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한국 프로야구 1993년 김성래부터 2003년 이승엽까지 역대 홈런왕 계보
1993년 3년 연속 홈런왕 장종훈이 부상과 부진으로 주춤한 사이 삼성 라이온즈의 김성래가 28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한 후 그 이듬해인 1994년에는 우종훈 좌기태라 평가받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좌타자 김기태가 25개의 홈런으로 KBO 리그 최초로 좌타자 홈런왕에 오르게 됩니다.김기태는 홈런왕과 타격왕을 둘다 차지해본 한국 프로야구 선수 6명 중 한명이지만 한 시즌 140안타 이상을 기록한 적은 단 한번도 없는데(당시 경기수를 144경기로 환산하면 5번을 기록)1997년에 김기태보다 낮은 타율을 기록한 이승엽이 170안타를 기록한 것을 보면,김기태는 최다 안타와는 인연이 없지만 대신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중장거리+출루형 타자로 보면 됩니다.1994년에 첫 좌타자 홈런왕, 1997년에 타격왕을 차지했는데 나머지 다섯 명은 이만수(1984년 트리플 크라운), 이대호(2006, 2010년 트리플 크라운), 김태균(2008년 홈런왕, 2012년 타격왕), 최형우(2011년 홈런왕, 2016, 2020년 타격왕), 에릭 테임즈(2015년 타격왕, 2016년 홈런왕)등이 있습니다.
김기태의 주 포지션은 1루수이지만, 골든 글러브도 지명타자로 2번을 받기도 했고 경기 출장도 1루수보다는 지명타자로 출장한 경우가 많아 엄밀히 말하면 전문 지명타자에 가까운데 사실 뛰어난 타격에 비해 수비에는 약점이 많기도 해서 지명타자로 나온 경우가 많았습니다.외국인 용병 찰스 스미스에 밀려 좌익수 수비를 하지 못했으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전문 지명타자 출신 감독이자 지명타자 출신 감독 최초의 우승 커리어도 갖고있습니다.여기에 김기태는 거포 이미지와는 달리 주루도 프로야구 선수 평균 이상이었는데 한 번도 하기 힘든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2차례나 성공했고, 두 자릿수 도루도 네 차례나 기록했으며 11년 연속 3루타 기록까지 갖고 있습니다.
김기태는 현재는 요리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로 활동하고 있는데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상당한 성과를 이뤘다고 볼 수 있지만 지도자 성과의 이면에는 논란이 굉장히 많은 인물이기도 합니다.또 KBO 리그 정식 감독 커리어에 두 번이나 '자진 중도 퇴진'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남긴 인물이기도 한데 옹호하는 쪽에선 형님 리더쉽, 동행 리더쉽이라고는 하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선수만 동행이라는 리더쉽이라며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이 많기도 합니다.김기태는 KBO 통산 15시즌 동안 1544 경기 출장하여 4975타수 1465안타 타율 0.294,2루타 298개,3루타 27개,홈런 249개,타점 923점,득점 816점,도루 83개,볼넷 975개,출루율 0.407,장타율 0.515 등을 기록합니다.1992년도에 출루율 0.461로 리그 1위,25개의 홈런으로 리그 1위를 차지한 1994년도에는 0.590의 장타율로 홈런,장타율 2관왕을 차지했으며 1995년도에는 34개의 2루타 1위,1997년에는 타율 0.344,장타율 0.636,출루율 0.460으로 타격 3관왕을 차지하기도 합니다.(이해는 리그 3년차 이승엽이 첫 홈런왕을 차지한 해이기도 합니다)1999년도에는 삼성으로 이적하지만 다시 SK로 트레이드 된 뒤 2005년을 끝으로 선수에서 은퇴합니다.
