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한국 프로야구 2004년 박경완부터 2011년 최형우까지 역대 홈런왕 계보
2005년 래리 서튼-홈런 35개
2004년 박경완(SK)이 자신의 두번째 홈런왕을 차지하고 2005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의 외국인 용병 래리 서튼이 3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 1위에 등극합니다.래리 서튼은 현대와 기아에서 딱 3년간 뛰었던 前 외국인 선수이자 롯데 자이언츠의 제 20대 감독으로 제리 로이스터 이후 롯데 구단 역사상 2번째 외국인 감독이자 역대 최초 KBO 리그 외국인 선수 출신 감독이기도 합니다.래리 서튼은 일리노이 대학교를 졸업, 1992년 드래프트에서 21라운드 582번째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지명되어 입단했으며 입단 첫 해인 1992년에 A 마이너에서 OPS 1.026을 찍으며, 급성장하면서 싱글A로 승격됐고, 1994년에는 A+ 1995년에는 AA, 1997년에는 AAA까지 승격되어서, OPS 0.921을 찍으며 1997년에 첫 콜업이 되었고, 주로 백업으로 출장을 했으며, 1998년에 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고, 메이저리그에 25인 로스터에 무난히 들어갔으나, 5홈런 42타점 .245 .311 .352 .663이라는 성적을 보여주며, 전형적인 AAAA리거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결국, 1999년엔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했고, 중간중간 콜업이 되었으나, 백업으로 주로 쓰였으며 시즌이 끝나고 199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되었으며, 여기서도 콜업됐다 떨어졌다를 반복했습니다.2001 시즌 중에 미네소타 트윈스로 이적했으나 미네소타에서도, 눈에 띌 성적은 보여주지 못하고, 마이너리그에서만 활동하다가 방출되었고, 2002년에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했으나, 2003년에는 부상까지 입으며 시즌 아웃되며 또 방출되었고, 2004년 플로리다 말린스와 계약을 하고, 21홈런 73타점 .373 .475 .692 1.166이라는 성적을 찍으며, 콜업까지 됐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지명할당되고 나서 팀을 찾고 있었고, 외국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KBO 리그 현대 유니콘스에서 오퍼가 들어오며 한국행을 선택하게 됩니다.
래리 서튼은 총액 25만 달러에 현대 유니폼을 입고 KBO 리그에서 활약하기 시작하는데 시즌 초반에는 적응을 못하며, 퇴출 1순위로 거론되는가 싶더니, 5월부터 타격이 살아나면서 맹활약했습니다. 35홈런 102타점 76득점 타출장 .292 .411 .592 OPS 1.003 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외국인 좌타 최초로 홈런왕을 먹고,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까지 거머쥐었습니다. 현대 유니콘스 강타자는 2003 심정수,2004 브룸바, 2005 서튼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 당시, 송지만,이숭용과 함께 막강 클린업트리오를 구축했으나 2005년은 현대 유니콘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시즌으로 7위를 랭크한 시즌이기도 합니다. 암울했던 시즌에 캘러웨이와 함께 투타에서 분전했습니다.외국인으로서는 첫 좌타 홈런왕이었고, 만 35세로 외국인 선수 중에서 2017 시즌이 끝난 지금까지 최고령 홈런왕이기도 합니다.홈런&타점&장타율 3관왕을 차지하고 볼넷도 86개나 얻어냈음에도 삼진은 101개에 병살타는 단 3개만 친 강타자였습니다.2005 시즌이 끝나고,2001년에 자신과 한솥밥을 먹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강타자인 알버트 푸홀스와도 함께 훈련하며 그의 타격폼을 익히겠다고 자신의 타격폼을 고쳤는데,도리어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성적이 하락했으며 무릎부상까지 겹치며 93경기에 나서는데 그쳤고 주력이 감소해 병살타도 급증했습니다. 결국 타율 .266 18홈런 61타점이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기고 현대와의 재계약에 실패했습니다.하지만 세부 기록을 보면 이 시즌 서튼의 기록은 절대로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기록이었는데 클래식 스탯만 보면 별볼일 없어보이지만 비율스탯을 다 따져보면 타출장 .266/.378/.489 OPS .868 wRC+ 155.2로, 부상으로 인해 결장이 잦아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지만 펠릭스 호세 다음가는 수준의 타격 지표를 나타냈는데 2005년에 한껏 높인 기대치+극심한 투고타저로 인한 클래식 스탯 부족+부상으로 인한 누적 스탯 부족+세이버매트릭스 스탯에 대한 가치 인식 부재가 전반적으로 겹쳐서 저평가를 받았을 뿐 투고타저가 극심하던 2006년 KBO에서 서튼의 성적은 분명 훌륭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가 재계약하지 않은 것은 2006 시즌 종료 시점 기준 36세였던 서튼은 이미 2005년에 비해 하락한 성적으로 노쇠화의 기미를 보였고, 여기에 부상으로 인해 나선 경기 수 자체가 부족했던 점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에이징 커브에 따른 노쇠화에 부상 여파가 겹치면 내년에는 성적이 더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이 때문에 현대는 서튼과의 재계약을 포기했습니다.
래리 서튼은 현대와의 재계약은 실패했지만 KIA 타이거즈와 계약에 성공 2007년 기아 유니폼을 입고 다시 한국 프로야구에서 일년을 더 뛰게 되지만 현대의 판단이 맞아떨어지며 서튼의 성적은 더욱 하락합니다. 눈야구는 됐지만 장타력이 예전같지 않아 기대에 걸맞지 않게 똑딱거리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2006년 부상 여파로 지명타자로만 나섰지만, 득점권 상황에서의 부진과 최희섭이라는 좌타 거포의 합류로 서튼은 팀에서 방출됩니다.서튼의 2007년 최종 성적은 34경기에 나와 타출장 .274/.398/.425 OPS .823 3홈런 10타점 14득점을 기록했습니다.장타력의 격감으로 4할대 장타율과 노쇠화로 기량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좋은 선구안으로 OPS 8할대를 기록하기는 했습니다.래리 서튼은 3시즌 통산 246경기에서 241안타-타율 0.280-43개 2루타-3개 3루타-56 홈런-173타점-140득점-출루율 0.397-장타율 0.532-OPS 0.929를 기록했습니다.
