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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名將列傳

회음후 한신_황제가 되지 못한 위대한 명장

by 마음heart 201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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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음후 한신

황제가 되지 못한 위대한 명장



회음후 한신韓信 기원전 196년에 죽은 인물로 지금이 시기로 201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천207년전의 사람입니다.회음후 한신은 중국 역사상 수많은 명장이라 칭송받는 장수중에서도 으뜸 중의 으뜸으로 삼국지를 주로 본 사람들이 조자룡이나 장비,관우등을 떠올리고  우리 나라의 충무공이나 을지문덕 장군을 흠모하듯이 진 제국 말기 혼란한 상황의 중국 대륙에서 아무 것 하나 가진 것 없던 한신이(한고조 유방이나 초패왕이라 불린 항우가 존귀한 집의 자손이었다면 한신은 천민의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끝내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으로(물론 여기에는 시대적 상황,바로 난세라는 분명한 시대적 도움을 받았지만)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물론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독자들도 분명 있을지 모르지만 필자가생각 하는 명장은 전쟁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종결시키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라고 생각 합니다.전 세계적으로 휼륭한 장군과 군인들이 많지만 회음후 한신은 결국 한고조 유방을 도와 진 제국 말기 혼란한 상황과 절대적으로 불리햬던 초패왕 항우와의 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한 제국을 세우는데 일조 합니다.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종결시키고 을지문덕이 수 나라의 침입을 살수에서 물리침으로전쟁을 종결 시켰듯이,개인적으로는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한신이 닮은 꼴로 비춰지기도 합니다.평민으로써 각 나라의 최고 대장군이라는 지위에 오른 점이나 전쟁이 후 토사구팽 당한 점, 물론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 대첩이 후의 기록은 전무하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상황을 유추하자면 회음후 한신과 비슷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하는 어림 짐작을 해보기도 합니다.고구려의 위대했던 명장 을지문덕은 영양왕과의 찰떡 호흡으로 수문제,수양제의 대군을 모두 물리치지만 영양왕 사후 영류왕이 집권하면서 그 이름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됩니다.을지문덕의 나이도 나이겠지만 전쟁 옹호파로 그 기반을 다진 을지문덕은 영류왕이 시행하는 대 중국 정책(전쟁 온건파)에 눈엣 가시같은 존재 였을 것입니다.죽음을 당하지 않았 다면 아마도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거나 매장 당하였을 경우가 농후한 것이 당시의 을지문덕이 아니었을까,승계직인 막리지를 연개소문이 구걸하다시피하여 승계하였다는 기록을 보더 라도 영류왕 당시에는 전쟁 옹호파나 신흥 귀족이 정치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천년전의 원조 백수 한신

 

