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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마지막 낭만파 주먹 시라소니 이성순_주먹전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들

by 마음heart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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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마지막 낭만파 주먹 시라소니 이성순

주먹전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들


감격시대:투신의 탄생에서 신정태(시라소니 이성순을 모티브로 함)역을 연기한 김현중-시라소니 역 중 가장 잘생겼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한 사나이 혹은 가장 잘 싸우는 남자에 대한 로망은 각정 판타지를 제공하고는 합니다.인터넷 등에 떠도는 최배달 VS 이소룡이나 시라소니 이성순 VS 김두한 중 누가 가장 강할까?라는 의문들은 각종 빠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사실 시대가 틀리고 체급이 틀리다는 여러 이유들도 있지만 결국 격투의 영역에 속하는 일인지라 직접 서로 주먹을 맞대어 상대해보기 전에는 과거의 전적들은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최배달과 이소룡은 모두 무술을 극한까지 단련한 정통파 무도인들이지만 1923년생인 최배달은 이소룡이 한창 나이 33살이었던 1970년대에는 48살 정도였기 때문에 현역에서 이미 물러나 있어 대결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었으며 이소룡과 최배달의 체급 차이도 제법 났기 때문에 서로가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미스매치였다 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시라소니 이성순과 김두한처럼 동 시대를 살았던 파이터들은 어떠했을까 싶지만 이 둘 역시 역사적인 대결의 장에서 서로에게 부담을 느끼며 대결을 회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더 정확히는 당시 조직의 우두머리로 자리잡고 있던 김두한이 시라소니 이성순처럼 이북에서 갓 넘어온 건달과의 싸움에서 승리해도 크게 얻는 것 하나 없고 지면 자신이 손안에 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싸움을 피하게 되고 시라소니 이성순을 형님으로 모시며 끝나게 됩니다.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라소니 이성순은 전설과 신화의 영역에 살짝 걸쳐진 인물이며 백여년전에 태어나 오직 자신의 주먹 하나로 살다간 협객이라는 명상과 20세기 마지막 낭만파 주먹이자 건달로 추앙받는 주먹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합니다.그런 시라소니 이성순에 대한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오해와 진실을 오늘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라소니 이성순(1916~1983)

체격은 왜소?하지만 천부적인 싸움 천재 시라소니 이성순은 잊어라

시라소니 이성순은 일제강점기부터 제1공화국 시기까지 활동했던 협객으로 본명보다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합니다.1953년 8월에 이정재의 부하들에게 동대문파 사무실에서 린치를 당해 몸을 다친 뒤 복수의 칼날을 갈았지만 이정재와 그 일파들이 정치깡패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하자 개신교에 귀의해서 살다가 1983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평가가 복잡한 동시대 김두한에 비하면 전과도 없었고 조직도 차리지 않았기에 그저 싸움을 즐긴 야인이자 의협심이 있던 협객 쪽에 보다 가까웠다는 시각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시라소니 이성순의 외모를 보면 건달보다는 이웃집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수수한 외모의 소유자로 덩치가 우람해보이지 않습니다.여기에 소설 및 방송에서 작은 체격에 싸움의 천재라는 소재로 워낙 유명했지만 시라소니 이성순의 실제 체격은 178~175cm 정도에 체중도 75kg으로 160 정도의 왜소한 체격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또한 각종 매체등에서 시라소니 이성순이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은 싸움의 천재나 달인 등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았을 뿐더러 만 18살때인1934년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고 합니다.

시라소니 이성순의 별명 시라소니의 의미

평안북도 신의주 오일동 출신으로 부농 이기정(1878~1943년)과 그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위인 형 이성덕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와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이성순은 어릴 적부터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골목대장 노릇을 했었다고 합니다. 보증을 잘못 들어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성순은 만 16살인 1932년부터 밀무역인 도비노리에 뛰어들게 되는데 이 시절 이성순은 실수로 90km 속도로 달리는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 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 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때의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로 당시 도비노리에 뛰어들어 미숙하고 부족한 이성순을 빗댄 놀림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들이 공개한  3.1공수유격단의 부부대장 참가 사진-사진 오른쪽 가장 키큰 사람이 시라소니 이성순이라고 함