1995년 최초의 잠실 홈런왕 김상호 25개 홈런
잠실을 홈으로 쓰는 구단들의 경우 넓은 구장 탓에 홈런왕 배출이 야의치 않은데 타이론 우즈,김동주,김재환 이전에 1995년 잠실 구장을 홈 구장으로 쓰면서 최초로 홈런왕 타이틀을 단 선수가 바로 김상호입니다.김상호는 1987년에 열린 신인드래프트에서 MBC 청룡의 1차지명을 받고 1988년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에 입단합니다.그러다가 1990년에 재일교포 투수 최일언과의 트레이드로 OB 베어스로 이적하였습니다.당시 OB는 김상호가 오기 전까지 소총부대라는 오명을 갖고 있었는데 일발장타가 있던 김상호를 영입해 장타력을 보강하고 노쇠화가 시작된 최일언을 LG로 보내 선수단의 체질 개선을 꾀하고자 했습니다.OB는 김상호를 타선의 핵심으로 기용하는데 김형석과 함께 클린업 트리오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특히 1995년 25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면서 OB 베어스의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 홈런왕과 타점왕 그리고 MVP를 수상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해의 MVP는 LG 트윈스 에이스 투수인 선발 20승의 이상훈을 제친 것으로 소속팀 OB 베어스가 그해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통합으로 제패한 것이 프리미엄으로 작용하면서 김상호의 MVP 수상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김상호가 당시 뽑아낸 25개의 홈런 숫자는 현재 40개-50개가 나오는 현재 시점에서 보면 홈런왕 치고는 상당히 적은 숫자지만 초창기 한국프로야구는 투고타저 경향이 강했으며 특히 1993~1997년은 투수들의 성향이 강해서 타자들은 기껏해야 25홈런~30홈런 사이가 홈런왕 평균치였으며 거기에 체계적인 훈련법의 부재, 외국인 용병 타자도 없어 장타력이 지금보다 떨어지는 편에다가 8개 구단으로 경기수도 지금보다 적어서 20개 초중반이면 홈런왕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30홈런도 프로 출범 7년째인 1988년에 해태 김성한이 처음 해냈고, 이후 장종훈만이 30~40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시절에 김상호는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썼음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여기에 101타점의 기록도 1992년 장종훈 이후 역대 두 번째 100타점 돌파였습니다.특히 1995년 잠실을 홈으로 둔 팀 소속 선수로는 최초로 홈런왕을 따낸 선수가 김상호 였습니다.슬러거 치고는 발도 빨라서 매년 20개 가까운 도루를 했으며 1995년 홈런왕을 수상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빠른 발을 가진 중장거리 타자'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쓴다는 것을 감안해도 통산 기록에서 홈런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이며(통산 136홈런) 전성기도 2~3년 정도로 짧았습니다. 정확성과는 거리가 먼 스윙으로 곧잘 쓰러질 정도로 큰 헛스윙을 해서 '칼춤'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단단한 체구와 강인한 체력으로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합니다.
김상호는 역대 KBO리그 MVP 중 최저 WAR을 기록한 타자인데 당시 1995년 MVP는 WAR만 놓고 따지면 선동열이나 장종훈,이상훈 중 한 명이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당시는 홀드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정도로 WAR같은 2차스탯은 아예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MVP 투표는 클래식 스탯 + 팀성적 + 임팩트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는데, 그 시즌 OB가 극적으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고 최초의 잠실홈런왕이라는 임팩트 때문에 김상호가 무난하게 MVP를 수상합니다.김상호는 OB 베어스와 LG 트윈스 서울을 연고로 한 두 팀에서만 13시즌을 뛰었으며 총 1229 경기 출장에 4192타수 1112안타,타율 0.265,2루타 196개,3루타 24개,홈런 136개,타점 624점,득점 581점,도루 117개,볼넷 517개,출루율 0.344,장타율 0.421을 기록하고 은퇴합니다.
