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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83년 장효조_유일무이 타격 3연패를 달성한 타격의 달인

by 마음heart 2023.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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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83년 장효조

유일무이 타격 3연패를 달성한 타격의 달인



▨ 장효자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통산타율 0.331의 교타자

오늘 소개할 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장효조는 유일무이 타격 3연패를 달성한 타격의 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장효조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KBO 한국 프로야구 출범한 1982년 시즌부터 뛰어야 됐지만, 하필이면 그 시기에 경리단 야구단에서 군복무 중이어서 프로 데뷔가 한 해 미루어지게 됐습니다.아마추어 시절에 알루미늄 배트 덕분에 장타력도 출중했는데 아직도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4번타자는 바로 장효조였습니다. 본인 말로는 대학 때는 야구공에 그려진 마크가 보일 정도로 타격감이 좋았다고 합니다.

이승엽과 장효조

▦장효조의 1983~1988 삼성 라이온즈 시절

알루미늄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뀌면서 장타력은 줄었지만, 장효조는 1983년 데뷔 첫 시즌부터 타율 1위에 안타를 117개나 쳐내는 등 기록을 쏟아냈으나,이미 성인무대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한 상태에서 입단했으므로 신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다분히 역차별적인 이유로 신인왕을 OB의 박종훈한테 넘겨줘야 했습니다.박종훈도 실업야구에서 1년간 뛰었으나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참가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므로 기자단은 박종훈을 대졸 신인과 같이 취급했으며 박종훈 이후로는 실업야구 리그 출신 프로야구 선수가 신인왕을 수상한 사례는 없습니다.훗날 1991년에 벌어진 한일 슈퍼게임에서 선수소개 때 가장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던 건 선동열도,이만수도,장종훈도 아닌 바로 장효조였는데 일본 올드 팬들이 그때까지 장효조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아마추어 시절에 장효조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1983년 데뷔시즌의 장효조가 얼마나 어마무시한 기록을 남겼냐하면 타율이 0.369에 홈런도 18개였습니다.양적 기록을 토대로 한 평가로도 흠잡을 데 없는 타격이었으나, 질적 평가에서는 더욱 돋보이는데 출루율이 0.475, 장타율이 0.618, OPS는 무려 1.093, RC/27의 경우는 1999 이승엽,2003 심정수,1994 이종범과 동급으로 비록 당시의 게임수가 100경기에 불과하여 통산 기록은 손해를 본 편이지만, 질적 평가에서는 단연 사상 최고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장효조의 전성기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투고타저 시절로 장효조의 시즌 조정 OPS가 역대 최고라는 점에서 장효조의 위대함이 잘 드러납니다.

이후 장효조는 타격왕 3연패를 달성하며 KBO 한국 프로야구 유일무이한 기록을 쓰는 등 총 4차례나 타격왕에 오르며 안타 제조기, 타격의 달인, 타격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오죽하면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지만 타격에 비하면 수비는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홈런을 제외하면 타율은 1987년 0.387(이 해 전기리그 타율이 무려 0.419),안타수는 1985년에 기록한 129개가 개인 최고기록이며 경기수 출장은 롯데 시절인 122경기로 한해 최다 출장을 기록했습니다.장효조는 프로 생활 10년동안 통산타율이 무려 0.331에 이르는데 이는 3천 타수를 넘긴 모든 KBO 리그 선수들 중 두번째로 높은 기록인데 이정후가 0.342로 경신하기 전까지 부동의 1위이기도 했습니다. 통산 OPS는 0.886. 특히 선구안이 매우 좋아 통산 BB/K는 1.75, 출루율은 0.427에 달합니다. 남들 평생에 한번 하기도 힘든 3할7푼대에 육박하는 타율을 무려 3번이나 기록했습니다.또한 당대 최고의 투수인 최동원에게 70타수 27안타 1홈런 0.386로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장효조가 프로 입단한 나이는 28세 때부터 프로에서 뛰었다는 것으로 대한민국은 프로야구 출범을 1982년에 했기에 그 이전에는 실업야구 팀이나 일본에서 뛰던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해 뛰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장효조처럼 20대 후반의 선수는 물론이고 30대가 넘은 선수들도 대한민국에서의 프로경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장효조는 1988년 12월, 선수협 파동 직후 좌완투수 장태수와 함께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됐습니다. 초창기 구단의 횡포에 의한 보복성 트레이드의 피해자였는데 장효조는 생전 인터뷰서 삼성을 떠나야 했던 이유로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자주 이견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장효조와 삼성 구단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별로 좋지 않았는데 1992년 장효조가 은퇴한 후 삼성에서는 2000년에야 코치로 영입했는데, 이것은 레전드로 대우하여 영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년간 임시직으로 기용한 다소 굴욕적인 조치였으며 당시 삼성 구단은 해태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왔는데 2000년 마침내 성사되는 듯 하다가 다시 1년 후로 연기되자 1년간 김응용을 대신할 임시 감독으로 김용희를 감독으로 선임,이때 김용희와 함께 장효조가 삼성 코치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김용희와 장효조는 롯데에서 5년이나 감독과 타격 코치로서 동고동락한 사이였습니다. 1년 후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오게 되면서 예정된 수순처럼 김용희와 함께 장효조도 팀을 떠나게 되는데 이후 장효조는 10년간이나 현장을 떠나 있다가 2010년에야 삼성 2군 코치로 복귀하게 됩니다.