래리 서튼 수상 내역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2005)
홈런 1위 (2005)
타점 1위 (2005)
장타율 1위 (2005)
2006년 홈런 26개 2010년 홈런 44개-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의 첫 홈런왕
이대호는 조선의 4번타자라는 별명만큼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롯데 자이언츠 뿐만 아니라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이며 한미일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유일한 타자이기도 합니다.이대호는 경남고 시절 대한민국 U-18야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야구대회에 추신수,김태균,정근우 등과 함께 출전,준결승전에서 호주를 상대로 결승 솔로포를 때려내기도 했으며 결승전에서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습니다.이후 고3이던 200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1회전에서 류제국의 덕수정보고에 2-3 패배를 당하고 마는데 투수 이대호가 1회 3실점 이후 2회부터 무실점 무피안타로 호투했다는 것입니다.이대호는 경남고 졸업 후 2001년 롯데 자이언츠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는데 그 해 롯데의 1차 지명은 추신수가 받았지만,추신수는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를 거친 후 메이저리거가 되었습니다.이대호는 롯데에 투수로 지명받아 입단했으나 덩치에 비해 구속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구속이 더 떨어지게 되자 타자로 전향합니다. 당시 우용득 2군 감독이 이대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타자 전향을 하게 됩니다.입단 첫 해에는 타자 전향 훈련을 받으며 2군에서 주로 하위 타선에 배치되었는데 시즌 막바지인 2001년 펠릭스 호세가 잔여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아 시즌을 마감하자 이대호가 1군 무대 데뷔전을 가지게 됩니다.대타로 데뷔전을 치른 이대호는 1군 6경기에 출장하여 8타수 4안타 1타점으로 시즌을 마칩니다.하지만 2002 시즌,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우용득이 이대호를 붙박이 4번 타자로 기용하면서 개막전부터 4번 타자로 기용된 이대호는 시즌 개막 후 한달간 홈런은 1개에 그쳤지만, 타율은 놀랍게도 3할대 중반을 기록하며 시즌 초반 투수 김진우 및 조용준 등과 함게 신인왕 후보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롯데가 시즌 중반 15연패를 당하며 팀 성적이 나락으로 추락하자,정식 감독 취임 후 반년만에 옷을 벗게 된 우용득 감독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은 이대호가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대호에게 쪼그려뛰기 및 사직 야구장 스탠드를 오리걸음으로 오르내리기 등의 고전적인 훈련을 수행한 이대호는 무릎 부상을 당했고, 그 후 계속 재활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이대호는 이렇게 2002년 1군 74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78에 8홈런 32타점을 기록해 신인 2년차 + 타자전향 2년차 치고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긴 합니다.
이대호의 2003 시즌은 2002년 10월 왼무릎관절 수술을 받은 뒤 6개월째 배트를 들지 못했으며 이때 체중이 130㎏을 훌쩍 넘어버렸지만 배팅과 펑고를 시작하면서 곧바로 몸무게는 120㎏대로 줄게 되었습니다.무릎 부상 때문에 6월에 합류하며 1군 54경기 출장에 그쳤는데 타격 성적은 타율 .243 4홈런 13타점으로 홈런과 타점이 반토막이 납니다.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이대호는 풀 타임 출전을 하면서 점차 타격이 성장세를 그리게 되는데 타율은 낮았지만 파워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이해 타율 0.248 20홈런 68타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 주었는데 문제는 병살머신이어서 치면 무조건 병살, 홈런 정도여서 교타력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습니다.2005년 이대호는 2년 연속으로 20홈런을 기록했으며 타율 .266 21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전년도 대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KBO 올스타전에 동군 1루수로 선발되어 경기에서 역전 투런홈런을 날려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기도 합니다.2006년 15kg가량 감량하고 돌아온 이대호는 선구안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면서 타율, 타점, 홈런 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1984년 삼성 소속의 이만수가 세운 이후 22년 만의 트리블 크라운을 달성합니다.이때부터 이대호는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인정받게 되지만 이 시기에 괴물 신인 투수 류현진도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하며 결국 MVP는 류현진에게 뺏기게 됩니다.이대호의 홈런 1위한 기록이 26개로 역대 최저 2위의 기록이었던 반면 류현진의 평균 자책점은 2.23이었고 18승과 탈삼진 1위를 달성했기 때문입니다.또한 류현진의 한화는 한국 시리즈에 준우승을 거두지만 이대호의 팀 롯데는 7위를 거두며 류현진에게 MVP를 넘겨야 했습니다.하지만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며 아쉬움을 달랩니다.
