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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최영의의 실전 카라테가 일본에 던진 격투기 문화·킥복싱과 K-1을 탄생시키다_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

by 마음heart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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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최영의의 실전 카라테가 일본에 던진 격투기 문화· 킥복싱과 K-1을 탄생시키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



사무라이의 나라답게 일본에서는 여러 무술이 융성하는데 유도를 비롯하여 대동류합기유술,아이키도,최영의의 극진 카라테 등 많은 무술들이 1900년대에 탄생하여 일본에 자리잡습니다.킥복싱 역시 마찬가지인데 킥복싱은 펀치와 킥을 모두 사용하여 상대를 타격하는 일본에서 태동한 격투기로 여러 무술 중에서도 특히 무에타이를 많이 참고해 나온 무술입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무에타이의 강함을 경험하는 극진의 사나이들

풀컨택트룰을 표방한 실전 무술 극진카라테의 등장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진정한 강함을 추구하던 남자들은 하나,둘 극진회관으로 모여 들었고 극진의 초인적인 수련을 견디며 점차 극진의 강함이 최고라고 인식하게 됩니다.지상 최강의 사나이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카라테에 대한 자부심은 타무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는데 자신이 수련한 무술로 타무술을 압도하고 싶은것은 남자의 당연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 대상은 태국의 무에타이였습니다.복싱 프로모터 노구치 오사무(1934년 도쿄 출신으로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 노구치 스스무씨가 소유한 노구치 복싱 체육관장이 되어 복싱 프로모터로 일했으며 196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구치 체육관의 주인이 되었고, 동생 노구치 쿄의 복싱 시합을 NET(현재의 TV 아사히)와의 TV에서 홍보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노구치 쿄는 세계 타이틀전 승부 조작으로 체포되어 NET와의 계약에서 제외되는 등 일본에서의 복싱 프로모션에서 백리스트에 오릅니다.1964년 노구치 오사무와 야마다 다쓰오는 태국의 룸피네 복싱 스타디움에서 쿠로사와 켄지, 나카무라 타다시, 오자와 노보루가라데 대표로 나서 무에타이 대항전을 3대3으로 조직했는데 이것이 킥복싱이라는 스포츠로 통용되는 것의 기초가 되어, 일본 킥복싱 협회를 설립하게 된다.)는 여러 무술의 격투가들이 한 무대에서 자웅을 겨룰 수 있는 킥복싱이라는 무대와 이벤트를 생각하게 되고 과거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들과 대결해 본 경험이 있다고 알려진 극진카라테의 최영의 총재를 찾아가게 됩니다.

최영의와 쿠로사키 겐지

노구치 오사무는 태국 무에타이 선수들과 극진 카라테 선수들과의 시합을 제의했고 최영의는 이 제안을 수락,당시 최영의 대신 수련생들을 가르치던 대리사범 쿠로사키 켄지가 태국 무에타이 원정대 감독 역할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 신문에 기사로까지 실리게 됩니다.

나카무라 타다시와 오자와 노보루

1964년 쿠로사키 겐지는 당시의 극진을 대표하는 후배 2명을 데리고 태국에 도착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주최측이 2대2 대항전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며 한명 더 선수를 요구하였고(처음에는 4대4 대항전으로 기획됨)결국 감독역으로 갔던 쿠로사와 겐지가 시합에 참여하게 됩니다. 태국 룸피네 복싱 스타디움에서 쿠로사와 켄지, 나카무라 타다시, 오자와 노보루가 무에타이의 성지인 룸피니 스타디움에 낙무아이들과 대련했는데, 자신보다 10살이상 어린 제자같은 후배들 나카무라와 오자와는 승리했지만 정작 극진공수도의 리더격이자 당시 극진을 대표하던 강자들 중 하나인 쿠로사키 켄지가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이후 충격을 받아 무에타이의 강력함을 실감한 쿠로사키 켄지는 극진카라테의 스타일을 살리면서 복싱 펀치와 무에타이 시합룰을 응용할 계획을 세우고 사실상 최초의 킥복싱 체육관을 만들게 됩니다.또한 태국에서의 극진카라테 VS 무에타이 선수들과의 이벤트 성공에 자신감을 갖게된 프로머토 노구치는 일본에서 킥복싱 경기를 열게 되었고 결과는 대흥행,여기에 나중에는 킥복싱 관련 애니메이션까지 나올 정도로 60년대 중후반 킥복싱은 인기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킥복싱이라는 명칭은 복싱 프로모터였던 노구치 오사무(野口修)가 1960년대 무에타이vs복싱,무에타이vs카라테 등의 시합을 추진하면서 무에타이에 자극받아 1966년에 고안했고, 일본의 복싱, 가라테 선수를 모아 "일본 킥복싱 협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다만 일본 킥복싱 협회는 킥복싱이라는 단어를 딱히 상표등록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킥복싱이라는 단어를 붙인 단체가 난립하게 되고 킥복싱 단체의 난맥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극진의 용 야마자키 테루토모와 태국의 무에타이 랭커 사만소 아디손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킥복싱,극진과 무에타이이 결합하다

