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한국 프로야구 1982년 원년 김봉연부터 1992년 장종훈까지 역대 홈런왕 계보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해태 타이거즈) 홈런 총 22개.1986년 홈런 21개
김봉연은 1952년 1월13일생으로 전라북도 전주 출신으로 군산상고를 졸업 후 육군 경리단(1975_1977),한국화장품 야구단(1979_1981)을 거쳐 1982년 마침내 프로야구에 태동하자 해태 타이거즈(1982_1988)에 만 30세의 나이로 입단 총 7시즌에 거쳐 활약합니다.이후 해태에서 플레잉 코치,타격코치(1989_1994),해태 2군 감독(2000)등을 거쳐 SBS 해설위원 등을 역임합니다.
김봉연은 KBO 리그 원년 홈런왕이자 팀 최초의 전국구 스타였으며 해태의 여러 스타 출신들 가운데서도 원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해태 출신 기념 모임에서도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김봉연은 실업야구 시절인 육군 경리단(1975 ~ 1977년)에서 뛸 당시 백호기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활약했고 연세대에 복학하여 1년을 보낸 뒤 1979년에 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입단 후에도 실업야구의 거포이자 스타플레이어로 실업야구를 대표했으며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31세의 나이로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합니다.당시 야구 선수들의 평균 은퇴 나이가 3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거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프로에 뛰어들었는데, 해태에서의 활약은 한 마디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실업야구 시절 대스타였기에 프로야구 출범때 모든 프로 선수들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특급 선수들의 연봉은 김봉연을 기준으로 설정해 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으로 책정되었는데 이덕분에 백인천과 박철순이 특급 선수 연봉을 받았지만 정작 김봉연 자신은 돈이 없다고 강짜를 부리는 해태 구단 때문에 A급 선수 연봉인 1800만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선은 주로 1번 김일권,2번 차영화, 3번 김성한,4번 김봉연, 5번 김준환 6번 김종모가 출전했는데, 선수의 대부분이 김씨라서 김씨왕조라고 불렸으며 모두 일발 장타가 있었습니다. 당시 코칭스탭간의 불화와 모기업의 지원 부족, 그리고 총원 18명의 초미니 선수단으로 해태는 4위에 그쳤지만, 해태의 3, 4, 5번은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였습니다.김봉연은 초대 주장 겸 4번 타자로서 22개의 홈런으로 원년 홈런왕에 등극했는데 홈런 수도 대단하지만, 홈런 22개 치는 동안 삼진은 겨우 16개에 그쳤을 정도로 타석에서의 심리전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원년 홈런왕 레이스에서 1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부상당했고,백인천이 계속 이를 추격하자,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타를 자청, 홈런을 쳐내며 절룩거리면서 베이스를 돈 것은 명장면으로 회자되기도 합니다.
1983년 리그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여행을 다녀오다 큰 교통사고를 입어 선수생활을 위협받는 부상을 입었는데 한 달 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홈런 레이스에 뛰어들지만, 아무래도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후기리그는 대부분 출장하지 못합니다. 다행히도 당시 전,후기리그에서 우승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규정에 따라 해태가 이미 전기리그 우승을 하여 코시 진출을 확정했으니 후기리그의 성적은 한국 시리즈 진출에 영항을 주지 않았으며 이후 회복한 김봉연은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하고, MVP를 수상합니다.1986년에는 이미 프로야구 시대의 홈런왕으로 위상을 굳혀가던 삼성의 이만수와 최초의 통산 100개 홈런 경쟁을 벌이지만, 최초 100호 홈런의 영광은 이만수가 차지했는데 대신 김봉연은 이 해에 프로리그에서의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회합니다.이때의 나이가 35세로 당시로 보면 평균 은퇴나이가 한창 지난 시기였습니다.결국 이듬해인 1987년부터 시즌 홈런이 10개 미만으로 줄었고, 1988년에도 홈런이 10개를 못 넘겼는데 자신의 최대 강점인 홈런이 줄어들자,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합니다. 김봉연 본인은 더 뛰고 싶었으나 김응룡 감독이 은퇴를 권유했으며 선수 시절 말년에는 김준환과 함께 해태의 플레잉 코치로 뛰었습니다.김봉연은 프로 원년부터 통산 7시즌을 해태에서만 뛰며 통산 630경기 출장 2,145타수 596안타 84 2루타,8개의 3루타,110개의 홈런,334 타점,311득점,262 사구 타율 0.278,장타율 0.478,출루율 0.303을 기록합니다.1982년 원런 홈런 1위(22개 홈런),득점 1위(55개),1986년 홈런 1위(21개 홈런),타점 1위(67개),장타율 1위( 0.514)등을 달성합니다.
