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리온 라니스터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영국 왕 리처드 3세
왕좌의 게임과 쌍둥이처럼 닮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
왕좌의 게임 시리즈에서 가장 극적이고 고난한 생애를 사는 인물들 중 라니스터 가문의 새끼 악마 티리온 라니스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티리온 라니스터 역에는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라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티리온 라니스터의 격렬한 삶의 투쟁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영국 왕 리처드 3세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티리온 라니스터(Tyrion Lannister)는 티윈 라니스터의 막내이자 세르세이와 제이미의 동생으로, 기형과 왜소증으로 인해 꼬마 악마, 임프 (Imp)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것들로 가시 돋친 말과 거친 굴욕을 당합니다.학대를 견디며 티리온은 왕의 살인 혐의로 누명을 쓰기 전에 스타니스 바라테온에 대항하여 킹스 랜딩을 방어하는 조프리 바라테온 휘하의 핸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재판 판결 전 에소스로 도피하여 대너리스 타르가르옌(Daenerys Targaryen) 아래 여왕의 핸드가 된 티리온의 이야기는 분명히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Claudius, BC 10~AD 54)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 8월 1일 아버지 대(大)드루수스의 임지인 루그두눔(현재 프랑스 리옹)에서 5남매 중 막내 아이로 태어났습니다.위로는 형 게르마니쿠스, 누나 리빌라가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잃었고,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는 가늘었고 평생을 절었다고 합니다. 또 고개가 자주 흔들리고 간혹 침을 질질 흘렸으며 왼쪽 팔에 문제가 있게 되는 장애를 가지게 됐는데 이런 장애는 움직일 때만 뚜렷했고 정신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동시대의 여러 묘사를 보면 단순한 소아마비가 아니라 뇌성마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 장애에도 형 게르마니쿠스와 누나 리빌라처럼 상당히 매력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키가 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군 복무를 해야할 로마 상류층, 특히 최상류층인 황실 사람에겐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가 있어, 어린 시절부터 황실 내 남녀노소에게 무시당했으며 황실 사람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를 되도록 바깥 출입을 자제시키려고 했고, 성년식 이후에도 가정교사를 항상 곁에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는 많은 부분을 가정교사, 가문의 해방노예 및 노예들에게 의지했는데, 이런 모습은 가문의 체통을 떨어 트린다하여 어릴 적부터 할머니, 어머니, 누나에게 구박 받는 이유가 됐습니다. 따라서 친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는 항상 정상이 아닌 손자 클라우디우스를 "배냇병신 같다"며 집안의 수치로 생각했는데 이는 바로 위의 친누나 리빌라도 비슷해, 그녀는 장차 아우구스투스 뒤를 이어 최고권력자가 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아내인 자신에게 짐이 될 동생을 무시하고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그래서 클라우디우스의 누나 리빌라는 누군가가 ‘훗날 자신의 동생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자, 큰 소리로 “로마인들에게 그런 잔인하고 부당한 불행이 닥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까지 드렸을 정도로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혐오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할머니, 어머니, 누나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클라우디우스의 유년기를 고통스럽게 만든 또 다른 사람들은 가문에서 고용한 가정교사들이었는데 그들은 대개 아우구스투스가 상당히 고민해 제국 각지에서 이름을 날리는 명사들이 많았는데, 이중 어린 클라우디우스를 유독 힘들게 한 이들은 성년식 전후로 가정교사 겸 생활보조인으로 배속된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몸이 불편하고 제위와 일찌감치 멀어진 황족 클라우디우스를 무시했는데, 클라우디우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가혹할 정도로 혹독한 벌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고용한 황실여인들이 약한 신체에 강한 정신력을 얻게 해야 해방노예들에게 빌붙어 살 생각을 안할 거라고 생각해, 더 엄하게 해달라고 요구해서였다고 합니다.하지만 황실 내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클라우디우스를 무시하지 않고 잘 챙겨줬는데 먼저 친형 게르마니쿠스는 본래부터 타고난 인격자인데다, 가족애가 대단한 만큼 클라우디우스를 감싸고 끔찍할 정도로 아꼈다고 합니다. 그는 바로 아래의 여동생(클라우디우스의 누나) 리빌라와 달리, 진심으로 클라우디우스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는데 단순히 형 노릇만 하지 않고 아버지이자 친구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아래의 리빌라와 많이 다른 점으로 리빌라는 커갈수록 자신에게 짐이 되는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대놓고 무시하고, 자신의 어머니, 할머니 이상으로 공개석상에서 동생을 폄하하는 발언을 내뱉었지만 게르마니쿠스는 다른 귀족아이들이나 동맹국 왕자들이 친동생을 무시하거나 괴롭힐 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지켜줬고, 놀이 친구가 많이 없는 동생의 놀이 친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군복무 중 로마를 방문해 잠시 머물 때에도 클라우디우스를 챙겼고, 결혼 후 분가한 상황에서도 본가에 들리면 늘 클라우디우스를 데리고 함께 여가생활을 보냈다. 