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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헌신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브리제_12대 338년 만석꾼 경주 최부자댁 의병장 최진립부터 독립운동가 최준까지~

by 마음heart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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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338년 만석꾼 경주 최부자댁 의병장 최진립부터 독립운동가 최준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브리제


21세기 현대의 대한민국은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사력 역시 세계6위권에 자리하고 있지만 불과 120여년전에는 일제 제국주의에 국권을 상실한채 독립 운동을 펼쳤고 1945년 8월 해방이후론 가득이나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여 빈집 살림이 된 상태에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세계 최빈민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모두가 무너진 세상에서 가난했기 때문에 세계의 갑부들이 펼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언감생신,입에 풀칠하며 오로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할아버지,아버지들은 일,일,일만을 하며 세상 그 어떤 나라보다 부지런하게 살아왔습니다.이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면서 세계의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나 LG,현대는 선진국이라 불리던 세계의 기업들이 펼치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함께 펼치고 있는데 사실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1970년대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던 가문이 있었습니다.드라마 명가로도 제작되었던 경주 만석꾼 최부자집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1600년대 초반부터 1900대 중반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집은 그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경주 최부자집이 만석꾼 집안으로 부를 쌓기 시작한 것은 최진립(1568-1636)대에부터 시작합니다.그로부터 시작한 최부자집의 부는 무려 12대 338년간을 이어지지만 단순히 만석꾼 부자집을 넘어 부자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지를 보여주는 너무나 훌륭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주 최부자집 육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권력에 탐욕을 갖지 말고 휘둘리지 말란 의미를 갖고 있다.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재산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은 흉년 탓에 고생인데, 남의 불행 도중 행복을 누리지 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다른사람이 행복을잠시 느낄수있게 해주라는 의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남을 도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절약과 검소를 몸에 배게 하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의병장 최진립(1568-1636)


경주 최부자집은 최진립(1568-1636)으로부터 최준(崔埈: 1884~1970)에 이르는 약 338년 동안에 부의 진정한 가치를 펼친 가문입니다.과객에게는 후했으나 집안 내부 살림은 매우 소박하고 검소했다고 합니다.경주 최부자집의 시초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최진립에서부터입니다.보통 부자였던 최진립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할 사람도 많이 죽고 땅 역시 쓸모없이 버려져 있을 때,땅을 나오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합니다.최진립은 가진 돈으로 땅을 사들일 뿐 아니라 일꾼을 사서 수로를 개척했는데 이앙법 모내기로 적은 일손으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어 전란으로 죽어가던 마을이 점차 활기를 되찾고 살아나게 만듭니다.또한 일꾼들에게 토지를 떼어주어 성과가 큰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도 하고, 공동경작지를 두어 일꾼들이 공동행사나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도 마름을 없애고 소작인과 직접 계약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합니다.이때부터 최진립은 경주에서 최고가는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하지만 조선이 다시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에 휩싸이자 칠십 노구를 이끌고 의병장으로 출정하여 남한산성 외곽에서 전투를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하고 맙니다.최진립은 무관으로서 최고의 칭호를 받으며 경주 용산서원에 위패가 모셔졌습니다.최진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도 공을 세웠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위도총부도사, 공조 참판, 삼도 수군통제사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아들 최동량을 교육시켜 최동량이 최부자집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최진립(1568-1636)

△1568년 경주 출생 △1592년 임진왜란 때 아우 계종과 의병 일으킴 △1594년 무과 급제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 △1614년 함경도 경원도호부사 △1630 가선대부 공조참판 △1637년 자헌대부 병조판서 추증 △1651년 시호 정무(貞武: 청백하여 절개를 지킴을 貞이라 이르고, 적을 억누르고 모욕을 막음을 武라 이름), 청백리에 오름 △ 1700년 용산서원 배향  (엔사이버 백과 참고)

차인표,한고은 주연 드라마 명가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집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2대 최동량과 3대 최국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은 아버지에게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재벌 2세들처럼 방탕한 생활대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실천,땅을 구입했는데 산부터 강까지 이르는 큰 땅을 산 후,여기 전체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최동량의 아들 최국선은 둑을 세우고 옆에서 도와주기도 합니다.최동량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땅을 쓰고 싶어하면 소작료를 수확한 곡식의 반만 받고 아버지처럼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두지 않았는데 사실 마름은 중간에서 소작료가 일꾼과 땅주인에게 잘 교류되는 지 검사관 역할을 맡았지만 그에 따른 페단으로 중간에서 소작료를 빼돌렸고 도리어 마름이 더한 권력을 가지고 소작인들에게 군림하기도 했습니다.마름 등을 없애고 일꾼을 모아 큰 땅을 모두 일구면서농사는 성공적으로 끝냈으며 거름을 쓰는 시비법과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수확량을 크게 늘렸습니다.최동량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들 최국선이 최부자집의 3대째 자리에 오릅니다.최국선은 할아버지 최진립과 아버지 최동량이 쌓은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합니다.최국선은 어느날 승려에게서 "재물은 거름과 같습니다. 재물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습니다."라는 말에 크게 깨닫고 나눔을 실천했다고 합니다.최국선에 이르러서 최부자집은 조선 최고의 부자로 등극하기에 이릅니다.최국선은 1671년 조선 현종 때에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쌀을 빌려간 것을 못 갚게 되자 안타까워하며,아들 최의기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불살랐다고 합니다.최국선은 또한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주었으며, 보리가 여물지 않은 3월과 4월의 보릿고개엔 100석의 쌀을 이웃에게 나눠주었으며 최국선 대부터는 소작 수입의 1/3을 빈민구제로 쓰는 풍습이 생기면서 200년 후인 최준 대에까지 이 풍습은 이어진다고 합니다.최국선에 이르러서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부자의 탐욕을 줄여갔던 경주 최부자집은 당대 뿐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존경을 받아왔습니다.하지만 도도하게 명성을 이어오던 경주 최부자집에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19세기, 조정의 부패와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덩달아 무너져 갔습니다.11대 경주 최부자 최현식때에 이르러서는은 활빈당에 의해 최부자집이 무너질 위기에까지 처했습니다.그러나 최부잣집의 도움을 받았던 농민과 거지들이 뭉쳐 스스로 활빈당을 물리쳐 주면서 위기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활빈당이란,1900년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으로 1900년 2월경 충청남도 내포 지방의 신창·예산·대흥·청양·정산·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합니다.

