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과 쌍둥이처럼 닮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
로버트 바라테온 왕과 영국의 헨리 8세
왕좌의 게임 시리즈에서 다섯왕의 전쟁의 시발은 바로 로버트 바라테온 왕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칠왕국의 17대 통치자였던 로버트 1세 바라테온(Robert I Baratheon)은 반란으로 타르가르옌 왕조의 아에리스 2세를 몰아내고 철왕좌의 새 주인이 되었으며 타르가르옌 가문에 속하지 않은 최초의 군주였습니다.미친 왕 (The Mad King)으로 알려진 아에리스 2세의 아들인 드래곤스톤의 영주 라에가르 타르가르옌 왕자가 로버트의 약혼녀 리안나 스타크와 사라지자, 로버트는 라에가르가 그녀를 납치해 강간했다고 단정짓고 스타크 가문과 함께 타르가르옌 왕가에 반기를 듭니다. 로버트는 전장에서 단 한 번의 패배만을 겪었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하여 트라이던트 전투에서 개인적으로 라에가르를 죽인 로버트는 전성기 시절 가장 위대한 전사이자 영감을 주는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사냥, 잔치, 여색에 열광하는 로버트의 성격등은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성격을 많이 반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헨리 8세
영국 왕좌에 앉은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헨리 8세는 1509년 아버지 헨리 7세(Henry VII, 1457~1509)가 사망한 후 칭호를 이어받습니다.헨리 8세는 튜더 왕가의 혈통으로, 부왕인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헨리 8세는 복잡한 여성 편력과 여섯 번의 결혼으로 유명한데 특히 헨리 8세는 재위 기간 중 종교 개혁, 영국 국교회 수립, 정치적 중앙집권화 등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 집권기에 영국은 늘어나는 왕실의 비용과 과도한 화폐 발행 등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겪었고, 공유지의 사유재산화로 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하였으며, 런던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헨리 8세는 유년기부터 부왕의 자리가 확고부동하지 않음을 인지하며 자라왔습니다. 1497년 당시 콘월의 반란군이 그리니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블랙히스까지 쳐들어왔을 때, 당시 5살이었던 어린 헨리는 모친과 함께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런던탑에 피신해 있었습니다.그는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부왕이나 형인 아서 왕자를 수행하면서, 외교적 동맹관계를 잘 이용하면 유리하다는 점을 유년기부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0살에 형수를 맞이하러 형을 대신하여 에스파냐에 다녀왔으나 형 아서 왕자는 결혼 후 6개월 만에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모친인 엘리자베스마저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헨리 왕자의 양육은 조모인 마거릿 보퍼트 부인이 맡아왔는데 일련의 가족상을 당하면서 부왕인 헨리 7세는 살아남은 차남을 철저히 보호하기 시작했고, 헨리 왕자에게 통치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전수하고자 했으며 말년에 헨리 7세는 헨리 왕자를 계승자로 정하고 평화적으로 왕위를 양도했습니다.헨리 왕자는 형인 아서 왕자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할 당시 10살 소년이었는데 당시 헨리 7세는 강력히 부상하던 에스파냐의 아라곤 왕국과 국교를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고, 장남인 아서 왕자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와 카스틸의 이사벨라 1세의 딸인 캐서린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하여 캐서린을 영국으로 호위해 오도록 했고, 공주의 수행 행렬에는 10살의 소년이었던 헨리 왕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헨리 왕자는 형수가 될 캐서린을 형보다 먼저 옆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결혼한 이듬해에 아서 왕자는 몇 달 만에 병사하고 말았으며 캐서린은 양측 부왕의 뜻에 따라 이전 혼인을 무효화하고 다시 미성년인 헨리 왕자와 약혼했습니다. 헨리 7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즉각 캐서린과 결혼을 감행했으며 결혼 후 몇 년간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연회를 함께 즐겼던 것으로 보아, 헨리 8세는 처음 만났던 당시부터 캐서린에게 좋은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됩니다.헨리 8세의 정책은 부왕과 마찬가지로 해군을 육성하고 항해를 촉진하는 정책을 썼고, 메리 포춘, 스윕스테이크 등 큰 배를 건조해서 상인들이 임대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장려했습니다. 