2007 시즌 이대호는 121경기에서 타율 0.335(리그 3위),29홈런(2위),87타점(2위),출루율 0.453(3위),장타율 0.600(1위)를 기록하는데 이대호의 2007 시즌의 wRC+는 194.2인데 이대호 커리어 하이시즌인 2010시즌(192.4)이나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2006시즌(192.4)보다 더 높았습니다.2008년 롯데는 7년간 지속되던 최하위권의 수모의 끝내며 데뷔 최초로 포스트 시즌을 경험하지만,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4위 팀 삼성에게 3연패를 당해 탈락하고 맙니다.이대호의 2008 시즌은 타율 0.301, 18홈런, 94타점(리그 3위), OPS 0.879(리그 7위)를 기록합니다.2009 시즌 개인 통산 150홈런을 달성하기도 한 이대호는 타율 0.293, 홈런 28(리그 4위), 타점 100(리그 3위), OPS 0.908(리그 11위)를 기록했습니다. 2010년은 역대급으로 손꼽히는 이대호의 커리어하이 시즌으로 타격 7관왕을 달성했으며 세계 최초의 9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기록이 2010년 단 한 시즌에 나온 기록입니다.이때의 이대호는 21세기 최고의 타자 시즌으로 2015년의 테임즈와 함께 손에 꼽히기도 합니다.2010년 이대호 기록은 127경기 출장-478타수-174안타(1위)-타율 0.364(1위)-44홈런(1위)-133타점(1위)-99득점(1위)-출루율 0.444(1위)-장타율 0.667(1위) 등 타격 7관왕의 위엄을 달성합니다.2011 시즌이 시작하기 전 스토브리그에서 이대호는 타격 7관왕과 9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2개나 달성하면서 연봉의 대폭적인 인상이 기대되었고 본인도 상당한 인상을 바라는 듯 했고 이대호는 7억 원을 요구 했으나 롯데 측은 6억 3천만 원을 제시했는데, 사실 그전까지 5억대를 제시하다가 연봉 조정신청을 하자마자 구단 측에서 갑자기 액수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우여곡절 끝에 2011 시즌을 마무리한 이대호는 타율, 최다안타, 출루율에서 1위를 차지하였는데 타격왕 타이틀은 2010년에 이어서 2연패로 타격왕 2연패는 1992년 빙그레 이글스의 이정훈에 이어 19년만에 나온 기록으로 오른손 타자로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시즌 최종성적은 133경기 493타수 176안타(2루타 26, 3루타 1) 27홈런 113타점 2도루,63볼넷 60삼진 타율0.357 .433 .578을 기록합니다.2011시즌 종료 후 이대호는 FA를 선언,일본 오릭스 버팔로즈와 2년간 총액 7억엔(105억 원)에 계약을 하고 일본 무대 정복에 나서게 됩니다.
NPB 소프트뱅크 유니폼을 입은 이대호는 데뷔 시즌부터 완벽히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전 경기 출장에 리그 OPS 1위를 달성했습니다.2012년 일본 프로 무대 최종 성적은 525타수 150안타(5위), 타율 0.286(10위), 24홈런(공동 2위), 91타점(1위),볼넷 64개(3위), 출루율 0.368(4위),장타율 0.478(2위), OPS 0.846(1위)으로 일본야구 교류전을 포함한 144경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 뛰고 거둔 성적으로 수비는 1루수와 지명타자로 번갈아 가면서 했지만 이대호 다큐멘터리를 한 "오사카의 거인 이대호"에서 144경기를 다 뛰는게 어렵다고 할 정도였습니다.또한 퍼시픽리그 베스트9 1루수부문에 선정이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골든글러브와 베스트9가 구분되어있는데, 골든글러브는 순전히 수비력만 따져서 투표하는것이고 베스트9은 모든 기량을 종합해서 투표를 하는것입니다.우리나라 골든글러브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2년 계약의 마지막 해 2013년 이대호의 시즌 최종성적은 141경기 521타수 158안타(리그 8위) 2루타 27(리그 8위) 24홈런(리그 6위) 91타점(리그 6위) 70득점-사사구 70(리그 8위) 타출장 0.303(리그 9위)/0.384(리그 8위)/0.493(리그 7위) OPS 0.878(리그 6위) WAR 4.2로 시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두른 덕에 전체적으로 2012년보다 살짝 더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비록 시즌 막바지에 스탯을 많이 까먹었지만,최정상급 성적을 거뒀습니다.
이대호의 일본 진출 3년차이자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3년 19억엔 계약 후 이적 첫 시즌인 2014년 다이어트를 엄청한 후 시즌을 맞은 이대호는 여전히 득점권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시즌 최종 성적 타율 0.300(6위), 안타 170개(2위), 2루타 30개(5위), 홈런 19개(공동 8위), 68타점(12위)를 기록했으며, 소프트뱅크가 정규리그 최종전을 이기면서 커리어 처음으로 정규시즌 우승 경력을 추가하게 됩니다.특히 타점 부분에서 기대 이하라고 할 수 있었는데 소뱅이라는 강팀에서 뛰는 중심 타자가 타점이 68점 밖에 안되는 것은 분명 아쉬운 성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일본 진출 4년차인 2015년 이대호의 성적은 타율 0.282-31홈런-98타점-OPS .892로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8월까지만 하더라도 타율 3할 30홈런 100타점 OPS 0.9대는 충분히 기록할 것으로 보였으나, 9월에 4월을 능가하는 부진을 겪으며 성적을 깎아먹고 말았습니다.특히 이대호는 야쿠르트와의 일본시리즈 5경기에서 16타수 8안타 2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불방망이를 휘둘렀는데 이대호의 8타점은 5경기로 끝난 일본시리즈 가운데 최다타점 신기록으로 2차전, 4차전, 5차전까지 결승타 3개를 날렸고, 이는 단일 시리즈 최다 타이 기록이었습니다. 1990년 세이부 쿠바출신 데스트라데 이후 25년만의 기록으로 결승 홈런 2개는 2004년 와다 가스히로 이후 11년만에 6번째 기록이기도 합니다.결국 소프트뱅크가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했고, 이대호는 일본시리즈 MVP로 선정되었습니다.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이며, 외국인 선수로서는 1996년 오릭스의 트로이 닐 이후 19년만의 일이며 역대 8번째였습니다.