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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속인 기독교 역사상 세기의 사기극들 ②_ 러시아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불자설에 대한 진실(이사전)

by 마음heart 2024.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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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불자설에 대한 진실(이사전)

세상을 속인 기독교 역사상 세기의 사기극들 ②



예수 그리스도의 10대부터 30대까지의 알려지지 않은 삶에 대한 여러 설들 중 러시아의 저널리스트이자 모험가인 니콜라스 노토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이란 책을 1894년에 썼습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삶에 관한 것으로 저자는 예수가 인도로 여행을 가서 힌두교도와 불교도들과 함께 공부했다고 주장했는데 노토비치의 글은 인도의 헤미스 수도원에서 우연히 발견한 티베트어 원고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대 학자들은 예수의 인도 여행에 대한 노토비치의 설명이 거짓 혹은 유사역사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불자설의 진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도에서 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제자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하다 죽었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예수 인도 불자설의 핵심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설을 부정하며, 이미 고증으로 논파된 유사역사학이기도 합니다.한국에서도 서구 정신문명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기독교의 원류가 사실은 아시아의 불교에 기인한다는 이야기는 서구에 주눅든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는데 예수의 12세~30대 까지의 행적은 성경에도 이 시기의 행적은 완전히 누락되어있는데 성경에도 누락된 내용이 정작 성경 밖에서 주장이 나왔으니 주목 받게 된 것도 있습니다.이러한 예수 인도 불자설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는 대표적으로 맨 프롬 어스(Man From Earth)가 있는데 꽤나 그럴 듯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사실 불자라면서요?"라고 낚인 사람들이 많기도 합니다.이와 별개로 그리스의 미술이 고대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는데,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기원전 1세기까지 불교계에서는 불상이 아닌 다른 상징(보리수ㆍ법륜 등)을 사용했는데, 현 파키스탄에 있는 간다라(Gandhara) 지방에서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불상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예수의 인도불자설을 맹신하는 자들이 이 설을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예수와 석가모니가 살던 시대,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과 기원후가 갈리는데, 석가모니는 대략 기원전 500년 전쯤 인물이기 때문에 갖다붙이기 좋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석가모니와 동시대나 또는 이전 시대 사람이었다면 이런 설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이 설이 나오게된 근거 중엔 이미 기원전에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동서양이 교류하였고, 심지어 알렉산더가 인도에 원정갔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외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현재의 인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나올 정도라,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인도가 그리스식 공부를 한 지식인이라면 미지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이 근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게다가 당시에 인도뿐만 아니라 인도보다 더 멀리 있는 중국의 존재도 이미 서양에 알려진 상황이었고, 인도랑 이스라엘 두 국가 모두 아시아권이며, 인도와 이스라엘의 거리는 나름 가까운데다,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에겐 잘 알려진 나라였는데, 페르시아의 인접국이 인도이기에 당시쯤이면 이미 이스라엘에서 인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충분히 알았을것이라는 것입니다.실제로 에스델기나 마카베오기 1서에서 인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며 또한 예수의 12 사도들중 한명인 사도 토마스가 인도에 가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는 전승도 존재하고, 그 주변국들인 중국과 인도네시아까지 다녀왔다는 설도 있을 정도인데다, 심지어는 당시 한반도 국가였던 신라에도 다녀갔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라 이미 예수가 토마스 이전에 인도를 다녀온게 아니겠냐는 주장도 나오며 역으로 예수가 카슈미르에 와서 소승불교를 상대로 설교를 하여 대승불교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또한 이 설로 인한 나비효과 때문인지 초기 성경에는 환생에 대한 구절이 있었으나 로마 제국 시대에 해당 구절이 삭제되었고, 이후부턴 환생 관련 구절이 누락된 성경이 이어져 왔다는 허위사실이 퍼지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저서 La vie inconnue de Jesus Christ 속 예수 불자설의 진위 여부