▩독립운동가 최준 그리고 박근혜,최순실과의 악연

12대 최부자 최준은 조선이 일본에 한일병합조약이 되는 경술국치 이후 대한광복회에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세워 안희제와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 및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그 증거 문서들이 2018년 고택 광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해방 후엔 전재산을 모두 털어 대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을 세웠습니다.최준의 이러한 독립운동 지원 과정과 일제의 신탁관리 명목의 수탈로 무려 300년간 이어지던 경주 최부자집의 명성은 최준의 대에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최준은 마지막 최부자로 불리우게 됩니다.최준은 나라가 일제에게 넘어갔을때 이회영과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을 몸소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기도 합니다.최준은 해방이후 일제의 신탁관리하에 있던 재산의 1/3을 돌려받았으나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모두 사회에 환원하여 현재의 영남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에 공헌을 했으며 사후 1983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이렇게 3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집 가문 그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준은 가문의 몰락은 아랑곳없이 영남대학교 등을 설립하지만 여기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사학비리가 일어나게 되버립니다.최준은 1964년 이병철 삼성그룹 대표와 차남 이창희를 함께 만나 대구대 운영권을 삼성에 구두로 넘기는데 정부주도로 대구대로 통합하여 만들어진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뒷자리로 봐둔 곳이라는 설이 파다했는데, 박근혜는 1980년 29살의 나이로 영남대 이사장에 추대되고 학내 반발로 이사장직에서 사퇴하고 이사로 남습니다.1988년 사립대학으로선 초유의 국정감사를 받으며 박근혜는 영남대 이사직을 물러나 떠나면서 ‘차제에 학교 일에서 완전히 손떼겠다’고 성명을 발표하였으나,2009년 박근혜는 당시 7명의 이사 가운데 4명을 추천하여 영남대 이사 추천권을 행사합니다.즉,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30여년 전 박근혜 이사 측근들에 의해 저질러진 영남대 사학비리의 확장판으로 독립운동가인 최준이 해방 후 전 재산을 들여 설립한 대구대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청구대와 통합돼 1967년 영남대라는 이름으로 박정희에게 빼앗겼는데 최준 선생으로부터 학교 운영권을 넘겨받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궁지에 몰리자 대구대를 헌납하라는 이후락의 강요를 받아들인 데 따른 것입니다. 

▩경주 최부자집 가계도

대수 이름 생존년도 가족관계
1대 최진립 1568년~1636년 최신보의 3남
2대 최동량 1598년~1664년 최진립의 3남
3대 최국선 1631년~1682년 최동량의 장남
4대 최의기 미상 최국선의 차남
5대 최승렬 1690년~1757년 최의기의 장남
6대 최종률 미상 독자
7대 최언경 미상 최종률의 양자
8대 최기영 미상 최언경의 장남
9대 최세린 미상 자식 없음,사후 최만희가 양자로 입적
10대 최만희 미상 최세린의 양자
11대 최현식 1854년~1928년 최만희의 장남
12대 최준 1884년~1970년 최현식의 장남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 가문은 대한민국이존재하는한,한반도 역사상 가장 의로우면서 추앙받아야 할 부자의 의기로운 전형이기도 합니다.물론 부자가 망해도 3대가 간다고 했지만 사실 최부자 가문은 6대에 이르러 최종률이 독자였던 관계로 대가 끊어져 버리지만 양자를 들여 명맥을 이어갑니다.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풍은 양자들에게도 이어져 다시 6대를 걸쳐 최준이 독립운동을 통해 가세가 완전히 기울때까지 실행되었다는 점입니다.1945년 8월15일 독립을 맞이하지만 다시 한국전쟁의 전화속으로 들어간 대한민국의 운명과 함께한 최준의 삶 그리고 일제에게 빼앗긴 재산을 돌려받지만 개인의 영달 대신 사회교육으로 돌려주려했던 헌신이 당시 더러운 권력자들의 비자금으로 전락하는 아픔까지 겪고 말지만 경주 최부자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현재까지 위대하고 고결한 유산으로 남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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