쿠로사키 겐지는 대산도장시절부터 극진회관 내에서 사범으로써의 입지는 강했지만 무에타이에 패배 이후로도 무에타이에 대한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5년동안 계속해서 무에타이와 카라테의 접점을 연구하다가 1969년 결국 극진을 떠나 도쿄 메지로에 킥복싱 체육관 메지로 GYM을 설립하게 됩니다.당시 일본 킥복싱 시합은 승부 조작에,태국인 유학생을 태국 무에타이 낙무아이라고 속여 시합에 내보내는 등 프로레슬링처럼 쇼 비지니스적인 모습이 대부분이었습니다.하지만 쿠로사키의 등장으로 킥복싱은 점차 무술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전투를 통해 배운 인생의 철학,가치관이 무도가 되고 그런 무도가들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시합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시대와 환경에 맞춰 변화한 다른 무술,격투기들과는 달리 킥복싱이라는 하나의 시합 이벤트가 먼저 존재하고 그에 맞춰서 무술 킥복싱이란 격투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기술 및 선수 육성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았고 선수들에겐 돈이 아닌 동기나 추구해야 할 철학조차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그렇기에 극진의 용이라 불린 야마자키 테루토모를 제외하면,태국의 무에타이 랭커(사만소 아디손-룸피니 페더급 8위)를 이긴 선수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쿠로사키는 극진과 등을 돌린 후 킥복싱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걸었고 "일본에서 갈고 닦아 일본의 것으로 태국 무에타이에 승리한다.""타도, 무에타이! 라는 쿠로사키 겐지의 신념이 일본 킥복싱계에 깃들게 됩니다.쿠로사키의 신념을 이식받은 제자들은 룸피니,라자담넌 등 본고장 무에타이를 겨냥해 하루 10시간의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고 그렇게 쿠로사키가 극진을 떠난 9년 뒤 마침내 그의 제자 후지와라 토시오가 태국 무에타이 2대 리그인 라자담넌 스차디움의 챔피언(사상 첫 외국인이자 비 태국인 챔피언)이 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이때부터 일본은 화려한 조명 아래의 슈퍼스타 VS 태국 낙무아이에 도전하는 사무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본의 킥복서들은  크게 이 두 갈래로 나뉘게 됩니다.1960년대~70년대 초에는 일본의 4개 전국 지상파 방송국에서 킥복싱을 방송할 정도로 크게 흥행했지만, 오일쇼크 등의 영향으로 이후 침체기를 겪는데 여러 킥복싱 단체의 난립도 한 원인이었습니다.그러다보니 무에타이와 차별성을 주장하면서도 연관성을 강조하는 웃픈 상황도 발생했는데 그러다 1990년대 신설된 K-1이 흥행하면서 2천년대 다시 주목받기도 했으나, K-1의 인기가 시들해진 2010년대 이후 종합격투기가 크게 성장하면서 주요 킥복싱 단체들도 종합격투기 단체들과 선수를 교환하거나 공동대회 개최, 종합격투기와 유사한 체급체계 구성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쿠로사키 겐지가 극진의 사범으로 있을 당시 유도에 관심이 많았던 존 블루밍이라는 네덜란드 군인(6.25 전쟁때 UN군으로 참전)이 도장에 방문하게 되는데 실전무도인 극진카라테의 매력에 심취해 그의 방문은 카라테 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7년후에는 네덜란드에 극진회관 지부를 차리게 되었고 쿠로사키를 초빙해 지도 또한 이어 받았습니다.무도가로싸의 그의 능력은 뛰어났고 네덜란드에서 존 블루밍의 입지는 커져나가 많은 네덜란드 무도가들이 존 블루밍에게 지도를 받게 되는데 그들 중엔 킥복싱 체육관 챠쿠리키 GYM을 설립하게 되는 톰 하릭이 있었고 쿠로사키의 도쿄 메지로GYM에서 유학한 후,네덜란드에 같은 이름의 메지로GYM을 설립하게 되는 얀 펄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훗날 브랑코 시가틱(K-1 WGP '93 챔피언),피터 아츠(K-1 WGP 94.95,98 챔피언),어네스트 후스트(K-1 WGP 97,99,2000,2002 챔피언),래미 본야스키(K-1 WGP 2003,2004,2008 챔피언)등 수많은 킥복서들을 키워냅니다.

