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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스포츠뮤지엄

불패의 사나이 최배달과 극진 가라테에 대한 짧은 고찰

by 마음heart 201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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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사나이 최배달과 극진 가라테에  대한 짧은 고찰



 여자에게 있어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가 최고의 로망이라면 남성들에게 있어 최고의 로망은 강인한 육체, 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가 되는 꿈을 꾸지 않은 남자는 아마 없을 듯합니다.다. 여성에게 권위적이고 큰소리치는 것을 강인함, 또는 남성다움이라 여기던 시대는 이미 흘러갔지만러 갔지만 그럼에도 아직 많은 남성들이 그런 세계를 동경하고 회상하는 것은 그런 남성다움이 존재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내면 깊숙한 믿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 열기가 수 그러 들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우람한 근육질의 격투기 선수가 주먹만을 의지해 제압하는 K-1이나 mma가 선풍적인 인가와 관심을 끌었는데요. 아마도 첨단을 달리는 문명일 수록 원초적인 승부의 세계에 더욱 열광하는 현상의 하나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오늘은 인터넷을 물들였던, 누가 누구보다 더 강하다는 식의 수많은 저울질 속의 근간에는 바로 격투기라는,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자면 오래전부터 일기 시작하여 몇 년 전부터는 거인 최홍만으로 시작된 k-1 바람이나 세계 최강 표도르의 MMA 신드롬 속에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속에 전설이 되어 버린 1994년도에 타계한 한 명의 사나이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오야마 마쓰다쯔, 한국명 최영의. 우리에겐 바람의 파이터나 최배달. 불패의 승부사로 유명한 이 사나이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로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최강의 사나이 그 논란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왜일까?그레이시 유술의 45ㅇ전 무패의 힉슨 그레이시나 영화배우이자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 격동의 시대 철권의 주먹 시라소니나 김두한, 그리고 입식 타격의 달인들과 MMA의 무시 무시한 전투력을 가진,현대의 투사들 속에1950년대에서 60년대 활동하며 극진 가라테를 창시한 이 전설적인 무도가가 인구에 회자되기에 몇자 적어보는데 실수하거나 모르고 지나친 것들에 대해선 너그러운 양해를 바랄 뿐입니다.다.

60억분의1이라 불리우던 표도르

흔히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최영의의 강함과 논란 속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건 실증이 아닐까. 힉슨 그레이시나 여타의 현대 무도가들은 최영의가 활동하던 60년대보다 월등히 좋은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미디어의 발전으로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을 분석하기 좋아졌고 그러므로 해서 높은 수준의 기력이 이루어짐으로써 최영의나 힉슨이 구가했던 절대 강자의 이미지보단 물고 물리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힉슨이나 최영의가 현대에 격투기를 한다면 전설과 신화에 가까운 업적을 만들긴 힘들지도 모를일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누구가 제일 강하다는 식의 논란에 대해서도 살짝 짚고 넘어가 보면특정인을 거론해서는 안되지만 이소룡을 잠시 언급해보죠. 젊은 사람들이라면, 혹은 예전 이소룡 영화를 보며 쌍절곤 돌리고 이소룡 특유의 괴조움을 따라 할 정도로 그의 영화에는 아드레날린을 급속히 분비시키는 마력이 있었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이소룡의 최강자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죠. 이소룡이 영화에서 보여준 액션의 절반만이라도 실전에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가 강자라는데 이견이 없지만 그가 분명 뛰어난 무술인이고 그의 무술 철학 역시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이분법적이고 맹신 도적인 이소룡이니까 지상 최강이 다식의 주장은 곤란하지 않을까. 우리 인터넷 문화의 현주소가 여기에 있다는데 씁쓰레해진다는 것입니다. 타진요가 그 대표적 예인데요. 집단으로 드러난 타진요의 문제는 결국 자신들만의 주장을 할 뿐, 타인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태권도 도장을 다니면 태권도가 최강이 되고 유도나 합기도를 배우면 그 무술이 지상 최강이 되는 식으로 철 지난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영의는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물론 그의 경험담에도 남성 특유의 과장법은 섞여있다 ) 실증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2류급의 무술가다. 부풀어진 거짓이다 식의 비난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이소룡이 최강의 사나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만인의 대중 앞에서 검증되었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음에도 주위 사람이나 몇몇의 증언만으로 그는 최강의 사나이가 된다는 건,여과 없는 맹신으로 이소룡 본인 자신이 가장 경계하던 것이었습니다. 

