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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센진 하리모토 이사오가 아닌 한국인 장훈이라 불린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불멸의 3할타자

by 마음heart 2011.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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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센진 하리모토 이사오가 아닌 한국인 장훈/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불멸의 3할 타자


 


공만 빠르던 박찬호가 메이저리거로 미국으로 진출하여 IMF 외환위기 때의 우리들에게 꿈을 던질 때, 그런 박찬호가 세월의 무게에 점점 잊힐 즈음, 한국인으로는 유일무이한 메이저리그 타자로 추신수가 시원스러운 홈런과 빠른 발로 도루를 할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야구가 기지개를 켠다. 그 속에서 무려 40여 년 전에 은퇴한 한 명의 노신사가 떠올랐다. 하리모토 이사오라는 일본명을 지닌 장훈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주인공이다. 처음 그의 이야기를 접한 것은 5권짜리 만화에서였다. 바로 허영만 화백의 "질 수 없다"라는 제목의 장훈 일대기,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통산 23년간의 선수 생활을 유지하며 9,666타수 3,085안타를 기록한 일본 프로 야구의 유일무이한 3천 안타 기록 보유자이다. 물론 스즈키 이치로가 미일 통산 3천 안타가 넘는 안타를 기록하여 이젠 장훈의 기록이 퇴색한 면도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장훈의 기록은 불멸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스즈키 이치로가 많은 안타 생산을 위해 특화된 타격 기술을 장착하여 메이저리그 기록을 경신해 가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의 야구 기술은 이치로에게만 특화된 기술적 퇴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의 두 전설 800홈런의 왕정치와 3000안타의 장훈은 요미우리에서 공포의 타선을 이끌었다.

 

전 세계 유일무이한 기록의 소유자 "장훈"

장훈 하면 흔히 안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떠오르고 더불어 일본의 타격 천재 이치로가 오버랩되지만 둘은 닮은 듯 전혀 다른 타격 스타일을 선보인다.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3천 개가 넘는 안타를 양산하기도 했지만 5백 개의 홈런과 300개의 도루를 동시에 달성한 전무후무한 타격의 레전드이다. 요새 추신수의 2년 연속 3할 타율에 20 홈런 20 도루가 굉장히 보기 드문 기록이라고 말들 하지만(물론 추신수야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장훈의 통산 타율 3할과 3천 안타, 500 홈런 300 도루는 한미일, 모든 프로야구 기록을 들춰 봐도 유일무이한 기록이 되는데 120여 년이 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단 한 명만이 장훈과 흡사한 기록을 가졌으니 가장 완벽한 선수라고 칭송받던 윌리 메이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윌리 메이스는 배리 본즈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로 통산 660개의 홈런과 3할 타율, 3천 안타와 300 도루를 동시에 이룬 선수이다. 단순히 리그가 틀리기에 그 기록의 가치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한 선수가 5천 타수를 넘어  1만 타수에 가까울 동안 꾸준한 성적을 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선수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끔 이치로와 장훈이 비교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들이 위대한 것은 역시 단일 시즌에 반짝하는 것이 아닌 20여 년을 꾸준한 성적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이제 장훈이 가지고 있던 단일 시즌은 모두 갈렸지만, 그의 통산 기록은 꾸준한 전설의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다.

메이저리그의 윌리 메이스와 함께 유이하게 3할 타율에 3천안타 500홈런 300도루를 기록한 장훈.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4년간 불꽃처럼 타오르다!

장훈이 야구선수로 위대한 점은 그의 손이 제대로 펴고 쥘수 없었던 조막손이었다는 것이다.

 