이런 까닭에 클라우디우스는 형을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합니다.사촌형이자 매형이 되는 소 드루수스 역시 훌륭한 인격자인 만큼이나 게르마니쿠스처럼 황실 내 다른 식구나 귀족들이 클라우디우스를 비하할 때 이를 막아줬다고 합니다.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편집적으로 자신의 혈육을 아꼈던 그는 누나의 친손자이자 자신의 혈육인 클라우디우스를 황실 내 또래 남성 황족 만큼이나 상당히 신경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차갑고 가부장적인 모습과 달리 어떻게 해서던지,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상류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자리잡도록 신경 쓰고 고민했다고 합니다.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를 숨기고 싶어하고 멸시한 아내와 달리, 클라우디우스를 훌륭한 황족이자 자신의 친족으로 자리잡도록 훈련시켰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 클라우디우스를 직접 지명하거나, 그에게 유언으로나마 특권이나 관직도 하사하지 않았으며대신 클라우디우스에게 자신의 친혈육으로서 유산으로 8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남겨줍니다.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가 즉위하자, 클라우디우스는 친삼촌에게 “저에게 공직을 줄 수 없으십니까?”라고 진심을 다해 물어보는데 티베리우스는 생전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공직 대신 조카에게 콘술 휘장을 줬습니다.그러자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진짜 콘술 자리를 달라고 재촉했는데 이에 티베리우스는 “내가 너에게 주는 금화 40닢은 사투르날리아 축제와 시길라리아 축제 동안 장난감이나 사라고 주는거다.”고 차갑게 대꾸했으며 클라우디우스는 큰아버지의 의중을 이해하고, 정치적 경력을 쌓으려는 꿈을 접었습니다. 그는 약간의 제위 계승 가능성이 있음에도 언제라도 궁중음모에 엮일 수 있는 로마를 떠나, 교외의 저택과 캄파니아 별장 사이를 오가며 남들의 이목에서 벗어난 삶을 보냈으며 이 기간 동안 술과 도박에 탐닉한다는 소문에 시달렸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세야누스의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또한 신체적 결함 때문에 권력계승 구도에서 배제된 것에는 장점도 있었는데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황실 내의 음모에서 안전했던 것입니다.그래서 소 드루수스, 율리아의 자손들, 게르마니쿠스의 자손들이 유배와 처형, 의문사를 당할 때, 아우구스투스 혈육 중 성인이 된 남성 황족임에도 클라우디우스는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그러다가 조카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즉위한 이후, 조카의 도움으로 그토록 원하던 공직 경험도 한때나마 경험하게 됐는데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그토록 원했던 집정관(콘술)을 잠시나마 경험했으며, 2달간 함께 한 동료 집정관은 친조카이자 황제인 가이우스였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처음 콘술이 되었을 때 4년 뒤 다시 콘술 자리를 약속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41년 1월 24일 근위대가 조카 칼리굴라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당시 클라우디우스도 암살 현장인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전에 있었는데,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지시라고 한 까닭에 헤르마이움이라는 방에 영문도 모르고 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야사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이 칼리굴라의 숙부이기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겁에 질려 커튼 뒤에 숨었다고 합니다. 칼리굴라와 카이소니아, 율리아 드루실라가 모두 살해된 뒤 카이레아의 지시로 클라우디우스를 죽이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암살을 결행한 카이레아 등은 아우구스투스 일가를 완전히 끝장낼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그들은 클라우디우스를 찾지 못했고, 때마침 병사 중 일부가 황궁 안에서 무언가 돈이 될 물건을 찾다가, 어두운 방 안에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합니다. 이들은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의 부하들이었고, 칼리굴라의 죽음에 분개한 터라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남자혈육 클라우디우스를 찾자마자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그를 로마 근교의 근위대 병영으로 모셨다고 합니다.이렇게 클라우디우스는 50살의 나이에 로마 제국의 권력을 손에 넣은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데 클라우디우스 일생 자체가 티리온 라니스터와 매우 유사한 점들이 많기 때문에 티리온 라니스터의 모티브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국 왕 리처드 3세
장미전쟁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자 에드워드 4세의 동생으로 조카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섭정에 올랐지만 얼마 후 돌변해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재위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하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장미전쟁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영국 중세사를 논할 때 상당히 자주 언급되는인물이기도 합니다.
