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⑪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캐릭터 류와 료의 모티브가 된 극진의 용호 야마자키 테루토모와 소에노 요시지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의 제자 백과사전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최영의가 일본 무도계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모두 알게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공수 바보일대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공수 바보일대는 최영의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유명세를 안겨줬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극진의 용호라고 불린 용龍 야마자키 테루토모와 호虎 소에노 요시지였습니다.극진의 용호라 불린 이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이자 라이벌이었으며 최영의가 40대때 입관하여 제대로 대련한 마지막 제자들이기도 했습니다.용龍이라 불린 야마자키 테루토모는 천재라고 불릴 정도의 재능과 잘생긴 외모,화려한 발차기 스타일이었으며 호랑이 소에노 요시지는 남자다운 얼굴에 완고한 무도가로 상대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파이팅 스타일로 극진의 용호 역시 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공수 바보일대에 그려지며 지금의 스포츠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열혈VS쿨,노력VS센스라는 라이벌 모습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1969년 당시 일본은 킥복싱이라는 이름으로 무에타이 시합을 열었고,킥복싱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무에타이 선수들과의 시합에 방송국측은 극진의 선수들도 참여해 주길 원했고 당시에 극진GYM이라는(후에 취소됨)프로격투가 전용 체육관을 구상 중이던 최영의는 극진의 용호를 포함한 총 3명을 내보냅니다.그런데 시합에서 소에노 요시지가 칸난파이라는 선수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야마자키 테루토모는 화려한 발차기로 상대를 KO승으로 이겨버리게 됩니다.그리고 10일 뒤 다시 열린 시합에서 야마자키 테루토모는는 소에노 요시지를 처참하게 이겨버린 칸난파이마저 압도적으로 이겨버리고 맙니다.그리고 5개월 뒤인 그 해 9월,제 1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대회에서 극진의 첫 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이 대회까지 극진에서는 안면 타격이 반칙이 아닌,스탠딩 발리튜도 룰로 진행되는데 소에노와 야마자키는 결승에거 격돌하게 됩니다.소에노는 야마자키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지만 결국 승부는 야마자키의 우승으로 끝나고 야마자키는 초대 극진 챔피언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야마자키 테루토모는 이 한해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내일의 죠 속 리키이시 토오루의 모델이 되었고 만화 바키 시리즈 작가 이타가키 케이스케는 학생 시절 잡지에 실린 야마자키의 돌려차기 사진을 본따 그린 것이 자신을 다른 격투 만화가들보다 10년은 앞서가게 해주었다고 말합니다.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야마자키에게 뒤떨어졌다는 분함 때문이었는지 소에노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1개월뒤 태국으로 넘어가 무에타이 선수들과 시합을 갖기로 합니다.당시 일본은 태국 본고장의 무에타이 선수라 속이고 태국 유학생들을 선수로 둔갑시켜 킥복싱 시합을 승부조작 시합을 하고는 하였는데 소에노는 태국 본토에서 무에타이 선수들과의 시합에서 3승을 거두고 돌아왔고 이 이야기가 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공수바보일대에 인상적으로 그려지게 되면서 후에 캡콤의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모티브가 됩니다.
5년뒤 또 다른 게임회사 SNK는 격투게임 용호의 권을 발매하게 되고,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극진의 용호의 대결은 게임에서 이어지게 됩니다.소에노는 후에 종합격투카라테 유파 사도관을 설립하게 되는데 사도관의 단증을 보유한 유명인으로는 UFC 전 웰터급,미들굽 챔피언 조르주 생 피에르(GSP) 그리고 이젠 고인이 된 명예 5단의 마이클 잭슨이 있습니다.
