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고 결코 지지않는 단 하나의 의지의 파이터
세계챔피언을 꿈꾼 투혼의 복서 김득구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급 챔피언 결정전
세계챔피언 레이 맨시니 24전 23승 1패 19KO승
(통산 30전 25승 5패-김득구와의 시합 이후 6전 2승 4패)
VS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
OPBF 라이트급 챔피언 김득구
17승 1패1무 8KO승(통산전적:20전 17승 (8KO) 2패 1무)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린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한 한국인 선수가 절대적인 열세라는 평가를 뒤엎고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14 라운드까지 분전하다 결국 KO로 패배하고 맙니다.하지만 사건은 이후 벌어지는데 패배한 한국인 복싱선수는 의식을 잃은 후 병원에서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으며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겨우 26살의 어린 나이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맙니다.우리들에게 비운의 복서로도 잘 알려진 김득구 선수였습니다.상대는 레이 맨시니였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투지로 명승부전을 연출했지만 결국 사각의 링에서 깨어나지 못한 김득구 선수의 사망으로 인해 당시 복싱계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많은 룰들을 고치게 됩니다.그의 사후 1984년 이계인 주연의 영화 울지 않는 호랑이라는 제목으로 김득구 영화가 개봉했으며 20여년이 지난 후 2002년에도 곽경택 감독이 연출,유오성이 주연한 챔피언이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합니다.
소년 김득구,가난을 벗어나려고 도시로 떠나다
김득구는 1956년 강원도 고성에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으나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해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습니다.호적상으로 1955년 1월 8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득구는 가난하게 자랐으며,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 및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무작정 17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떠나는 김득구를 말리지 못하고 손에 단 돈 3천원을 쥐어줬다고 합니다.서울에 올라온 김득구는 버스에서 물건 등을 파는 외판원을 하던 중 우연찮게 복싱 세계타이틀 매치를 보고난 이후 복싱에 올인하기로 하는데 복싱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이,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틈틈이 공부를 병행하여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합니다.복싱 선수가 되기위해 동아체육관에 입문,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하게 됩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한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은 이후 1982년 2월 28일 OPBF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 경기 결과로 인해 세계 복싱 협회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합니다.이후 같은 해에 네 번의 경기를 더 가지면서 OPBF타이틀도 3차 방어전까지 해냈지만, 그때까지도 비 동양권 선수와의 경기는커녕 아시아 내 원정 경기조차 단 한 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챔피언인 레이 "붐붐" 맨시니(Ray Mancini)와 타이틀전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김득구 측에서는 어렵게 생긴 기회인 만큼 필승을 다짐하며 맹훈련에 들어가게 됩니다.
1982년 11월 13일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의 운명의 날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타이틀전은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렸습니다.김득구는 비장한 각오로 관을 준비해 놓고 가서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는데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기뻐하는 사람 없이 슬픔만이 가득한 비극만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습니다.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맨시니가 유효타는 더 많았어도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10회 때부터 체력 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으며 그 후 11~13회에 걸쳐 계속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지만 이 때 허용한 집중타로 김득구의 눈 주위가 크게 부어올랐습니다.운명의 14회.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김득구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공이 울리자 마자 맨시니에게 다시 달려들어 펀치를 섞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유효타를 날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지칠 대로 지쳐 가드를 완벽하게 올리지 못한 김득구의 왼쪽 머리에 맨시니의 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습니다.이에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으나 이어지는 맨시니의 왼손 훅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으나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김득구는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스텝도 넓게 밟지 못해 안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달려들던 맨시니가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제대로 적중해 버렸습니다. 김득구는 이 충격만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운되고 말았습니다.김득구는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고 결국 다시 일어서기까지 했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으며 이에 심판이 KO를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확정되었스비다.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으며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향년 26세를 끝으로 불꽃같은 삶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김득구와 맨시니의 미스 세계 타이틀 매치업의 진실_밥 애럼 프로모터의 농간
김득구는 나름 전적은 괜찮았지만 세계무대 경력이 없어 세계 복싱계에선 무명인 선수였는데 WBA 세계랭킹 1위가 되고 동급 최강으로 평가받는 챔피언과 매치업이 이루어진 부분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많았는데 이런 의아한 매치업이 이루어진 것은 매니 파퀴아오의 프로모터로도 유명한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습니다.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뉴욕 골든글러브 우승 경력이 있다)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무명의 동양챔피언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리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아 버립니다.