1983년 1984년 1985년 KBO 리그 최초 3년 연속 홈런왕 이만수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 이만수는 헐크와 최초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최초 100홈런, 최초 200홈런, 최초 트리플 크라운 기록 등 많은 1호 기록들을 가지고 있기에 붙은 별명입니다. 여기에 더해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져리그 코치와 코치로써의 우승까지 달성했습니다.포수이면서 홈런왕으로 수비력이 박경완에게 밀린다는 얘기가 종종 나오지만, 박경완이 고평가 받는 포수 리드는 객관화되기 어렵고, 세이버메트릭스에서도 수비 반영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기준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도루저지와 수비율 등 클래식 수비지표에서 이만수는 박경완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958년생인 이만수는 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이기도 하며 대구상고-한양대를 거쳐 삼성 라이온즈에 1982년에 입단하여 1997년 은퇴한 후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기도 합니다.
이만수는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으로 MBC청룡과의 개막전에서 팀의 4번 타자 겸 주전 포수로 출전하여 1회에 2루타를 치며 타점을 기록했으며, 5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쳤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 삼성에 입단,한국프로야구 원년 멤버 중 한 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선수로 16시즌 동안 활동했습니다. 프로 원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 선수이기도 하며 별명은 헐크,등번호는 22번은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영구결번이기도 합니다. 현재 삼성의 영구 결번인 양준혁의 10번도 다른 선수들이 단 적이 있었고 삼성의 또 다른 영구 결번 번호인 이승엽의 36번도 그 이전의 선수들이 단 적은 있지만 이만수의 22번 만큼은 은퇴한 후에도 아무도 단 사람이 없어서 삼성 라이온즈 역사에서 유일하게 22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되었습니다.삼성의 초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첫 전국구 스타라고 할 수 있는데 장효조&이만수-양준혁-이승엽으로 시작되는 본좌 계보의 시작이었으며. 삼성의 역사는 이만수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닌데 삼성 본좌 라인 중 유일한 우타자이지만 삼성에서의 우승 경험은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룬 1985년 뿐, 한국 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었습니다.
이만수는 프로에서 16시즌 동안 1449게임에 출장, 5034타석에서 타율 .296, 타점 861, 홈런 252, OPS .907을 기록했는데 16시즌동안 3할 타율을 6번, OPS 9할 이상을 9번이나 달성한 레전드 중 레전드입니다. 통산 OPS+가 155인데,양준혁과 이승엽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이며 비교대상인 선수들이 1루수/지명타자인 것과 다르게 이만수는 포수였다는 것입니다.!역대 홈런왕 3번,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했습니다.통산 wRC+가 159.0으로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뛴 양준혁에 이어 역대 2위로 포지션을 감안하면 더더욱 뛰어난 수치인데 21세기 들어 KBO의 리그 평균 포수 wRC+는 단 한해도 100을 넘긴 적이 없으며, 전 시즌 평균으로는 약 90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런 포수 포지션에서, 단 한 해만 wRC+ 159를 기록했다면 MVP 컨텐더로 불릴 만할텐데, 이만수는 통산 기록으로 159를 찍었고 커리어하이로는 무려 200을 두번 넘겼습니다. KBO 역대 최고의 포수를 넘어 역대 최고의 우타자로 부를 만한 선수입니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그의 볼넷:삼진 비율. 커리어 통산 4310타수 672볼넷 490삼진으로 10타수당 삼진 1개에 지나지 않을 만큼 까다로우면서도 파워를 겸비한 타자였습니다.
