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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열전名將列傳

평행이론으로 본 영국의 자긍심 넬슨 제독과 충무공 이순신의 삶

by 마음heart 201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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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을 통하여 수군에는 동(東)에는 충무공 이순신이요, 

 

서(西)에는 영국의 넬슨만이 있을 뿐이니,

 

가히 영웅이라 칭송 받을 이는 이 둘만이 있을 뿐이다.”

 


 

한때 서양 학자들은 충무공 이순신이란 존재 자체를 몰랐기에 해전사나 해군의 역사를 논할 적에

 

영국의 넬슨 제독만이 유일하다 믿었다.

 

임잔왜란을 종결 시킨 이순신의 조국, 조선은 결국 삼백년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굴곡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니 멸망한 나라의 옛 장수가 인구에 회자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의 눈높이에는 불멸의 업적을 남긴 이순신 제독이 있었기에 영국의

 

넬슨 제독이 제 아무리 출중하다 하여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과 다름 없었으나

 

가만히, 그리고 찬찬히 넬슨 제독을 살펴 보자면 마치 이순신 제독이 환생이라도 한 듯

 

그의 삶을 닮았다는데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비록 우리에게는 불멸의 성웅, 이순신 제독이 계시지만 서양 해전사에 신화로 남아 있는

 

넬슨 제독의 위업과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의 유사점을 평행이론을 도입해서 진지하게,

 

또는 재미로 풀어보고자 한다.

 

 

 

 

만일,충무공이 서양에서 태어났다면


 


 

호레이쇼 넬슨 제독. (1758.9.29~1805.10.21)

 

 

 

 

 

이순신 제독이 만 53세의 나이로 노량 해전에서 전사할 적이 서기로 1598년,

 

그로 부터 약 160년후에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이란 이름의 아이가 태어난다.

 

12세에 해군에 입문한 넬슨은 1777년 부(함)장이 되어 동인도로 배치되었다가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약관의 나이인 만 21세에 1779년 6월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나포한 대포 28문의 프리깃함 힌친브로크(HMS Hinchinbroke)의 지휘권을 인수해

 

함장으로 취임한다.

 

이는 영국 해군사상 최연소 함장 기록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의 이순신독은 무얼하고 있었을까?

 

당시의 조선 사회가 문을 숭상하고 무武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이순신의 초창기 과거 시험의 초점은 문과 였으나 생각을 바꿔 무과에 열성을 다하던

 

시기였으며 넬슨 제독이 초유의 기록으로 최연소 함장이 되던 이때 이순신 제독은

 

아산 방진군수의 딸과 혼인하여 일가를 이루던 때이다. 당시로선 늦은 결혼이었다.

 

 

 

 

 

 

 

위대한 영웅의 탄생,평범과 비범사이

 

 

 

 

1793년,

 

만 35세의 넬슨 나폴레옹이 지배하는 프랑스와 전쟁이 터지자 지중해 함대로 전근되어

 

아가멤논’ (HMS Agamemnon)함의 함장을 맡아 코르시카 섬 해역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10여 년간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인다.

 

1794년 코르시카 섬의 칼비 지역에서 프랑스군이 쏜 포탄의 파편을 맞아 오른쪽 눈을

 

잃는 부상을 당하기도 한다.

 

 

 

비슷한 나이때의 이순신 제독은 서른 두살에 겨우 무과에 급제하여

 

그 해 12월에 뒤늦게 두만강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임명 된다.

 

이순신은 두만강을 넘어 야습해오던 야인 울지내를 유인술로 생포하는 공을 새우지만

 

공은 인정받지 못하고 다시 두만강 연변 만호로 발령 받아 녹둔도 둔전관까지 겸임하게 된다.

 

녹둔도는 오곡이 잘되는 농토라서 야적들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다.

 

이순신은 당시 함경도 병사 이일에게 군사 증원을 요청하는가 하면 야적들의 기습에

 

만반의 대비를 하였으나 야적들이 야간이 아닌 주간에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허를 찌릅으로써

 

식량과 포로 80여명을 납치해 간다.

 

이에 이순신은 야적을 추격하여 섬멸한 뒤 양민 80여명을 구출해낸다. 그러나 이 전투로 이순신은

 

왼발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당한다.

 

 

 

 

 나폴레옹을 좌절시킨 넬슨


 

 

 

 

 

1797년,

 

만 39세의 넬슨은 함포 74문을 적재한 ‘캡틴’ (HMS Captain)함을 지휘해 함포 130문의

 

산티스마 트리니다드’ 함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트리니다드 함은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넬슨이 이때 거둔 승리가 세인트 빈센트 봉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기도 한다.

 

그는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해군소장 진급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넬슨은 같은 해 7월,

 

캐너리 섬 산타쿠르즈 시를 점령하려는 작전에서 부상을 입어 오른쪽 팔을

 

잘라내야 했다.