▣용龍이라 불린 야마자키 테루토모_스탠딩 발리튜도 룰의 제 1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대회 초대 챔피언에 등극하다
극진의 용호라는 별칭속에서 용龍이라 불린 야마자키 테루토모는 극진 역사상 가장 화려한 발기술과 더불어 카라테와 킥복싱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칩니다.최영의 총재가 항상 말하던 것을 상기하며 야마자키 테루토모는 말하길,
"다리는 손의 3~4배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다리를 손의 움직임처럼 사용할 수 있다면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죽음에서 활을 얻은 나는 정신없이 돌려차기 연습을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어떤 태세에서도 발차기를 하며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면
발차기의 중심이 항상 신체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자세에 관련한 이야기였고 그리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체가 강해져야 하고,이것은 내구력과도 관련이 있다.
/야마자키 테루토모
극진의 용호 야마자키 테루토모의 일단 노린다면 벗어날 수 없다는 전설의 상단 돌려차기는 그렇게 완성됩니다.극진 역사상 다양한 돌려차기의 명수들이 배출되었지만 그 파괴력과 기술의 화려함에서 야마자키를 능가하는 극진 카라테 선수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야마자키의 돌려차기는 극진회관 선수권 대회 규칙 뿐 아니라 킥복싱의 링 위에서도 그 필살의 파괴력이 입증되었으며 최영의 총재가 인정한 가장 화려한 돌려차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야마자키 테루토모는 1947년 7월13일생으로 일본 야마나시현 고슈시 출신의 무도가이자 극진카라테 선수 겸 프로 킥복서였으며 이후 언론인,가수 등의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카라테 단수는 7단이며 역진회관을 창시했습니다.야마자키는 신장 177cm 62kg에 불과했지만 극진카라테에서 극진의 용호 혹은 천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프로 킥복싱 전적은 10전 8승 8KO 2패이며 무에타이의 본고장 태국 선수들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합니다.또한 미국의 무술잡지 블랙벨트에도 그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킥복싱에서도 환상의 명선수로 선정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무술인이기도 합니다.선수에서 물러나면서 주니치 스포츠,도쿄 주니치 스포츠의 격투기 평론가,언론인으로 활약했으며 자원봉사로 극진카라테를 무료로 지도하는 등 일본 대학수의대를 졸업한 인텔리이기도 합니다.야마자키 테루토모는 다섯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극진카라테를 수현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의 입학식에서 일진 무리의 동창생에게서 "몸이 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악연이 되는데 일진 무리 중 두목격의 한명이 카라테를 배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때 카라테라는 무술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하치오지시에 있는 가장 가까운 도장에 카라데를 배우던 일진 두목이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장을 찾던 중 이케부쿠로에 있는 극진 카라테 도장 광고를 보고되고 도쿄에 살고 있는 누나에게 놀러간다는 구실로 도장을 둘러보기 위해 극진카라테 본부를 방문하게 됩니다.하지만 방문 후 야마자키가 배운 것은 기본기와 이동 수련 뿐이었기에 뭔가 대단히 강하다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또한 두번째 견학때도 첫번째 방문때와 비슷했지만 일진 두목과의 대결을 상정하고 있던 야마자키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4번째 견학을 하게 됩니다.이때 처음으로 서로 맨주먹으로 치고 발과 무릎으로 거리낌없은 공방에서 직접 타격하는 자유 대련을 경험하면서 야마자키는 "이게 싸움이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특히 오야마 야스히코의 움직임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런 놈들과 싸우면 그냥 당해 버린다.빨리 배우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가입에 필요한 금액을 누나에게 빌려 극진 카라테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됩니다.