이만수는 1983~85년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프로야구 초창기 홈런왕이라는 이미지가 굳지만 1982~1990년, 이만수의 최전성기 9년으로 한정지어 계산하면 그 위엄이 더더욱 빛나는데 9년 평균 타 출 장이 .310 .399 .554에 OPS가 .953으로 동기간에 OPS가 9할을 넘는 선수는 오직 이만수 뿐이며, wRC+는 무려 173.2에 9년 합계 sWAR은 49.77승이나 됩니다.누적홈런은 183개로 1위, 그러면서 BB/K가 1.19나되는, 당시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메이저리그의 알버트 푸홀스나 미겔 카브레라,마이크 트라웃과 다름없는 엄청난 타자였음이 분명합니다.심지어 국민타자 이승엽의 95~03 시즌 9년과 비교해봐도 동급이라 할 수 있는데 9년 평균 이승엽의 wRC+는 170.9, 이만수는 173.2. sWAR로 비교하면 이승엽이 5005타석을 들어서고 56.83승을 기록했는데 이만수가 3200여 타석을 들어서고 49.77승을 기록했습니다. 포수로써 수비 보정이 이루어졌더라도 타석수가 2000타석 가까이 차이나고 7승 더 기록했다면, 물론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동급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KBO 리그 성적으로 이대호와 단순 비교해보아도, 통산 wRC+는 이만수가 159, 이대호가 141이고 누적 sWAR은 5034타석을 소화한 이만수가 65.29이고 7072타석을 소화한 이대호가 56.71로 둘 다 이만수가 우위인데 만약 144게임으로 환산하여 비교하였을때, 커리어하이 기준으로도 (각각 가중출루율, wRC+, sWAR/144G)1984 이만수가 0.467, 204.6, 9.00이고, 2010 이대호가 0.482, 192.4, 9.55이다. 이만수는 커리어 통산 wRC+ 200 이상을 두번이나 기록했는데 반해 이대호는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물론 외국인 선수 유무를 비롯한 80년대와 21세기 야구의 차이, KBO에서의 기록이 전성기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NPB와 MLB에서의 시기가 빠진 기록이라는 점과 해외리그 진출 여부, 시즌 소화 경기수 변화 등을 들어 이대호가 이만수보다 더 좋은 타격 능력을 가진 선수라고 말할 수 있긴 합니다.현재까지도 이만수의 선수 시절 수준의 타격 성적을 냈거나 앞으로 비슷한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보이는 포수는 나오지 않았는데 타고투저가 우세한 현재의 KBO 리그와 달리 이만수는 프로 선수 생활 1982~1997년까지 거의 15년 이상을 투고타저 시대에 뛰었던 선수였습니다. 게다가 막바지인 1993~1997년에는 포수로 뛴 경기가 단 5경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외하고 순수 포수로서의 성적을 보면 통산 성적보다 훨씬 더 좋은데 통산 타율이 .296인데 포수 시절인 1982~1992년까지의 성적만 가져오면 통산 타율이 무려 .304에 달합니다.
이만수 수상내역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5회 (1983~1987)
MVP (1983)
타율 1위 (1984)
홈런 1위 3회 (1983~1985)
타점 1위 4회 (1983~1985, 1987)
장타율 1위 2회 (1984, 1987)
승리타점 1위 2회 (1983, 1985)
1985년 1988년 1989년 리그 최초 투타 겸업 10승-10홈런 달성 오리궁뎅이 김성한
김성한하면 오리궁뎅이 타법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오타니가 이도류를 하기도 전 한국 프로야구 원년 이미 김성한은 10승과 10홈런 이상을 기록한 원조 이도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1958년 5월18일생 전라북도 군산시 출생인 김성한은 군산상고-동국대를 졸업한 뒤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로 프로 야구에 발을 내딛습니다.포지션의 경우 1루수부터 3루수,2루수,유격수 그리고 투수를 볼 수 있을만큼 다재다능한 선수로 아까도 말했다시피 KBO 최초로 단일 시즌 10승-10홈런, 30홈런, 20-20 클럽, 통산 1,000안타, 통산 2000루타, 통산 700득점 등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1983년부터 1999년까지 16년 간 통산 최다안타 1위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22년 현재 스탯티즈 기준 통산 wRC+가 3천 타석 이상 소화한 선수 가운데 20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오랜 기간동안 선보였습니다.선수 시절 등번호는 11번이며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다가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자리를 옮기면서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감독이자 기아 타이거즈의 첫 감독이기도 합니다.