KBO리그 최초 30-30클럽 가입 창시자 1996년 30개 홈런 박재홍
호타준족이라는 단어도 낯설고,30-30클럽이라는 용어 자체도 없던 시절 KBO리그에 첫발을 딛은 신인 박재홍은 홈런이면 홈런,도루면 도루를 모두 잘하며 박재홍 열풍을 프로야구판에 불어 넣습니다.박재홍은 데뷔 시즌이던 1996년 30홈런과 30도루를 기록하더니, 선수 시절 동안 무려 세 번을 기록했습니다.당시 리그 경기수는 126경기로 162경기가 치러지는 메이저리그에 비해 턱없이 경기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시즌에 30홈런과 30도루를 동시에 이루었기에 그 가치가 더욱 높은데 경기수를 감안하면 KBO리그의 30-30은 160경기의 40-40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재홍은1998년에는 30홈런-40도루의 기록을 수립하기도 합니다.박재홍의 30-30 기록 달성 연도는 1996년, 1998년, 2000년으로 2000년에는 타점왕까지 달성 합니다. KBO리그에서 호타준족이라고 하면 박재홍이 연상될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리그의 역사적인 선수라 할 수 있습니다.박재홍의 30-30의 경우 2000년에는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100득점을 기록했으며 한국야구 최초로 200홈런-200도루 기록을 세웠고 2009년에는 250홈런-250도루 기록을 세우지만 노쇠화로 인해 결국 KBO리그 최초의 300-300 달성은 실패하고 맙니다.박재홍의 300-300 클럽 실패 요인은 도루에 있는데 도루 성공률이 매우 낮다는 것으로 통산 도루 성공률이 겨우 64%에 불과하며 30-30을 기록했을 때도 67~69%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도루란 실패하면 주자가 없어지고 아웃카운트만 하나 늘어나는 리스크가 큰 행동이기 때문에 70% 이하,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면 75% 이하의 도루 성공율은 팀에 도움은커녕 해가 되는 플레이이기 때문입니다.
박재홍의 도루를 스탯티즈 기록으로 살펴보면 도루 대비 득점기여인 RAA도루가 -6.29가 나왔는데 도루한게 해가 되는 플레이라 할 수 있는데 단순히 마이너스 수준이 아니라 1786위 중에서 1761위라는 처참한 RAA도루를 기록하였습니다. 도루 200개 이상한 선수 중에 박재홍만이 유일하게 RAA도루 기록에서 마이너스를 기록하였습니다. 즉, 200홈런-200도루는 기록을 위한 기록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원래 데뷔 시즌이던 1996년에 김재박 현대 감독의 시즌 구상은 박재홍을 톱타자로 기용해 김인호나 김성갑 등 기존의 테이블 세터진을 보완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박재홍의 지나치게 좋은 공격력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으로 타순을 변경하게 되었으며 1번타자는 김인호 낙점됩니다.결국 나중에 롯데에서 전준호를 데려와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박재홍은 2006년까지만 해도 홈스틸까지 성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도루를 시도했으나,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에는 부상 위험을 감안하다 보니 좀처럼 박재홍에게는 도루 사인을 내지 않는지라 2007년부터는 20도루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없습니다.
개인 통산 최고 타율이 1997년에 96경기를 뛰며 기록한 3할2푼6리였을 정도로 기술보다는 힘으로 장타를 만들어 타점을 쓸어담는 스타일이었으며 스윙 자체가 원년 홈런왕 김봉연과 비슷했으며 박재홍이 획득한 우승반지는 1998, 2000(현대),2007, 2008, 2010(이상 SK)으로 총 5개입니다.박재홍은 KBO리그 17시즌동안 1797 경기에 출장하여 6097타수 1732안타 타율 0.284,2루타 316개,3루타 26개,홈런 300개,1081타점,1012득점,267도루,940볼넷,출루율 0.376,장타율 0.492등을 기록합니다.박재홍은 KBO리그 최초 데뷔하자마자 30개의 홈런을 날리며 1위를 하고 도루 36개로 30-30 클럽에 최초 가입했으며 이후 두번 더 30-30 클럽에 가입 총 3번의 최다 가압자이기도 합니다.또한 비록 300-300 클럽에 들진 못했지만 200-200 클럽과 250-250 클럽에 가입하며 호타준족의 대명사로 자리잡습니다.