니콜라스 노토비치

러시아의 종군기자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1894년에 "La vie inconnue de Jesus Christ"(이하 이사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예수 불자설을 주장한 근거는 자신이 인도의 헤미스 사원(티벳 불교 사원이다)에 갔을 때 그곳의 라마가 자신에게 '이사(Issa)의 삶'이라는 티벳어로 된 기록물을 보여주었는데 그 Issa(Issa는 예수의 아랍식 명칭이다)가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것을 번역하여 자신의 책에 실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으로는 '이사(Issa)의 삶'에는 이사가 이집트에 있을 때의 이야기와 모세에 대한 이야기, 로마에 의한 정복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이사가 13세 때 상인들을 따라 인도로 가 불교도들과 생활하며 그들에게서 수년간 팔리어와 불교를 공부하고 다시 수년간 인도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공부와 가르침을 행하다가 29세에 고국으로 돌아가 설교를 시작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가르침을 행하다 3년 뒤인 33세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는 것입니다.누구는 이사전을 교황청에서 보관한다고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사전은 교황청이 아니라 티베트에서 봤다고 하며 나온 이름으로 누군가가 대충 가톨릭 음모론과 연결지어 교황청에서 비밀리에 보관하여 숨긴다고 썰을 푼 것으로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문제는 티베트 문자가 등장한 시기는 서기 7세기라는 것, 현재 남아있는 티베트 문자로 적힌 가장 오래된 문서가 서기 9세기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즉 티베트어로 쓰인 이사전이란 책이 있다면, 아무리 빨라도 7세기 이전이 될 수가 없으며 이사전의 원본문서라는 것을 본 사람도 노도비치 혼자뿐이라는 것입니다. 7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문서는 물론 그 이후에 전해진 어떤 문서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노토비치는 죽을 때까지 티베트어 원본 이사전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티베트 불교가 지금처럼 전세계로 확장되지 않고 미지로 남았던 시절, 티베트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과 무지를 악용해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뉴에이지 불쏘시개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게다가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베트에 불교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는데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7세기 송첸감포왕 때의 일로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와 500년 이상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도 불교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수십년 전이라면 몰라도 500년 이상 전에 불교가 있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가정이며 설령 만에 하나 예수 당시에 티베트에 불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지역에 한정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세력도 크지 않았을 텐데, 멀리서 온 낯선 이방인인 예수를 가르칠 만한 역량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노토비치가 이런 주장할 할 당시 저명한 동양학자이자 옥스퍼드 대학의 불교철학 교수였던 (독일계 영국인) 막스 뮐러(Max Mueller)(독일인의 사랑의 저자)는 이 책을 위서라고 단정했습니다. 또한 다른 학자들도 노토비치가 방문에서 찾았다는 그 사원을 방문하여 주지스님과 면담해보니 그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자들 대부분은 노토비치의 책을 위서라고 단정했으며 이사전은 그 내용의 가부 이전에, 노토비치가 보았다고 주장한 그 '고문서'가 정말로 실존하긴 하는지부터 매우 의심스럽고 현재도 이 이사전은 노토비치가 조작한 책이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야소전(爺蘇傳)이라는 책도 있어 이것이 예수 불자설을 밝혀냈다는 루머가 있는데, 애초에 이 책은 1935년 중화민국의 신학자 조자신(趙紫辰)이 지은 예수에 대한 고찰로, 예수를 공자나 주자 등 여러 유학자들에 빗댄 신학서적입니다.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이사전에 대한 반론