시라소니 이성순의 싸음실력과 신체 능력에 대한 썰들

시라소니 이성순이 써움실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평양 제일의 싸움꾼 박두성을 이긴 것으로 당시 박두성은 1930년대 최고의 씨름꾼으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로 북한 전역의 씨름 대회에 출전하여 연속 우승하며 황소 10마리를 거머쥐었을 만큼 완력과 기술이 뛰어난 씨름꾼 출신으로 힘도 뛰어났지만 싸움기술도 뛰어나 안주와 평양 등지에서 활약하는 내노라하는 주먹꾼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안주와 평양 뒷골목의 주먹황제로 등극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시라소니 이성순의 나이 21살,1936년도경으로 이 시기 남한에서는 김두한이 경성 최고의 주먹 신마적을 이기고 경성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비슷한 시기에 남북한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하기도 합니다.시라소니 이성순은 이후 중국 전역을 떠돌며 활약했는데 신의주 칼잡이 김장손과의 싸움, 상하이에서 칼잡이 하야시 반장과의 싸움, 베이징에서 야쿠자 두목 구로야마와의 싸움, 베이징에서 쿵푸 대가 마오와의 싸움, 만주 봉천 호랑이 이상대와의 싸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과의 우정, 천진에서 일본 야쿠자 카네미야 일당과 40:1의 싸움 등 여러 무용담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이 사실상 거의 없습니다. 당시 만주 지역은 동아시아의 화약고 지역이자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온갖 세력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동양의 서부'로 불리던 시절이라 정말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면 기록이 없을 리가 없으며 이외 알려진 점은 북경에서 치에코라는 여성과 만나 살림을 차렸지만 잠시뿐이었다는 것입니다.시라소니 이성순의 특기는 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인 공중걸이박치기,무릎차기, 팔꿈치 공격이었고 단검 던지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시라소니 이성순이 작은 체격이라는 말이 어디서 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라소니 이성순은 178~175 정도되는 신장에 75kg 정도의 몸무게를 지니고 있어 복싱으로치면 라이트 미들급에 해당하는 아시아인으로서는 상당히 묵직한 체형이고 꾸준하게 단련한다면 한방의 KO펀치를 가질 수 있는 체형이기도 합니다.그런데 이런 체형의 시라소니 이성순은 엄청 날쌔고 뛰어난 운동신경과 더불어 다양한 싸움기술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소개한 여러 기술 뿐 아니라 주먹과 팔꿈치,무릎과 발,어깨,다리,머리 등 온 몸을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시라소니 이성순은 앉은 자리에서 무려 3미터를 뛰어 올라 상대방을 걷어차거나,2.74m 길이의 탁구대를 뛰어 넘어 상대방을 이마로 들이받는 박치기 실력과 논두렁 7개를 뛰어넘어 상대방을 타격하기도 했다 합니다.사실 이런 신체능력의 경우 하풍을 좋아하는 싸움꾼들의 부풀리기인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시라소니 이성순의 경우 실제 이성순의 신체능력을 목격하고 증언한 이들도 많은데다 엘리트 체육집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시라소니 이성순이 싸움에 특화된 신체능력을 단련하면 가능하다 여겨집니다.스켈레톤 국가대표 윤성빈의 점프능력을 보면 준비동작 하나없이 1미터 이상을 점프하는데 상대가 방심할만한 거리에서 낌새를 느끼지 못할 점프로 뛰어올라 박치기를 한다면 가히 천하무적일 것이라 여겨지긴 했습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점프의 끝이 박치기라는 결정적 한방을 날린다는 것입니다.이쁘고 안전한 점프가 아닌 멀리 떨어진 상대방을 향해 뛰어 올라 머리로 들이박는 것이기 때문에 방심하거나,공격하지 못할 거리라고 안심할때 점프하여 박치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라소니의 점프력이 뛰어나면서 탄력이 타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 광경을 지켜본 목격자의 진술이 허풍에 허풍을 달수는 있어도 일반적인 점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시라소니 이성순은 해방 후 월남,서울에 와서 이북 출신 건달들의 큰형님 격으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과 정팔의 압록강동지회와 대동강동지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서 단합하는 성격으로 이 가운데 시라소니 이성순이 옵저버 역할을 하면서 중재를 담당했는데 정식 직함은 압록강동지회 감찰부장으로 시라소니 이성순은 한국 전쟁 시기에는서북청년단 인원으로 구성된 KLO 부대원으로 전쟁에 참가했고 3.1공수유격단의 부부대장 자격으로 한국군 최초 공수강하훈련을 교육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위 사진 참조)