단일 단체로는 일본내에 전무 후무한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생전의 최영의

 

최영의는 공식 시합으로만 100여 차례의 시합을 벌였으며 미국 순회 땐 11개월간 10여 회의 경기를 가져 헤비급 복서와 프로 레슬링 선수를 모두 KO로 이겼습니다. 지금 상식으로 11개월간 10차례의 경기는 가진다는 건 실현 불가능하지만 최영의가 살았던 시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최영의의 극진 가라테가 지금의 K-1에서 보이는 온전한 입식 타격기로 이해하고 알고 있지만 초창기의 극진은 무에타이의 빰(상대를 넘어뜨리는 무에타이 고유의 기술)을 봉쇄하고 되치기할수있는되치기 할 수 있는(최영의 자신이 기무라도 인정한 유도의 고수였으니) 무술이었다. 전 세계 140개 나라 2000만 명이 수련한다는 극진 가라테가 유독 한국에서만 천시받고 그의 사후에나 입성한 이유는 또 뭘까? 세계적인 무도가요, 이소룡 이전에 아니 그 이후로도 나오기 힘들 이 위대한 무도가가 자국에서만은 냉대받는 것은 배타적인 한국적 특성도 한몫했겠지만 그가 일본에서 살고 일본식 가라테로테로 명성을 드높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영의가 극진회관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 귀화를 결심하던 1967년경 한국의 태권도 대부 최홍희가 그를 찾아가 귀화를 설득하기도 하고 갓 태어난 태권도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해서 고국에 28년 만에 귀국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태권도계의 내분과 알력 다툼에 실망한 최영의 자신이 떠나며 태권도의 중흥을 위해 권도와 유사한 극진 가라테의 한국 유입을 막음으로써 결과론적으론 도리어 실전성이 결여된 경기식 태권도가 정착되어 무술계가 퇴보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듯하다.벌어진듯하다. 격투가가 무술인이 자신이 연마한 무술의 진정한 가치를 찾기 위해 탐구하듯 최영의는 자신이 연마한 무술의 가치는 강함에 있다 여긴듯하다. 젊은 시절, 수없이 가진 무술적 기행과 대결, 조센징이라 차별받았을 고통과 역차별은 한때 우리에게 회자되던 추성훈만 봐도 쉽사리 짐작이 갈 것이다. 최영의가 살아온 시대에서 50여 년이 훨씬 지나왔음에도 마녀 사냥을 당하는 그를 보며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무술가로서 최영의가 흘렸을 눈물의 양이 얼마일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뿐이다.뿐이다. 사실 최영의 개인이나 극진 가라테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역도산과 프로 레슬링의 등장 덕뿐이다. 현재도 더 강한 사람, 더 강렬한 시합을 갈구하듯이 역도산이나 프로 레슬링보다 더 강한 것을 찾던 일본인의 시야에 역도산을 이긴 톰 라이스를 이긴 카라 테맨이 있다는 풍문이 살과 살을 더했으며  철저히 실전 지상주의로 자신을 만들어온 최영의는 점차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사실 만화나 영화의 영향으로 그의 왜곡된 이미지도 많은데 사실 그가 무술 순례를 할 때나세계의 강자들과 시합을 할 때도 그는 주목받는 위치에 있진 않았다 당시만 해도 가라테는 일본인의 눈에 들어오는 무술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유도와 검도, 스모가 있었기 때문에 오키나와에서 건너온 가라테는 그저 그런, 또는 야만적인 싸움패의 운동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최영의는 철저히 아웃사이더였고 자신이 추구하는 무술 철학을 실천한 무도 가였을 뿐이었다. 일본의 경제부흥과 역도산이 등장하여 그들의 콤플렉스인 거구의 서양인을 내리꽂는, 패전과 더불어 팽배한 패배주의에서 일본인도 할 수 있다 라는 환상과 열망 속에 마침내 최영의의 극진가라테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최영의를 표현하는 단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단 한번의 패배도 없기에 불패의 승부사라던지, 도장깨기를 통한 야수적 이미지  그리고 대표적인 황소와의 격투등.. 지극히 야만스러운 이런 행동 이면에는 조센징이라는 차별속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이 자리 하지 않았을까 살펴 봐도 좋을것 같다
 위의 사진은 병목 수도 격파 시범으로 최영의가  즐겨 하던 데몬스트레이션