이승엽,라이온 킹의 탄생-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이승엽은 고교를 졸업한 후 삼성 라이온즈에 투수로 입단하지만 타격에 더 뛰어난 재능을 보여 타자로 전향합니다.2년차를 거친 후 3년되던 해인 1997년 시절 32개의 홈런을 날리며 첫 홈런왕에 오릅니다.이후 홈런왕 4회 수상 및 KBO 리그 MVP 5회 수상, 한국시리즈 4회 우승, 골든글러브 10회 수상 등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으며, KBO 리그 시즌 최다 홈런 기록과 통산 7개 부문 타격 기록을 보유한 국민타자이기도 합니다.이승엽의 한국프로야구 1기 성적은 어마무시 한데 1기 통산 OPS가 1.0이 넘는데 타자로 전향한 2년 정도인 95, 96년 성적을 합쳐서입니다.보통 타자들은 1시즌에 OPS 1.0찍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승엽은 평균 성적이 OPS 10할 이상이었는데 7년 연속 30홈런에 9년 동안의 평균 홈런은 36개를 기록합니다.이승엽은 1995년 데뷔 첫 시즌 타율 .285에 홈런 13개로 신인으로서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지만, 이동수에게 밀려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합니다.이듬해인 1996년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는데, 백인천 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해 주었고,1996년 2년차 시즌은 첫 3할 타율을 기록했지만 홈런은 9개로 되려 한 자릿수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승엽은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장타에 눈을 떠 홈런 제조기로 명성을 높이며 대폭발했는데 126경기 전 경기를 출전해 .329의 타율과 32홈런 114타점으로 특 A급 타자의 바로미터인 3할 30홈런 100타점을 모두 훌쩍 넘겼습니다. 170안타를 쳐내 최다안타 1위에 올랐으며, 홈런과 타점 또한 모두 1위. 또한 역대 최연소 홈런왕이었습니다. 타율만 2위로 데뷔 3년차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뻔한 굉장한 시즌을 보냈습니다.이후 이승엽은 일본 이적 직전인 2003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홈런 30개 이상을 쳐냈으며 1998년, 2000년을 제외하고 다섯 번의 홈런왕을 차지합니다. 특히 1997년에는 앞선 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삼성을 일약 포스트시즌에 복귀시킨 주역이 되었고, 이후로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게 됩니다.이승엽은 1998년 더 발전된 장타력을 보이며 38개의 홈런과 2년 연속 3할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으나 외국인 용병 타이론 우즈에게 밀려 홈런왕 2연패에는 실패합니다. 대신 장타율과 득점왕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올랐습니다.1992년 장종훈의 41개를 뛰어넘는 홈런 신기록 수립까지 예상되었으나 막판 뒷심 부족으로 우즈에게 맹추격 당하였고 결국 우즈가 홈런 42개를 때려내며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합니다.홈런왕과 MVP도 우즈에게 돌아갔지만 정작 골든글러브는 이승엽이 수상하며 논란이 되었는데 이 수상은 아직까지 역대 최악의 외국인 차별 사례로 꼽히기도 합니다.그리고 이승엽은 1999년 54홈런으로 1998년 당시 두산 용병이었던 타이론 우즈의 42개, 토종타자로서 장종훈이 세웠던 41개보다 무려 열 개 이상 많은 공을 담장 너머로 날리면서 그의 주가는 폭등,본격적으로 홈런왕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이승엽은 2000년 시즌에 54개의 홈런에서 36개로 줄어들었고 타율도 전년도 .323에서 .293로 떨어지며 외다리 타법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2001년 시즌 역시 전 시즌에 이어 외다리 타법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39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타율 역시 .276으로 더욱 떨어지며 위기가 계속됐지만 OPS와 WAR은 오히려 전년도보다 올랐으며, wRC+는 전년도에 비해 2정도 하락했지만 그 하락한 성적도 펠릭스 호세,심재학,양준혁에 이은 4위였습니다.2002년 시즌에 이승엽은 0.323의 타율로 정확성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홈런 개수도 47개로 늘리며 홈런왕 2연패에 성공했으며 또한 득점, 타점, 장타율 모두 1위에 오르며 4관왕에 올랐습니다.이해에 MVP까지 수상하며 2년 연속 MVP와 개인 4번째 MVP 수상에 성공하기도 합니다.그리고 대망의 2003년,이승엽은 크레이지 모드로 돌입하며 전년의 상승세를 이어받아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는데 2003년에는 0.301의 타율에 아시아 신기록이자 현재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인 56홈런, 한 시즌 최다타점인 144타점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심정수와 펼쳐진 불타는 홈런왕 라이벌전은 2002년의 월드컵 열풍과 맞물려 침체되었던 한국프로야구의 흥행요소였으며, 이 둘은 2년 연속(2002~2003)으로 3할-40홈런-100타점을 찍었지만 심정수는 세부 스탯에서 앞섬에도 홈런왕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2인자로,이승엽은 홈런왕과 MVP 2연패에 성공하며 일본 진출의 발판까지 마련하게 됩니다.
