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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전설스토리 루게릭의 후계자 미키 맨틀_역사상 최강의 스위치히터

by 마음heart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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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전설스토리 루게릭의 후계자 미키 맨틀

역사상 최강의 스위치히터 



미키 찰스 맨틀(Mickey Charles Mantle,1931년 10월20일~1995년 8월13일(향년 63세),180cm / 88kg)은 뉴욕 양키스의 원클럽맨이자 사상 최고의 스위치 히터로 MVP를 3회 수상했습니다.미키 맨틀은 베이브 루스의 기록들을 갈아치울 재능이 있던 선수라고 평가를 늘 받아왔던 선수였고 실제로도 그럴 기세였으나 그 놈의 부상으로 여러 번 골골대는 바람에 고작 500홈런을 넘긴 것에 그쳤습니다.선수생활 내내 여러가지 잔부상에 시달리지만 최악의 유리몸이라고 하기엔 18년 동안의 선수생활 중 3시즌을 제외하고는 전부 120경기 이상을 소화하는 미친 근성을 보여줬으며 무수한 잔부상들의 고통을 20년 가까이 버틸 정도로 정신력이 대단한 선수였지만 다만 이러한 무리는 그가 툴을 온전히 발현하지 못하게 하는 주 요인이 되었습니다.그럼에도 미키 맨틀은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 21세기에 마이크 트라웃이 있다면 20세기에는 맨틀이 있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유리몸 기질로 인해 라이벌 윌리 메이스보다는 성적이 다소 낮습니다.월드 시리즈에 자주 진출하고 대단한 성적을 내면서 월드 시리즈 통산 홈런ㆍ타점ㆍ득점ㆍBB/Kㆍ총루타 기록을 차지했는데 맨틀의 통산 성적은 18시즌 동안 타율 .298, 2415안타, 536홈런, 출루율 .421, 장타율 .557, OPS .977, 순장타율 .259, BB/K 1.01, wRC+ 170, 150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미키 맨틀의 유년기

미키 찰스 맨틀 Mickey Charles Mantle

미키 맨틀은 태어날 때 아버지 엘빈 찰스 맨틀(Elvin Charles Mantle)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활동한 MLB 명예의 전당 포수 미키 코크런의 이름을 본따 이 아들을 미키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후 성장한 아들이 야구를 하려고 하자 왼손잡이었던 미키의 할아버지와 함께 좌우로 배팅 볼을 던져주는 지극정성으로 스위치 히팅 타법을 익히게 했는데 훗날 이는 플래툰 시스템을 극도로 신봉했던 케이시 스텡겔 감독을 만나게 되며 큰 이점으로 작용합니다. 아버지의 이런 플래툰 교육은 선견지명이었던 셈이었는데 또한 풍족한 것은 아니었던 형편상 미키도 나름대로 집안 형편을 위해 광산부터 농부까지 갖가지 잡일을 맡아 했는데, 그때 단련된 무지막지한 손목과 어깨 힘은 훗날 대성할 홈런 타자의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그렇게 고교 시절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세미프로 팀에서 뛰었으며, 우연히 양키스 스카우트가 펜스 뒤 강에 빠지는 홈런을 지켜보고는 루 게릭의 후계자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하였고, 졸업식까지 기다렸다 졸업 당일 사인하는 정성을 다한 끝에 양키스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키 맨틀,뉴욕 양키스의 전설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조 디마지오의 뒤를 잇는 후계자가 되다

