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을 통하여 수군에는 동(東)에는 충무공 이순신이요,
서(西)에는 영국의 넬슨만이 있을 뿐이니,
가히 영웅이라 칭송 받을 이는 이 둘만이 있을 뿐이다.”
한때 서양 학자들은 충무공 이순신이란 존재 자체를 몰랐기에 해전사나 해군의 역사를 논할 적에
영국의 넬슨 제독만이 유일하다 믿었다.
임잔왜란을 종결 시킨 이순신의 조국, 조선은 결국 삼백년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굴곡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니 멸망한 나라의 옛 장수가 인구에 회자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의 눈높이에는 불멸의 업적을 남긴 이순신 제독이 있었기에 영국의
넬슨 제독이 제 아무리 출중하다 하여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과 다름 없었으나
가만히, 그리고 찬찬히 넬슨 제독을 살펴 보자면 마치 이순신 제독이 환생이라도 한 듯
그의 삶을 닮았다는데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비록 우리에게는 불멸의 성웅, 이순신 제독이 계시지만 서양 해전사에 신화로 남아 있는
넬슨 제독의 위업과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의 유사점을 평행이론을 도입해서 진지하게,
또는 재미로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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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충무공이 서양에서 태어났다면
호레이쇼 넬슨 제독. (1758.9.29~1805.10.21)
이순신 제독이 만 53세의 나이로 노량 해전에서 전사할 적이 서기로 1598년,
그로 부터 약 160년후에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이란 이름의 아이가 태어난다.
12세에 해군에 입문한 넬슨은 1777년 부(함)장이 되어 동인도로 배치되었다가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약관의 나이인 만 21세에 1779년 6월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나포한 대포 28문의 프리깃함 힌친브로크(HMS Hinchinbroke)의 지휘권을 인수해
함장으로 취임한다.
이는 영국 해군사상 최연소 함장 기록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의 이순신 제독은 무얼하고 있었을까?
당시의 조선 사회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이순신의 초창기 과거 시험의 초점은 문과 였으나 생각을 바꿔 무과에 열성을 다하던
시기였으며 넬슨 제독이 초유의 기록으로 최연소 함장이 되던 이때 이순신 제독은
아산 방진군수의 딸과 혼인하여 일가를 이루던 때이다. 당시로선 늦은 결혼이었다.
위대한 영웅의 탄생,평범과 비범사이
1793년,
만 35세의 넬슨은 나폴레옹이 지배하는 프랑스와 전쟁이 터지자 지중해 함대로 전근되어
‘아가멤논’ (HMS Agamemnon)함의 함장을 맡아 코르시카 섬 해역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10여 년간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인다.
1794년 코르시카 섬의 칼비 지역에서 프랑스군이 쏜 포탄의 파편을 맞아 오른쪽 눈을
잃는 부상을 당하기도 한다.
비슷한 나이때의 이순신 제독은 서른 두살에 겨우 무과에 급제하여
그 해 12월에 뒤늦게 두만강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임명 된다.
이순신은 두만강을 넘어 야습해오던 야인 울지내를 유인술로 생포하는 공을 새우지만
공은 인정받지 못하고 다시 두만강 연변 만호로 발령 받아 녹둔도 둔전관까지 겸임하게 된다.
녹둔도는 오곡이 잘되는 농토라서 야적들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다.
이순신은 당시 함경도 병사 이일에게 군사 증원을 요청하는가 하면 야적들의 기습에
만반의 대비를 하였으나 야적들이 야간이 아닌 주간에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허를 찌릅으로써
식량과 포로 80여명을 납치해 간다.
이에 이순신은 야적을 추격하여 섬멸한 뒤 양민 80여명을 구출해낸다. 그러나 이 전투로 이순신은
왼발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당한다.
나폴레옹을 좌절시킨 넬슨
1797년,
만 39세의 넬슨은 함포 74문을 적재한 ‘캡틴’ (HMS Captain)함을 지휘해 함포 130문의
‘산티스마 트리니다드’ 함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트리니다드 함은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넬슨이 이때 거둔 승리가 세인트 빈센트 봉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기도 한다.
그는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해군소장 진급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넬슨은 같은 해 7월,
캐너리 섬 산타쿠르즈 시를 점령하려는 작전에서 부상을 입어 오른쪽 팔을
잘라내야 했다.
1년 후인 1798년 부상에서 회복되어 복귀한 넬슨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지원하는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넬슨에게 패배한 나폴레옹
프랑스 육군은 넬슨이 도착하기 전 이미 아부키 만 상륙을 완료한 후였지만,
8월 1일 벌어진 나일 해전(Battle of Aboukir Bay)에서 영국 전투함들은 13척의 프랑스
전투함 중 11척을 나포하거나 파괴하는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해군의 피해는 단 한 척도 없었으며 나폴레옹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나일 해전은 후일 벌어진 트라팔가 해전만큼 해전사나 넬슨 제독에겐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해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해 12월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침공하자 넬슨은 함대를 지휘해 나폴리 왕가를 구출하고
이 과정에서 그는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의 젊은 아내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과
사랑에 빠진다.
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넬슨과 엠마
넬슨은 이미 기혼자였지만, 엠마는 곧 넬슨의 정부가 되었으며 영국에 돌아와서는
둘 사이에 딸 ‘허레이시아’ (Horatia)가 태어난다.
(넬슨 제독과 엠마 해밀턴의 사랑 이야기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스토리이기도 한데 도덕적으로나 인품으로 완벽하리만치 깨끗했던 이순신 제독에
비하면 넬슨은 좀 더 자유로웠다고나 할까, 물론 유교 사상에 길들여진 이순신과 넬슨을
비교하기는 못하지만 암튼 언제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도 풀어보도록 하자)
그 후 ‘아미앵 협정’ (Peace of Amiens) 으로 프랑스와의 휴전이 성립되자 잠시 해군을
떠났던 넬슨은 다시 전쟁이 격화되자 1803년 ‘빅토리’함 (HMS Victory)의 지휘를 맡아
프랑스 ‘툴롱’항 (Toulon) 봉쇄 작전에 참전 한다.
그 후 2년 간 넬슨은 거의 바다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프랑스 해군은 1805년 악천후 속에서 영국의 해상봉쇄를 겨우 벗어났다.
넬슨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인도 제도로 향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건강마저 악화되었던 넬슨은 영국 머튼(Merton)으로 퇴역하지만 2개월도 안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해군이 스페인 함대와 합류한 데 이어 자신들의 육군과도 합세,
영국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는 33대 27척으로 함정 수에서 영국 함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은 세밀한 작전계획을 짜 이를 각 함장에게 하달하고
자신은 기함 빅토리 함상에서
“조국은 제군들에게 각자 맡은 바 의무를 다할 것을 원하고 있다”
는 메시지를 보내며 부하들을 독려한다.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 포격전을 벌이는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
1805년 10월21일,
만 47세의 넬슨은 프랑스, 스페인 연합합대와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에서 만나
치열한 해전에 돌입한다. 이 해전은 정확히 넬슨의 작전계획대로 진행되어,
영국 함대는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함선 사이를 뚫고 들어가 19척의 적함을 격침
또는 나포하는 승리를 거둔다. 이때 영국 함대의 피해는 단 한 척뿐이었다.
트라팔가르 해전 후 영국은 이후 100년간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고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은
트라팔가르 바다 밑에 수장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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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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