극진 카라테는 대산도장에서 개선된 직후였지만 지도 내용은 대부분 대산도장의 것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최영의 총재를 필두로 대산 도장 시절의 대리 사범 이시바시 마사시,구로사키 겐지 등이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당시 야마자키 테루토모의 선배는 오야마 시게루,오야마 야스히코,치비 신이치,고다 유조,후지 마키 준,나카무라 타다시,카토 시게오,오사와 아키오,아시하라 히데유키 등이 함께 연습을 거듭했습니다.당시 일본에서 카라테 도장을 다닌다는 것은 불량청소년들만이 배운다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가 카라테를 배운다는 것을 알면 반대할 것이 뻔했으므로 야마자키는 비밀로 하고 카라테 도장을 다니게 됩니다.따라서 야마자키가 도쿄에 자주가는 핑계로 댄 것은 "가수가 되고 싶어 히가시 나카노에 있는 스튜디오에 가고싶다"고 부탁,승낙을 받았으며 스튜디오 수업은 일주일에 두번 이었기 때문에 다른 요일에 몰래 카라테 도장에 다녔지만,이케부쿠로의 왕복 운임이라든가 수업료 등의 금전적 문제는 당시 고교생ㅇ이었던 야마자키에게는 카라테 수련보다 더 고생스럽고 난감한 문제였다고 합니다.원래 카라테 수업 구실로 다녔던 스튜디오의 경우 2년 반을 다녔는데 이 수업은 카라테 뿐 아니라 훗날 야마자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야마자키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차에 뛰어 올라타고 편도 4시간의 이케부쿠로에 있는 본부 도장에 빨리 도착해봐야 19시 이전이었는데 당시 저녁 수업의 경우 18시 30분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야마자키는 늘 기본 연습 도중에 합류했다고 합니다.또한 21시에 보통 연습이 끝나지만 당시엔 시간내에 바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21시 30분이나 22시 정도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도장을 22시경에 나와 신주쿠 23시 기차를 타고 가까운 카이야마토 역에 도착하면 새벽 2시,이땐 노선 버스도 마감했기 때문에 야마자키는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새벽 3시 정도였고 다시 아침 7시에 일어나 학교에 통학했는데 보통의 집이라면 학생의 이런 늦은 귀가가 용납되지 않았겠지만 당시 야마자키는 부모님들과는 따로 살고 형과 함께 살고있어 늦은 귀가도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끝났다고 합니다.
야마자키는 극진 카라테에 입문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기본기와 카타 등은 자신과의 싸움이었기에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상관없었지만 자유 대련이었던 조수는 상대가 자신보다 기술적으로 몇 수나 위였기 때문에 대련때마다 몸 어딘가는 늘 상처를 입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기 때문에 자유대련 시간이 될때마다 마음속으로 공포심이 일기 시작합니다.최영의 총재는 그런 초심자들에게 항상 말하길,
나 자신이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상대를 두려워하면 안돼.
눈 앞의 두려움과 공포를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야 사람은 성장하며 기술도 몸에 붙게 된다.
처음부터 검은 띠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연습할 필요조차 없는 것 아닌가?
마음껏 부딪혀서 기술을 몸에 붙여라!
부상이란 것은 강한 사람일수록 피해간다.부상을 당하는 동안은
아직 나 자신이 미숙하다고 생각하라.
극진 카라테를 창시한 최영의는 야마자키를 비롯한 극진 수련생들을 격려하였고 야마자키는 최영의의 말에 항상 새로운 투쟁심에 불을 붙였고 일진 두목과의 싸움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멈추면 진다라고 생각하고 자유대련에 두려움과 공포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고 수련을 계속 해나갔습니다.그리고 2학년때 드디어 일진 두목과의 싸움이 일어납니다.야마자키가 학교에 나막신을 신고 간 야마자키를 본 일진 두목이 건방지다며 트집을 잡았고 아먀자키는 선빵으로 발차기를 날린 후 상대를 잡아 집어 던져 싸움을 끝내 버렸고,이후 야마자키가 극진 카라테를 배우고 있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져 버렸고 이후 일진 두목도 야마자키를 더이상 건드리지 않게 되면서 졸업 후까지 더이상의 대결은 없게 됩니다.