이승엽은 2003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일본 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일본 프로야구 첫해인 2004년 시즌 성적은 14홈런 50타점 타율 0.240, 출루율 0.328, 장타율 0.450, OPS.779를 기록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하지만 2005년 시즌에는 반등에 성공하며 30홈런 82타점 타율 0.260, 출루율 0.315, 장타율 0.551, OPS .866을 기록하고 롯데의 일본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이 되기도 합니다.2006 시즌에는 일본 프로야구의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에 입단하여 41홈런, 108타점, 타율 0.323, 출루율 0.389, 장타율 0.615, OPS 1.003이라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면서 요미우리와 4년 30억 엔의 초대형 재계약을 맺습니다. 당시 이승엽의 연봉은 약 6억 5천만 엔으로 리그 전체 1위였으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2위의 메가톤급 계약이었습니다.2007년 30홈런을 때리기는 하지만 이후 일본 시절의 성적은 망급으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NPB 8시즌동안 797경기 2688타수 686안타 타율 0.257,159 홈런,439 타점,394득점,출루율 0,324,장타율 0.494를 기록하며 국내로 돌아오게 됩니다.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컴백이후의 이승엽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후였지만 이때 6년간의 성적은 30홈런도 단 한번밖에 기록하지 못하지만 국내 각종 타격 지표를 바꿀만큼 누적 성적에서는 일본에서의 8년을 지워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수준으로 누적 성적이 쌓이게 됩니다.이승엽은 국내에서 총 15시즌을 뛰며 1906걍기 출장-7132타수-2156안타-타율 0.302-464개 2루타-28개 3루타-467개 홈런-1498 타점-1355 득점-1055볼넷-장타율 0.572-출루율 0.389를 기록하는데 이승엽은 국내 리그에서 8년을 빠진 후에도 통산 2루타 1위,통산 홈런 1위,통산 타점 및 득점 1위,장타율 1위 등을 은퇴한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이승엽 개인 통산 성적으로 누적 기록을 살펴보면,2703 경기-9800타수-2842 안타-602개 2루타-36개 3루타-626 홈런-1937 타점-1749 득점-1331 볼넷- 장타율 0.550-출루율 0.372의 기록으로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 중 이승엽의 기록은 넘사벽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98년 외국인 용병 첫 타이틀 홀더 타이론 우즈
타이론 윌리엄 우즈(Tyrone William Woods),흑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일본 시절 애칭은 T로 OB 베어스 팬들에겐 절대 잊지 못할 외국인 선수이며 펠릭스 호세,제이 데이비스,야마이코 나바로,에릭 테임즈와 함께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외국인 타자이기도 합니다.외국인 선수 제도가 최초로 도입된 1998년도에 OB 베어스를 통해 드래프트 뽑혀서 국내땅을 밟았습니다.역대 최초로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40홈런을 기록한 선수이자 사상 최초의 외인타자 잠실 홈런왕, 외국인 시즌 KBO MVP이자 사상 두번째 외국인 한국시리즈 MVP를 달성하였습니다.1996년 레드삭스 산하 더블A팀 트랜턴 선더에서 99경기 25홈런 OPS .982를 기록했고, 1997년에는 트리블A팀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29경기 9홈런 OPS 1.064를 기록하지만 메이저에 나이 많은 지명타자를 위한 자리는 없었고 시즌 후반기는 멕시칸리그의 페트롤레로스 데 미나티틀란으로 이적했으나, 공식경기 출전은 없었습니다.마이너리그 시절에도 장타력만큼은 인정을 받았으나, 문제는 수비와 주루 때문에 1루 외에는 볼 수 있는 포지션이 거의 없다는 점으로 당시 보스턴의 1루에는 1995년 아메리칸리그 MVP 모 본이 있었고, 지명타자 자리에는 레지 제퍼슨이 1996년에 타율 .347를 때리면서 우즈는 콜업을 받지 못합니다. 3루수나 외야수도 볼 수 있었지만 수준이하였고 1루 수비마저 잘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타이론 우즈는 타격은 메이저리그급이지만 수비 때문에 일본이나 한국으로 오는 외국인 선수들이 꽤 있는데 타이론 우즈도 그런 유형의 선수였다고 합니다.타이론 우즈는 20대 후반까지도 메이저에서 부름이 없자 야구를 그만 두고 소방관이 될 생각을 했으나 1998년 당시 처음으로 한국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 공개 트라이아웃을 실시하면서 한국 무대를 노크,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를 통해 OB베어스에 입단,한국 프로야구의 신화에 첫발을 뗍니다.