너무 삼천포로 빠진 것 같은데 다시 회음후 한신에 대해 알아 보면 사마천의 사기에 회음후 한신은 젊을 적에도 그 기상이 담대하고 생각함이 깊었다고 적고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훗날 한신이 유명해진 후의 사람들의 후일담이고 한신의 젊은 날은 비루함의 극치 였다 할 수 있는데 요새의 대한 민국으로 치면 청년 백수였다고 할까?빈둥 빈둥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는 한신을 사람들은 싫어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큰 칼을 옆에 차고 다니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겉 멋 들었다고 욕할 수도 있었겠지만 훗날 명장이 되는 그를 보면 보여 지는 겉 모습은 결국 사람들의 시선이 만들어낸 편견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한신이 얼마나 놀고 먹었나 짧막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놀고 먹자면 돈 많은 부모를 두던가 아니면 뻔뻔하게 기생충처럼 친구나 이웃에게 기식해야 하는데 신분이 보잘 것 없고 잘난 부모를 두지도 않은 한신은 늘 기식하는 처지 였는데 회음의 속현인 하향이란 곳에 정장이란 자의 집에 신세를 진 적이 있었는데 남의 밥 먹는 것도 한 두번, 한신이 몇개월간 그 집에서 지내자 정장의 아내가 한신이 슬슬 귀찮아져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속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 한신이 식사를 하러 와도 모른채 했으며 그런 일이 반복 되자 결국 한신도 그 속을 짐작하고 스스로 절교를 한 뒤 떠나 버렸습니다.또 한가지 일화는 한신이 회음성 밑에서 낚시를 하며 주린 배를 잡고 있을 때 무명 빨래를 하던 부인네들 중 그런 한신을 불쌍이 여겨 한신에게 밥을 주었는데 무명 빨래(아마도 품삯을 받고 하는 직업은 아닐까,오늘 날의 빨래방처럼)는 수십 일동안 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다 밥을 주자  한신은 기쁜 마음에 부인에게 말했습니다."부인, 내가 언젠간 이 신세를 백배,천배로 갚아 드리겠습니다"그러자 부인은 하찮은듯 성을 내며 그런 한신에게 핀잔을 주었는데"사나이 대장부가 제 손으로 제 잎에 풀칠도 못하는 것이 불쌍해 밥을 준 곳뿐, 무슨 보답을 바라겠소".한신은 신분이 미천하고 가난 하여 늘 이런 천대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으뜸은 역시 우리에게도 널리 회자 되는 가랑이 사이를 지나간 일화로 우리 나라의 백정이라하면 가장 하류 인생으로 취급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천년전 회음의 백정촌이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 만큼은 아니라해도 역시 낮은 신분임에는 분명할 것인데 그런 백정촌의 젊은 사내 몇몇이 늘 비루한 신세임에도 큰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란신 꼴이 보기 싫었는지 시비를 걸었는데." 야, 이 놈 한신아, 덩치는 산만한 놈이 칼을 옆에 찬다고 겁장이가 용감해 지는 건 아니다.네 놈이 정녕 사내라면 그 칼로 날 찔러 봐라.네 놈이 그 칼로 날 찌르면 사내 대장부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분명 네 친구들에게 죽을 것이고 그 칼로 날 찌릊 못하겠다면 내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며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한신은 잠시 노려 볼 뿐 군말 없이 가랑이 사이를 지나 갔고 그 후로 온 동네 사람들에게서 한신은 사타구니 무사 혹은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결과론적으로 한신은 훗날 그가 품은 야망을 위해 잠시의 수모와 모멸감을 참음으로써 더 큰 이름을 날릴 기회를 얻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신이 모욕감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칼부림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가진 것 하나 없고 빽 하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던 한신으로썬 그때의 그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말해 무엇할까,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보다 먼저 한신의 삼분지계가 있었다

 