브랑코 시가틱( K-1 WGP '93 챔피언)와 피터 아츠(K-1 WGP 94.95,98 챔피언)
어네스트 후스트( K-1 WGP 97,99,2000,2002 챔피언)와 래미 본야스키(K-1 WGP 2003,2004,2008 챔피언)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 붐이 일 당시인 1960년대에 잠깐 성행했으나 운영 미숙으로 인해 금새 쇠퇴하고 명맥은 이어져왔으나 1990년대 이후부턴 무에타이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며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 안에서도 정통 태국식이냐 일본 킥복싱 스타일이냐는 도장별로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간판은 무에타이 위주로 선점하고 있었으며 킥복싱이라는 명칭도 제법 볼 순 있지만, 그런 도장도 킥복싱을 일본 무술이라고 가르친다기보단 MMA 하위 관점에서 그저 복싱에 킥이 더해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마케팅 개념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최고의 입식 타격가를 가리는 K-1의 탄생

일본 최대의 킥복싱 단체로 초창기에는 아래 K-1이라는 이름의 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킥복싱, 가라데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이종격투기스러운 이미지였고 전성기에는 'K-1 히어로즈'라는 브랜드로 종합격투기 대회도 운영하였지만 전체적으로 K-1은 킥복싱 단체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2011년부터는 모회사가 바뀌면서 일본 단체도 아닌데, 현재 일본에서 활동중인 한국인 기업가가 K-1의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으며 본부는 홍콩에 두고 있다.한국과 일본에선 2000년대 한때 높은 네임벨류를 자랑하기도 했으나,지금은 위상이 많이 추락한 상태다.K-1의 K는Karate,Kickboxing,Kungfu,Kempo,Kakutougi,Tae Kwon do의King을 정한다는 의미다.

1980년대 유럽에서 열리는 킥복싱 경기에서는  엘보우 공격이 금지하였고 태국 무에타이 경기와는 많이 다른 양상이었는데 무에타이처럼 날카로운 미들킥과 넥클린치(뺨클린치=일명 목씨름)중심이 경기 운영이 아닌,펀치를 치기위해 킥을 차고,킥을 치기 위해 펀치를 날리는,화려한 연타가 볼거리인 킥을 쓰는 복싱이였습니다.아시하라 히데유키의 제자였고 정도회관이라는 자신의 유파를 설립하여 자신이 주최하는 무도 대회를 쇼비지니스로 승화시켜가던 이시이 카즈요시는 이런 유럽식 킥복싱이 버블붕괴 이후의 사회적 불안을 안고있는 일본에서 복싱,프로레슬링에 익숙한 90년대 일본인들에게 좋은 볼거리라 생각하였고 서양의 장신 킥복싱 선수들을 영입하여 대형 입식 격투 이벤트 K-1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K-1을 연 정도회관 관장 이시이 카즈요시(한국을 역사조작국가라고 떠벌리던 무식한 놈이다)그리고 당시 가라데 룰의 최강자 사타케 마사이키