또한 레이 맨시니가 CBS 채널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사정 때문에 밥 애럼이 이런 무리수를 던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레이 맨시니가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배한다면 모처럼 맺은 TV 계약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뒤떨어지는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상대로 링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속 선수를 돈벌이 상품으로만 여기던 밥 애럼은 다음 상대로 또 다른 약체(미끼) 선수인 캔 보그너를 이미 내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밥 애럼은 검사 출신의 엘리트이지만, 뒷골목 범죄자 출신인 돈 킹보다 몇 배는 더 추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로 이런 복싱계 이면의 추악한 비지니스가 김득구의 생명을 뺏어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밥 애럼은 김득구의 죽음조차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는데 김득구의 경기 이후 2개월간 본인의 프로모션에 큰 경기가 잡혀있지 않고, 라이벌인 돈 킹의 프로모션엔 3건의 큰 경기가 잡혀있다는 걸 파악한 밥 애럼은 돈 킹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이미지를 높이기위한 수단으로 2개월간 미국 전역의 프로복싱경기를 중지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심지어 밥이 이용한 돈은 프로모터로는 라이벌이나 사적으론 친한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무리하고 추악한 대진을 기획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린 밥 애럼은, 결과적으로 복싱계의 사정을 알고 있는 관련자들에게 약간의 비난만 받았을 뿐 실질적인 책임은 전혀 지지 않았고 지금도 미국의 프로 권투계를 좌우하는 거물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물론 밥 애럼이 김득구가 사망할 것을 미리 알고, 또는 김득구를 사망에 이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런 매치업을 추진했을 리는 없으며 또한 평범한 매치업을 했더라도 당일 컨디션 조절 실패나 지명방어전 상황, 또는 해당 단체의 선수층이 얇은 상황 등에서는 얼마든지 기량차가 큰 경기가 나올 수 있기도 합니다. 저런 상황에서 선수 보호를 위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경기 운영인데, 당시에는 2000년대 이후에 비해 선수를 보호하는 룰이 크게 부족했던 데다, 이미 9라운드 이후 경기가 넘어간 것이 명백한 상황이 여러 차례 나왔는데도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부분이 김득구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습니다. 다만 당시 선수 본인이 경기가 계속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심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것이 실제로 주심은 경기를 계속할지 여부를 선수 본인에게 확인했고, 김득구는 명백하게 경기의 계속을 희망했다는 것입니다.만약 후술하는 의혹대로 밥 애럼 측이 주심에게 제 때 경기 중단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이 확실하다면 이는 명백히 그의 죄가 되는 부분이나, 이 부분에 대한 증거는 나온 바 없으며 밥 애럼이 본 사고에 대해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이런 사정 때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불멸의 복서 김득구가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의 불행
김득구는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1982년 이영미씨와 약혼했으며 그가 죽은지 몇 달 후인 1983년에 유복자 김지완이 출생했습니다. 아들 김지완은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 김득구의 모친은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뒤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갈취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김득구와 타이틀전을 함께한 맨시니는 1983년 1월에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금년말 안에 한국을 방문해 "김득구의 모친을 만나 위로하고 김득구의 묘앞에 참배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얼마 뒤 김득구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호텔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맨시니의 대변인이 위 정보를 전면 부인하자 UPI통신은 허위보도를 한 이탈리아 언론을 탓하며 정정보도를 냈습니다.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도 알려졌으나, 실은 이탈리아 가제타 델 스포르의 가짜뉴스이며 가제타 델 스포르는 맨시니가 김득구를 생각하여 묘지에 방문하여 기도를 올렸다고 하였으나 맨시니 본인이 거짓말이라고 밝혔으며, 이후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만나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묻자 기자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이후에도 맨시니는 1984년까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지켰으나, 1984년 6월 1일 리빙스턴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상실했습니다. 1985년 2월 복수전에 실패한 뒤 잠정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해 1989년 헥터 카마초와 W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1992년 그렉 호건과 NABF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으나 모두 패한 뒤 최종 은퇴했습니다. 복싱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자기가 본래 하고파 했던 영화배우로 데뷔했는데 영화배우를 하지 못했던 건 아버지가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후 장애인이 돼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복싱선수가 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맨시니는 김득구의 사망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렸는데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에도 계속 복싱 선수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득구의 사망이 맨시니의 선수 생활에 큰 타격을 가했다는 점은 틀림없는데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전과 같은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한 채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했습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합니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으며 당시 경기심판과 김득구의 어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경기후에 3명이 사망했으니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였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는데 또한 '살인 복서'로 낙인찍힌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2011년이 되어서야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리기도 합니다. 맨시니는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합니다.2023년 1월 19일, 꼬꼬무에서 김득구의 이야기를 다루며, 레이 맨시니와도 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맨시니는 당시 경기를 하며 느꼈던 김득구의 투지에 찬사를 보내며 "그 순간만큼은 그의 약혼자, 어머니, 가장 친한 친구보다도 내가 그를 가장 잘 알 수 있었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제작진이 "하늘에 가면 뭐라고 하며 만날 것 같으신가요?"라고 묻자, 맨시니는 "반갑네, 친구. 사랑한다네."라고 하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김득구와 멘시니 경기의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참고로 시합에서 심판 리처드 그린이 김득구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다는 것은 잘못된 루머인데 적어도 9라운드 이후부터는 누가 봐도 김득구의 열세였고 리처드의 문제점은 판정을 불리하게 내린 것이 아니라 이미 제대로 된 의식이 없음에도 정신력만으로 시합에 임하던 김득구를 계속 링에 올렸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외신에서도 선수 자신의 의사를 중시한다는 명목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진 선수를 끝까지 시합에 나서게 한 심판의 태도를 비판했지 판정이 편파적이었다고 문제삼지는 않았습니다.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 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또한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줄였으며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늘렸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습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습니다. 미국 밴드 Sun Kil Moon은 김득구 선수를 주제로 한 곡을 내기도 했는데 밴드 멤버 중 하나인 마크 코즐렉이 김득구의 경기를 본 뒤 그를 소재로 한 'Duk Koo Kim'이라는 곡을 쓴 것입니다.
누구보다 강하고 물러서지 않았던,
현실이 가난했을 뿐 꿈은 가난하지 않았던
불멸의 복서 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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