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84년 헐크 이만수
최초의 사나이,리그 최초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다
오늘의 스포츠뮤지엄에서는 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84년 헐크 이만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최초의 사나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만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 삼성에 입단했습니다.KBO 한국 프로야구 원년 멤버 중 한 명으로,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선수로 16시즌 동안 활동했으며 프로 원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 선수이기도 합니다. 별명은 헐크이며 등번호는 22번으로,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KBO 영구결번이기도 합니다. 현재 삼성의 영구 결번인 양준혁의 10번도 다른 선수들이 단 적이 있었고 삼성의 또 다른 영구 결번 번호 이승엽의 36번도 그 이전의 선수들이 단 적은 있지만 이만수의 22번 만큼은 은퇴한 후에도 아무도 단 사람이 없어서 삼성 라이온즈 역사에서 유일하게 22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되었습니다.이만수는 최초의 사나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서 팀의 4번 타자 겸 주전 포수로 출전하여 1회에 2루타를 치며 타점을 기록했으며, 5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쳤습니다.프로 출범 1호 타점과 1호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등나무 가구 세트를 받았습니다.삼성의 초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첫 전국구 스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효조&이만수-양준혁-이승엽으로 시작되는 본좌 계보의 시작이었으며. 삼성의 역사는 이만수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삼성 본좌 라인 중 유일한 우타자이지만 삼성에서의 우승 경험은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룬 1985년 뿐,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었습니다.
▧1982~1990년 전성기 시절 이만수
이만수는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포지션은 포수였으며 KBO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블 크라운 달성 등 다양한 타이틀 및 통산 기록으로 한국프로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전드급 선수입니다.성실성과 노력으로 대표되는 선수로 1985년 삼성이 플로리다로 훈련을 갔을 때, 정규 훈련+야간 개인 연습+새벽 개인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 현지인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프로 통산 16시즌 동안 1449게임에 출장, 5034타석에서 타율 .296, 타점 861, 홈런 252, OPS .907을 기록했습니다. 16시즌동안 3할 타율을 6번, OPS 9할 이상을 9번이나 달성한 레전드 중 레전드입니다. 통산 OPS+가 155인데, 양준혁과 이승엽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더군다나 비교대상인 선수들이 1루수/지명타자인 것과 다르게 이만수는 포수였습니다.역대 홈런왕 3번,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했으며 통산 wRC+가 159.0으로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뛴 양준혁에 이어 역대 2위로 포지션을 감안하면 더더욱 뛰어난 수치입니다. 21세기 들어 KBO의 리그 평균 포수 wRC+는 단 한해도 100을 넘긴 적이 없으며, 전 시즌 평균하였을때 약 90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런 포수 포지션에서, 단 한 해만 wRC+ 159를 기록했다면 MVP 컨텐더로 불릴 만할텐데, 이만수는 통산 기록으로 159를 찍었고 80년대 평균하여 170을 넘겼으며, 커리어하이로는 무려 200을 두번 넘겼습니다. KBO 역대 최고의 포수를 넘어 역대 최고의 우타자로 부를 만한 선수입니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그의 볼넷:삼진 비율. 커리어 통산 4310타수 672볼넷 490삼진으로 10타수당 삼진 1개에 지나지 않을 만큼 까다로우면서도 파워를 겸비한 타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만수의 전성기였던 1982~1990년으로 한정지어 계산하면 그 위엄이 더더욱 빛나는데 9년 평균 타 출 장이 .310 .399 .554에 OPS가 .953으로 동기간에 OPS가 9할을 넘는 선수는 오직 이만수 뿐이며, wRC+는 무려 173.2에 9년 합계 sWAR은 49.77승이나 됩니다.누적홈런은 183개로 당연히 1위, 그러면서도 BB/K가 1.19나 되는, 그야말로 타격의 신이라 불릴 수준이었습니다. KBO 리그 성적만 가자고 이대호와 단순 비교해보아도, 통산 wRC+는 이만수가 159, 이대호가 141이고 누적 sWAR은 5034타석을 소화한 이만수가 65.29이고 7072타석을 소화한 이대호가 56.71로 둘 다 이만수가 우위입니다. 