K-1의 시초는 이렇게 카라테 단체 정도회관의 관장인 이시이 카즈요시가 카라테의 맨손과는 달리 글러브를 착용하고 안면가격을 포함하는, 최영의의 극진카라테와는 차별화된 공수 대련 규칙을 도입하여, 수련생들을 격투기 시합에 내보낸 아이디어에서 시작합니다.킥복싱이나 무에타이 시합 등에 나간 정도회관 선수들은 '가라데 VS 기타 무술'혹은 '일본 VS 외국'의 이미지를 가지고 일본 팬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되는데, 이 시합들이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선수가 바로 가라테 월드컵에서 극진회관의 월리 윌리암스를 꺾고 우승했던 정도회관의 에이스 사타케 마사이키입니다. 사실 이 당시 사타케는 가라데 룰에서는 적수가 없는 수준이었는데 사타케가 이긴 윌리 윌리암스는 극진회관 최강에 가까웠고, 앤디 훅과의 대결에서도 무승부를 거쳐서 격파로 승리하는 등 잡을 선수는 거의 다 잡았으며 이후 프로레슬링 Rings에도 참가해서 괜찮은 경기를 했고 K-1 초기에 알려진 스탠더맨이나 패트릭 스미스와의 경기에서도 승리한 적이 있을 정도이고, K-1직전에 열린 대회에서는 피터 아츠와도 무승부를 거둡니다. 사실 K-1은 사타케 마사아키가 세계에서 먹힌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정작 사타케는 1회 대회에서 4강전에서 브랑코 시카틱과의 대결에서 패배, 2회 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피터 아츠와의 대결에서 판정패 하는 등 극초기에만 가능성을 보여주다가, 결국 무사시에게 밀려나고, 이시이 관장과 대립하면서 정도회관을 떠나게 됩니다.


이시이 관장은 초창기의 종합격투기 대회였던 Rings 대회가 끝나고, 링 위에서 '내년에는 총 상금 500만 달러(대략 50억) 상금을 걸고 전세계에서 최고의 격투가들을 데려와 시합을 펼치겠다'라고 했는데, 여기에 후지TV라는 거대 스폰서를 얻으면서 K-1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결국 K-1의 시대에 전 세계 각지의 킥복싱 고수들이 출전하게 되는데 피터아츠,어네스트 후스트,브랑코 시카틱 같은 선수들이 시합에 출전하였고 일본에서는 사타케 마사아키가 출장합니다. 대회우승 상금은 10만 달러(사실 이것마저도 세금을 피하기 위해 대전료를 낮춰 발표하는 것은 일본 격투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돈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는 순수하게 입식타격기만으로 복싱을 제외하고 우승시 1억여원 상당의 상금이 주어지는 대회는 당시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상금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K-1 WGP 우승상금은 꾸준히 증가하여 2003년도 우승자인 레미 본야스키가 받은 공식 상금은 40만달러에 이릅니다.시합은 대 성공으로 끝나는데 이후 K-1은 정기적으로 시합을 열며 선수들을 불러 모았는데, 명성과 돈 덕택에 다른 격투기 시합에 등장 안하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참가하며 시합의 질도 올라갔습니다. 97년에는 프로 격투기대회에 참전 안한다던 극진회관마저도 선수들을 보내며 일본인들의 큰 관심을 얻게 되며, 근육덩어리 괴수로 알려진 밥 샙의 참가로 엔터테인먼트성도 크게 상승했습니다.특히 이시이 관장은 초창기 무제한급에 땜빵용 선수로 자신들의 제자들을 마구 내보내며 주먹구구식 운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극진회관,정도회관,네덜란드의 메지로짐,보스짐,챠쿠리키짐 등의 명문 소속 선수들은 화려한 기량을 뽑내며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드라마틱한 승부를 보여주었고 K-1은 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입식격투기 대회 이벤트로 성장합니다.K-1을 후원하던 후지TV는 사타케 마사아키의 은퇴로 인해 공석이 된 강력한 일본인 선수의 등장을 이시이 관장에게 요구했고 이시이는 자신들의 제자들 중 가장 재능있으면서 양손,양발잡이에 전설의 이도류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름으로 데뷔한 모리 아키오도 무제한급에선 강력한 유럽의 킥복싱 선수들에 막혀 좋은 성적을 거둘 순 없었습니다.(데뷔 당시엔 83kg)