한신은 진 제국이 중국 최초의 천하 통일의 대업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와해 되며 다시 천하가 어지러워지며 각처에서 영웅들이 할거 하자 자신이 모실 영웅을 찾았고 항량 밑으로 들어 갑니다.향량이 죽고 다시 항우의 밑으로 들어 갔지만 한신의 처지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한신은 요새 직책으로 치면 보디가드를 했지만 그에게는 성이 차지 않는 직책이었습니다.또 항우에게 여러번 책략을 제출했지만 늘 무시 당하기 일색이었는데 항우 역시 당대를 수놓던 영웅이었는데 초록은 동색이라 영웅은 영웅을 알아볼터인데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젊은 날의 항우라면 책사들의 충고도 듣고 그러했겠으나 많은 것을 이루고 중국 대륙이 곧 자신의 손아귀로 거머쥐리라 의심치 않던,유일한 라이벌 유방은 항우가 보기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기에 그런 항우에게 천미한 출신에 외모도 보잘 것 없는 한신이 그 어떤 기발한 책략을 내 놓았던들 항우의 마음에 찰까,여담으로 우리 나라의 불세출의 피겨 여왕 김연아의 안티는 우리 나라에 대부분 몰려 있다.분명히 김연아가 이룬 업적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피겨사에 전인미답의 경지이건만 우리 나라에만 독특하게 몰려 있는 김연아 안티는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원인 모를 경기를 일으키기도 합니다.왜? 그냥 싫어서라는 것이 가장 주 요인 아닐까?한신 역시 항우에게 이런 비슷한 낙인이 찍히진 않았을까 생각 합니다.결국 한신은 항우에게서 도망 하여 유방의 밑으로 들어 가고 유방은 그를 귀이 여겨 중용 합니다.자, 그렇다면 이대목에서 어째서 한신은 항우에게는 중용되지 않고 유방에게는 대장군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일까?초한지의 내용대로 유방에게 천자의 상이 있어서?필자는 그것을 정치력에서 봅니다. 항우는 매우 영리하고 용맹무쌍 했지만 장수의 그릇밖에는 되지 않았다 봅니다. 항우에게는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했는데 그에 반해 항우에 비해 무엇 하나 뛰어난 점 없었다고 전해 지는 유방은 기실 노련한 정치인이었다고 판단 됩니다. 유방이 쌓아온 정치적인 힘은 항우의 압도적인 군사적인 힘을 차츰 자신에게 리하게 이끄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유방이 정치적인 인간이란 이유는 패권을 다툴 당시에는 중용하고 감싸던 적군의 장수조차 한 제국을 세우고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제거하는데에 기인 합니다.암튼 그건 먼 훗날의 일이고 유방에게 중용 되어 연전 연승하며 수많은 대군을 이끌고 승승장구하던 한신에게는 훗날 비참한 말년의 죽음을 피할 기회가 두 번 찾아 옵니다.바로 항우의 밀사를 받들고 찾아온 우이 출신의 무섭과 제나라 출신의 책략가 괴통이 그들인데 일단 항우는 초에서 용저를 잃고 한신에 대해 겁을 먹은 상태에서 한신을 자신과 연합시킬 계책을 들고온 무섭을 한신에게 보냅니다.무섭은 한신과 항우,유방이 솔밭처럼 어지러이 얽키고 설켜 있어야 한신 역시 무사할 수 있을거라며 설득하는데 이에 한신은 단호하게 유방에게 받은 은혜를 말하며 거절 합니다.그 후 제 나라의 책사 괴통이 가만히 살펴 보니 천하 대권의 향방이 한신 한 사람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 차리고 한신을 감동 시키려 자신이 관상학을 잘본다 말하며 한신의 운명에 대해 장황한 사설을 늘어 놓는다."제가 관상학을 좀 배워 어줍잖게 볼 줄을 압니다" "그래, 선생께서는 과인의 관상을 어찌 판단 하시오?천하의 귀인이라도 자신의미래에 대해 궁금해 하기는 범부와 마찬가지, 옮다구나 괴통은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주위의 사람을 물리치게 하고 나서 한신의 관상을 말하기 시작 했습니다."관상을 봄에 고귀함과 비천함은 골상에 달렸고 근심이 생기느냐 기쁨이 생기느냐는 얼굴에 달렸으며 성공과 실패는 결단에 달렸습니다.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만에 하나 어긋나는 것이 하나 없습니다" " 장군의 관상을 보아 하니 봉후에 불과 하며 그것도 위태로워 안정된 상이 아닙니다.그러나 장군의 등을 보아 하니 고귀하기가 천하에 둘도 없는 상이옵니다.""흠,그게 무슨 말인가? 좀 더 소상히 말해보게"이에 괴통은 막힘 없이 천하의 형세가 한신이 중심에 있음을 자각하라고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한나라와 초나라를 이롭게 하고 두 임금을 존속시켜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것이 최상의 상책이라 생각 합니다. 대장군까지 세 세력이 솔밭처럼 웅거 하면 어느 편에서도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 이기 때문입니다" 한명도 아니고 두명씩이나 천하를 셋으로 나눌 것을 제안했지만 이때에도 한신은 한고조 유방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 하여 물리 쳤습니다.만약 이때 한신이 괴통의 책략을 받아 들였다면 천하를 통일하진 못하였다해도 한신이 말년에 비참하게 살해 당하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우리가 흔히 아는 삼국지나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내놓았다 생각한 천하삼분지계가 실은 훨씬 오래전에 괴통이 한신에게 내 놓은 책략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사마천의 사기는 정사이고 4백년 후의 삼국지연의는 소설인 점을 생각 하면 요즘말로 표절 의혹이 대두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괴통의 천하 삼분지계 역시 춘추전국시대의 합종연횡그 퀘를 같이 한다 볼 수 있습니다.(합종연횡은 소진이 주도한 것으로 BC 4세기말 진이 상앙의 부국강병책으로 최강국으로 등장 하자 열국(列國)의 존립이 위협받게 된다. 그리하여 동방에 있던 조(趙)·한(韓) 위(魏)·연(燕)·제(齊)·초(楚) 등 6국은 종적으로 연합하여 서방의 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를 합종이라 하며, 상황이 이리 되자 진은 6국의 대진동맹(對秦同盟)을 깨는 데 주력해 위나라 사람 장의(張儀)로 하여금 6국을 설득하여 진과 6국이 개별적으로 횡적인 평화조약을 맺도록 했다. 이것을 연횡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진은 6국 사이의 동맹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들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다. 장의·소진을 비롯하여 소대(蘇代)·진진(陳軫) 등 전국시대에 활약한 외교전술가들을 종횡가(從橫家)라고 불렀다.)한신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끝내 한 제국을 성립시키는데 일조 하였고 군권을 순순히 내놓았으나 곧이어 정치적으로 살해당하고 맙니다. 바로 괴통의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으며 유명한 고사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때 널리 퍼져 나가기도 합니다.