타이론 우즈는 1998년 한국무대 데뷔 중반까지도 당시 한국야구의 좌우폭이 넓은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하지 못하고 선풍기질만 하면서 퇴출까지 거론되었지만, 김인식 감독이 3번 타순에 고정시키고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았는데 결국 타이론 우즈는 이에 부응하듯 7월부터 홈런을 쏟아내기 시작,한때 8개 차까지 벌어졌던 이승엽을 추월하고, 장종훈이 가지고 있던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41홈런)마저 경신하며 홈런왕, 타점왕에 올랐고 리그 MVP로 선정됩니다.MVP 선정 과정은 예상보다 치열했는데, 기자들이 18승으로 다승왕을 따낸 LG 김용수를 밀어주면서 2차 투표까지 간 접전 끝에 MVP 수상에 성공합니다.1998년부터 2000년까지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트리오를 이루어 두산 베어스의 강타선은 물론 리그 최고의 클린업트리오를 구축했으며 심정수가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된 2001년에는 심재학의 가세로 우동학(우즈-김동주-심재학)트리오를 형성,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삼성을 무너뜨리고 두산의 세 번째 우승에 공헌하면서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1998년의 페넌트레이스 MVP에 이어 2001년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면서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MVP 트리플크라운을 기록한 선수로 이름을 남깁니다.
타이론 우즈는 1998~2001년까지 42-34-39-34홈런을 기록하면서 꾸준한 활약을 했으나 2002년에는 25홈런 타율 .256으로 부진에 빠졌는데 당시 외국인 선수에 대한 텃세, 두산 프런트의 섭섭한 대우에 불만이 쌓여서 태업을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받기도 합니다. 당시 한국야구의 스트라이크존이 좌우로 지나치게 넓은 것(일명 태평양존)에도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2000년대 초까지의 한국프로야구 영상을 보면 2010년대보다 좌우로 공 두 개 정도는 넓게 존을 잡아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심판들이 우즈에게는 유독 스트라이크존이 더 넓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우즈존이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결국 5년간의 두산 생활을 접고 2003년 일본 프로야구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합니다.2003~2004년 약체 요코하마 중심타선에서 활약한 우즈는 2003년 40홈런으로 알렉스 라미레스,2004년 45홈런으로 터피 로즈와 함께 공동 홈런왕이 됩니다. 우즈는 이로서 요코하마 구단 역사상 최초로 40홈런을 친 타자로 기록에 남았으며 2019년 현재까지 요코하마에서 40홈런을 친 선수는 우즈 이외에는 다무라 히토시,무라타 슈이치,토니 블랑코, 츠츠고 요시토모,네프탈리 소토 뿐이며, 이 중 2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기록한 것은 우즈와 소토밖에 없었습니다.타이론 우즈는 2005년 중심타선 보강을 위해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뒤 투수친화적인 나고야 돔에서도 38홈런을 때려냈고, 2006년에는 요미우리의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홈런 47개로 홈런왕, 144타점으로 타점 1위를 차지합니다.2007년에는 무라타 슈이치에게 1개 차로 뒤진 35개로 홈런 공동 2위였지만,121개의 볼넷과 19개의 고의사구를 얻어냈으며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8년에도 홈런 35개를 쳤으나, OPS .904로 일본에서의 최저성적을 기록했고, 그해 말 연봉협상에 난항을 겪어서 재계약에 실패합니다.타이론 우즈는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홈런왕에 오른 유일한 선수이며 일본 리그로 진출한 이승엽이나 이대호,김태균 모두 이는 달성하지 못했습니다.