야마자키는 싸움에 지고 싶지 않은 이유로 시작한 극진 카라데 수련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워낙 장거리에서 도장을 다녔기 때문에 연습량은 동료들에 비해 항상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더 연습하고 싶은 마음에 초조함과 조급함까지 생기던 야마자키에게 최영의 총재는 "극진 카라테의 토대는 기본 연습이다.하지만 기본을 지탱하는 것은 기초 체력이다.체력을 만드는 연습은 어디에서든 할 수 있다."고 조언했고 도장에 주 2~3회 참여하는 것이 전부였던 야마자키는 도장에 다닐 수없는 날에는 가업인 농사를 도우며 수업료 및 앙복 운임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겸했습니다.그 후 최영의의 조언에 따라 체력 만들기를 하며 기초 체력 증진에 매진하였습니다.결과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강화시키며 62kg의 경량급인 야마자키가 무차별급의 극진 카라테의 직접 타격제에서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야마자키는 졸업 후 일하면서 매일 도장에서 연습할 수 있었지만,진학을 결심한 후 직장을 그만두고 일본 대학 농 수의대에 입학하게 되지만 학생 운동이 치열해지면서 대학 자체가 한때 폐쇄되면서 학교에 갈 수 없게 됩니다.학교 친구들은 시골로 돌아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의 선택을 하게 되지만 야마자키는 최영의의 권유도 있었기에 극진카라데 연습에 전념하기로 합니다.여태까지는 저녁 수련 연습 뿐 이었지만 이후 아침 연습을 끈내면 점심 무렵에 도장에서 바벨 등으로 체력 만들기에 몰두했고 16시부터 2부 연습에 참석하기도 합니다.컨디션이 좋을때는 야간 연습에도 참여하는 생활이 일상화되며 할상 야마자키는 23시경이나 되야 집으로 돌아가는 등 야마자키의 생활은 극진 카라테 수련이 중심이 되어 버립니다.극진 카라테의 검은띠를 취득하는 자는 백명 중에 단 한명뿐이다라는 말이 전해질만큼 극진의 수련은 고행의 연속이었지만 야마자키는 흰띠에서 오렌지,파랑,노랑,녹색의 띠를 뛰어넘어 네 계급을 월반하기도 합니다.1967년 4월15일에는 2년 반만에 블랙벨트(초단)로 승단하며 당시 최단 기록의 승단을 합니다.같은 해 10월10일에는 2단으로 승단하고 그 후 본부도장의 미군 캠프에서의 지도와 자신의 수련을 이어 나갔습니다.
1969년 1월, TBS. 니혼 TV에 이어 NET이 세계 킥복싱이 방영 개시했고 NET은 무에타이 선수와 일본 권법,카라데의 각 유파에 출전 요청을 해 선수를 조성하는 한편,극진카라테에도 같은 해 2월에 참전 의뢰를 해왔습니다.최영의 총재는 당시 수제자들 중 야마자키 테루토모,소에노 요시지,오가와 히로시를 선출하고 극진 체육관 소속 킥복서로 참전시켜 그들은 극진 삼인방이라고 소개되기도 합니다.야마자키는"미국 캠프 자마의 도장생에는 신장 2m 가까이되고 체중 역시 90kg 이상되는 거한들이 수십명 있었고 그 중에는 복싱을 하고있는 학생도 있었습니다.그들을 상대로 지지 않는 기술을 연구하고 체력을 강화하며 대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무게라면 절재 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고 펀치도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었는데 그것이 경기를 할때 버팀목이었다."라고 야마자키는 술회하기도 했습니다.오타구 체육관에서 데뷔전을 맞이한 야마자키 상대는 무에타이 라이트급 6위의 선수였지만 야마자키는 오른쪽 스트레이트로 2R 45초에 KO 승리했습니다.2차전에서 일본 킥복싱 선수의 30연승을 저지한 태국의 칸난빠이와의 대전이 실현되었는데 1R 1분 33초에 KO로 승리한 야마자키에 대해 칸난빠이는 "야마자키는 글러브 속에 돌을 넣고있다!'라고 강력하게 항의할 정도로 야마자키의 강력한 펀치력에 대한 일화가 있을 정도였습니다.같은 해 9월,극진 회관 주최 제 1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참가선수는 총 48명으로 A,B,C의 블록으로 토너먼트가 나뉘어 각각 진출한 선수끼리 결승리그를 진행하는 룰이었습니다.당시는 두께 2.8cm이상의 삼나무판을 격파용으로 사용했는데 야마자키는 총 16장으로 격파부문에서 최고 기록을 세우고 대회까지 우승을 하며 더블 타이틀을 획득합니다.전 일본 챔피언에 오른 후 다시 킥복싱 경기 제안이 들어오고 상대는 일본 킥복싱의 전설 사와무라를 19회 다운시켜 승리했던 무에타이의 룸피니 페더급 8위 사만소 에디슨이 선정됩니다.
