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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82년 백인천_최초이자 20세기 마지막 불멸의 4할타자

by 마음heart 2023.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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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82년 백인천

최초이자 20세기 마지막 불멸의 4할타자



▥백인천(1982년.0.412)KBO 한국 프로야구 원년 1982년 최초이자 20세기 마지막 4할을 치다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탄생하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20년간 활약하던 백인천은 당시 한국나이 41세, 호적상으로도 40세로 원년 최고령 선수였지만 한국행을 선택합니다.40대가 되어 모국으로 돌아온 백인천은 첫 경기부터 방망이가 불을 뿜었는데 백인천은 프로 원년 개막전인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삼성전에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해 6회말 추격의 중월 솔로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의 기반을 마련했고 연장 10회말 고의사구로 걸어나간 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 때 홈을 밟았습니다. 경기 종료 후 그는 방송 인터뷰 때 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당했던 멸시와 서러움이 생각났는지 연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 극적인 역전승에 감격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눈물의 인터뷰를 하는 백인천을 둘러싸고 티비에 출연했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프로야구 역대 레전드 인터뷰로 회자되고 있기도 합니다.

1982년 원년 시즌에 타율 0.412(72경기,250타수 103안타)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 타율은 당연히 한국 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타율이자 KBO 역사상 유일무이의 4할 타율입니다.일본 프로야구에서도 4할을 친 선수는 없고 일본프로야구 최고 타율 기록은 1986년 한신 타이거즈의 랜디 바스가 기록한 0.389입니다.미국에서도 1941년에 테드 윌리암스가 4할을 친 이후로는 4할타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장타율 또한 0.740로서 2015년 에릭 테임즈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33년 동안 1위를 유지하였습니다. 원년에는 타자가 본업인 해태 김성한이 투수로 나와서 10승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할 정도로 원년은 아직 실업야구의 티를 벗지 못했던 시절이고, OB의 에이스 박철순이 224이닝(80경기중 36경기)을 던질 정도로 선수층이 빈약했기에 40대라는 나이 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와서도 4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백인천은 타율,장타율 뿐 아니라 출루율 역시 0.5022001년 펠릭스 호세가 0.503으로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까지 역대 1위는 이 시즌 백인천의 몫이었습니다.결과적으로 백인천의 1982년 타율/출루율/장타율은 KBO 리그 한 시즌에 나오기 힘든 전설적인 수치였습니다.더불어 안타와 득점에서 1위, 홈런과 타점은 2위였으며 도루도 11개를 기록하면서 호타준족 이미지까지 있었습니다. 백인천이 1982년 당시 40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노익장 그 자체였다 할 수 있습니다.

1962년의 백인천

백인천은 경동고 시절 야구선수로 뛰는 와중에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도 활동했고, 1961년 500m 고등부 대회를 싹쓸이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만능 스포츠맨이었습니다.한편으로 야구선수로서의 능력은 더욱 뛰어나서 학창시절 "원자탄 투수" 이재환과 함께 배터리를 이루며 경동고를 당대 고교야구 최강으로 이끈 주역이었으며, 특히 1960년 한해 경동고의 성적은 무려 32승 2무로 그야말로 초고교급 야구팀이었고 백인천이야 말로 그 경동고의 핵심 선수였던 것입니다.1959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1960년 6월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개장한 이래 고등학생으로는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했으며, 그해 10월 일본 원정경기 때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도 홈런을 쳤는데 이는 고교생이 진구 구장에서 기록한 2번째 홈런이었습니다. 또한 1962년 1월, 타이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최종일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도 비바람을 뚫고 타이베이 송산구장 개장 이래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홈런을 날리기도 했습니다.경동고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서 활약했으며 일본 프로야구에서 스카웃 제의가 았었지만 당시 강하게 남아있는 반일감정 등의 이유로 번번히 무산되었습니다.그러던 중 한 재일교포 야구인의 주선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구단 관계자를 만나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지만 반일감정이 다시 걸림돌이 되자 일본 프로야구신문에 여론조사까지 의뢰했고, 결과는 80%의 국민이 백인천의 일본 진출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오자 백인천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 나중에 돌아와 병역의무를 완수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장훈과 함께한 일본 프로야구 시절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후 1962~1974년까지 토에이 플라이어즈,1975~1976년까지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1977~1980년까지 롯데 오리온즈,1981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19년간 현역으로 뛰며 오랫 동안 활약했고, 이후 한국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에 MBC 청룡에 감독 겸 선수로 입단했습니다.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 입단 초기엔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는 가혹한 포지션인 포수로 플레이했는데, 항상 일본어 사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투수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1963년 시즌 중반 주전 포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1군으로 올라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눈에 들며 주전 포수자리를 꿰차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 1965년 시즌 후반부터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습니다.이후 백인천은 주로 중견수로 뛰면서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욱 꽃피우게 되었는데 백인천이 중견수를 볼 때 좌익수는 주로 절친한 선배인 장훈이 맡았는데, 백인천은 빠른 발과 넓은 수비범위, 포수를 보던 강견을 바탕으로 리그 정상급의 외야수비를 자랑한 반면, 장훈은 백인천 못지않게 발은 빨랐지만 어릴 적 입은 화상으로 불편한 오른손과 고등학교 시절 부상으로 약해진 어깨 때문에 수비는 영 자신이 없었던지라 좌중간을 향해 날아오는 타구는 으레 백인천만 바라보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백인천은 먼 거리를 헐레벌떡 뛰어와 타구를 잡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고 합니다.어느 날 백인천은 이를 참지 못했는지 웃으면서 장훈에게 "장이형, 형 연봉 중에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라고 농을 걸자 장훈은 백인천을 장난스레 쥐어박으며 "임마, 너 수비연습 시켜준 건 생각 안해?"라면서 서로 껄껄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고. 참고로 백인천은 장훈과 친해서인지 장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백인천은 일본프로야구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하여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했는데 현재 이 기록은 일본 명구회 가입 조건인 2,000안타, 200홈런에 가장 가까운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기록한 135안타를 더해도 2000안타가 되지 않습니다. 2006년 WBC 이후부터는 일본에서도 대한민국에서 세운 기록을 인정해 주는 게 일반적으로 이승엽의 한일 통산 400호 홈런도 방송에서 직접 언급을 하기도 합니다. 백인천은 일본과 대한민국 양쪽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한 최초의 선수이며 또한 대한민국에서 외국 리그로 진출한 선수 중에 최초로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2012년 전까지는 유일했었지만, 2012년에 이대호가 퍼시픽리그 타점왕을 차지하면서 유일한 선수라는 타이틀은 사라졌습니다. 2018년에는 MLB에서 류현진이 평균자책점왕 타이틀을 따내기도 했습니다.