해군을 장려하는 정책은 의회의 방해도 받지 않았는데 의회는 육군을 육성하는 정책에는 제동을 걸었지만 바다의 일에는 비교적 관대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해군을 육성하면 전시가 아닐 때 해상무역에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는데 헨리 8세는 즉위 5년 만에 해군부를 창설하고 선박 수를 늘리며 함대의 시설을 현대화하는 데 힘썼습니다.이처럼 실리 위주의 정책을 편 헨리 8세는 인물을 천거하는 방식도 실용적이었는데 비록 출신이 비천하더라도 도움이 되는 인물이라면 기꺼이 만나고자 했고, 능력이 인정되면 그를 요직에 기용했습니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총리였던 토머스 울지는 푸주칸의 자식이었으나 11살에 교회가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만큼 수재였습니다. 왕실의 개인교사에 불과했던 울지는 1513년 대법관에 임명되었고, 요크셔 대주교와 추기경 등을 차례로 역임하며 왕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후 400여 명의 시종과 개인 합창대를 두는 등 허영이 심했고 권력욕도 강했습니다. 헨리 8세는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에 탄원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울지가 제 역할을 못하자 그를 불신하기 시작,결국 울지는 경질되었고, 후일에는 반역죄로 고발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사망했습니다.헨리 8세는 대외 관계에 관심을 두어 유럽 타 국가들과의 권력 관계에 개입,당시 교황청을 위협하며 이탈리아로의 진출을 꿈꾸던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에스파냐 동맹에 대항하여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당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프랑스 편에 서 있었습니다. 당시 에스파냐의 캐서린과 결혼한 상태였던 헨리 8세는 전략적으로 에스파냐 동맹 편에 서서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이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입지를 약화시켰으나, 후에 여동생 메리를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시켜서 다시 프랑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전략적인 대외 정책을 폈습니다.한편 헨리는 캐서린 왕비 대신 새롭게 만난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왕비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바티칸의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체계를 설립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는데 당시 대중은 교황청의 과도한 간섭과 수도원의 부패에 이미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종교를 갈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영국은 헨리 7세부터 해상무역을 장려하여 중산계급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신흥 중산층은 인쇄술 발명 이후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영어로 된 기도서와 성경을 직접 읽기를 원하였으며, 루터파의 개인성을 중시하는 신앙에 호의적이었는데 이에 헨리 8세는 영국국교회 설립의 명분을 얻었고 수도원을 개혁하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헨리 8세는 상당히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지출로 유명했는데 수도원 해산의 수익금을 생활비로 사용했지만, 이 재산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고 왕국은 로버트와 유사한 방식으로 부채로 거의 파산할 뻔했습니다.아내를 6명이나 갈아치우고, 음주와 폭식을 즐기고, 젊었을 땐 미남이었지만 점점 뚱뚱해져서 나중엔 청년 시절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헨리 8세와 쌍둥이처럼 닮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젊은 시절에는 사냥과 마상 시합을 좋아했던 헨리 8세는 토너먼트도 자주 나가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친정까지 나설 정도로 전사로서의 자질이 다분했던 사실과 백성들에게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던 반면에 왕권 강화에 집착하여 숙청을 많이 했던 헨리 8세와 달리, 로버트는 왕권 강화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도 원작 설정을 잘 반영한 탓에, 작중 로버트의 모습은 뚱뚱해진 헨리 8세처럼 풍만하다 못해 비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으며 미남이었다는 점은 전혀 연상 안 되는 뚱뚱하고 어딘가 술에 찌든듯한 모습에다가 사냥중 멧돼지에게 치여 죽는 어이없는 사고사는 바실리오스 1세(Basilius I, 811~886)와 비슷한데 그는 사냥중 사슴의 뿔에 치여 죽었는데 로버트의 멧돼지 사냥 역시 여기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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