여기에 144게임으로 환산하여 비교하였을때, 커리어하이 기준으로도 (각각 가중출루율, wRC+, sWAR/144G)84 이만수가 0.467, 204.6, 9.00이고, 10이대호가 0.482, 192.4, 9.55입니다. 이만수는 커리어 통산 wRC+ 200 이상을 두번이나 기록한데 반해 이대호는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물론 이만수가 뛰던 때는 외국인 선수가 없었고 경기수도 적었으며 비율스탯 이런 거 다 떠나서 80년대 선수 이만수랑 21세기 선수 이대호를 비교하면 절대적인 기량은 이대호가 낫겠지만, 1910년대 선수와 2000년대 선수의 기량을 비교할 수 없듯이 절대적인 기량 비교는 사실상 의미가 없습니다. 야구선수 각자가 현역이었던 시절에 한 리그에서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플레이를 했는가, 얼마나 지배적인 선수였는가 비교하는 게 wRC+, WAR 등 야구의 스탯이며, 그런 스탯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현역 시절 이만수가 현역 시절 이대호보다 지배적인 타자라는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라는 것입니다.이만수는 심지어 국민타자 이승엽의 95~03 시즌 9년과 비교해봐도 동급이라 할 수 있는데 9년 평균 이승엽의 wRC+는 170.9, 이만수는 173.2. sWAR로 비교하면 이승엽이 5005타석을 들어서고 56.83승을 기록했는데 이만수가 3200여 타석을 들어서고 49.77승을 기록했습니다. 포수로써 수비 보정이 이루어졌더라도 타석수가 2000타석 가까이 차이나고 7승 더 기록했다면, 물론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동급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수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승엽 역시 이대호처럼 전성기에 NPB에 나가 있었던 시기가 존재하고, NPB에서도 부상 등으로 부진하기 시작한 2008년 이전까지 시기 (2004년~2007년) 중 적응기인 2004년을 제외하고는 1인분 이상은 하는 타자였기에 wRC+ 면에서 다소 손해를 보긴 했습니다. 95~96 시즌 이승엽은 홈런타자로 각성하기 전이라 wRC+가 그다지 우수하지 않습니다. 물론 WAR로 따져보면 그 당시 이승엽도 좋은 타자였던 건 맞지만 95~96시즌 이승엽보다는 04~05 시즌 이승엽이 월등하게 좋은 타자였습니다.현재까지도 이만수의 선수 시절 수준의 타격 성적을 냈거나 앞으로 비슷한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보이는 포수는 나오지 않았는데 타고투저가 우세한 현재의 KBO 리그와 달리 이만수는 프로 선수 생활 1982~1997년까지 거의 15년 이상을 투고타저 시대에 뛰었던 선수였습니다. 게다가 막바지인 1993~1997년에는 포수로 뛴 경기가 단 5경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외하고 순수 포수로서의 성적을 보면 통산 성적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통산 타율이 .296인데 포수 시절인 1982~1992년까지의 성적만 가져오면 통산 타율이 무려 .304에 달합니다. 포수로서의 성적으로 본다면 현재 KBO 리그에서 최고 포수로 인정받는 양의지가 본격적으로 타격에서 정상급 성적을 내기 시작한 2018년 이전, 2000타수 이상의 KBO리그 선수 중 포수로 뛴 경기를 기준으로 할 때 타율 3할을 을 넘긴 포수는 이만수, 단 한 명 뿐이었습니다.
포수 기준 OPS를 10할을 넘기는 대활약을 한것은 양의지도 프로 14년차인 2018년에야 처음 기록한 것이며, 강민호 역시 2015년 한번 뿐으로 강민호가 2015시즌에 이만수를 제치고 포수 단일시즌 OPS 역대 1위를 기록했지만 이때는 타고투저 시즌인걸 감안해야합니다. OPS 0.900 이상을 기준으로 잡아도 양의지는 2018년을 포함할 경우 3시즌, 역시 강민호도 3시즌 뿐입니다. 반면에 이만수는 OPS 1.000 이상 시즌이 2시즌, .900 이상 시즌은 10시즌으로 그것도 포수로서 뛰었던 1982~1992년 사이에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따라서 이만수의 통산기록을 넘기려면 양의지나 강민호나 각자의 최고성적을 앞으로도 5년 정도는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타고투저로 인해 같은 OPS라도 wRC+, WAR 등에서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성적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려야 비교가 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만수는 대졸 + 1년 유급으로 인해 프로야구 기준 통산 성적에서 전성기 2년 정도를 손해를 본 데다가 당시 경기수도 현재 144경기에 비하면 훨씬 적은 80~126경기 정도였기 때문에 그만큼 경기수, 타수에서 크게 모자란데도 타격 성적만 보면 이만수는 다른 선수와는 아직까지 비교가 불가능한, 그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최근 양의지가 2018~2020년 모두 OPS 1.000 이상, wOBA .430 이상을 기록하면서 이만수의 기록을 노리고 있지만, 2021년 한국 나이 35세가 되는 양의지가 비율 기록으로써 통산 wRC+ 134.5를 15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은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경기숫자 차이 덕분에 누적 기록으로는 박경완과 이만수를 모두 넘어설 가능성이 크기는 합니다.