타이론 우즈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5시즌을 뛰며 614경기 출장-2624타석-655안타-90개의 2루타-6개의 3루타-174 홈런-412개의 득점-510개의 타점-358 도루-타율 0.294-출루율 0.393-장타율 0.574-OPS 0.967-sWAR 24.6 을 기록했습니다.이후 일본 프로야구에서 6시즌 824경기 출장-3466타석-851안타-2루타 115개-홈런 240-496개 득점-616 타점-490볼넷-타율 0.289-출루율 0.391-장타율 0.573-OPS 0.964-sWAR 27.2 를 기록하는데 특이한 것은 타이론 우즈는 국내 무대에서 뛰다가 한수위의 기량이라 평가받는 일본에서 타격 지표가 국내에서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타이론 우즈는 일본에서만 홈런왕 3회, 타점왕 1회, 베스트나인 3회 수상. 6년 중 4년을 홈구장으로 나고야 돔을 쓰면서도 연평균 홈런 40개를 쳐냈으며, 통산 OPS 0.964는 3000타석을 기준으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6위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2000년-이만수 이후 최초의 포수 홈런왕 박경완
박경완은 현역 시절 야구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포지션 포수로 활동하며 통산 300개의 홈런을 날린 거포이기도 합니다.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데뷔해 현대 유니콘스를 거쳐 2013년 SK 와이번스에서 은퇴했습니다. SK와이번스의 왕조시절을 이끈 야전사령관이며 공수겸장 완성형 포수의 대표주자 중 한명으로 은퇴 시점 기준으로 KBO 리그 최장 시즌 1군 경기 출장 선수이며, 스탯티즈 통산 포수 WAR 1위이자 SK 와이번스와 SSG 랜더스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로 인천야구의 팬들에게는 상징적인 선수로 인식되기도 합니다.박경완은 포수로서의 기본기인 블로킹, 포구 능력, 도루 저지를 위한 강견은 물론 장타력까지 모두 정상의 기량을 뽐내던 KBO의 역사상 최정상급 포수로 현대의 1998, 2000 시즌, 그리고 SK의 2007, 2008, 2010 시즌 우승 주역이며 포지션상 도루는 많이 안 노리지만 포수 20-20을 달성한 적이 있을 정도로 주력 역시 있는 편입니다. 140년 역사의 MLB에서도 포수 20-20은 오직 단 두 번밖에 기록되지 않았는데 1999년 이반 로드리게스가 이걸 달성하여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누르고 MVP를 수상하였습니다.박경완의 2001년 20-20은 이반 로드리게스에 이은 전세계 2번째 포수 20-20이며, 당연히 KBO역사에서는 유일무이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박경완은 타자로써는 가장 전형적인 OPS 히터로 한국 버전 애덤 던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정교함보다는 힘으로 쳐내는 타격을 주로 했던 편으로, 통산 타율은 2할 5푼에 1리가 모자라고, 단 한 번도 3할을 친 시즌이 없으나, 2000년, 2004년 두 번이나 홈런왕을 차지한 적이 있습니다. 타율은 낮지만 KBO 통산 7위에 해당하는 13.3%의 BB%를 기록할 정도로 선구안이 뛰어나서 통산 타율은 0.249인데 출루율은 무려 0.367로 절대로 공갈포 소리는 듣지 않으며,세이버메트릭스 이후로 수혜를 본 타자로 반드시 꼽힙니다.특히 2000년에는 40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포수로는 이만수 이후 처음으로 홈런왕과 시즌 MVP를 따내기도 했습니다.삼진수도 엄청나게 많은데 통산 삼진이 1,605삼진으로 역대 타자 최다 삼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하지만 클러치 능력이 꽤나 빼어나서 타점도 적지 않고 적시타도 상당히 많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전성기이던 쌍방울과 현대시절 김기태나 박재홍 등 더 뛰어난 타자들이 많아서 박경완이 타점을 내고 싶어도 주자가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스탯티즈 기준 포수 통산 타격 WAR 1위이다. 타 스탯도 출루율, 장타율, OPS 역대 포수 3위,wRC+ 4위 등 타격 능력 역시 롱런하면서도 꾸준히 성적을 내줘서 역대 포수 중 톱클래스입니다. 이만수와 포수로 종종 비교되는데 wRC+ 기준 이만수는 통산 159, 박경완은 122인데 사실 포수로 통산 122의 조정생산력이면 엄청나게 뛰어난 것으로 KBO의 2010년대 포수 평균은 95를 넘긴 적이 없고, 통산성적으로 122면 포수가 아니라 1루수로도 레전드 지만 비교대상이 KBO 역사상 최고의 우타자로 불린 이만수이기 때문입니다.