이대호는 이후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하며 일본 생활을 마감하지만 일본 퍼시픽리그 4년 통산 타석 1위, 타율 4위, 홈런 3위, 안타 2위, 타점 2위, OPS 1위(출루율 3위, 장타율 1위), wOBA 2위, WRC+ 2위, OPS+ 2위를 기록합니다.사실상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타자들 중 가장 성공한 타자라 할 수 있는데 이대호 이전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타자 케이스인 이승엽과 비교해보자면, 8년간 이승엽은 14.9의 WAR을 기록해4년간 17.6을 기록한 이대호에 비해 낮은 생산력을 기록했고, 비율 스텟에서도 wRC+ 120으로 평균보다는 나았지만 이대호보다는 부족했습니다. 이대호의 NPB OPS는 .856, 이승엽은 .818로 표면적으로는 큰 차이로 보이지 않는데, 이대호의 일본진출 시기가 하필 새로운 공인구 효과로 역대 최고 수준의 투고타저 시기였던 바에 기인하는데 실제 당시 기록을 보면 홈런과 2루타, 장타율 등의 스탯은 이승엽도 좋은 편이었지만 나머지 모든 타격 부문에서 이대호와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이대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녹록치 않았는데 시애틀 매리너스와 메이저리그 계약이 아닌, 스프링캠프 초청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으로 보장연봉은 100만 달러에 옵션이 300만 달러로 총액 400만 달러의 계약이었습니다.이대호의 주 포지션인 지명타자에는 2014년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40홈런), 2015년 아메리칸 리그 홈런 2위(44홈런)에 빛나는 넬슨 크루즈가 버티고 있었고 1루수에도 고액 연봉을 받는 애덤 린드가 1순위로 예정되어있었으며 플래툰 파트너로 한 자리를 다투는 헤수스 몬테로와 에드 루카스와 경합해야 했습니다. 사실상 매리너스는 영입 시부터 이대호를 주전감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며, 이대호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25인 로스터 경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잘하면 플래툰, 못하면 백업 대타 정도의 롤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이대호는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18게임에 나와 40타수 10안타 홈런 1개, 2루타 3개, 9타점 7득점 6삼진 4볼넷을 기록했으며 타율은 0.250-출루율은 0.333-장타율 0.400-OPS 0.733으로 아주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볼 수도 없는 성적이었습니다.하지만 약점으로 지목된 주루와 수비는 괜찮은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결국 이대호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25인 로스터에 최종 포함되었으며 등번호 10번을 받게 됩니다.이대호는 비록 플래툰으로 메이저리그를 뛰게 되지만 한국 프로야구와 일본 프로야구 그리고 메이저리그까지 거친,국내에서 유일하게 삼국 프로야구를 뛴 선수가 됩니다.메이저리그 성적은 전반기 타율 .288 OPS 0.844 wRC+ 130으로 비록 플래툰이긴 해도 전반기는 매우 잘했다고 볼수 있지만, 후반기 부진(타율 .200 OPS 0.582)으로 상당히 깎아먹었으며 결국 최종성적은 317타석 292타수 74안타 14홈런 49타점, 볼넷삼진 20/74-타율 .253-출루율 .312-장타율 .428-OPS .740, wRC+ 103, OPS+ 102-fWAR 0.3 bWAR 0.3을 기록합니다.그렇게 메이저리그 시애츨에서 1년을 뛴 이대호는 고향 롯데로 컴백하게 됩니다.그런데 2021년 2월 실시한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1시즌만 뛴 선수 중 가장 좋아하는 선수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하는 등 간간히 언급되고 있습니다.미국에 진출해서 성공을 거둔 아시아 타자가 이치로, 아오키 등 대부분 날렵한 쌕쌕이형 타자가 많았고 홈런타자인 마쓰이도 비만 체형은 아니었던 데 비해 194cm의 거대한 몸집에 배가 나온 푸짐한 체형의 동양인 홈런타자 1루수라는 독특한 캐릭터성에, 항상 웃는 듯한 정감이 가는 인상에, 인상적인 활약도 제법 남겨서 뛴 기간이나 실제 세이버 스탯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시애틀 팬에겐 짧았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은 선수라고 합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일년을 뒤로하고 다시 고향 부산 롯데로 돌아온 이대호는 2018년부터 은퇴 시즌인 2022년까지 5년동안 국내 리그 스탯을 다시 쌓아갑니다.2017년 시즌 이대호는 타격 종합 지표인 wRC+ 에서 이대호의 잠재력이 만개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 2009년을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132.4를 기록했는데 이 수치는 2008년 이대호의 wRC+ 147.1보다 낮은 기록이고, 2009년 이대호의 wRC+ 131.3보다 근소하게 높은 정도지만 2009년은 주포지션이 3루였기에 포지션 조정을 먹어서 이 해 WAR인 3.67보다 1이상 높은데 WAR로만 따지면 마찬가지로 3루수를 본 적이 있는 2005년보다도 약간 낮습니다.이대호는 메이저에서는 wRC+ 102를 기록했고, 일본에서는 2012 ~ 2015년 wRC+ 150을 기록했는데 KBO 리그와 타 리그와의 수준 차이를 감안 했을 때 이 시즌은 이대호가 9경기 연속 홈런을 치며 KBO 리그 수준을 능가한 시즌 이후로 가장 부진한 시즌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개인 통산 6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그렇게 다시 돌아온 이대호는 4년간 총 565 경기에 출장-2109타수-650 안타-93개 2루타-1개 3루타-107 홈런-434 타점-269 득점-194 볼넷-타율 0.308-출루율 0.381-장타율 0.505-OPS 0.886을 기록하고 마지막 은퇴 시즌인 2022년 시즌에는 142경기 출장-540타수-179안타-23개 2루타-23홈런-101타점-타율 0.331를 기록하며 은퇴시즌으로보면 이승엽보다 더 탁월한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이대호는 17시즌 통산 1971 경기에 출장-7118타수-2199안타-331개 2루타-6개 3루타-374 홈런-1425 타점-972 득점-타율 0.309를 기록,이대호라는 이름 석자를 KBO 리그에 뚜렷하게 남깁니다.