▥장효조의 1989~1992 롯데 자이언츠 시절

장효조는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에는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는데 홀수해(1989, 1991)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격년제 징크스'를 기록했습니다. 이 시기에 롯데는 최하위권을 맴도는 부진을 겪었고, 이런 상황과 맞물려 일부 팬들은 "팀 공헌도는 적으면서 타율 관리에만 신경쓴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삼성 시절 타격 1위를 밥먹듯이 했던 임팩트로 인해 장효조에 대한 부산팬들의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했고, 김용철이라는 간판 타자와 맞트레이드되었다는 점도 일조했습니다.그래도 1991년에는 이정훈,장종훈과 함께 시즌이 끝날 때까지 타격왕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2위를 기록하여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출루율 1위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장효조가 프로 선수로서 수상한 생애 마지막 개인 타이틀이었습니다.이듬해인 1992시즌에는 삼성에서 하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했지만 그 해 그의 기량은 크게 하강 곡선을 그리며 시즌 타율 0.265, 54안타라는 프로 데뷔 이래 최저의 성적을 기록했는데 평소에  '절정일때 옷을 벗자 '라고 생각해온 장효조는 1992시즌이 끝나자 미련없이 현역 은퇴를 택했습니다. 1992년 당시 롯데에는 3할 타자들이 즐비했고, 2할대 후반의 백업 타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지명타자였던 그로서는 안타깝지만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야구계에서는 그가 아직 충분히 더 뛸 수 있었다고 봤기에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사실 당시 롯데 타선이 백업까지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장효조가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갔더라도 많은 기회를 받기 어려웠을 수 있지만,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면 충분히 몇 년은 더 활약했을 수 있습니다.은퇴한지 11년이 지난 후 인터뷰에서 장효조는 "너무 일찍 은퇴해서 아쉬움이 많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3~4년은 더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쉬움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장효조는 1977년 니카라과 슈퍼 월드컵 야구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이 대회에 병역특례가 적용되지 않아 군에 입대했으며 육군 이병으로 고졸 선임들 밑에서 구르던 1981년 전두환 정부가 뒤늦게 국제 야구대회 우승 멤버들에게 병역특례를 소급 적용하면서 학업을 구실로 병역연기 중이던 한양대 후배 이만수, 김용남, 이상윤은 병역특례를 받은 뒤 KBO 리그 원년멤버가 됐는데, 당시만 해도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면 즉시 전역시키는 제도가 없었던지라 장효조는 병역특례 혜택을 받지 못하고 1983년에야 만기전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KBO 리그 원년 이후 당시 1시즌 경기는 총 100경기였는데(원년에 80경기, 이후 100경기로 늘어났다) 교타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해에는 18개의 홈런을 쳐서 리그 3위를 기록,이는 1991년 쌍방울의 김기태가 27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신인 좌타자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습니다.1983년 홈런 1위는 이만수(27개), 2위는 김봉연(22개)이었습니다.장효조는 1983년  2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프로에 데뷔하여 1992년 37살의 나이에 은퇴하는 약 10년간 961경기에 출장,3050타수 1009안타 타율 0.331,157 2루타,36개의 3루타,54 홈런,437타점,485득점,109도루,533 4사구,장타율 0.459,출루율 0.427을 기록합니다.

◎장효조의 통산 수상내역

수위타자 4회(1983, 1985, 1986, 1987)
최다 안타 1회(1983)
최우수 장타율 1회(1983)

최우수 출루율 6회(1983, 1984, 1985, 1986, 1987,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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