이번경기는 지금까지와의 경기와는 조금 다르다.
극진회관의 간판을 짊어지게 되고,전일본 챔피언이기 때문에
절대로 질 수 없는 경기..!
라고 각오에 각오를 다지며 맹렬하게 연습을 수행하며 경기에 대비합니다.당일 시합에는 스승 최영의도 텔레비젼 해설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야마자키는 사만소를 코너로 몰아붙여 오른쪽 스트레이트로 1R에 KO 승리합니다.스승 최영의 앞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을 야마자키는 그 어떤 시합보다 더 기뻤다고 합니다.일본 킥복싱의 전설 사와무라를 이긴 사만소를 1R에 넉다운으로 승리해버린 야마자키에 대해 무에타이의 탑랭커들도 야마자키와의 시합을 꺼릴 정도로 두려운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데일리 스포츠 도쿄 본사 편집국장이었던 콘도 타카시는 킥복서 야마자키를 평하길,
"1970년대 킥복싱 팬들을 매료시키고 화려한 시대를 연
NET그룹의 라이트급 선수로써 본 고장 태국의 강호 무에타이 선수들을
차례로 쓰러뜨려 순식간에 스타가 되고 불과 일년만에 스스로 링과 작별했던,
그 환상의 선수가 야마자키 테루토모였다.
킥복싱 무대위에서 극진카라테 일가의 인기도 올라갔다.
야마자키는 이 사자의 역할을 100% 발휘하며 킥복싱에서 익힌 기술을
극진카라데에서도 살려 전일본 선수권에서도 안정된 성적을 거뒀다.
1970년 6월14일,오르단의 후세인 1세의 아내 무나 왕비,페리 아르왕 동생 및 공주 일행이 일본에 방문했고 극진회관은 도쿄 힐튼 호텔에 방문하여 연무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야마자키와 소에노 요시지의 대련을 본 왕실 일행은 그 실력과 박력에 감탄했으며 같은해 제 2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대회 결승 리그에 오른 야마자키는 하세가와 카즈유키와의 대결 끝에 준우승에 그칩니다.1971년 대학을 졸업 후 주니치 영화사에 입사,직장인으로 생활할 것임을 표명하고 선수를 은퇴합니다.