2007년 심정수(삼성) 31개
심정수는 이승엽과 함께 2000년대를 대표하는 홈런타자이자 2003 시즌 WRC+ 210, 2002-2003 2년 연속 3할-40홈런-100타점을 기록한 리그 최고의 거포였지만 동시대에 함께 전성기를 맞이한 이승엽의 기록과 스타성에 가려 2인자에 그친 비운의 선수이기도 합니다.전성기였던 두산 말년~현대 시기를 요약하면 컨택, 수비, 선구 전부 다 올스타급 그 이상의 미칠 듯한 파워로 리그를 지배했던 타자라고 할 수 있는데 같은 시기 홈런왕 타이틀을 다툰 이승엽과의 타격 스타일을 비교하면 이승엽이 거포로서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타격 기술로 공을 담장 밖으로 보내는 유형이라면, 심정수는 웨이트로 다져진 엄청난 근육과 특유의 기마자세 타격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우 강한 파워와 타격 순간의 임팩트로 평범한 야수였다면 외야수에게 잡힐 뜬공도 홈런으로 만들어내는 파워히터 유형으로 이 파워로 만들어지는 강한 타구의 단타 + 투수들의 공포 심리로 인해 현대에서의 최전성기인 2002~2003년도에는 타율도 .328로 웬만한 교타자의 타율만큼 높아지며 출루율 .441, 장타율 .682, OPS 1.122라는 KBO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전성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통산 0.287 .388 .533, wRC+ 152.6으로 용병을 제외하면 역대 OPS 10위 안에 드는 강타자이며, 좌타자를 제외하면 심정수 위에는 김태균과 박병호 밖에 남지 않는데 wRC+는 용병을 제외하면 통산 5위이며 위로 우타자는 이만수 하나뿐입니다. wRC+로는 한 때 라이벌이였던 이승엽보다도 우위에 있는 타자였지만 짧은 전성기 이후 파워는 좋았지만 컨택에서 아쉬운 모습을 계속 보였음에도 뛰어난 선구안으로 생산성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했습니다.부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전성기 시절에는 OPS 1을 넘긴 시즌이 3번이나 있고, 이승엽과 홈런 경쟁을 벌였던 2003년에는 무려 wRC+ 210을 기록했는데 에릭 테임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KBO 역사에서 역대 가장 뛰어났던 단일 시즌 기록 중 하나였으며 당시에는 아직 기록에 대한 세부적인 평가에 대해 야구 관계자들이 무지했고, 이승엽의 56홈런의 임팩트에 가려져서 그렇지 홈런과 타점을 제외한 모든 지표에서 2003심정수는 2003이승엽보다 한 수 위의 성적을 기록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부상과 시력문제로 인해 성적이 떨어졌던 시기 역시 과거 만큼의 무시무시한 생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저평가 받을 만한 성적은 절대 아닌데 2할 중반을 겨우 마크했던 타율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출루율이 가장 떨어졌던 시즌이 2004년 현대에서의 .385일 정도로 공을 잘 봤던 준수한 OPS 히터였으며 이 시기가 KBO 역사에서 눈에 띄는 투고타저 시즌임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심정수는 부상으로 인한 공백이 아쉬웠다는 평가는 타당해도 경기장에 나서면 충분히 제 몫을 해주는 타자였습니다.통산 홈런+볼넷의 타격 결과 비율이 전체 타석의 18%를 넘고, 홈런+볼넷+삼진의 비율이 37%에 육박할 정도로 인플레이된 타구 비율이 높지 않은 타자였는데 국내 타자들 중 이보다 높은 비율을 기록했던 타자는 심정수보다 볼넷과 삼진이 좀 더 많았던 이병규와 최희섭 정도,다른 OPS 히터들과는 다르게 통산 BABIP은 .304로 높지 않았는데 어퍼스윙을 통해 만들어낸 뜬공으로 홈런과 볼넷을 양산하고, 이로 인해 높은 순장타율과 출루율을 유지하지만, 타율 기대값은 낮은 뜬공 특성상 BABIP 자체는 낮게 잡히는 유형의 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전성기인 03년에도 리그 평균보다 낮은 .287의 BABIP를 기록하는 등 BABIP의 오르내림이 성적의 오르내림과 직결되지 않았던, 인플레이 타구보다는 홈런을 위시한 장타와 눈야구를 통해 생산성을 뽑아내던 타자였습니다. 그의 성적 하락은 BABIP보다는 순장타율과 홈런 비율의 하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정수는 약물 복용 의혹에 시달린 대표적인 선수인데 증거들이나 공식적으로 심정수가 약물 복용으로 몸을 키웠다는 증거는 전부 카더라 통신이며 두산 시절부터 원래 힘이 장사였던 심정수는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힘이 더 커지고, 투수 친화 잠실구장을 벗어나 타자 친화 구장 현대로 가고 여기에 기록적인 타고투저 기간 동안에 이승엽이라는 훌륭한 경쟁상대 덕분에 역사에 남을 만한 성적을 기록하게 되지만 그 리즈시절이 라식수술과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인한 각종 부상 때문에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는게 팩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만수-장종훈-심정수-박병호-최정으로 이어지는 한국 야구 최고의 우타거포 중 한 명으로 투타 합쳐서 역대 WAR 15위 권안에 들어가며, 단일시즌 WAR 기준 2003 심정수가 1997 이종범보다 높기도 합니다.이승엽과 박병호와 함께 단일 시즌 50홈런을 넘긴 단 셋 뿐인 타자이며, 외야수로서는 유일합니다. 또한 역대 top 5에 들어가는 단일시즌 기록을 남긴 선수이지만 아쉽게 50홈런 치고도 시대를 잘못 타고나 MVP를 수상하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끝마쳐야만 했던 비운의 2인자이기도 합니다.파워는 당연하고 출루율도 좋은데 심정수의 통산 출루율은 .388로서 자신의 타율인 .287보다 1할 이상 높으며 통산 wRC+는 152.6으로 양준혁, 이만수, 장효조에 이은 4위이며, 현역 선수중에서 이보다 높은 선수는 아무도 없습니다.이승엽도 심정수보다 wRC가 낮습니다.통산 WAR은 56.17인데 33살까지 저 커리어를 쌓고 라식 수술의 후유증으로 일찍 은퇴했다는게 매우 아쉬운데 심정수는 먹튀와 2인자 이미지, 전성기를 비인기팀이자 지금은 사라져버린 현대에서 보냈기에 저평가 받는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심정수는 프로 15년간 OB와 두산 베어스 그리고 현대와 삼성에서 활동했으며 1450경기-5050타수-1451안타-타율 0.287-231개 2루타-14개 3루타-328 홈런-1029 타점-859 득점-장타율 0.533-출루율 0.387을 기록합니다.홈런왕은 딱 한번 최전성기가 지난 은퇴시점 1년 전인 2007년 3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합니다.46개와 53개의 홈런을 날린 02과 03년에는 이승엽에 밀렸으며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후에는 무주공산 홈런왕 타이틀에 쉽게 접근하는듯 싶었지만 이때는 심정수가 부상과 부진으로 타이틀 홀더가 되지 못하며 대망의 홈런왕을 4년여만에 힉득하지만 곧바로 은퇴하기에 비운의 홈런왕이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2008년 김태균(한화) 홈런 31개