"무사시"모리 아키오는 뛰어난 아웃복서 스타일과 전략적인 경기 운영을 선보였지만 무제한급에선 결국 한계를 드러낸다
천재 파이터 마케팅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마사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전 세계를 돌며 WGP 시리즈를 열게 되었으며, K-1이 지나치게 거인 위주로 시합이 펼쳐진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엄청난 흥행가도를 달리던 K-1의 주요 수입원이 일본 내 시청률과 스폰서 광고였기 때문에 K-1이 더욱 흥행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본 내 자국의 챔피언이 꼭 필요했습니다.결국 K-1은  동양인이었던 일본인이 활약할 가능성이 있는 체급 중 가장 높은 체급인 미들급(-70kg)을 기획했고 2002년 자국내 꽃미남 킥복서 코바야시 마사토를 앞세워 K-1 World MAX 미들급(-70kg)을 신설하기에 이릅니다.마사토는 사실 끊임없는 노력파 선수였지만 대중들에게는 자신을 연습없이 밤마다 술먹고 놀러다니는 천재형 파이터로 마케팅했으며 자신과 조금이라도 싸울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과는 절대로 사적인 사적인 친분을 갖지 않는 등 마사토는 독고다이+거만한 천재+잘생긴 외모+펀치 연타가 특기한 화려한 스타일 등으로 체급을 떠나 일본 킥복서들의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기도 합니다.결국 마사토는 K-1 World MAX 미들급 2003 우승을 일궈내며 일본내 슈퍼스타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K-1은 남녀노소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게 됩니다.예전 K-1의 에이스는 무사시였지만 마사토의 등장으로 일본 자국인 에이스는 신구 세대 교체를 하며 예전 무사시는 마사토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게됩니다.그리고 그해 8월,프로레슬러이자 전 국회위원 안토니오 이노키+K-1 PRIDE FC=Dynamitel SUMMER NIGHT FEVER in 국립이라는 콜라보로 일본 국립경기장에서 격투기 역사상 9만명이라는 최대 관중을 동원하였고 그해 K-1 WGP 결승전은 7만여명을 동원하는 등 K-1은 프라이드와 함께 격투계의 양대산맥으로 승승장구하며 연말인 12월31일,가족들이 TV에 모여 앉아 격투기 K-1 경기를 시청하게하는 독특한 문화현상도 만들게 됩니다.또한 K-1 MAX의 경우 파워는 모자라도 매우 빠르고 스피디한 시합 양상으로 인해 월드그랑프리로 대표되는 기존의 K-1시합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었고 여기에다 태국 무에타이의 전설적인 낙무아이들도 끌어들이며 질적으로 발전한 시합을 보여주었습니다.대략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는 실력과 파워를 겸비한 훌륭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시합을 열면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으며 또한 'Fighting Network'라는 지역 기반 대회를 열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면서 복싱을 위협하는 차기 격투기 시합으로 기대를 모았었지만 이시이 관장이 탈세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다가, 결국 사실로 드러나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정도회관은 약간 뒤로 물러나고 후지TV의 K-1 담당 프로듀서 타니가와 사다하루가 2003년부터 시합을 주최하게 되면서 일이 조금씩 틀어집니다.그는 PRIDE FC와의 관계 악화를 야기시켰고,크로갑을 시작으로 실력있는 헤비급 선수들을 프라이드에 빼앗기고 맙니다.

탈세 혐의로 감옥에 가게된 이시이 관장을 대신한 후지TV의  K-1 담당 프로듀서  타니가와 사다하루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K-1의 몰락