군산상고를 거쳐 동국대에서 활약하던 김성한은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해태에 입단하지만 당시 해태의 선수가 불과 15명으로 타 팀에 비해 상당히 부족했던 탓에 팀 창단 초기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면서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팀 사정으로 인해 KBO 리그에서 투타겸업을 하면서, 양쪽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낸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선수가 되었습니다.당시 김성한의 투수기용이 단순히 해태의 선수층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원래는 투수 출신으로 고교 때는 김시진과 투수로 맞대결하기도 하며 대학시절까지 투수로서 활약했었지만 다만 타격에 더 재능을 보였고, 팔꿈치 부상의 여파로 프로 데뷔 후 3년만에 타자로 완전 전향했습니다. 데뷔 초에는 선수층이 얇았던 팀이었던 해태의 팀 사정상 투수까지 겸업하면서 휴식없이 타자와 야수로도 계속 출장했는데, 그 결과 팔꿈치에 뼛조각이 떨어져나오며 이후 기량하락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김성한하면 엉덩이를 뒤로 내민 상태로 타격을 하는 특이한 타격폼으로 인해 오리궁뎅이라는 별명이 유명한데 지금뿐만이 아니라, 타격폼이 정형화되지 않아 각종 기상천외한 타격폼이 넘쳐났던 당시 기준으로 봐도 이상한 타격폼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는 아마시절 유독 스윙스피드가 느렸던 김성한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을 거듭한 끝에 완성 된 것으로 원래 동국대 시절에는 느린 스윙스피드를 보강하기 위해 배트를 비스듬이 기울여 번트를 칠듯이 흔들거리다 짧게끊어치는 타격을 했다고 하는데, 이게 알루미늄 배트로 치는거라 반발력이 좋아서 홈런이 잘나갔다고 합니다.하지만 프로무대 나무 배트로는 도저히 대학시절의 끊어치는 타격이 안돼서 타격폼을 스스로 연구했다는데, 그게 바로 오리궁뎅이 타법으로 간결한 스윙을 통해 정확도를 높이면서도 자신의 강점인 뛰어난 펀치력을 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투타겸업에서 완전히 타자로 전향하고 나서는 그야말로 맹활약을 펼치며,김봉연,김준환,김일권,김종모와 함께 '김씨타선'으로 대표되는 해태 타이거즈의 중심 타순을 이끌면서 해태를 7번이나 우승시키는 데 큰 공헌을 쌓았습니다. 이미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80경기 전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305, 리그 10위)에 10홈런 이상(13홈런, 리그 4위), 타점 1위(69개), 10승 5패 방어율 2.88을 기록하며 자신의 진가를 알린 김성한은 1985년 22홈런으로 이만수와 함께 공동 홈런왕에 MVP까지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야구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성한 수상내역
한국시리즈 우승 7회 (1983, 1986~1989, 1991, 1993)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6회 (1985~1989, 1991)
MVP 2회 (1985, 1988)
홈런 1위 3회 (1985, 1988, 1989)
타점 1위 2회 (1982, 1988)
장타율 1위 3회 (1985, 1988, 1989)
승리타점 1위 2회 (1988, 1989)
김성한의 1985년 첫 홈런왕을 기록한 시점부터 마지막 전성기였던 91년까지 7년간 기록을 보면 타율.301(3위),홈런 145개(1위), 타점 483개(1위), 안타 803개(1위),도루 99개(8위), OPS.902(2위), WAR 30.97(2위), +wRC 157.5(2위)를 기록하면서 또 다른 전설인 이만수와 함께 리그를 양분했던 타자였습니다.개인 타이틀 역시 이 기간동안 홈런왕 3회(1985, 88, 89),타점왕 1회(1988), 최다안타 2회(1985, 88), MVP 2회(1985, 88)를 기록하면서 화려함과 꾸준함을 갖춘, 당시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으로 또다른 특기할만한 점으로는 이 전성기 시기에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한 시즌 30홈런과 20-20클럽을 달성했다는 점. 