사실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이사전 설은 비판의 여지가 너무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성격은 '학자'나 '구도자'가 아니라 사회비판적인 목청을 높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로 이건 단순히 인상비평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으로 참고로 그 예언자로서의 활동이 (당연하게도) 유대교 예언자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도 학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논리와 사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오로의 스타일이지 예수의 스타일이 아니며 그런 예수를 학자/구도자와 같은 개념으로 잡음 자체가 초점이 어긋난다는 것입니다.게다가 시골 깡촌인 나자렛(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처음 만난 필립보가 "모세와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분을 만났다"고 호들갑을 떨자 그 말을 들은 그의 친구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뚱하게 반문한다)에서 목수, 정확히는 건축 관련 잡다한 일을 두루 하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해외를 두루 다니며 갖가지 사상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것도 이상한데 그 시절에 여행이란 극히 위험하여, 돈이며 그 밖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며 그렇다고 예수의 양아버지 나자렛의 요셉이 돈이 많거나 권력 좀 있는 제사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기에 시골의 목수 아들이 페르시아 건너 인도까지 유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라는 것입니다.또한 요셉은 전승에 의하면 예수가 어렸을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또한 동네 사람들이 "우리가 밥그릇 숫자까지 아는 요셉 아저씨, 마리아 아줌마네 아들이잖아?"라는 식으로 대했다는 점도, 예수가 나자렛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살았음을 짐작하게 하며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계의 이론을 너무 무시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또 다른 문제점은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베트에 불교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또한 구약시대 때 호전적이었던 하느님이 신약시대에 와서 '사랑과 구원의 신'이 된 성격변화도 생각할 가치가 있는데 구약성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쓰였는데, 구약 중 후기에 씐 문서에서는 이미 유대인들의 민족신/국가신의 성격이 많이 흐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성경 자체도 반박의 증거로 충분한데 신약은 종교적인 내용은 있을지언정 예수 사후 비교적 빠른 시기에 문서가 집필되었지만 이러한 신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의 경력으로 외국 유학은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예수가 당시 로마의 주적인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다녀왔다면, 안 그래도 예수를 죽이려고 이를 갈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먹이감이었을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반박하기도 쉬워질 뿐더러, 정치적으로 누명 씌우기도 좋지만 예수의 처형을 주장할 때도 "이놈이 민중을 선동합니다." 정도만 언급될 뿐으로 '선동'이라고 누명을 씌웠으면서, 그 사람이 이교도 국가에 갔다온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마태 26:59-61, 마르14:55-59 등을 보면, 예수를 잡아온 후 대사제 가야바와 온 의회가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할 만한 증언을 눈에 불을 켜고 찾지만 결국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발언을 했다.' 정도 증언만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요한복음 10:19절에서 42절까지를 보면 예수가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위해 돌을 집어던지고 예수가 그 자리를 피하는 장면이 나오며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일화나 스테파노의 최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율법을 근거로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은 로마에서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병궁복음서

리바이 다울링(Levi H.Dowling 1844-1911)이라는 미국인 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아카샤)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The Aquarian Gospel of Jesus the Christ≫를 집필하여 1908년에 출판했는데 이 책이 1970년대 한국에 보병궁복음서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성약성경이라는 이름으로도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그 이름이 묻힌지 오래. 통일교 교리서 중에도 이름이 같은 책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책과는 무관하다.

이 책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삼위일체 교리는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위해 아타나시오의 주장을 지지하게 되면서 생겨난 거짓.

-예수가 12세 때, 남부 인도 오릿사 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차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예수의 부모를 찾아가 그에게 동양의 지혜를 배우도록 인도 유학을 청원한다. 그리하여 예수는 남부 인도 오릿사 지방의 쟈간나스의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하면서 베다 성전과 마니 법전을 배우고 승려 라마스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예수는 인도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당시 인도 최고의 의원이었던 우도라카의 제자로 입문한다. 그러다 절대 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신분제도(카스트)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정죄하려는 승려들을 피해 네팔로 피신을 가게 된다. 그 뒤 티베트의 사원에서 성현 멘구스테를 만나 고전을 공부하고, ‘광명의 부처’ ‘살아있는 신탁(神託)’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4세 되던 해에 고향에 들렀다가 다시 그리스를 거쳐 이집트에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 입회를 허락받고 성실, 공정, 박애, 신앙, 의열, 성애의 6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써 극복하고, 이집트 밀교의 비밀과 생사의 문제, 그리고 태양계 밖의 세계의 비밀을 배우고 보랏빛의 방에서 마지막 7번째의 시험을 마치고 마침내, 그리스도(하느님의 사랑)라는 최고의 법명(法名)을 받는다. 그렇게 오랜 수도생활을 한 뒤 티베트를 마지막으로 29세에 귀국하였다.

-미륵 ← 마이트레야 → 아후라 마즈다 → 메시아 → 미트라. 여기에서 나오는 신들은 전부 동일신이며, 이것은 전부 다 마이트레야. 즉, 미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으로 배화교,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전부 불교의 미륵사상에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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