미키 맨틀은 마이너 시절 유격수로 뛰었지만, 필 리주토에게 막힌 데다 유격수로서 딱히 수비가 좋은 편도 아니어서 중견수로 보직을 변경했지만, 양키스에는 이미 중견수 자리를 차지한 괴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조 디마지오였습니다. 그래도 맨틀은 강견을 앞세워 우익수로 뛰었지만, 디마지오는 맨틀이 자신을 향후 밀어낼 것임을 직감하고 일부러 쌀쌀맞게 대했다고 합니다.1952년 조 디마지오의 예상대로 중견수로 자리잡은 만 21살의 미키 맨틀은 3할 타율을 찍으며 스무 살짜리 치고는 매우 뛰어난 시즌을 보냈지만, 리그 최다 삼진의 불명예 또한 얻으며 양키스 팬들에게 야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절치부심한 맨틀은 1955년부터 본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23세 시즌인 1955년부터 1962년까지 그는 비율 스탯 .315 .445 .616에 320홈런을 날렸습니다.특히 주목할 점은 1956~1957년에 각각 기록한 11.5/11.4fWAR과 MVP 3회 수상 (1956, 1957, 1962)으로 1956년에 맨틀은 MLB 최후의 통합 트리플 크라운(양대 리그에서 타율, 홈런, 타점 1위)을 달성했으며, (0.353, 52홈런, 130타점), 1957년에는 홈런 수가 34개로 줄었지만 0.512라는 어마어마한 출루율을 기록(20세기 이후로 5할 이상의 출루율을 기록한 선수는 맨틀을 포함에 3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둘은 알다시피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 각 팀의 역사상 최고의 타자들로 21세기까지 포함하면 배리 본즈도 있지만 그는 약쟁이임으로 사실상 20세기 이후에는 이 셋뿐입니다.)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이였던 1956년 못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MVP 3회 수상은 도핑의 힘을 빌린 본즈에 이은 메이저리그 최다 수상 타이 기록으로, 이보다 많이 수상한 선수는 약의 힘으로 7회를 수상한 배리 본즈,맨틀 외 통산 3회 MVP 수상자들은 지미 폭스,조 디마지오,알렉스 로드리게스,스탠 뮤지얼,로이 캄파넬라,요기 베라,마이크 슈미트,알버트 푸홀스,마이크 트라웃 뿐입니다. 단일 리그 타격 트리플 크라운도 맨틀 이후 1967년 칼 야스트렘스키,2012년 미겔 카브레라 단 둘뿐이며 게다가 이 시기 무시무시한 홈런 세례를 퍼부으며 과거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이끌었던 영광스런 시대를 다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양키스 타선은 한동안 맨틀 혼자만 이끌어야 했고, 그가 받은 무수한 견제는 역대 8위에 랭크된 볼넷 수로 남아 있습니다. 역대 1700볼넷 선수 중 20시즌을 뛰지 않은 선수는 맨틀이 유일한데 2012년에 짐 토미가 최종 1747개를 기록, 1733개를 기록한 맨틀을 제쳤지만, 토미는 이 기록을 달성하기까지 21시즌이 걸렸고 올타임 2위에 해당하는 많은 삼진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습니다.동시대 뉴욕의 3대 중견수라 함은 뉴욕 자이언츠의 월리 메이스,브루클린 다저스의 듀크 스나이더와 함께 미키 맨틀을 일컫는 것이었고, 베이브 루스와 조 디마지오의 후계자라는 프리미엄까지 겹쳐진 맨틀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부상으로 도루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5툴 플레이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었는데 심지어 좌타석에서 번트를 대고 1루로 냅다 뛰면서 상대를 농락하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맨틀에 대해서도 'Mickey could do everything"말해야 할 듯합니다.특히 맨틀의 홈런에 대해 더 자세히 언급하면, 기존의 담장 살짝 넘어가는 홈런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었는데그의 홈런은 요새 야구장들이 외야 거리 360피트(110m)만 되어도 펜스 멀다고 징징대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450피트(137m), 500피트(152m)급 홈런이 대부분으로 양키스 선수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날린 유일한 장외 홈런도 그의 기록이며, 다른 팀 선수까지 포함해도 니그로 리거 조시 깁슨의 2개를 제외하면 유일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의 홈런 기록에 대해서는 기하학적인 계산까지 동원되며 야빠 수학자들의 단골 떡밥이 되었는데 비공식적이지만 기하학적 계산을 동원하면 650피트(198m)급 홈런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고 합니다.또한 1961년에는 그 유명한 M&M포가 결성,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에 나란히 도전하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결과는 잘 알려진 로저 매리스의 61홈런으로 끝났지만, 뉴욕 팬들은 양키스 프랜차이즈 스타인 맨틀이 54홈런에서 멈춘 것을 전설적인 밤비노에 대한 예우라 여겼는데 실제로는 돌팔이 의사가 스테로이드 주사 바늘로 오염된 것을 쓰는 바람에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였다고(당시 스테로이드는 메이저리그가 금지한 약물이 아니었다).다른 기사에는 스테로이드가 아닌 암페타민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또한 2013년 SI의 기사에서는 스테로이드와 암페타민을 동시에 맞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938년 연방식품의약품화장품법에서는 처방약은 의사 처방 없이는 판매할 수 없도록 규정했고,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처방약에 포함되었습니다. 의사가 아닌 돌팔이에게 스테로이드를 맞았으면 불법으로 스테로이드를 맞은 것으로 여기에 대한 비난은 가능해 보이는데 물론 당시에도 금지 규정만 있었지 처벌 규정은 없었고, 1988년에야 생기게 됩니다. 처방 없이 처방약을 사용하면 연방법 위반으로 리그 규정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키 맨틀의 발목을 잡은 잦은 부상 그리고 은퇴