20세기 낭만파 주먹왕의 몰락_정치깡패 이정재의 시라소니 린치사건

6.25 전쟁 이후에 서울의 조직폭력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와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되었는데 시라소니이성순은 1.4후퇴 당시에 부산에서 수많은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의 사무실에 드나들 수 있었는데 시라소니 이성순이 이정재로부터 돈을 뜯어가며 동대문 시장의 점포 양도 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게 됩니다. 처음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서 돈을 2번 빌리고 점포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은 50만환(5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내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 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내달라'는 요구였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시라소니 이성순은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동대문패의 간부인 김사범,조열승,임화수 등 간부들이 시라소니 이성순에게 분노하고 이정재도 자존심이 많이 상하면서 이권 분산과 조직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몽둥이, 둔기, 손도끼 같은 흉기로 시라소니를 잔혹하게 린치하기에 이릅니다.1983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정재의 부하 10명 정도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집단으로 때렸다고 하는데 시라소니 이성순은 당시에 종로 5가의 반도병원으로 옮겨졌고 얼마 뒤에 백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이 사건 이후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됐으며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고 후유증 또한 마찬가지로 심각했습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 사건으로 백병원에 입원한 그를 이정재의 부하인 이석재가 후환을 없애겠다는 의도로 단독으로 병원으로 찾아가 쇠막대로 마구 때려 그나마 하나 남은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했으나 이성순이 깁스로 이석재의 얼굴을 치고 그 소란을 들은 간호사가 들어온 바람에 이석재는 그대로 도망쳤으며 나중에 임화수가 오자 시라소니는 마구 화내며 권총을 들이대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이후 시라소니 이성순은 이정재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려 했으나 경찰들의 방해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한 거물 폭력배인 신상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시라소니는 김두한과 손을 잡고 이정재의 암살을 모의하기까지 했는데 당시 두 사람은 이정재를 제거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두었으나 이를 실행하기 직전에 김두한과 이정재가 청요리집인 관수동 대관원에서 화해를 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이후 시라소니 이성순은 거의 폐인이 되어 장티푸스에 걸린 적도 있고 쓰러져서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도중에 3.1 공수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으로 참가하고 장면,신익희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고 합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사 정권이 구악 일소라는 명분 아래에 조직폭력배들을 일제히 검거할 때 이성순도 체포되었지만 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나왔으며 구속 중이던 이정재를 추가 기소하기 위해 당시 검찰에서 방증을 수집하는 도중 시라소니 폭행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정재와 대질 심문도 했는데 린치 사실을 부인하며 이정재를 감쌌다고 합니다. 

밖에서는 건달들도 무서워하는 협객이었으나 집에서는 아내 바보였던 시라소니

굳이 건달이나 깡패가 아니라고 해도 당시 시대는 남성이 우월적인 위치에 있던 사회라 일반적인 남성들도 여성들이나 아내 등에게 함부로 대하고는 했는데 시라소니 이성순은 1948년 만 32살의 나이에 친척의 소개로 해방 전 조선 최고의 미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동화백화점에서 근무했던 이진옥씨는 백화점에서도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혔고 그런 이진옥씨를 처음 만난 시라소니 이성순은 아내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이진옥씨는 시라소니 이성순이 너무 못생겨서 안 만나려고 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시라소니 이성순이 이진옥씨 집안 친척들을 다 모이게 하더니 쌍권총을 딱 꺼내놓고 결혼을 안 시켜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자 친척들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시라소니 이성순의 아내 사랑을 끔찍해서 예쁜 아내를 얻었다는 기쁨에 외출할 때는 항상 데리고 다니며 자랑을 했고, 맛있는 음식점을 발견하면 꼭 다음에 데려가곤 했다고 합니다.맛있는 음식을 사오면 아이들은 먹이지 않아도 아내만은 몰래 먹을 정도였는데 그래서인지 시라소니 이성순은 다른 주먹 거물들이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등 사생활이 복잡했던 것과는 달리 추문 한번 내지 않았으며 아내의 내조덕에 전과 하나 없이 아내와 평생을 해로했습니다.