김태균은 야구 명문 천안 북일고 3루수로 1학년부터 팀의 중심타선에 들어간 초고교급 선수였습니다.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WBSC-U-18 야구 월드컵을 재패한 황금 세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3학년 시즌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한화 이글스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김태균을 1차 지명, 2000년 7월에 계약금 1억 6천만원을 받고 입단합니다.19살의 기태균은 2001 시즌 초반엔 1군에 자리가 없어 2군에 머물렀으나 5월에 승격 후 주로 대타로 기용되며 날카로운 타격을 보였고, 곧 대선배 강석천의 3루를 빼앗아 버렸습니다.김태균의 놀라운 활약에 고무된 이광환 감독은 김태균을 4번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는데,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연소 4번 타자였습니다. 시즌 내내 기복없는 활약을 보여주며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4강에도 올려 놓은 김태균은 준플레이오프에서도 4번으로 출장,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홈런포를 뽑아내며 큰 경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믿었던 송진우 등 베테량들이 부진하며 2패로 스윕당해 광탈했지만, 10대 4번 타자 김태균의 흔들림 없는 활약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시즌 종료 후 성적은 타율 .335와 20홈런, 대타 출장을 포함하여 1군 88경기 출장으로 이뤄낸 기록으로 19살 김태균의 압도적인 활약에 준수한 성적으로 풀 타임을 소화한 삼성의 박한이는 김태균에 밀려 신인왕 투표에서 2위에 그치게 됩니다. 데뷔 시즌의 20홈런은 풀 타임 기준으로는 절반을 약간 웃도는 245타수에서 기록된 것으로, 풀타임을 뛸 경우 40홈런을 칠 거포로 다들 기대했습니다. 3루 수비는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원래 3루수였던 강석천의 수비가 과히 좋지 않았고, 마땅한 대안도 없어서 한동안 주로 3루를 맡았습니다.기대를 모은 2002 시즌,김태균은 시즌 전 받은 라식 수술을 부작용과 더불어 소포모어 징크스로 거하게 말아먹으며 모든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는데 2001 시즌과 비교해보면 홈런과 득점, 장타율까지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삼진도 100개를 돌파하였으며 0점대 war로 시즌을 마무리합니다.
데뷔 3년차이던 2003년 김태균은 데뷔 시즌에 버금가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40홈런을 넘기지 못합니다.그래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떨쳐내고타율 0.319에 데뷔 첫 30홈런(31홈런)과 150안타를 기록하였으며 장타율은 .572로 개인 최고 장타율을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삼진도 106삼진을 기록하며 개인 최다 삼진을 기록하였고 현재까지 개인 최다 삼진으로 남아있습니다.이승엽의 부재 후인 2004년에 투고타저시대가 찾아옴과 동시에 프로야구의 흥행이 저조했지만 김태균은 2년 연속 20홈런과 데뷔 첫 100타점을 기록합니다.한화는 포스트 장종훈으로 김태균을 낙점하고 2005년도에 장종훈이 은퇴하면서 포스트 장종훈으로 김태균에게 장종훈만큼의 임팩트 있는 성적을 기대했었지만 장종훈과는 스타일 자체가 정반대였던 김태균은 장종훈만큼의 임펙트있는 시즌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장종훈이 떠난 한화에서 김태균의 2005 시즌은 안타, 타점, 장타율 각 2위와 타율 3위, 출루율 5위를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경신하고 1루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였으며 KBO 올스타전에도 출전,홈런 레이스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거포로서 팬들의 기대치를 더욱 높이기도 했습니다.2006년 한화는 준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내게 되지만 김태균은 커리어로우를 기록하게 되는데 2할9푼대의 타율과 13홈런으로 김똑딱이라는 오명을 쓰고 미디어의 차디찬 관심을 받게 되는데 김태균은 시즌 중엔 부진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하는데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타격감을 보여 주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MVP까지 차지하는 등 한국시리즈 진출의 1등 공신으로 등극합니다.2007 시즌 장종훈 후계자로의 김태균에게 바라는 성적과의 괴리감으로 분명 못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감이 크지 않은 시즌으로 성적을 마친 2007년 성적은 118경기에서 타율 0.290-21홈런-85타점(4위)-장타율 0.483-출루율 0.420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2008 시즌 역시 김태균이라는 이름값에는 어울리지는 않지만 데뷔이후 첫 홈런왕(31개)과 장타율 1위를 차지하기도 합니다.김태균의 2008 시즌 성적은 115경기에서 133안타 타율 0.324(5위)-31 홈런(1위)-92 타점(4위)-81 득점(5위)-장타율 0.622(1위)출루율 0.417(3위)를 기록합니다.김태균은 2009 시즌 두산과 경기중 포수 최승환과 부딪힌 후 헬멧이 벗겨진 상태로 뒤통수를 땅에 박아서 뇌진탕 후유증으로 부진을 겪지만 시즌 말 부활 합니다,최종성적은 95경기 출장 타율 0.330 19홈런 62타점을 기록하며 최하위인 팀 클린업에서 활약하였고 FA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갔습니다.