결국 프로듀서 타니가와 사다하루가 선택한 프라이드에 대한 해결책은 초대형 선수들을 영입하는 것으로 그는 일본의 스모 외국인 최초 요코즈나 출신의 아케보노 타로(曙 太郎;채드윅 조지 하헤오 로언(Chadwick George Haheo Rowan,204㎝ / 233㎏),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밥샵(로버트 맬컴 샙 주니어,Robert Malcolm Sapp Jr.196cm / 165kg),브라질의 거인 스트리트 파이터 몬타냐 실바(211cm / 142kg),WAA 헤비급 세계챔피언,IBA 슈퍼헤비급 세계챔피언 출신이자 래리 홈즈와 마이크 타이슨과도 경기했던 복싱 챔피언 출신 버터빈(182cm, 188kg),한국 씨름 천하장사 출신의 최홍만(218㎝/160㎏)등 격투기 실력은 초보였지만 뛰어난 피지컬을 자랑하는 거인 및 타종목 선수들을 K-1 으로 끌어모아 어떻게든 시청률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기 시작했고 2003년 12월31일 K-1 PREMIUM 2003 Dynamite에서 이뤄진 밥샵 VS아케보노의 시합은 시청률이 43%나 나오지만 K-1은 대중들에게 더이상 격투기 단체가 아니었습니다.비록 탈세 혐의로 감옥에 갔지만 이시이 관장 시절에는 격투가의 실력을 위주로 선수를 데려오던 반면, 타니가와 프로듀서 체제에서는 엔터테인먼트성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아케보노 등 온갖 입증되지 않은 선수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TV연예인, 야구 선수, 축구에 한국에선 씨름선수들까지 데려가려 했고 최홍만 역시 이때 발탁됩니다.(물론 최홍만은 아케보노나 몬타냐 실바같은 다른 이벤트형 거인 파이터들 중에서는 기량이 그나마 출중한 편이어서 탑급 선수들 상대로도 꽤 선전한 편이었다.)거구에다 강력한 힘에 악역 이미지까지 겹치면서 경기 실력 자체보다는 엔터테인먼트성으로 성공하게 된것입니다.그러나 이런 떡밥성 막장 매치는 처음 한동안은 꽤나 이슈거리를 만들었으나, 이후 점점 서커스성의 떡밥매치에 의존한다는 인식을 주면서 격투기 팬들이 돌아서게 만들고, 시청률과 인기의 저하를 궁극적으로 막아내지는 못했으며 게다가 마사토가 한번 더 우승하면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K-1 MAX에서 마사토를 챔피언으로 만들려고 계속 룰에 손을 대다보니 킥복싱도 무에타이도 가라데도 아닌 요상한 룰이 되어버린 것도 문제인데다 마사토의 명예로운 은퇴를 위해 구색 맞추기 용으로 태국의 무에타이 선수를 찾아 나선 K-1은 너무 강하면 마사토가 우승할 수 없기에 쁘아까오 포프라묵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태국 무에타이씬의 기대주 솜밧 반차멕을 영입합니다.

쁘아까오는 원래 58㎏ 체급에서 활동하던 선수였기에 당시 쁘아까오와 시합했던 선수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가벼운 그의 킥과 펀치에 방심(실제 선수들 인터뷰 참조)했으나 그러나 무명의 쁘아까오 레벨은 당시 K-1에서 활동하던 선수들보다 몇수위였고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진학할 학비를 벌기 위해 K-1에 진출한 쁘아까오는 체급을 초월한 넥믈린치(빰클린치=목씨름),니킥,앞차기만으로 K-1을 평정하고 맙니다.사실 쁘아까오는 K-1 MAX에 참가하기 전 우리나라의 KOMA라는 시합에 등장하여 무시무시한 경기력을 과시한 적이 있는데 당시 국내에는 중소규모 대회가 난립했으며 코마도 그중 하나였는데 당시 쁘아까오는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 남삭노이, 쌈코, 쌍욕 등 정상급 낙무아이들의 차원이 다른 경기력에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본토 무에타이 선수들이 그렇듯, 8세부터 무에타이로 돈을 벌기 시작해 룸피니 스타디움 2위 랭커,20대도 되기 전에 이미 150전에 130승의 괴물같은 스코어를 자랑했는데 놀라운 것은 저것이 챔피언 급에서는 그다지 많은 전적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그리고 2005년 프라이드에서 연패를 거듭하던 211cm의 가라데 기계 세미 슐트를 영입하게 되는데 쁘아까오와 세미 슐트는 K-1 입성과 함께 압도적인 기량과 피지컬로 우승하면서 선수층이 정체되어있던 K-1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많은 팬들이 K-1에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당시 K-1은 피터 아츠,제롬 르 밴너 등의 인기 많은 베테랑 파이터들이 부상으로 제 기량을 내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건졌던 2세대 파이터 스테판 레코와 알렉세이 이그나쇼프는 각기 MMA 데뷔, 알콜 중독 등으로 삽질을 하며 부진에 빠지는 둥 WGP급 파이터들이 줄어들면서 선수층의 질적 하락이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2003~2004년은 말 그대로 레미 본야스키와 무사시 두 명이서 다 해먹고 있었는데 막상 그 두 명은 지나친 판정 위주의 경기 플레이로 인기가 없었고, 단체 자체는 판정 논란과 서커스 매치로 인기를 한참 까먹고 있던 와중에 새로운 챔피언 쁘아까오와 세미 슐트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미들급의 슈퍼스타 마사토가 새로운 강자의 등장으로 우승이 힘들어지고 무제한급은 점점 거인들의 이벤트성 시합이 되어가며 재미가 없어지던 찰나에 압도적인 기량의 두 선수를 누가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새로운 화제성에 관심이 쏠리기도 하지만 세미 슐트가 정형화된 패턴(K-1 측에서는 니킥 제한, 딥킥 제한 등으로 쁘아까오와 슐트를 약화시켜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복싱스킬이 향상되고, 경기 운영이 노련해지면서 되려 쁘아까오와 슐트를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으로 장기집권을 해 나가자 "맨날 쁘아까오와 슐트만 이기고 WGP를 우승하니 뻔하고 재미없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시청률이 더 떨어지게 되는데 당시 또 다른 독주 체재를 이어나가던 효도르의 경우에는 슐트같은 압도적인 탑독 챔피언이 아닌, 언더독 챔피언성향이 있었기에 "효도르가 저 도전자를 어떻게 이길까?" 하는 화제가 더 많았습니다. 때문에 독주를 해도 재미없다고 까이지는 않았으며 효도르의 실력 자체는 역대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막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당시 부터 이미 헤비급 치고는 너무 작았기 때문에 실력과는 무관하게 언더독 성향이 있었고 효도르가 무패 행진을 이어가면서도 언더독 성향이 있다보니 챔피언을 응원하는 쪽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도전자를 응원하는 쪽에선 이번에 잡을 수 있을까의 대립구조가 형성된 것이지만 세미 슐트의 경우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어차피 슐트가 독주할게 뻔한테 차라리 WGP 토너먼트 자체를 없애는게 조금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WGP 토너먼트 자체가 K-1의 근간이자 K-1만이 가진 특수성이니 만큼 없애기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이러한 상황에 피터 아츠의 부활과 바다 하리라는 초대형 신인의 등장, 그리고 알리스타 오브레임의 등장으로 약간 나아지게 되었으나 이 시기에는 K-1은 이미 경영난으로 몰락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산소 호흡기를 단채 줄어드는 흥행을 만회하려고 자국내 격투기 슈퍼스타 마사토가 다시 한번 챔피언이 되는 그림이였고 2007년 토너먼트 8강전에서 마사토는 쁘아까오에게 판정으로 승리하게 되지만 쁘아까오 전의 로우킥 데미지로 인해 결승전에서 앤디 사워에게 패배,준우승에 머물고 맙니다.