시라소니 가족 사진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아내는 미인이며 시라소니 이성순은 평범한 회사원같은 이미지이다
단란한 시라소니 이성순과 아내 그리고 시라소니 아들분이라는 사진-부전자전이라고 기골이 장대하다

시라소니 이성순에 대한 증언들

신상사의 인터뷰에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시라소니 이성순의 외모와 실제외모는 전혀 다르다고 증언합니다.증언에 따르면 앞머리가 좀 벗겨졌고, 전체적으로 체격이 컸다고 합니다.딱 보기에 근육질은 아니었으나 몸통 자체가 매우 두꺼웠고, 벌어진 어깨와 골격이 대단했으며, 일반 성인남성에 비해 손이 두 배로 컸다고 하며 손가락 하나가 없었다고 합니다.또한 상하이 독수리라고 불린 주먹 장천용과 절친한 관계로 지내며 그 아들 장호근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소설가가 된 장호근은 이성순이 주인공인 소설 시라소니를 집필해서 그의 무용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게 했습니다.시라소니의 아내 이진옥씨는 남편은 싸움뿐만 아니라, 단도의 명사수였는데 30~40m 거리에서도 정확히 과녁을 맞출 정도였으며, 몸이 정말 민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또한 시라소니 이성순은 자식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을진 모르지만 아내 사랑이 유별나서 아내를 학대하기는커녕 시라소니에게는 아내가 법이었으며, 아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시절의 부부관계에서 남자가 여자를 하대하는 것을 넘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많았음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인데 그래서 이로 인해 전과가 없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항상 자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또한 시라소니 이성순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모습은 대부분 왜소한 모습에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항상 중절모와 정장을 하고 깔끔한 모습이었으며 키는 한 1m 75cm에 몸은 근육질로 영화나 드라마에선 항상 술에 취에 있지만 술 자체를 즐겨하시지 않았으며 시라소니 이성순의 동료들은 이성순의 싸움 기술중 공중걸이(몸을 날려서 하는 박치기)는 세계 최고였다고  증언하기도 합니다. 시라소니 이성순이 휴전후 장면 박사 등의 경호원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며 시라소니 이성순이라는 사람 자체가 어느 한곳에 속하지 않는 자유인이었으며 동대문 사단에 집단 린치를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은 전혀 사실 무근으로 5·16 군사정변 이후 주먹세계와 손을 끊고 편안한 삶을 사시다 여생을 마치셨다고 합니다(/셋째딸 이선숙 인터뷰(2003년 10월 1일)중

드라마 무풍지대(1989)에서 시라소니를 연기한 배우 박건식(좌)과 야인시대(2002)의 시라소니 조상구

김두한과 함께 협객이라는 이름으로 시라소니는 소설,드라마,영화화되기 좋은 소재였지만 장군의 아들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김두한과는 달리 시라소니를 소재로 폭발적인 인기를 끈 매체는 사실 전무합니다.1979년 이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대근 주연의 영화 시라소니가 서울에서 40만 관객을 동원,1980년 신성일까지 기용하여 협객 시라소니 part 2라는 제목으로 속편이 제작되며 유일무이 시라소니라는 인물을 채용한 영화로는 가장 성공한 드라마가 되었으며 1992년 이일목 감독의 감독 데뷔작이 시라소니라는 장편영화이기도 하지만 서울관객 10만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며 장군의 아들 짝퉁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합니다.도리어 드라마 속에서 등장한 시라소니는 극의 긴장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며 무풍지대나 야인시대에서 인기를 누리기도 합니다.일제치하와 한국 전쟁이라는 폭풍같은 한 시기를 살아가고 21세기 선진국 한국의 오늘을 있게한 수많은 순국열사들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뛰어난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스포츠 영웅들이 되었을지도 모를 인재가 바로 시라소니 이성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물론 그런 선한 방향이 아니라해도 주먹을 약자한테 쓰지 않고 협객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큼 정의롭게 사용하며 수많은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시라소니 이성순,이 주먹전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들을 알아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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