박경완의 통산 타율은 0.249로 많이 낮은 편이지만, 클러치 능력과 뛰어난 장타력으로 이를 극복했던 스타일로 삼진개수 역대 1위(1605개)인 탓에 공갈포로 취급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다른데 박경완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많이 주목받은 능력은 아니지만 볼넷을 상당히 많이 얻어내는 타입이라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거의 0.1 이상 높은 편이었고, 실제로 통산 성적도 타율은 .249에 그치지만 통산 출루율은 .367로 데뷔 초 2할 초반의 타율에 머물때도 출루율은 항상 3할을 넘겼습니다.박경완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2043경기 출장으로 역대 10위를 기록하여 박용택(2237경기 출장)과는 불과 194경기 차이 정도만 나며 통산 314홈런으로 역대 8위를 기록했는데 박경완보다 홈런을 많이 친 타자는 총 7명으로, 최정(403개),양준혁(351개),장종훈(340개),이호준(330개)심정수(328개),이범호(329개)그리고 467 홈런의 이승엽 뿐입니다.통산타점도 995타점으로 역대 19위를 기록했는데 통산 안타수는 1,480개로 정확성보다 장타를 중시한 스타일대로의 결과인데23시즌이나 뛰어서 한 해 평균 안타 개수는 64.3개정도입니다.통산 974볼넷으로 역대 5위를 기록(1278개의 양준혁이 1위),몸에 맞는 공 166개로 역대 단독 4위이며 박경완의 안타 중 장타의 비율이 40.6%로 역대 6위인데 안타 10개 중 4개가 2루타 이상이었다는 것이며 KBO리그에서 유일한 20-20클럽 포수 가입자이자 한경기 4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박경완 기록 및 수상내역
통산 2,043경기-1,480안타- 314홈런- 995타점- 913득점- 타율 0.249
2000년 KBO리그 MVP
2000년, 2004년 KBO리그 홈런왕 (40개,34개)
1996년, 1998년, 2000년, 2007년 KBO리그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1998년, 2000년, 2007년, 2008년, 2010년 KBO 한국시리즈 우승
2001년 포수 최초 20-20 클럽 달성
KBO 리그 최초 4연타석 홈런(2000년 5월 19일 (vs 한화)
한국시리즈 우승 5회 (1998, 2000, 2007, 2008, 2010)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4회 (1996, 1998, 2000, 2007)
MVP (2000)
홈런 1위 2회 (2000, 2004)
연도 | 선수(소속) | 홈런 |
1993년 | 김성래(삼성) | 28개 |
1994년 | 김기태(쌍방울) | 25개 |
1995년 | 김상호(OB) | 25개 |
1996년 | 박재홍(현대) | 30개 |
1997년 | 이승엽(삼성) | 32개 |
1998년 | 타이론 우즈(OB) | 42개 |
1999년 | 이승엽(삼성) | 54개 |
2000년 | 박경완(현대) | 40개 |
2001년 | 이승엽(삼성) | 39개 |
2002년 | 이승엽(삼성) | 47개 |
2003년 | 이승엽(삼성) | 56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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