요새 추신수에겐 5 툴 플레이어라는 말이 따라다니죠. 공격, 수비 도루 등 모든 것을 잘하는 선수라는 뜻인데 그 원조격에 장훈 선수가 있다. 물론 수비는 그리 썩 훌륭한 선수는 아니라고 하지만 조센징이라는 차별과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던 장훈의 의지는 5 툴 플레이어 이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추신수가 클리블랜드라는 메이저리그 약체팀에서 활약하기에 더 좋은 성적을 올릴 기회를 놓친다는 말들을 자주 하고 좀 더 강한 팀에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다면 20 홈런 20 도루가  아닌 30 홈런 30 도루도 가능했을 거라고, 장훈 역시 마찬가지 케이스인데 일본 프로야구는 심하게 말하면 요미우리와 요미우리가 아닌 팀만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리우리라는 팀은 일본 야구의 상징이자 전부인데 장훈은 도에이라는 하위권 팀에서 그것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선수 생활을 이어 갔다. 장훈 역시 선망의 대상이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팀에서 뛰고 싶어 했지만 프로 데뷔부터 은퇴까지 요리우리 한 팀에서 마무리한 왕정치가 얼마나 복이 많은 선수인지는 이것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인기로 친다면 왕정치가 최고는 아니었는데 왕정치 앞에는 일본 순수 혈통의 나가시마 시게오라는 선배가 존재했는데 왕정치와 함께 요미우리의 중심 타선을 책임졌던 이 불세출의 일본 야구 영웅은 은퇴하자마자 요미우리의 지휘봉을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지만 1975년 요미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전해 우승팁이었던 요미우리였으니 아무래도 나가시마의 감독적 재능도 재능이지만 경험 부족도 한몫했다는 것인데 1975년에 왕정치의 성적 역시 몬스터급이었던 여러 해의 성적에 걸맞지 않게 초라했는데 0.285의 타율에 고작 33 홈런, 물론 이것이 보통 선수의 기록이라면 준수한데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홀로 요미우리 타선을 책임져야 했던 세기의 홈런왕, 그 이름값에는 못 미쳤는데 결국 요미우리는 1976년 시즌 장훈을 영입하게 되는데 요미우리로썬 홀로 외로운 타선을 책임질 왕정치의 어깨를 덜어 주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고 장훈으로써도 선수로써 요미우리에서 뛰고 싶었던 평생의 소원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장훈은 요미우리에서 단 4년간 뛰었다. 우리나라의 양준혁 선수가 은퇴하면서 하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는데 양준혁에게 가장 가치 있는 기록이 무엇이냐고 묻자 양준혁은 사사구라고 말했는데 사사구는 보이지 않는 기록이지만 선수로써 팀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기록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여담이지만 제가 만약 프로 야구의 감독이라면, 그래서 이치로나 왕정치, 그리고 장훈 중 한 명 만을 쓸 수 있다면 진짜 객관적으로 누구를 쓸까? 인기나 관객 동원면에서야 분명 이치로나 왕정치일 수 있겠지만 팀에 도움이 되고 활용도가 높은 장훈이 첫 번째로 마음이 간다. 국뽕일 수도 있지만, 장훈은 요미우리 4년간 두 번의 우승을 경험했으며 만 36세의 두 노장 왕정치와 장훈은 회춘이라도 한 듯 몬스터 시즌을 보낸다. 장훈과 왕정치가 첫 호흡을 맞춘 1976년 장훈은 시즌 안타 182개의 안타와. 355의 고타율을 기록하였고 왕정치 역시 부진했던 전년도와는 달리 엄청난 몬스터급 활약으로 홈런 49개와. 325의 타율로 공포의 타선을 만들어내며 둘의 조합이 결코 장난이 아님을 만천하에 보여주었으며 이후 장훈은 77년과 78년. 348,. 309리의 타율로 변함없었고 왕정치 역시 홈런 50개와 39개를 쳤지만 1979년에는 둘 다 부진했는데 아무래도 노쇠화에 따른 부상과 부진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당시 장훈은 대망의 3천 안타에 불과 39개 만을 남겨 놓고 있던 상황이라 3천 안타를 달성 하면 미련 없이 요미우리라는 선망의 팀에서 유니폼을 벗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동경해온 거인 유니폼을 입고 3천안타를 때려낸 후 야구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거인에 와서 팀을 두 번이나 우승시켰다. 난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요미우리의 대표 하세가와는 한국인 구단주 신격호가 있는 롯데로의 트레이드를 논했고 장훈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나섰던 나가시마는 침묵한다. 장훈의 트레이드건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거인의 전통적인 납회식 자리에서 장훈의 트레이드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인물이 나타난다. 그건 다름 아닌 왕정치였다. 사람의 성격은 제각각인데 들판에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은 이미지가 장훈이었다면 울타리 안에서 고이 곱게 홈런 타자로 길러진 이미지가 왕정치였다고 한다. 즉, 모범생 타입. 결코 남의 일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왕정치의 발언,

" 구단주님, 장훈에 대한 트레이드 방침을 철회해 주십시오. 장훈을 남게 해 주십시오.."라며 왕정치가 폭탄 발언을 했고
불쾌한 구단주가 술 취했냐며 면박을 줬지만 왕정치는 단호한 말투로 "아닙니다.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장훈을 남게 해 주십시오" -/장훈 회고록 중

 

왕정치의 뜻하지 않은 발언에 장훈은 마음을 굳힌 채로 트레이드를 받아들였다. 평생의 라이벌로만 여겼던 왕정치에서 특별한 마음의 친구가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왕정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둘은 은퇴조차 같이 하자는 맹세를 했다.(물론 왕정치가 일 년 먼저 은퇴했지만) 그 후 노쇠화와 요미우리에서 부상 등으로 대망의 3천 안타와 500 홈런을 달성하고 예전의 명성을 뒤로 한채 단 일 년만 뛰고 은퇴하려던 장훈은 롯데 구단주의 의리 때문에 일 년을 더 연장하여 2년간 더 뛰고 1981년에 기난긴 프로 생활을 마친다.


