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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심장으로 짐승의 왕을 쏘다_정성화,김고은 주연 영화 영웅 뮤지컬로 다시 만나는 대한의군 육군참모중장 안중근

by 마음heart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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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화,김고은 주연 영화 영웅 뮤지컬로 다시 만나는 대한의군 육군참모중장 안중근

야수의 심장으로 짐승의 왕을 쏘다



한민족 오천년 역사에 수많은 외란을 겪으며 수많은 민중의 영웅들을 낳았지만 영화 영웅은 근세기인 백여년전 나라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에 울분을 가슴에 품고 제국주의 야욕으로 조선을 비롯하여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려던 짐승의 왕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저격한 독립군 대한의군 육군참모중장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며 또다른 안중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영화 두사부일체(2001),색즉시공(2002),낭만자객(2003),1번가의 기적(2007),해운대(2009),국제시장(2014)등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 작품으로 주연배우들로는 안중근 역에 정성화,설희 역에 김고은,조마리아 역에 나문희,우덕순 역에 조재윤,마진주역에 박진주,이토 히로부미 역에 김승락 등이 출연합니다.영화 영웅 시놉시스는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 분)와 가족들을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온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정성화 분). 동지들과 함께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으로 조국 독립의 결의를 다진 안중근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3년 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피로 맹세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안중근. 오랜 동지 ‘우덕순’(조재윤 분), 명사수 ‘조도선’(배정남 분), 독립군 막내 ‘유동하’(이현우 분), 독립군을 보살피는 동지 ‘마진주’(박진주 분)와 함께 거사를 준비한다. 한편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이토 히로부미에게 접근해 적진 한복판에서 목숨을 걸고 정보를 수집하던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김고은 분)는 이토 히로부미가 곧 러시아와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을 찾는다는 일급 기밀을 다급히 전한다.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이날만을 기다리던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전쟁 포로가 아닌 살인의 죄목으로, 조선이 아닌 일본 법정에 서게 되는데…

영화 영웅은 2009년 뮤지컬 영웅의 초연부터 14년 동안 전례 없는 찬사와 함께 국내 주요 뮤지컬 시상식을 휩쓸며 대한민국 뮤지컬계를 평정한 대표적인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뮤지컬에서 안중근 역을 맡았던 배우 정성화가 영화 영웅에서도 대한제국 독립군 대장 안중근 역을 맡아 열연합니다.여기에 영화 차이나타운,드라마 도깨비,유미의 세포들,작은 아씨들에 이르기까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김고은과 다채로운 장르에서 스펙트럼 넓은 캐릭터 소화력을 입증한 김고은은 영웅에서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로 분해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게 된 인물의 강한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냈습니다.여기에 더해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역으로 열연한 나문희는 안중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어머니 조마리아의 강인함을 나문희만의 절제된 표현력으로 더욱 높은 파고의 감동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언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다보면,김고은이 분한 설희라는 인물의 첩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영화 속에서 설희는 명성황후를 보좌하던 궁인으로 일본이 궁을 침입하여 황후를 시해하는 악랄한 만행을 저지를때 바로 옆에서 목격하기도 합니다.비록 명성황후가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국모를 그 나라의 백성들도 아닌 남의 나라의 자객들이 시해했다는 사실이 공분을 금치 못하게 하는데 영화 영웅속에서는 김고은의 연기와 노래로 그날의 감정이 오롯이 전이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몰랐던 대한의군 육군참모중장 안중근 이야기_야수의 심장으로 짐승의 왕을 쏘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평화적 아시아주의자입니다.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습니다.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습니다. 대한독립군의 장군격인 참모 중장으로 활동했으며, 권총 FNM1900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하였으며 체포된 후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기고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글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저술하다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쳤습니다.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인데 아명인 동시에 자(字)이기도 합니다. 자서전에 따르면 가슴과 배에 걸쳐 점 7개가 있었던 까닭에 자를 응칠로 하였다고 하며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로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습니다.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안태훈은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46위로 입격했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자신의 첫째 남동생 안태건(安泰健, 1868~?)의 이름을 빌려 썼습니다.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진해현감(行鎭海縣監: 종6품) 겸 진주진관병마절제사(兼晉州鎭管兵馬節制使:정3품)를 지냈습니다.안중근은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고 사격의 명수였는데 놀랍게도 기계로 쏴도 명중률이 고작 50%인 화승총으로 20보(약 10m)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혔다고 합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습니다.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 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박영효의 장학생)이 좌절되자 7살의 안중근과 함께 일가 친척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로 이주하여 은둔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종2품) 정현석(鄭顯奭)과 해주 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것이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탕이 됐으며, 일본·청국·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전쟁하게 된 원인이 됐다.
관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청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또 일본 군인들도 건너와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해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중략)...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우리의 의병들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만세를 3번 부르며 본래의 마을로 개선해 황해도의 관찰부에 급히 승전 보고했다. 당시 일본 하급 장교인 스즈키란 자가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다 우리가 동학당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이후 적병들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고, 차츰 잠잠해져서 나라 안이 다시 태평해졌다.