이만수가 레전드 오브 레전드이지만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이기도 한데 비록 1번의 우승이 있지만 삼성은 1985년 통합우승의 경우 공식적인 우승이지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못했고 이만수를 보유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0회 우승, 6회 준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선수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우승은 마침내 2005년에 월드시리즈에서 코치로 재직중이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우승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이만수의 포스트시즌 성적을 보면 통산 포스트시즌 타격 WAR은 스탯티즈 기준 1.88인데 이는 역대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든 삼성 야수 중 1위에 해당하는데 바로 뒤가 1.85의 이승엽입니다. 타율 .257은 포스트시즌이면 괜찮은 타율이고, 53안타는 팀내 역대 7위, 홈런은 7개로 2위, 33타점은 4위에 해당하며 그의 앞에는 이승엽,박한이,양준혁 등 왕조 시기의 후배들뿐입니다. 즉 1980년대 포스트시즌에 참가했던 삼성 선수들 중 가장 좋은 포스트시즌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으로 은퇴하는 1997년까지 이만수는 포스트시즌 안타, 홈런, 타점, 득점 등 주요 지표에서 1위를 마크했으며, 이만수에 이은 팀내 PS 타격 WAR 2위는 장효조였는데 1.22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다만 병살도 7개로 1위였고 OPS 같은 지표가 좀 떨어졌다는 건 특기할 점인데 이만수의 포지션이 포수인 걸 생각하면 수비 기여도 및 클러치 상황까지 합한다면 총합 포스트시즌 WAR 또한 팀내에서 손꼽힐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투수들까지 합산한다면 투수들에게 밀립니다.선수 시절 최악의 흑역사라면, 1984년의 트리블 크라운 달성 과정으로 당시 김영덕 감독이 이만수의 타율 1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내는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강행하여 트리플 크라운의 가치가 빛을 잃었고, 그 대가로 시즌 MVP도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으로 맹활약한 롯데 최동원에게 내어주는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후 나이로 인한 기량 하락으로 이만수는 만 39세에 은퇴하게 됩니다.팬들의 지지가 여전히 두터웠고 현역 연장 욕심이 있었던 이만수의 입장과 달리 뛸 수 있는 상황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대타 외에는 보직을 제대로 줄 수 없는 감독 입장에서 매우 곤란한 상태였습니다.(1999년 시즌까지 뛰고 야구계로 현역 은퇴 당시 만 41세)이만수는1993~1996년 4년 동안 대타로 총 777타수를 기록했는데 wRC+에서 각각 133.1-111.4-135.0-92.7을 기록하여,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면 전성기보다 못할 뿐 괜찮은 전력으로 활동했습니다.1997년의 경우 무릎 부상 악화로 선수 생활 자체가 어려운 가운데 치른 시즌이라 52타수에 불과했고 삼성은 재계약을 포기합니다.은퇴식을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이만수가 떠나고 2년 후에 은퇴한 유격수 유중일,은퇴 경기를 치른 삼성의 1호 선수는 양준혁,이만수의 탈단과정과 이로인한 연고팬들의 반발 & KBO 레전드에 대한 KBO 구단들의 예우에 대한 야구팬들의 반발이 공론화되면서 한때 우승에 눈먼 토사구팽구단 이라는 악명까지 있던 삼성 라이온즈도 이러한 악습이 많이 시정되었고 2003년에 22번을 이만수의 KBO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삼성 구단의 레전드 죽이기의 안타까운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많은 삼성 팬들은 한 동안 '이만수 감독 복귀' 설을 꾸준히 밀기도 했었지만 2003년 삼성에서 감독 제의를 했다가 이만수가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까지 다 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계약을 파기했던 사건도 벌어집니다.사실 이 때문에 당시 삼성에서는 김응용,선동열 라인이 매우 건재했었습니다. 2010년 시즌 후 준우승 감독인 선동열을 갑자기 내치긴 했으나 후속 감독은 이만수가 아닌, 삼성의 또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류중일이 맡게 되었고, 4년 연속 우승까지 안겨주게 되어 프런트나 팬들에게도 신임이 두터워져 이래저래 이만수의 삼성 복귀는 요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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