고교 시절 풋볼 경기 도중 당한 무릎 골수염 부상으로부터 맨틀의 파란만장한 부상 수난사는 시작되었는데 당시 심하게는 다리 절단까지 염려될 정도로 부상은 심각했고,이 부상으로 한국전쟁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합니다.이후 야구를 그만둘 때까지 이 부상은 끝끝내 맨틀을 괴롭혔는데 또한 선수 생활 내내 수 차례나 대형 부상으로 병원 입원을 반복하는 등 그의 선수 생활은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또한 맨틀의 집안에는 호지킨 림프종 환자가 많았는데, 이 병으로 인해 선조들 대부분이 40대 이전에 삶을 마감해야 했던 것 때문에 맨틀은 늘 자신이 요절할 것이라 여겨 내일이 없는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고 이렇게 과도한 허슬 플레이들은 결국 맨틀의 부상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습니다. 그에게 야구 외 유일한 낙은 화이티 포드와의 술자리였습니다.결국 맨틀의 이 유리몸은 루스를 뛰어넘을 대타자로 촉망받던 맨틀이 끝내 루스의 기록을 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버렸습니다.하지만 흔히 유리몸이라고 알려져 있는 선수들과는 비교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출전기록이 넘사벽인데, 총 18년의 커리어 중 3시즌을 제외하고는 전부 120경기 이상을 출전했으며 특히 1962년 이전까지의 기록은 154경기 체제여서 사실상 매시즌 전경기 출전에 가까웠으며 특히 마지막 2년은 둘 다 정규시즌 전체의 90%에 육박하는 경기를 뛰는 등 자그마치 18년이란 세월동안 무수한 부상의 고통을 참고 뛸 정도로 비범한 정신력의 선수였던 것입니다.

