없었고 전열의 용병부대와 제2열의 아프리카
 
보병대가 한꺼번에 패배했다
 
스키피오는 정예병사로 이루어진 한니발의 제3열이 전혀 손실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전열을
 
재편하는 한편, 자신의 누미디아인 동맹세력인 마시니사 기병대를 카르타고군의 배후로 올려보냈다.
 
한니발은 2만 명의 병력을 잃고 패배했으나 자신은 마시니사의 추격을 벗어나 몸을 피했다.

 

 

 

 

 

자마 전투 상상도

 

 

 


자마 전투 패배 이후 1년이 지나 체결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평화조약은 한니발의 필생의 목표를
 
좌절시켰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무기를 들고 로마와 싸우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비록 전쟁을 잘못 치루었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수페트(민간 행정관)가 되었으며 아울러
 
군지휘권도 그대로 보유했다. 수페트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는 카르타고의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일정한
 
행정적·정치적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카르타고 귀족계급 내의 일부 세력과 사이가
 
나빠졌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를 부추겨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만들려고 한다는 혐의로 로마 당국에 고발당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에페소스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궁전으로 피신했다(BC 195).

 

처음에는 로마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던 안티오코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수행에 관해 그가 타당한 충고를 하는 것이 점차 말썽의 원인이 되자 그는 안티오코스를
 
위해 함대를 마련하고 지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페니키아에 있는 도시로 가야 했다.
 
그러나 해전에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팜필리아의 시데 앞바다에서 로마 함대에게 패배했다.
 
육지에서 안티오코스는 190년에 마그네시아에서 패배했으며 로마인들이 그에게 내건 요구조건의 하나는
 
한니발을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마그네시아 전투). 이 지점에서 또다시 한니발의 뒤이은 행적에 관한
 
설명은 여러 가지이다. 그는 크레타를 거쳐 비시니아의 프루시아스 왕의 궁정으로 달아났거나 아니면
 
아르메니아의 반군세력에 가담했던 것 같다. 결국에 그는 프루시아스에게 피신처를 구했다.
 
프루시아스는 당시에 로마의 동맹세력인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한니발은 이 전쟁에서 프루시아스를 도왔으며 해상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이던 중 뱀이 가득 들어
 
있는 큰 솥들을 적군의 배에다 던져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로마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과정을 통해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피신할 길이 없게 되자 한니발은 비시니아의 리비사라는 마을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조국이여!나를 용서해주주오..!라는 말을 남기고


 

 

2300년전,한니발의 카르타고와 스키피오의 로마가 벌인 일대 회전은 요즘으로 치면 세계대전이었다.

 

두 국가의 싸움에 주변 중소국가들이 휘말릴 수 밖에 없는,이 불세출의 영웅들이 벌인 전쟁의 승패는

 

기실 허울 좋은 영광일지도 모른다.공존하지 못하고 한쪽을 잡아 먹어야만 하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논리,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와 스키피오의 조국 로마는 숙명과도 같은 전쟁을 치르며 역사에 그

 

이름을 오롯이 남겼지만 이제는 두 국가 모두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웅들의 이름만이 인구에 회자 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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