 

1년 후인 1798년 부상에서 회복되어 복귀한 넬슨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지원하는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넬슨에게 패배한 나폴레옹

 

 

 

 

 

프랑스 육군은 넬슨이 도착하기 전 이미 아부키 만 상륙을 완료한 후였지만,

 

8월 1일 벌어진 나일 해전(Battle of Aboukir Bay)에서 영국 전투함들은 13척의 프랑스

 

전투함 중 11척을 나포하거나 파괴하는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해군의 피해는 단 한 척도 없었으며 나폴레옹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나일 해전은 후일 벌어진 트라팔가 해전만큼 해전사나 넬슨 제독에겐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해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해 12월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침공하자 넬슨은 함대를 지휘해 나폴리 왕가를 구출하고

 

이 과정에서 그는 나폴리 주재 영국대사의 젊은 아내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

 

사랑에 빠진다.

 

 

 

 

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넬슨과 엠마

 

 

 

 

넬슨은 이미 기혼자였지만, 엠마는 곧 넬슨의 정부가 되었으며 영국에 돌아와서는

 

둘 사이에 딸 ‘허레이시아’ (Horatia)가 태어난다.

 

 

(넬슨 제독과 엠마 해밀턴의 사랑 이야기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스토리이기도 한데 도덕적으로나 인품으로 완벽하리만치 깨끗했던 이순신 제독에

 

비하면 넬슨은 좀 더 자유로웠다고나 할까, 물론 유교 사상에 길들여진 이순신과 넬슨을

 

비교하기는 못하지만 암튼 언제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도 풀어보도록 하자)

 

 

 

그 후 ‘아미앵 협정’ (Peace of Amiens) 으로 프랑스와의 휴전이 성립되자 잠시 해군을

 

떠났던 넬슨은 다시 전쟁이 격화되자 1803년 ‘빅토리’함 (HMS Victory)의 지휘를 맡아

 

프랑스 ‘툴롱’항 (Toulon) 봉쇄 작전에 참전 한다.

 

그 후 2년 간 넬슨은 거의 바다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프랑스 해군은 1805년 악천후 속에서 영국의 해상봉쇄를 겨우 벗어났다.

 

넬슨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인도 제도로 향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건강마저 악화되었던 넬슨은 영국 머튼(Merton)으로 퇴역하지만 2개월도 안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해군이 스페인 함대와 합류한 데 이어 자신들의 육군과도 합세,

 

영국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는 33대 27척으로 함정 수에서 영국 함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은 세밀한 작전계획을 짜 이를 각 함장에게 하달하고

 

자신은 기함 빅토리 함상에서

 

 

“조국은 제군들에게 각자 맡은 바 의무를 다할 것을 원하고 있다”

 

 

메시지를 보내며 부하들을 독려한다.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 포격전을 벌이는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

 

 

 

 

 

1805년 10월21일,

 

만 47세의 넬슨은 프랑스, 스페인 연합합대와 스페인 트라팔가르 곶에서 만나

 

치열한 해전에 돌입한다. 이 해전은 정확히 넬슨의 작전계획대로 진행되어,

 

영국 함대는 열세 번째와 열네 번째 함선 사이를 뚫고 들어가 19척의 적함을 격침

 

또는 나포하는 승리를 거둔다. 이때 영국 함대의 피해는 단 한 척뿐이었다.

 

트라팔가르 해전 후 영국은 이후 100년간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고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트라팔가르 바다 밑에 수장되고 말았다.

 

 

 

 


 일본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이순신



 


 


 

넬슨 제독이 그 모든 업적을 이룬 시기는 47세 무렵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영웅 이순신은 47세에 이르러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었다.

 

다음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나 일본의 침공을 예측한 이순신 제독은 착실하게

 

전쟁을 대비하였다.

 

당시 조선은 개국 이래 전쟁에서 무풍지대였고 무武보단 문文이 숭상시 하던 때였기에

 

일본과의 전쟁 초기에는 추풍낙엽처럼 번번이 전투에 패하기 일쑤였다.

 

백번을 싸워 백번을 패하는 무기력함속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을 떠났으니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채 한달도 안되어 생긴 일이였다.

 

1592년 4월13일

 

일본군이 부산포를 침략한지 딱 24일여만에 이순신 제독의 함대는 첫 출격을 한다.

 

이순신 제독은 옥포해전에서 일본군 함대 26척을 바다에 수장시키며 조선에 첫 승전보를

 

안겨 준다.같은 달 5월 29일에 만난 일본 수군 함대 30여척을 역시 바다의 물귀신으로 만들며

 

승리하는데 사천해전은 세게최초의 철갑 돌격선 거북선이 이때 처음 출격했으며 

 

승자총통과도 같은 일본군에게는 없던 우수한 화력이 승리의 주요인이었다.

 

1592년 7월,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인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다.

 

이때 이순신 제독은 육전에서 주로 씌이던  포위 섬멸 전술인 학인진을 펼치는데 이때

 

일본군 전함 59척이 바닷속에 수장된다.