특히 그가 은퇴한 후, 홈런 1위와 타점 1위는 2009년에 김상현이 홈런 1위와 타점1위에 오를 때 까지 누구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또한 리그에서 한시즌 30-30을 최초 달성한 선수는 1996년의 박재홍이지만 100경기 남짓한 한 시즌에 30홈런과 한 시즌 30도루를 한번씩 달성해본 최초의 선수는 김성한이라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그런 김성한도 1991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노쇠화가 오기 시작하는데 1991년 3할에 가까운 타율(.294)과 리그 3위의 홈런(23개)을 기록하던 방망이는 1992년 15홈런에 그치더니 1993년부터 다시는 두자릿수 홈런을 치지 못합니다. 은퇴년도인 1995년에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했을 정도로 펀치력은 그대로였으나 노쇠화로 인해 본래 자신의 약점이던 스윙스피드가 더욱 떨어지게 된 탓입니다.김성한의 은퇴식에는 1980년대를 함께 호령했던 라이벌 이만수가 꽃다발을 건내주어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김성한 통산기록은 타율 .286 1389안타, 207홈런,781타점, 762득점, 2루타 247개, 2285루타, 143도루로 은퇴를 선언한 95년 당시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분의 1,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또한 투수로서 김성한은 4시즌 동안 통산 방어율 3.02를 기록, 총 167이닝을 던졌고 1982년에는 무려 106.1이닝을 소화했습니다. 1982년에 타자로서 타율 0.305, 13홈런, 69타점, 10도루라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했지만, 투수로서도 규정이닝을 넘기면서 10승(5패 1세이브), 방어율 2.88을 기록하며 프로에 데뷔,현재까지 KBO에서 본인 한 명밖에 없는 한시즌 10승 - 10홈런 - 10도루 - 3할 타율 - 타점왕이라는 진기록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투타 10-10-10클럽을 개설하고 현재 그 유일한 회원이며, 메이저리그에서도 10홈런-10승은 베이브 루스(1918년, 11홈런-13승)와 오타니 쇼헤이(2022년, 34홈런-15승, 시즌 진행중)만 달성한 기록입니다. 다만 당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26경기 출장 중 5경기만 선발로 나왔는데 물론 80경기 체제 중에 5경기를 선발로 나온 것이 생각보다 적은 비율은 아니며 주로 나온 포지션은 구원 투수이지만 문제는 구원 투수라도 80년대 야구 특성상 마구잡이로 등판하였다는 것입니다.80경기 중 이닝이 106이닝을 넘겼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1987년 1993년 홈런왕 김성래(삼성 라이온즈)
1986년 해태 타이거즈의 김봉연이 21개의 홈런으로 1위를 차지한 다음해인 1987년 삼성 라이온즈의 김성래가 22개의 홈런을 날리며 그해 홈런왕에 등극합니다.1961년생인 김성래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84년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원래는 실업팀인 한일은행에 입단하려고 했었습니다.연세대 시절 주 포지션이 유격수였는데, 당시 삼성의 주전 유격수는 서정환을 밀어내고 KBO리그 첫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오대석이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자, 그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합니다.1985년 김영덕 감독의 포지션 전향 지시에 따라 유격수에서 2루수로 활동, 1987년 22홈런을 기록하면서 2루수 포지션 최초로 홈런왕을 차지합니다.1988년에는 김상훈과 타격왕 경쟁을 벌일 정도로 페이스가 좋았으나, 1988년 9월 6일 해태 전에서 벌어진 김성한과의 충돌로 인해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으로 하락세를 걸었으며 1989년에는 역대 최고의 2루수로 평가를 받는 강기웅이 입단하면서 입지가 더 줄게 됩니다.무릎 수술을 받고 좌익수로 자리를 옮긴 1992년 0.292의 타율을 기록했고, 1루수로 변경한 이듬해인 1993년에는 타율 0.300, 28홈런, 91타점으로 홈런왕, 타점왕 그리고 MVP를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28홈런이 지금 기준으로는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해 롯데 자이언츠의 팀 홈런은 29개였습니다.즉 이 해 김성래의 홈런 수는 롯데의 전체 홈런 수와 고작 1개의 차이만을 보였던 것으로 김성래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클러치 히터로서의 능력 또한 대단했습니다.