1972년 2월,스페인의 카를로스 황태자와 소피아 부인이 일본을 방문합니다.카를로스 황태자는 최영의 총재에게 극진카라테를 배운 인연이 있습니다.극진 회관 부회장 모리 마스다이라(당시 중의원 의원)의 중개로 연무회가 열럈으며 같은 달 21일에 최영의 외,오야마 야스히코,야마자키 테루토모,스즈키 코우헤이,미우라 미유키,사토 카츠아키,이소베 세이지,오이시 다이고,하워드 콜린스 등 20여명의 블랙벨트 보유자들로 구성된 구성원들이 아카사카 영빈관에 방문하여 제 1회 전일본 선수권 챔피언 야마자키 테루토모와 제 3회 전일본 선수권 챔피언 사토 카츠아키와 시범 경기를 하는등 일본 국빈이었던 스페인 황태자 부부 앞에서 극진카라테 기술들을 선보이기도 합니다.그리고 그해 가을,선수를 은퇴하고 있었던 야마자키는 최영의 총재의 명령으로 제 4회 전일본 선수권에 2년만에 참여하게 되고 결승 리그 진출을 두고 하워드 콜린스와 대결하게 됩니다.모두 압도적으로 야마자키의 승리를 예상했고 경기 양상도 야마자키의 승리가 확실시 되었지만 막판에 야마자키는 절반을 뺐기며 패배하였고 야마자키는 "패배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며 결과에 승복합니다.1973년 제 5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도 야마자키는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상대는 킥복싱 경험이 있는 로야마 하츠오(한국명 노초옹)으로 이 경기는 "이것이야말로 극진의 진수!!"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명경기로 회자되지만 야마자키는 결국 패배했지만 야마자키에 대한 찬사는 관계자들에게서 끊임없이 나오기도 합니다.이후 야마자키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연습을 쌓을 수 없었기에 한계까지 왔다고 판단하고 최영의에게 도복을 반환 합니다.결과적으로 제 5회 전일본 선수권이 마지막 출전이 되지만 참가한 대회 모두 입상하는 안정적인 성적을 남기게 됩니다."나는 수년간 축적해온 극진 정신이 좋았다."는 말을 남기고 야마자키는 은퇴합니다.선수권 대화에서 물러난 뒤에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정도로 극진회관 본부 도장에서 연습을 틈틈이 하며 나카무라 마코토를 지도하기도 했습니다.야마자키는 최영의 총재에게 양해를 얻어 1977년 극진 회관 지부로서가 아니라 오미야에 도장을 두고 다케다 신겐의 군기에 기록된 풍림화산을 도복과 띠에 이름을 붙여 카라테 지도를 시작했습니다.마쓰이 쇼케이도 첫 출전한 제 12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전에 야마자키의 지도를 받기도 합니다.1995년 풍림화산에서 NPO 단체 국제 무술 카라테 연맹 역진회관을 정식으로 발족합니다.
"카라테라는 것은 머리 긑부터 발 끝까지 전부를 무기로 하는 훈련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특기가 4~5개 정도 있으면 절대 뒤지지 않는다.
접근하면 박치기를 먹이고 떨어져 있으면 킥을 날린다.보통 이 한방에 상대는 쓰러진다.
양 손,양 발,팔꿈치,무릎,주먹 등 뭐든지 무기니까...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카라테다."
/야마자키 테루토모
▣극진의 맹호, 야마자키 테루토모의 라이벌 호랑이 소에노 요시지
극진 카라테의 최영의 총재에게 사사받고 극진의 용호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극진의 용호 야마자키 테루토모의 라이벌이자 용호의 호랑이 소에노 요시지는 야마자키와는 달리 우직하게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는 불도저 스타일이었지만 화려한 발차기와 격투센스의 야마자키에 비해 화려함에서는 비교적 덜 부각된 것이 사실입니다.소에노 요시지(添野義二, 사도관 9단;1947년 9월29일생~)는 사도관공수도를 창시하고 세계공수도연맹 사도관이라는 공수도 단체를 설립하기도 합니다.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캐릭터 류와 료 중 류의 모델로 최영의 총재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은 소에노 요시지입니다.1993년 게임 개발자와의 인터뷰에 의하면,류의 모델은 만화 무한의 파이터(공수 바보일대)속 최영의 총재의 제자이자 극진의 호랑이라고 불렸던 소에노 요시지로 스츠리트 파이터는 만화 속에 등장하는 태국 무에타이 암흑의 제왕 레이바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소에노 요시지는 극진 카라테를 배우고 활동하던 시기,성서의 호랑이 혹은 극진의 맹호라는 별명과 함께 야마자키 테루토모와 극진의 용호라고 불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에노 에이지는 신장 170cm 70kg의 비교적 평범한 피지컬이었지만 극진 카라테에 킥복싱 스타일을 접목,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하기도 합니다.