/안응칠 역사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鄕長) 유만현(柳萬鉉)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 복구하라는 내용으로(1897년 5월 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 농민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으며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발렘(한국명 홍석구)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안중근은 사도 토마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게 됐습니다.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우덕순과 더불어 의군을 조직,처음에는 회령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몇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스파이의 거짓 안내와 병력 열세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기에 결국 패배하고 우덕순은 일본군에 잡히고 자신과 몇몇 동료들만 목숨만 건져 가까스로 살아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여담으로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격파할 당시 일본 포로들을 잡았었는데, 포로들이 자비를 호소하자 안중근은 그들을 기꺼이 풀어주었는데 당연히 참모들은 그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안중근은 그런 그들에게 "그렇게 하자면 4천만 일본 국민 모두를 죽여야 하는데 그럴 수 있냐. 정의의 군대는 정의롭게 싸워야 한다"고 반문하자 아무도 반박을 못하였다고 합니다.물론 영화 영웅에서도 그렇게 자비를 베풀어 풀어준 일본군 포로들이 앞장서서 안중근 의사와 독립군의 뒤통수에 비수를 박는 짓을 합니다.

▤30살의 대한의군 안중근과 69살 일본의 늙은 여우 이토 히로부미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 사건이 유명한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으며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입니다.안중근은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습니다.안중근이 이토 저격을 성공한 후 유동하 의사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만세를 외쳤다는데 기록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조를 나눌때 채가구에 우덕순, 조도선, 하얼빈에 안중근과 유동하로 나누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는데 거사 당시 다른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기 쉽진 않은데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정황이 이렇습니다. 일단 우덕순 조는 역 구내 숙소에서 새벽부터 대기하다가 조도선이 역 매점 주인에게 일본의 대신(이토)이 온다는 것 때문에 러시아 군대의 경비가 철통같아 나갈 수가 없다는 얘기를 전했고 우덕순은 거사를 포기하고 대기 중 또는 이를 수상히 여긴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감금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유동하는 통역과 두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이때 뒤늦게 안중근과 합류했거나 처음부터 안중근을 보조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습니다.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그렇게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FN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 저격했습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는데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합니다.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에 각각 1발씩을 맞췄습니다.(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토를 저격한 후 혹, 자신이 이토가 아닌 무고한 늙은이를 살해한것인가 생각이 들어 이토 주변의 남자들을 저격했다고 합니다.)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됩니다. 여기서 이 한 발을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이 아닌데 안 의사는 당시 자결할 생각이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으로 총알 한 발을 남김은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즉시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당한지 30분만에 사망했고, 일본 정부는 이토의 장례를 국장으로 후하게 치러줬으며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기도 합니다.안중근은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 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을 따른 러시아측 행정명령에 따라 러시아 검찰 조사 도중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거쳐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되고 맙니다.