1968년을 마치고 미키 맨틀은 비교적 젊은 37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는데 맨튼의 마지막 경기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원정 경기였는데 상대 선발 투수는 당대 최강의 투수이자 메이저리그 마지막 30승 투수인 데니 매클레인이었습니다. 디트로이트가 앞서 가던 중 7회초 맨틀이 타석에 들어서자 매클레인은 맨틀에게 가운데 직구를 던질 것이니 홈런을 치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맨틀은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으나 공은 정말 가운데로 들어왔고, 맨틀은 타임을 걸고 좀만 높게 던져줄 것을 요구했다고. 결국 맨틀은 홈런을 만들어냈는데 재밌는 일은 다음 타자인 조 페피톤의 타석에서 일어났는데 페피톤은 매클레인에게 똑같은 코스로 공을 던져줄 것을 요구했는데, 매클레인은 공을 머리 쪽으로 던지는 것으로 화답했다고 합니다.맨튼은 1974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88.2%의 지지율로 절친한 친구 화이티 포드와 함께 헌액됨과 동시에 뉴욕 양키스의 모뉴먼트 파크에 그의 7번이 내걸렸습니다.하지만 미키 맨틀은 은퇴이후 사업 실패, 술로 인해 가산을 탕진했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간 이식을 받기도 했으며, 가족들마저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끌었으며,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와중에 맨틀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생존하였으며, 메이저리그의 천재 강타자는 1995년 63세를 일기로 댈러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가 들고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기 관리에 신경쓸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미키 맨틀의 가족들이 걸린 질병인 호지킨 림프종은 되려 팀 동료이자 M&M포로 유명한 로저 매리스가 걸렸고, 매리스는 1985년에 사망했습니다.은퇴 후 4년이 지난 1972년에는 양키스가 양키 스타디움을 리모델링하고 50주년 행사를 하는 차에 맨틀을 포함한 레전드들에게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최고로 좋은 기억'을 물어보는 일이 있었는데, 맨틀이 여기서 불펜 옆에서 펠라치오를 받은 일이라고 답변하며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기도 합니다.

▧미 대중문화 속 미키 맨들

영화 머니볼의 첫머리에 미키 맨틀이 남긴 명언이 나오는데 원작인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에는 나오지 않는 대사이며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반에 디카프리오가 맡은 주인공 프랭크 주니어한테 아버지 프랭크는 밑의 대서를 예시를 들면서 인간관계에 있어 복장의 중요성을 설명해줍니다. 그런데 영화 후반에 프랭크는 똑같은 질문을 자신을 잡으러 온 FBI 수사요원 칼에게 던지는데, 칼은 아버지 프랭크와 달리 미키 맨틀이 있어 양키스가 이긴다는(즉 복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복장을 입은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뜻) 반대의 답변을 합니다.

It's unbelievable how much you don't know about the game you've been playing all your life.
자신이 평생 해온 경기에 대해 우린 놀랄 만큼 무지하다.

/영화 머니볼 중

"양키스가 매번 우승하는 이유가 뭐겠니?"
"미키 맨틀 때문에요?"
"유니폼 때문이야. 핀 스트라이프 무늬가 상대 선수들의 기를 꺾어 버리거든."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中

훗날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는 강타자 알 칼라인을 한 꼬마팬이 조롱했다.
"아저씨는 미키 맨틀의 반만큼도 못해요."
칼라인이 대답했다.
"얘야, 세상에 미키 맨틀의 반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 알 칼라인;맨틀과 동시대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만 22년을 뛰며
통산 399홈런 3007안타를 기록한 '미스터 타이거'.
올스타에 18회나 선정됐고, 골드글러브를 10회나 수상했다.

또한 로저 매리스의 1961년 홈런 기록을 다룬 2001년작 영화 61*에도 등장하는데 토머스 제인이 맨틀 역으로 출연했습니다.매리스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양키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홈팬들과 구단 관계자, 기자들의 편애를 받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들의 야유에 시달리는 매리스의 모습이 교차됩니다. 또한 "우리 집안은 다들 오래 못살았다"면서 몸을 돌보지 않는 모습도 묘사되었습니다.명 기타리스트인 스티비 레이 본의 lenny라는 모델에 싸인을 해 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1952년에 나온 콜렉팅 카드인 1952 Topps Mantle #311은 많은 카드 수집가들의 기준과도 같으며, 2021년 초에는 더 희귀한 호너스 와그너 카드를 제치고 역사상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하였습니다. 아무리 보관 상태가 나쁜 카드라도 만 달러가 넘는 인기 높은 카드이기도 합니다.미키 맨틀은 18년의 선수 생활 중 첫 시즌은 우익수로 뛰고 14년간 중견수로 출장하고 마지막 2년만 1루수로서 각각 131경기씩 출장했습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좌익수와 우익수로도 조금 나왔는데 특히 1965년엔 좌익수로만 108경기 나왔으며 또 투수/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으로 출장해봤습니다.

미키 맨틀 통산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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