 

 모반죄로 참살당한 시대의 명장 한신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중국 통일이라는 중국 역사상 두번째 대업을 완성한 한신은 제왕에서 초왕으로 이룰 것은 모두 이룬듯 보였지만 곧 한 고조 유방은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는 작업을 진행시킵니다.그 여파는 한신에게도 미쳐 초왕에서 회음후로 격하되었지만 한신의 지배력은 여전 하였습니다.유방은 차마 한신을 죽일 수 없었지만 유방의 마음을 읽은 여후가 한신을 꾀어 포박한 뒤 장락궁의 종실(황태자의 궁전)에서 한신을 베어 죽여 버립니다.한신의 죄목은 역모였으며 말할 것도 없이 일가족은 모두 몰살 당하였습니다.이렇게하여 한 제국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많은 명장들이 사라져 갔습니다.사마천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한신이 겸양하지 못하여 화를 자초하였다 말하기도 하며 한신과 더불어 한고조 유방을 도와 제국을 이루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책략가 장량은 미리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떠나 후세 사가들은 장량을 더욱 위대하게 떠받들기도 하지만 한신이 진정으로 모반이라는 것을 꿈꾼 인간이었을까?아니면 자신에게 온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친, 장수로써는 위대했지만 정치적 식견은 모자란 인물이었을까?한신은 오랫동안 무명으로 지내다 유방을 만나 겨우 뜻을 펼칩니다.그래서 항우가 보낸 책사나 괴통의 천하삼분지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리를 지켰으나 한 고조 유방을 비롯한 외척 세력의 생각은 안정된 국가 위에 한신과 같은 군인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그야말로 토사구팽,충무공 이순신이 선조로부터 끊임 없는 배척과 픽박을 받으면서 류성룡이라는 정치적인 외줄로 겨우 살아 남았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약, 이순신이 임진왜란 이 후 살아 남았다면 어찌 되었을까?그 역시 한신과 같은 꼴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한신은 전쟁터에서는 째빠른 판단으로 연전 연승하는 명장이었지만 정치판이라는 전쟁터에서는 너무나 순진한 인물이었습니다.비록 정치라는 논리 앞에 비참하게 제거되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 했지만 끝까지 의리를 지킨 한신의 마음은 존중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비록 천하의 황제가 될 분명한 기회가 있었지만 은혜를 배신하지 않고 지킨 한신이 천하를 통일한 한 고조 유방보다 더 애착이 가며 중국사에 길이 남을 명장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써도 우러러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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