 

이때을 전환점으로 육지에서도 의병장들의 활약으로 승전보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순신 제독은 부산 해전웅포 해전을 통해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조선군과 합세한 명나라군과 함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순신 제독은 이에 대한 공으로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지만 곧 일본군의 이간책과

 

이순신을 견제하는 정치 세력에 의해 모든 직함을 내려 놓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 제독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 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궤멸 되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복직시킨다.

 

이순신 제독은 결국 명량 해전에서 남은 13척의 조선 함대를 이끌고 333척의 일본 수군을

 

해협으로 유인하여 좌초시키거나 침몰시키며 다시 전세를 역전 시킨다.

 

 

 

 

 

 

 평행이론으로도 설명안되는 레전드의 최후


 

 

 

넬슨 제독과 이순신 제독,

 

너무나 비슷하게 해군으로써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고 전술,전략 역시 당대에 비교할 대상이

 

없던 두 인물의 최후는 소름끼치도록 닮은 꼴이다.

 

넬슨 제독이 직접 지휘한 빅토리함은 프랑스의 기함 ‘부상테르’ (Bucentaure)함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지만, 넬슨 역시 프랑스군의 저격수가 쏜 총탄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이순신 제독이 노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생을 다하며 전쟁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듯이,

 

넬슨은 최후의 순간에

 

 

“나는 이제 만족한다. 조국을 위해 내 임무를 완수하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한다”

 

 

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47세.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명장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유명한 이순신 제독의 죽음, 

 

자신의 죽음 앞에서 " 한창 싸움 중이다.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숨을 거두었다.

 

다만 둘의 최후의 순간의 유언이 다른 점은 역시 조국의 영광에 이바지 하여 만족감을 표시하는

 

넬슨에 비해 끝까지 조국의 안위를 염려 했던 이순신의 처한 상황은 늘 숙연해진다

 

너무나 비슷하여 깜짝 놀라고만 동서양의 가장 위대한 명장들,

 

해군으로써 이보다 더 위대한 장군들은 다신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두 영웅은 똑같이 바다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원래 오늘은 넬슨 제독의 위대함을 그리려 했으나 도저히 넬슨을 이야기 하며

 

우리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빼먹을 순 없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나라와 인종을 떠나

 

두 영웅이 위대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너무나 비슷한 느낌의 삶을 살다갔기에 

 

평행이론에 억지로  두 인물을 비교해보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걸출한 동서양의 명장의 죽음 이후의 양국의 역사이다.

 

넬슨과 이순신의 사후로 영국과 조선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이후의 영국은 해양패권을 장악, 대서양에서 인도양까지 이르는 주요 거점을 확보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위대한 대영제국의 전성기가 찬란히 서막을 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이순신이 구축해논 막강한 해군력은 다시 임진년 이전으로 회귀하고

 

삼전도의 굴욕과도 같은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은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한다.

 

넬슨과 이순신은 전략적 측면에서도 당대를 뛰어넘는 천재들이었다.

 

화력을 효율적으로 집중하고 기동성을 극대화하는 전술로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넬슨은 트라팔가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졌고

 

넬슨의 해군 전략·전술은 이후 미국의 해군제독 ‘앨프리드 마한’에게 전해져

 

해상전투에서 새로운 이론개발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순신 제독의 전략 역시 풍전등화의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내며 시대를 앞서는 해상전투을

 

제시하며 이후 모든 동양 해전의 교범이 되었다.

 

 

 

단채 신채호 선생이 쓰신 이순신전에도 넬슨 제독과 이순신 제독을 비교한 글이 있다.

 

선생께서는 글에서 모든 면이 넬슨 제독과 이순신 제독이 비슷하여 놀라면서도 다른 점도

 

명확하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영국과 조선의 국력의 힘이었다.

 

영국은 넬슨의 사후에도 그 빈자리를 느낄 새도 없이 국력을 신장하여 패권을 차지하였지만

 

이순신의 조선은 막대한 전쟁 후유증으로 재건하는데 오랜 시일이 걸린다.

 

즉, 재능은 비슷할지라도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넬슨과 오로지 자급자족하여 수군을 이끌었던

 

이순신과는 비교 대상이 되기엔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암튼 넬슨 제독 역시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위대한 명장임은 분명 하다.

 

다만, 조선의 이순신 제독만 없었다면 넬슨은 세계사에 비교불가한 해군의 레전드로 기록되기에

 

충분하겠으나 넬슨 이전에 이미 조선은 이순신이 존재했으니 말해 무엇할까,

 

살펴볼수록 이순신 제독은 당대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굴복시키더니 죽어서는 넬슨을 좌절시키는

 

참으로 위대한 해군 제독이었음을 새삼 느낀다.미안,넬슨..당신도 위대한 제독임은 분명해~

 

언제 기회되면..

 

수많은 명장들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이순신 제독이 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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