김태균은 2009시즌 종료후,치바 롯데 마린즈와 3년 계약을 맺고 일본 프로야구에 도전장을 내밉니다.일본 리그에서의첫시즌인 2010년 김태균의 성적은 141경기 출장 527타수-141안타-타율 0.268-21홈런-92타점-장타율 0.429-출루율 0.357로 괜찮은 성적(특히 타점은 리그 6위다)이었지만 득점권 타율 0.236로 사실상 꼴지에 랭크되어 있고, 병살이 24개로 단연 선두에 랭크되어 있었으며 삼진 역시 1위 라쿠텐의 야마사키 타케시에 7개 뒤진 140개로 2위였으며 장타율은 거포형 1루수로서 부족한 .429였으며, 타격의 대표적 세부스탯인 WRC+은 115, WAR은 2.2를 기록하면서 클래식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습니다.비록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2011년은 보다 적응한 모습으로 더 나은 성적을 올릴 거라는 기대감이 김태균에게 있었지만 일본 도호쿠 대지진다으로 인해 전력난이 심해지면서 대폭 늘어난 낮경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손목 부상까지 겹치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몇경기 만에 1군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7월에 김태균이 부상 장기화와 지진의 여파로 인한 심리적 충격 등을 이유로 치바 롯데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FA 자격을 보유하게 되고 국내 복귀하게 됩니다.김태균은 이때 일본 언론 뿐 아니라 국내 언론에게도 엄청 디스를 당하게 됩니다.
2012년 김태균은 한화와 계약 기간 1년에 옵션없는 순수연봉 15억원에 계약하며 다시 국내 무대에서 뛰게 됩니다.김태균이 컴백한 2012년 성적은 126경기에서 151안타(3위)-타율 0.363(1위)-16 홈런-80 타점-92 볼넷(1위)-출루율 0.474(1위)-장타율 0.536(4위)를 기록합니다.2010년 후반 들어 세이버매트릭션들에게 굉장히 재평가받는 시즌인데, WAR과 WRC+ 스탯에서 리그 최정상을 기록했음이 뒤늦게 밝혀집니다. 2012년의 KBO리그는 2000년대 이후 손에 꼽을 투고타저 시즌이었는데 타율 2위 강정호와 약 5푼이상 차이나고 wRC+에서 중시하는 출루 2위 박석민과도 4푼 이상 차이나는 등 세이버 스탯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합니다.그래서 클래식 스탯을 중시하는 골든글러브는 홈런, 타점왕 박병호에 밀려 차지하지 못했으나 세이버매트릭스 기록으로 따지면 2012년 최고의 타자는 김태균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김태균은 일본 프로리그 2년을 제외한 19시즌동안 KBO리그에서 활동했으며 총 2105경기 출장- 6900타수 2209 안타(3위)-2루타 399개(5위)-3루타 8개-타율 0.320(5위)-311홈런-1358 타점(4위)-1024득점-28도루-1249 볼넷(2위)-장타율 0.516-출루율 0.421(3위)의 통산성적을 거둡니다.출루율 1위만 리그에서 4번을 했을만큼 출루율이 좋은 선수였으며 2017년에는 무려 301일 동안 86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미국 연속 출루기록은 1949년 테드 윌리암스의 84경기,일본 기록은 1994년 69경기 연속출루를 기록한 스즈키 이치로이며 대만 프로야구는 2016년 린즈성의 109경기 연속 출루 기록)
2009년 김상현(KIA) 홈런 36개
2009년 36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한 김상현(당시 기아)은 前 해태/기아 타이거즈,LG 트윈스,SK 와이번츠 및 kt wiz의 외야수,3루수로 데뷔하였으나 수비 미숙 및 주전 경쟁 등을 이유로 외야수로 전업하였다가 kt 시절엔 대부분 1루수를 맡았으며 이후 독립구단 저니맨 외인구단에서 선수로 활동하다가 2018년 1월 말 감독이 되었다가 같은해 5월초에 개인사 문제로 팀을 퇴단,현재는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겸 자영업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등번호는 기아 타이거즈 입단 초기에는 46번 - LG 트윈스 이적 후 59번 - 상무 제대 후 7번 - 2009시즌 개막 후 26번 - KIA 타이거즈로 이적 후 SK로 팀을 옮긴 후에도 27번을 계속 사용하고 kt wiz에서는 19번을 달게 되었습니다.기아 타이거즈 2009 시즌 우승의 주역이으로 2009 시즌의 어마어마한 임팩트 때문에 딱 공갈포스러운 통산 성적에 비해 팬덤들 사이에서 주목도는 높은 선수이지만 야외 차안에서 불미스럽고 치욕적인 사건을 일으켜 자신의 야구인생의 모든 커리어가 멈춰서게 되어 버렸으며, 자신은 물론 팀에게도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주며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김상현은 파워는 인정받을 정도였지만 2할 초,중반의 타율과 수비 에러 그리고 상무 피닉스에서 군복무를 하며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큰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 친정집 기아로 다시 돌아온 2009년,기아 타이거즈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이 해 압도적인 표 차이로 2009년 정규시즌 MVP로 선정되었으며, KBO 골든글러브도 차지하는데 시즌 중간에 트레이드된 선수가 MVP를 차지한 건 역대 최초이자 2021시즌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사례이기도 합니다.2009년 연봉이 5,400만 원이었는데 연말에 11개의 상을 수상하며 벌어들인 상금만 최소 6천만 원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김상현의 2009시즌의 최종 성적은 121경기 출전 448타수 141안타로 타율 0.315(리그 7위), 홈런 36(리그 1위), 타점 127(리그 1위), OPS 1.011(리그 5위)를 기록. 해태 시절 홍현우가 기록한 국내 선수 최다 홈런, 최다 타점 기록인 34홈런과 111타점을 넘어섰습니다. 팀 내 타율도 1위였으며 장타율(0.632) 1위와 득점권 타율(0.403)이 특히 높았으며 출루율과 비득점권 타율은 타율/OPS에 비하면 의외로 낮은 편으로 4번 타자보다는 한방을 쳐줄 수 있는 5번 타자감으로 더 적당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4번에 무시무시한 득점권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최희섭이 있었는데 2009년 한국 시리즈 최희섭의 득점권 타율은 무려 5할일 정도로 득점권에 강했습니다.