김성래는 선수 시절 홈런왕을 2번이나 했을 정도로 타격지표도 좋았고,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로도 쓸 수 있었을 정도로 수비력도 뛰어난 선수였지만 의외로 저평가를 받는 선수였는데 2루수로 뛰면서 홈런왕을 했는데 이는 KBO리그 역사상 정상급의 2루수로 꼽히는 홍현우,박정태 등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기도 합니다.김성래가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내야 유틸리티로 활동한 게 컸는데 유격수로 시작해서 주 포지션이었던 2루수를 포함해 내야 전 포지션에서 활동하였고, 외야수로도 뛰었던 시즌이 있었으니 어느 포지션의 레전드로 낙점할지 참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비슷하게는 2루수-3루수로 활동했던 홍현우가 있습니다.이외에도 한창이던 1988년에 입은 부상으로 몇 시즌을 날려먹은 것도 타격이 컸습니다.게다가 당대 홈런왕 치고는 인기도 많지 못한 편이었는데 팬이 생길만 하면 발생하던 부상으로 인해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과적으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다른 타자들 이만수나 김성한, 장종훈을 넘어설 정도의 인상을 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성적과 함께 다른 홈런왕들의 헐크, 오리궁둥이, 연습벌레,연습생 신화 등 무언가 스토리를 가지고, 꾸준히 활약했던 선수들에 비해, 김성래는 꾸준히 선수로 뛰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김성래는 KBO리그 통산 17년동안 선수생활을 하며 1,277경기에 출장,3,633타수 1008안타 타율 0.277를 기록했으며 147개의 홈런,170개 2루타,10개의 3루타,595개 타점,490개 득점,24도루,597개의 4사구,장타율 0.451,출루율 0.376을 기록했으며 1987년 22개의 홈런을 날리며 첫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1988년에는 0.459의 출루율로 리그 1위를 기록,1993년도에는 28개의 홈런과 91개의 타점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에 등극하기도 합니다.
1990년 1991년 1992년 3년 연속 홈런왕 장종훈
1988년 김성한이 KBO 리그 최초로 30개의 홈런을 날리며 그해 홈런왕에 오르나 싶더니 이듬해인 1989년에도 26개의 홈런으로 2년 연속 홈런 1위에 오릅니다.김성한은 이로써 이만수(이만수는 1983~85년 3년 연속)와 더불어 KBO 리그에서 3번 이상 홈런왕에 오른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그리고 1990냔 빙그레 이글스의 연습생 출신 장종훈이 28개의 홈런을 날리며 유격수로는 사상 처음 홈런왕에 오르게 됩니다.장종훈(전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은 시대별 홈런왕을 살펴볼때 1980년대를 상징하던 홈런왕이 김봉연-김성한-이만수였다면 1990년대를 대표한 선수는 장종훈으로 장종훈의 뒤를 이승엽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홈런왕이 됐고 이후 이대호-박병호-최정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는데 지금도 '홈런왕' 하면 장종훈을 떠올릴 정도로 현역시절 홈런 타자의 상징이었으며 KBO 리그 최초의 단일시즌 40홈런 달성자이자 최초의 3시즌 연속 단독 홈런왕(이만수는 1985년 김성한과 공동홈런왕임)으로 은퇴 시점에서 KBO 역대 우타자 최다 홈런 1위의 기록을 달성했습니다.장종훈의 홈런 타구는 라인 드라이브를 넘어 엄청난 속도로 총알같이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 전매 특허였는데 정말 총알같은 타구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다 할 정도로 타구를 강하게 치는 선수로 유명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유격수가 점프해서 아쉽게 못잡았는데 그게 펜스 상단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장종훈은 KBO 리그 최초로 연습생 신화의 대명사로 불리는데 당시 지명도 못 받고 입단해 홈런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입지로까지 올라선 경우는 장종훈이 최초였습니다. 