백인천의 4할 타율은 원년 팀당 경기수가 고작 80경기로 적었던데다 선수 겸 감독으로서 스스로 기록관리를 했기 때문에 4할타율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일부의 주장이 있으며 이에 대해선 반박도 존재합니다. 80경기가 적긴 했어도, 80경기 시즌이라고 딱 잘라서 KBO 리그를 볼 경우 백인천을 제외하고 4할을 치고 있었던 것은 1994년의 이종범(104경기)과 2012년의 김태균(89경기) 그리고 2021년의 강백호 단 세명 뿐이며 백인천의 기록을 폄하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가 나올 경기는 일부러 결장한 듯이 주장하지만, 백인천은 그해 한 팀이 소화하는 80경기 중 8경기에 결장했는데, 그중 5경기는 몰수게임에 따른 출장정지이므로 그가 자발적으로 빠진 경기는 단 3경기뿐입니다. 감독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어려운 투수가 나오면 결장할 수도 있었음에도 거의 전경기 가깝게 출전했다고 봐야합니다. 게다가 출장정지 받은 5경기 중엔 투수진이 붕괴된 최약체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시리즈도 있었습니다. 오심이 없었거나, 몰수패 경기까지만 끌고 가지 않았어도 오히려 삼미 등을 통해 타율을 더 올릴수도 있던 상황. 본인은 4할 타율에 대해 신경도 안썼다고 합니다. 마지막 경기 때 코치가 타율이 4할이니 오늘 경기는 쉬고 다른 선수를 내보내자고 하자 백인천은 자기는 4할 신경도 안쓴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기록관리에 대한 확실한 반증은 홈런과 타점 기록인데 기록 관리를 하려면 타석에서 빠져야 하는데, 누적 기록인 홈런과 타점에서 2위에 올랐다는 건 오히려 기록관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1982년 타격 10걸 선수 중 백인천보다 타수가 적었던 선수도 3명이나 되며 규정타석을 넘긴 OPS 1.237의 선수에게 기록관리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 선수 시절에 3할을 넘긴 시즌이 딱 3번이 있었으며 장타율 5할을 넘긴 시즌도 3번, 출루율 3할5푼을 넘긴 시즌이 2번에 불과한데 한국 프로야구에 와서 만 39세에 타율 0.412를 치고 장타율 0.740을 넘겼다는 것은 분명히 KBO 리그 초창기에서나 가능한 이례적인 기록이었다고 할 것입니다.그렇지만 백인천이 일본에서 그저그런 선수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일본 프로야구 통산 타율 0.278, OPS가 0.746,통산 홈런 209개,통산 도루 212개를 기록했습니다.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상위급 선수였으며 특히 호타준족의 상징인 통산 200홈런 200도루 클럽에 가입해서 이름을 확실히 남겼다는 것입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2018년 3월까지 200-200 클럽 가입자는 17명에 불과한데 그 중 이치로와 마쓰이 가즈오는 MLB에서의 기록을 합쳐야만 가입하게 됩니다. 다만 일본 시절엔 단 1번도 20홈런을 넘긴 적이 없어서 파워형 선수라고 보기엔 확실히 무리고, 출루율이 통산 0.316으로 0.276의 높은 통산타율 치곤 다소 낮았는데, 이유는 통산 379사사구/471삼진 기록에서 보듯 배드볼 히터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였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일본 시절엔 40사사구/40삼진을 단 1번도 넘긴 적이 없습니다.물론 선구안이 나빴다고 보긴 힘들지만 사사구를 얻어 출루하는 것보단 공을 치고 나가는 걸 선호한 컨택 위주의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조건에 거의 완전히 부합하는 한국 프로야구 선수는 박용택이라고 볼 수 있는데, 통산 200-300의 대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한번도 20홈런을 찍은 적이 없고, 선구안은 무난하지만 배드볼 히터 유형에 가까워서 볼넷이나 출루율이 크게 높은 선수도 아니라는 게 공통점. 다만 백인천보다는 평균 타율이 높고, 볼넷이나 삼진 개수도 백인천보다는 많습니다. 일본에서 백인천은 이병규보다도 더한 배드볼 히터였으며 3할 치고도 출루율이 .350을 못 넘긴 시즌도  있습니다.백인천은 KBO에 만 39세에 입성하여 3시즌 통산 .335의 타율을 남기며 1984 시즌 후 조용히 은퇴합니다.

백인천 한일 통산기록-붉은 글씨 는 1위 기록.  진한 표시 는 리그 5위 내 기록.  푸른 글씨 는 KBO 리그 역대 최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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