1452년 10월2일 포더링헤이(Fotheringhay) 성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13남매 중 12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을 웬즐리데일에 있는 미들햄(Middleham) 성에서 보냈는데, 그 성은 사촌형이기도 한 워릭 백작 킹메리커 리처드 네빌의 소유였습니다. 그곳에서 리처드는 워릭의 딸들 이사벨과 앤, 그리고 워릭의 피후견인 프랜시스 러블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그 친구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졌습니다.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둘째 형 에드먼드가 죽자 어머니가 바로 윗형 조지와 함께 저지대국가들로 보내어 1년간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그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큰형으로부터 글로스터 공작위를 받았습니다. 다만 나이가 어려 어린 시절 살던 미들햄 성으로 보내져 12살까지 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사춘기를 겪는 동안 리처드는 선천성 척추측만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 유골 검사 결과 밝혀지기도 합니다. 특히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폐위된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작 리처드 형제를 런던 탑에 가두어 두었다고 합니다.1485년 헨리 튜더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2천 병력을 끌고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합니다.튜더 가문은 웨일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웨일스는 헨리 튜더를 전폭 지지하여 헨리의 군대에 합류했고, 리처드 3세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들을 소집하여 진압에 나섰습니다. 3주 후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 지방 보스워스에서 양군이 맞붙었는데 양측의 병력을 살펴보면 튜더 가문의 병력은 많아야 5천을 넘지 않았고, 리처드의 병력도 많아야 1만 2천 정도로 리처드가 소집한 귀족들의 5명 중 4명이 소집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리처드의 권력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렸음을 보여 주는데 잉글랜드 북부의 귀족 가문인 스탠리가 변수였는데 리처드 3세도 스탠리 가문의 지지를 얻으려고 그에게 토지와 직위를 퍼주다시피 하사했지만 문제는 스탠리가 헨리 튜더의 모친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여 헨리의 의붓아버지 격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리처드 3세의 뒷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리처드 3세는 이를 간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당시 전황은 리처드에게 유리했는데 리처드는 군대를 이끈 지휘 경험이 있고, 무예도 할 줄 아는 전사였지만, 4살 연하의 헨리는 도망다니던 신세였기에 군대 지휘 경력이 전혀 없어서 후방에서 대기했고 그의 삼촌 옥스퍼드 백작이 실제로 군대를 지휘했습니다.게다가 전투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리처드 3세의 국왕군은 언덕 위를 점하고 있었던데다 머릿수도 헨리 반군의 2배였습니다.리처드는 노련한 장군 노퍽 공작이 맡고 있던 그의 오른쪽 날개를 먼저 출격시켜 언덕 아래 있던 헨리의 반군을 치도록 했지만 상대편 지휘를 맡고 있던 노련한 장군 옥스퍼드 백작의 책략에 빠져,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전사했고 먼저 출격한 오른쪽 날개는 진창에서 백병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에 리처드는 왼쪽 날개를 맡고 있던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게 노퍽 공작을 도우라고 명령했하지만 헨리 퍼시는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서 사실상 배신했고, 헨리 7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까지 합니다.헨리 튜더의 친위 병력에 더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스탠리 가문이 결국 전쟁에 개입했고, 결국 리처드는 몸소 앞에서 지휘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기에 이릅니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왕군 병사들은 왕이 전사하자 겁에 질려 도망쳤고, 헨리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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