장종훈의 뒤를 이어 김현수 및 서건창 같은 신고선수 출신 스타플레이어도 많이 나왔으나, 80년대 당시 연습생(신고선수) 출신으로 1군 주전을 꿰차고 타이틀까지 딴 선수는 장종훈 하나밖에 없었고 이것이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면서 지금까지 쓰일 정도로 고착화된 것으로 이 때문에 장종훈은 지금까지도 육성선수들의 롤모델로 꼽힐 만큼 존경받고 있는데, 최익성,박경완,김현수,서건창 같은 신고선수 출신 스타 선수들도 장종훈의 일례를 들으면 늘 연습생 하면 넘버 원이라고 칭송하는데 장종훈은 연습생 신화와 함께 꼭 붙어다니던 신화가 고졸 신화이기도 합니다.아직 기술적으로 무르익지 않은 고졸 선수가 프로 무대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가 고졸 후 프로무대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한다는 점에서 고절 신화는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라 여겨집니다.장종훈의 연습생 신화의 사작은 데뷔 4년차인 1990년 유격수를 보면서 120경기를 출전하여 타율 0.290,119 안타,홈런 28개,타점 91개,장타율 0.545로 3관왕을 차지하며 예열을 다진 장종훈은 이듬해인 1991년 126경기 전경기 출전에 타율 0.345(3위),160안타(1위),35개 홈런(1위),114개 타점(1위),104 득점(1위),볼넷 76개(1위),출루율 0.450(2위),장타율 0.640(1위) 등 타격 전부분에서 1위 아니면 3위권 안에 전부 자신의 이름을 올립니다.이해에만 무려 타격 5관왕을 이룬 장종훈은 리그 MVP에 오르며 최고의 한해를 보냅니다.장종훈은 1992년에는 더욱 진화하여 국내 프로야구 최초의 40개의 홈런을 날리며 최종 스코어 41개의 홈런을 기록합니다.1992년 역시 장종훈의 해로 125경기 출전하여 타율 0.299,홈런 41개(1위),타점 119개(1위),득점 106개(1위),볼넷 106개(2위),출루율 0.446(3위),장타율 0.659(1위)등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타격 전부분에 이름을 올리며 타격 4관왕을 이루며 MVP 2연패를 달성합니다.하지만 지독한 연습벌레로 통했던 장종훈의 연습 방법이 부상을 몰고오면서 장종훈은 이후에는 부상과 부진으로 예전만큼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2005년 19년간의 프로생활을 마감합니다.장종훈이 은퇴할 당시 각종 타격지표에는 장종훈의 개인 기록들이 가득했는데 19년간 빙그레-한화 이글스 한 팀에서 뛰며 기록한 통산 성적은 1950경기 출장-6292타수-타율 0.281-1771안타-331 2루타-25 3루타-340 홈런-1145 타점-1043 득점-122 도루-866 볼넷-장타율 0.504-출루율 0.377을 기록 했습니다.
장종훈이 KBO 최초로 달성한 기록들
유격수 홈런왕(1990년)
단일시즌 3할-30홈런(1991년)
단일시즌 100타점(1991년)
단일시즌 100득점(1991년)
단일시즌 40홈런(1992년)
3년 연속 최고 장타율(1990년~1992년)
3개 포지션 골든 글러브 수상(1992년)
단일 시즌 최고 장타율 4회 수상(1990~1992년,1995년)
통산 300홈런(2000년)
통산 900타점(1999년)
통산 900득점(2000년)
통산 1,000타점(2001년)
통산 1,000득점(2002년)
통산 1,500안타(2000년)
통산 1,700안타(2002년)
통산 3,000루타(2002년)
통산 300 2루타(2002년)
통산 1,900경기 출장(2004년)
5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1988년~2002년)
6년 연속 세자릿수 루타(1987년~2002년)
장종훈 수상내역
한국시리즈 우승 (1999)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2회 (1988, 1990)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1991)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2회 (1992, 1995)
MVP 2회 (1991, 1992)
안타 1위 (1991)
홈런 1위 3회 (1990~1992)
타점 1위 3회 (1990~1992)
장타율 1위 4회 (1990~1992, 1995)
출루율 1위 (1995)
연도 | 선수(소속) | 홈런 |
1982 | 김봉연(해태) | 22개 |
1983 | 이만수(삼성) | 27개 |
1984 | 이만수(삼성) | 23개 |
1985 | 이만수(삼성),김성한(해태) | 22개 |
1986 | 김봉연(해태) | 21개 |
1987 | 김성래(삼성) | 22개 |
1988 | 김성한(해태) | 30개 |
1989 | 김성한(해태) | 26개 |
1990 | 장종훈(빙그레) | 28개 |
1991 | 장종훈(빙그레) | 35개 |
1992 | 장종훈(빙그레) | 41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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