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인 안병찬은 물론 러시아의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라스, 스페인 변호사,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지만 선임은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형식적인 절차로 관선변호사인 미즈노 키치타로와 카마타 쇼지가 변론을 맡았으며 재판장은 마나베 주조, 검사는 미조부치 다카오가 각각 맡았습니다.안중근 의사는 대체로 법정에서 사실관계보다는 제국주의에 근거해 조선의 자주성이나 역사를 완전히 부정, 폄하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까운 주장을 펼치는 검사를 상대로 사상적 싸움을 벌이며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메이지 천황의 존엄성을 고종의 그것과 같이 긍정하고, 아시아 각국에 대해 선진국인 일본이 일정한 수준의 우위를 갖고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인정하되 일방의 착취적 식민지 관계를 부정한 채 어디까지나 각국은 자주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명목상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토가 중간에서 이러한 대의를 왜곡하여 많은 한국인을 살상하고 국가적 존엄과 주권을 박탈하였으며, 특히 굴욕적인 조약들을 강요했다는 취지의 아시아주의에 근거한 주장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특히 안중근 의사의 거사 이유 중 책에서 보았다며 항간에 떠도는 고메이 덴노의 시해 설을 언급했을 때는 재판장이 놀라서 방청객을 퇴정시키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2018년 4월 20일에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 문서 보관소 하바로프스크 도서관에서 ‘한국 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일본군 참모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가 중국 현지 밀정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로 작성한 이 문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를 캐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문서에서는 안중근이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간도 용정에 망명한 것은 당시 간도에서 서전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습니다(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을 모셔오기 위한 모금운동도 안중근이 주도). 보고서에서 '안응칠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도 합의해 간도에 갔다.’, ‘(유럽에 머물던) 이상설을 안응칠과 동지들이 모금해 연해주로 불러들였고 안응칠은 간도에서 이상설을 사사했다.’ 등 이상설과 안중근의 사제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등장하는데,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 통감부 촉탁 경시 사카이의 신문’에서 안중근이 이상설을 두고 '포부가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고 호평하고 있어, 안중근의 사상에 이상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대부분의 독립 항일 운동은 치밀한 사전 조사와 계획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안중근 의사만큼이나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치밀하게 작전을 계획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우선 그가 준비한 화기부터 범상치 않은데, 당대 최신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며 소형이어서 여러 정 준비할 수 있었던 벨기에의 헤르스탈 조병창에서 제작한 FN M1900은 32 ACP탄을 사용하는 자동 권총으로 기존의 자동 권총들은 대부분이 탄막 형성의 기능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정확한 조준 및 살상력 확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FN M1900은 세계 최초로 슬라이드를 권총에 장착함으로서 기존과는 달리 화기의 크기가 매우 작아졌으며 동시에 사격 안정성 및 정확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권총이었습니다.의거 전 안 의사는 M1900 2정(혹시 모를 불발 및 탄 걸림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과 별도로 S&W M2를 준비하였는데 다행히 1차 공격 시 준비한 화기가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에 준비해 간 다른 화기들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경호를 위한 일제 군 병력들이 대응할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고 빠르고 침착하게 요인을 암살한 후 무차별적인 테러로 보이지 않도록 1발을 남길 상황적 판단까지 할 수준이면 그의 전술적 / 법적 전략 지식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플랫캡 을 쓰고  폴로코트 로 추정되는 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 의거 당시에도 이 차림이었다
순국 5분 전  사진