 

고국을 찾은 장훈과 그의 어머니

이승엽이 국민타자라는 호칭과 인기, 불세출의 홈런왕이라는 이미지로 인기를 억을 때 양준혁 선수는 비록 그늘 속에 가려 있었지만 꾸준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자신은 전혀 생각도 못한 통산 홈런부터 안타 등 각종 타이틀까지 한국의 레전드가 되는데 장훈 선수는 물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여건에서 더욱 가치 있는 기록들을 만들어낸다. 야구 선수는 결국 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일본 야구계가 제아무리 그를 배척하고 무시하여도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수식어가 붙는 장훈을 은퇴 이후에 무시할 순 없었는지  세기의 홈런 와 왕정치보다 더 빠른 기간에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다.

장훈 일본 프로야구 통산성적

모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있는 곳이고 장훈의 기록 역시 언제난 깨지겠지만 원폭 피해로 입은 조막손으로 신체 능력의 최고를 달리는 프로 무대에서 단순히 살아남은 것이 아닌 베스트가 되었다는 것, 야구 선수뿐만 아니라 인간적, 사회적으로  재일 교포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주는 인물을 쉽게 만날 수는 없다. 올해부터 오릭스엔 박찬호와 이승엽, 그리고 김병현과 임창용이 한국인의 실력을 발휘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들은 이들만의 전설을 만들어 갈 테지만 그 어떤 차별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일본 야구의 레전드가 된 장훈이야말로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신화인 것이다.

 신인왕(1959년)

  • 신인왕(1959년),MVP : 1회(1962년)
  • 수위 타자 : 7회(1961년, 1967년 ~ 1970년, 1972년, 1974년)
  • 최고 출루율 : 9회(1962년, 1964년, 1967년 ~ 1970년, 1972년 ~ 1974년)
  • 베스트 나인 : 16회(1960년 ~ 1970년, 1972년 ~ 1974년, 1976년, 1977년)
  • 월간 MVP : 1회(1976년 6월)
  • 일본 시리즈 기능우수상 : 1회(1962년)
  • 일본 시리즈 타격우수상 : 1회(1977년)
  • 올스타전 MVP : 3회(1960년 제3차전, 1962년 제2차전, 1974년 제3차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1990년)

주요 기록

  • 시즌 타율 : .3834(1970년) ※역대 4위.
  • 시즌 타율 3할 5푼 이상을 양대리그에서 기록(도에이 : 1970년, 1972년 / 요미우리 : 1976년) ※사상 유일.
  •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 16회(1960년~1962년, 1964년, 1966년~1974년, 1976년~1978년) ※일본 기록.
  • 시즌 타율 3할 3푼 이상 : 11회(1961년, 1962년, 1966년~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기록.
  • 시즌 150안타 이상 : 9회(1961년, 1962년, 1964년, 1969년~1972년, 1976년, 1977년) ※역대 2위 타이.
  • 시즌 100안타 이상 : 20회(1959년~1978년) ※역대 2위.
  • 시즌 20홈런 이상 : 16회(1961년~1973년, 1976년~1978년) ※역대 3위 타이.
  • 타격 10위권 진입 : 17회(1960년~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타이 기록.
  • 9년 연속 시즌 타율 3할대 이상(1966년~1974년) ※일본 기록.
  • 15년 연속 타격 10위권 진입(1960년~1974년) ※퍼시픽 리그 기록.
  • 20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1959년~1978년)
  • 20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1959년~1978년) ※역대 4위 타이.
  • 13년 연속 시즌 20홈런 이상(1961년~1973년) ※역대 3위 타이.
  • 16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도루(1959년~1974년)
  • 일본 시리즈 통산 타율 : .370(73타수 27안타) ※7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1위를 기록.
  • 사이클링 히트(1961년 5월 7일)
  • 1이닝 2개의 2루타(1961년 5월 6일) ※일본 타이 기록.
  • 9타수 연속 안타(1974년 5월 23일~5월 26일)
  • 30경기 연속 안타(1976년 5월 13일~6월 20일)
  • 13타석 연속 출루(1974년 5월 23일~5월 26일)
  • 1,733경기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1972년 8월 19일) ※역대 3위.
  • 만 32세 2개월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1972년 8월 19일) ※최연소 기록이자 역대 2위.
  • 2,185경기 만에 통산 2500안타 달성(1976년 6월 10일) ※사상 최고 속도 기록.
  • 통산 맹타상 : 251회 ※일본 기록.
  • 통산 고의사구 : 228개 ※역대 2위.
  • 통산 희생 플라이 : 90개 ※역대 5위 타이.
  • 통산 타율 3할대·300홈런·300도루 ※사상 유일.
  • 통산 500홈런·300도루 ※사상 유일.
  • 올스타전 출장 : 18회(1960년~1964년, 1966년~1978년)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훈과 노닌 와타루(전 롯데 오리온스 감독) 2명뿐이다. 수위타자 7회 달성은 일본 타이기록, 4년 연속은 역대 2위, 20년 이상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를 기록한 것은 오 사다하루와 장훈뿐이고,입단 1년 차부터 한정하면 장훈만 단독으로 기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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