극진 가라테는 사실, 최영의란 인물의 카리스마에 의해 부흥하고 유지돼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아니다. 극진 가라테의 세계화는 일본인이 아니라 동양 문물에 대한 관심과 최영의로 대변되는 카리스마 가득한 인물에 대해 매혹당한 서구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최영의의 자연석 격파나 병목 수도 깨기, 송판 격파, 공중 수박 관수 깨기, 얼음 격파 등은기,얼음격파등은 오늘날엔 흔히 무술시범에서 하는 것이지만 1950년대나 1960년대의 서양인들흔히 구경할 수 없는, 아마도 놀랍고 신비하기까지 한 데몬스트레이션이었을 것이다. 최영의를 추억함에 있어 그의 강함이 지금엔 그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아라고 생각할 사람들에말해주고 싶은 건 최초는 최고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당시의 카라테계가 슨도메(타격 직전 멈추는 것) 룰에 안주할 때 최영의는 아마추어 영역에 프로개념을 도입한 풀 컨텍트 가라테를 도입하였고 유도와 검도, 스모에 가리어진 가라테를국가의 지원 없이 단 한 사람의 역량만으로 세계적인 무술로 끌어올림으로써 최영의의 가치가 존귀해지는 것이다. 이소룡이 미디어의 힘으로 영춘권을 단박에 세계적 관심의 무술로 만든 예처럼, 최영의의 무용담이나 수련은 널리 인지되어있는바 달리 기술하진 않겠지만 그가 창안한 극진 가라테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가끔 극진 선수가 K-1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때극진의 실전성이나 강함에 의문을 품으며 극진 가라테에 거품이 있다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극진 가라테는 최소의 룰만을 적용하는 맨손 격투술이란 것이다. 복싱 글러브를 끼고 링 안에서 시합을 벌이는 것은 사실 극진식 대련과는 상반된 것이다. 만일 K-1 선수들에게 극진식 대련으로 시합을 한다면 맨손으로 가하는 타격에 익숙한 극진인에고전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최영의 사후에야 K-1에 출전한 것도 그런 최영의의 지론에 의한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최영의 사후 20세기 무술계를 석권한 극진가라테도 분파되기도 하고 내분으로 갈라지기도 하였다. u.s오야마였다. 가라테를 필두로 싸움 10단으로 유명한 아시하라 히데유키의 호원회관,사토 카즈아키(제 1 회 세계선수권 우승자)의 좌등숙,K-1으로 유명한 정도 관등 그의 사후 일어나는 분파와 내분에 20세기 한국이 낳은 위대한 무술가의 극진이 공중분해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운 맘도 없지 않으나 역시 이 모든 단체의 뿌리는 극진이다. 달리 생각하면 사람의 성향이 다르듯 같은 것을 똑같이 가르쳐도 배우는 자의 성향에 따라 수십 갈래 형태의 무술 스타일이 만들어질 수 있다.

최영의가 일본에서 살고 일본식 가라테로 명성을 쌓음으로 그를 조국을 버린 사람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가 일본인 가득한 곳에서 한국말을 쓰고 한국 식당을 고집하고 후계자 조차 마쓰이 쇼케이(문장규)로 결정한 것은그의 일생을 나무만 보고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에서 나오는 잘못된 인식 탓일 것이다. 사실 남성들이 꿈꾸는 강함이란 외형적인 부분에 치중하는 것이 사실이다. 여자들이 외모를 가꾸기 위해 성형 수술하는 것을 비난하지만 남자들 역시 내면적인 강함보다는 겉으로 보이는강함에 치중하는 것도 사실이다. 최영의라는 인물을 통해서 진정한 강함을 엿보고 싶었다. 본인 자신은 일본이라는 열도 안에서 한국인이라는 신분으로는 강해지는 것이 살 길이라는 절박함으로 강해지려고 부단하게 노력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것, 부단히 노력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다 어느 날 문득,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관심 조차 없었던 극진류의 무술이 세상에 소개되는 계기에 최영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내실 있는 그의 무술은 일본만이 아닌 세계 무술계 금자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토양이 척박한 우리나라의 무술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고 백전 백승식의 전설이란 모두 지나간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것, 얼마 전 표도르의 무패 신화가 깨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영의 역시 얼마든지 질 수 있는 사람이었고 패배라는 사실을 늘 인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것이다. 사람이 더욱 성숙해지려면  성공이 아닌 실패나 패배에서 더욱 배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것은 패배라는 시련이 없었다 해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부단하게 자신을 채찍질했다는 것이 아닐까. 진정으로 우리가 강함이란 명제를 논하려 한다면 최영의의 강함과 불패의 신화를 말하기에 앞서 그를 품을 수 없었던 조국의 현실과 한 세대를 치열한 생존 방식으로 살다 간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본다면 그가 비록 세계 최강이 아닐지라도,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이름 석자의 존재는 천금보다 귀하고 값진 것이 될 것이다.

극진 카라테 2대 총재 문장규

마지막 말로 끝을 맺겠습니다. 흔히 남자들이 갖는 강한 것에 대한 오류는 육체의 강건함이지만 육체를 뛰어넘지 못하는 정신의 미숙함이 현시점에는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진정 강한 것은 물처럼 흐르는 내면의 부드러움인 것이지, 마초적인 남성 다움이라 착각하는 남성들이 대부분이기에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최영의로 대변되는 인물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것은 강함이지만 그의 강함이 진정 육체에서만 나온 것일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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