1910년 2월14일에 마나베 쥬조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법정을 자신의 의견을 펼칠 장으로 보고 있던 안중근은 항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를 존경하던 미즈노는 이를 제지하면서 "항소하면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느냐"고 했고, 안 의사는 여기에 동의해 항소를 포기했다고 하며, 수감 뒤 서예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했으며 이후 3월 26일 오전 9시에 정근, 공근과 마지막 면회를 가졌다가 10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 본인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일제에 요구했으나 일제에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교수형을 집행하였는데 이 때 나이 32세였으며, 조선인들에게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또한 자신을 존경하던 전옥 쿠리하라 사다키치, 변호사 미즈노 키치타로 등 사형에 입회한 사람들에게는 "여러분께서는 앞으로 동양 평화에 진력해 달라"는 말을 남겼고, 이에 미즈노는 안 의사의 사형 직후 "동양 평화를 위해 만세 삼창을 하자"는 요청을 했으나 형무소측에 의해 거부당했습니다.그가 순국 후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 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끝끝내 넘겨주지 않았습니다.유해는 뤼순 감옥 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내용의 당시 러시아 신문 기사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 행방은 묘연한 상태입니다.2030년 3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20주기를 맞이하게 되며 그리고 2023년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기입니다.백범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서 패전, 이후 공산 중국의 성립과 한국전쟁과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해 한국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져 버립니다. 현재 안중근 매장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론 둥산포, 원보산, 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3곳이며, 특히 원보산은 당시 뤼순감옥 전옥(소장)인 쿠리하라 사다키치의 딸 이마이 후사코의 증언 등을 토대로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 등이 공식지목했던 곳이기도 합니다.공산화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 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하나 둘 다 실패하였습니다.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 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해졌습니다.

▥일제의 대를 이은 복수_안준생의 공개사죄

이토 분키치(사진 앞줄 오른쪽)와 안준생(사진 앞줄 왼쪽).

안중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독립 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안중근 의사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해서 1953년 ~ 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합니다.이후 안중근의 장남 안문생(안분도)은 어린 시절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그리고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이후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습니다.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이에 분노한 김구가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백범일지에 적혀 있습니다.안중근의 아버지는 김구가 동학 접주로 활동해 일본군에 쫒길때 보호해준 적이 있고 안중근의 집안 대부분이 독립 운동에 헌신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출범 후에는 김구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폈습니다.그런데 안공근은 말년에 김구와 파벌을 달리해 활동하다 1939년에 상해에서 실종되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공근의 사인은 당시 중국 경찰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밝히지 못했지만 안공근이 핵심으로 활동한 한인 애국단이 이봉창의 천황 폭탄 투척, 윤봉길의 상해 의거 등을 주도한데다 당시 상해에서 일제의 간첩 공작이 활발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안공근은 일제 밀정에 의해 언제 암살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에 의한 암살설, 김구의 측근에 의한 암살설 등 여러설이 있는데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또 다른 사촌 안봉근은 독일 베를린으로 떠나 두부 장사를 하며 번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같은 독일 망명자인 이미륵의 정착도 도왔으며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에서 금메달 및 동메달을 각각 땄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파티를 주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2020년 미국의 한국학연구가 프랭크 호프만은 저서 베를린의 한국인, 사진 속의 한국인을 통해 안봉근이 나치에 협력했을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나치는 식량 확충을 위해 고기 대체품을 연구하던 중 안봉근을 찍었을 지도 모른다고 했으며 이 의혹은 UPI뉴스에서 단독 보도됐습니다.안중근 의사는 감옥 안에서 세계 열강이 동양을 침범해 옴에 따라 한중일 3국이 서로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여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려 했는데 일본이 3국 간섭으로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중립 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 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은행, 공용 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려있지만 약속과는 다르게 서문과 첫장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습니다.안중근 의사는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로 답하였는데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우리말 시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 쥐 도젹 ○○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 ○○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장부가

영화 영웅은  대한의군 육군참모중장 안중근이 야수의 심장으로 짐승의 왕 이토 히로부미을 하얼빈역에서 저격한 일년간의 시간을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흔치않은 뮤지컬로 영상화한 작품입니다.조국의 독립을 위해 32살의 짧은 생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모셔오지 못한 후손들의 죄가 한없이 커져만가게 하는,죄스러운 마음이 심장 곳곳에 퍼져버리게 하기도 합니다.영화 영웅 속의 이름모를 영웅들과 안중근 이라는 이름 석자의 무게를 생각하면 일본 그리고 중국이라는 국제 정세에서 동양평화론은 바로 우리 자신의 힘이 견고해야 나오는 것임을 21세기인 지금와서 생각하면 더욱 굳건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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