소에노 에이지는 사이타마 현 출신으로 1964년 9월1일에 극진 회관에 입문하여 최영의 총재를 필두로 대산도장 시절의 대리사범 이시바시 마사시,구로사키 켄지 등이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선배는 오야마 시게루,오야마 야스히코,고다 유조,나카무라 타다시,카토 시게오,오사와 아키오,아시하라 히데유키 등이 있었습니다.소에노 에이지는 극진 카라테 제 1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 라이벌이자 극진의 용호로 불린 야마자키 테루토모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고 제 2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3위,제 4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5위의 성적을 거둡니다.또한 프로 킥복싱 전적 9전 6승 3패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소에노 에이지는 1966년 성서대학으로 진학 후 대학의 공수도부를 극진회관 산하로 변경했으며 1967년 4월15일 블랙 벨트로 승단합니다.1969년 4월,NET은 TBS 니혼 TV에 이어 세계 킥복싱을 방영하기로 결정,NET은 무에타이 선수와 일본 권법,공수도 등 각 유파에 출전요청을 해 선수들을 수급하는 한펀,극진회관에도 참전 요청을 하고 최영의 총재는 소에노 에이지를 비롯하여 야마자키 테루토모,오가와 히로시를 극진 체육관 소속으로 출전시킵니다.소에노 에이지는 4월15일,사와무라 타다시의 연승을 저지한 무에타이 선수 칸난빠이에 아쉽게 패배하지만 경기 내용에 있어서는 "사와무라보다 강하다."고 주목을 받습니다.소에노 요시지의 경기 스타일이 상대의 공격을 맨몸으로 맞으면서도 전진하며 자신도 공격을 가하는 인파이터 스타일에,저돌적으로 돌진하며 힘으로 눌러버리는 유형이었기 때문에 경기가 끝나면 최소 1~2주 정도는 휴식을 취해야하는 날들이 경기마다 계속되었다고 합니다.결국 경기 후 닥터 검사에서 뇌파에 이상소견을 보여 킥복싱에서 은퇴하게 됩니다.같은 해 9월20일,극진화관 주최 제1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결승리그에서 하세가와 카즈유키에 승리하지만 정작 결승에서 만난 야마자키 테루토모에 패해 준우승에 그칩니다.같은 해 도시모 사이타마 지부장에 취임한 소에노 요시지는 킥복싱 체육관 소에노 짐도 개설합니다.
1970년 9월26일,소에노 요시지는 제2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결승리그에 진출하지만 야마자키 하세가와에 패해 3위에 입상합니다.1972년 10월22일,2년만에 출전한 제4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B블록 결승전에서 사토 토시카즈에게 패배,5위에 그칩니다.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소에노 요시지는 선수권 대회에서 은퇴합니다.1979년 11월,제2회 오픈 토너먼트 전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산페이 게이지 VS 윌리 윌리엄스의 주심을 맡은 요시지는 윌리의 거듭된 잡기에 의한 무릎차기 반칙을 한 윌리를 뒤에서 잡아 던진 후 실격에 의한 반칙패를 선언하기도 합니다.1980년 9월,소에노 요시지(당시 5단)는 극진회관에서 제명 처리됩니다.이유는 형사 사건을 일으킨 일이었지만 기소되지는 않았으며 복귀도 없었습니다.당시 최영의 총재와 공수도 바보일대의 작가 카지와라 잇키와의 대립의 영향으로 소에노 요시지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또 로야마 하츠오가 소에노 요시지와 같은 사이타마 현 내에 도장을 하고잇어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겼고 최영의 총재가 로야마 하츠오의 편을 들어줬다는 설도 있습니다.
극진회관에서 제명당했지만 소에노 요시지는 스승 최영의와 개인적인 교제는 계속 이어졌으며 이케부쿠로 사우나에서 자주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최영의 총재는 말년에 소에노 요시지를 만날 때마다 "극진카라테로 돌아와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당시 소에노 요시지도 사도관을 설립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우호 단체가 되자고 제의를 했다고 했으며 최영의 총재가 1994년 서거하자 소에노 요시지는 극진본부에 달려와 통곡했다고 전해집니다.그리고 최영의 유훈에 따라 최영의가 대산도장 시절 가르쳤던 싸움 카라테를 지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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