김상현은 이후 SK와이번츠-kt wiz 등으로 팀을 옮긴 후 2015 시즌 성적은 타율 0.280, 27홈런, 88타점, 133안타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이후 FA 자격을 얻게 되는데 kt 구단 창단 첫 FA 선수가 되었으며 4년 17억원에 계약합니다.그렇게 기대감을 품고 2016 시즌을 시작하지만 60경기 정도 치른 시점에서 문제의 사건이 터지며 불명예스럽게 선수의 마지막을 끝내게 됩니다.김상현은 국내리그에서 통산 14 시즌을 뛰며 1082경기 출장 3411타수-874안타-타율 0.256-2루타 159개-3루타 10개-158홈런-570타점-465득점-54도루-373사구-장타율 0.448-출루율 0.331등 기록합니다.
2011년 최형우(삼성)-홈런 30개
최형우는 최정,양의지와 더불어 KBO 리그 2010년대 최고의 선수로 자주 언급되는데 특히 타격 기록은 넘사벽 수준인데 그 이전에도 클린업 트리오로서 충분한 성적을 올리긴 했으나, 본격적인 전성기는 커리어하이인 2011 시즌을 기점으로 그 이후의 몇 년 정도입니다.동시대에 그보다 더 나은 단일 시즌성적을 올렸다고 단언할 수 있는 타자는 박병호와 에릭 테임즈 정도 뿐이며, 커리어 하이 시즌의 성적은 박병호와 wRC+나 WAR/144로 볼 때 거의 동일하다(박병호 2015년, 최형우 2011년).아쉬운 점은 팀이 전통의 타격 강팀 삼성 라이온즈 였기 때문에 저평가가 심했다는 점인데 커리어하이인 2011 시즌이 워낙 투고타저여서 절대적인 비율스텟이 압도적이지 못했던 것도 아쉬운 점이며 이후 클래식으로든 비율로든 밀리지 않는 시즌을 몇 차례 더 기록하고 나서야 저평가를 벗을 수 있었습니다.풀타임 20홈런 이상을 보장하는 파워에 타율 3할을 넘길 수 있는 정확성, 통산 출루율 4할이 넘는 선구안을 가진 최형우는 발은 느린 편이나 주루센스가 괜찮아서 주루사는 적습니다.게다가 꾸준함과 내구성도 자랑하는데 2008 시즌부터 2017 시즌까지 리그에서 가장 많은 안타와 홈런, 타점을 기록한 타자이고 홍성흔과 더불어 3시즌 연속 타율 0.330을 기록한 단 둘 뿐인 선수입니다.홈런왕 1회를 포함해 시즌 30홈런을 4번이나 넘겼습니다.
최형우는 기아 타이거즈 윤석민에게 상당히 강했는데 통산 상대 타율이 4할에 육박하고 윤석민을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때려낸 적도 있습니다.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5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홈런을 기록했었지만 포스트 시즌 타율이 다소 낮다는 점 때문에 꾸준한 홈런에도 불구하고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한 편이입니다. 다만 이 평가는 2012년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2014년에는 홈런을 치지 못했지만 대신에 안타를 많이 때려내어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했고, 5차전의 끝내기 역전 2루타와 6차전의 추가 2타점 적시 2루타로 역시 해결사 본능은 어디 가지 않았음을 잘 보여줬으며 5~6차전의 연속 2루타로 PS 최다 2루타(15개) 기록을 세웠습니다.삼성 시절 30홈런 정도를 때리는 거포였지만 KIA 이적 후 30홈런을 넘긴 적이 없는데 장타력은 전성기가 지나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2017~2018 시즌 타율은 3할 중반에 홈런은 20개 중후반, 타점은 100개 이상을 기록하며 중장거리 타자로서 타선의 중심 역할을 충분히 해줬습니다.2020 시즌에는 지명타자로 전업하면서 2019 시즌의 에이징 커브 의심은 말끔히 씻어내며 파워가 회복되고 타격 능력은 더 상향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354/.433/.590 wRC+ 168.4를 기록하며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최형우는 2011년 처음으로 30개의 홈런과 118 타점,장타율 0.617로 타격 3관왕에 올랐으며 2016 시즌에는 138경기에 출장,519타수 195안타-타율 0.376-2루타 46개-31홈런-144타점-99득점-장타율 0.651(2위)-출루율 0.464(2위)를 기록하는데 최다안타,타율과 2루타,타점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합니다.2020년에도 140경기에서 안타 185개(4위) 타율 0.354(1위)를 기록하며 타격왕을 기록하기도 합니다.최형우의 KBO 17년 통산성적은 1944경기 출장-7021타수 2193 안타-타율 0.312-2루타 463개(2위)-3루타 16개-356 홈런(5위)-1461 타점(2위)-1160 득점-장타율 0.535-출루율 0.40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형우 수상 내역
한국시리즈 우승 5회 (2011~2014, 2017)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5회 (2011, 2013, 2014, 2016, 2017)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2020)
신인왕 (2008)
타격왕 2회 (2016, 2020)
시즌 최다 안타 (2016)
홈런왕 (2011)
타점왕 2회 (2011, 2016)
장타율 1위 (2011)
출루율 1위 (2017)
연도 | 선수(소속) | 홈런 |
2004년 | 박경완(SK) | 34개 |
2005년 | 서튼(현대) | 35개 |
2006년 | 이대호(롯데) | 26개 |
2007년 | 심정수(삼성) | 31개 |
2008년 | 김태균(한화) | 31개 |
2009년 | 김상현(KIA) | 36개 |
2010년 | 이대호(롯데) | 44개 |
2011년 | 최형우(삼성) | 30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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