K-1 WGP를 우승한 최초의 MMA선수 알리스타 오브레임

당시 K-1은 8강부터 결승까지 같은 날 모두 치루어졌었는데 마사토는 "하루에 2경기 정도가 딱 좋다.원매치라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하였고 2008년 K-1은 이런 마사토의 의견을 수렴,8강 일정을 하나 앞으로 빼 4강부터 결승 토너먼트를 진행하였습니다.그런데 이어없던 것은 시합을 치루면 거의 몸무게가 3kg 줄어버리는 무제한급 선수들은 변함없이 지옥의 결승 8강 토너먼트를 진행했다는 것입니다.결국 K-1이 대놓고 밀어준 덕이었지 마사토는 다시 한번 K-1 World MAX 2008년의 챔피언이 되었고 다음해 자신이 한번도 이기지 못했던 앤디 사워에게 리벤치 매치를 성공시키며 은퇴하였으며 그렇게 마사토까지 떠난 K-1은 마지막 불꽃까지 꺼져 버리며 본격적인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또한 K-1 이라는 단체의경기,브랜드 자체의 권리는2008년까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시이가 갖고 있었기에 운영면에서 어려움이 많았기에 2011년부터는 돈이 없어서 자국 선수들 파이트머니도 못주는 상황이 벌어져서 선수들이 떠날 정도로(마사토는 자신의 파이트머니가 연체되자 지금이 은퇴할 적기라고 판단)재정난이 악화 되었고 니혼테레비,TBS,후지 TV 등 방송 3사에서 중계되던 K-1이었으나 중계 연장에 실패하고 방영권 계약도 끝나면서 일본에서조차 인터넷 유료 중계로 봐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또한 후지 TV가 지난 K-1 경기 방영분 영상에 대한 권리는 2013년 GIory가  인수해 버려 K-1은 현재 개최하는 대회 프로모션 과정에서 과거의 후지 TV 영상자료는 전혀 쓰지 못하고, 중국이나 한국에서 중계한 화면을 따와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그렇게 2012년에는 K-1은 프라이드와 함께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그러나 과거 서커스라고 비난받던 쇼비지니스적인 성향을 버리고 복싱처럼 다양한 체급을 신설하며 진정으로 격투기 단체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며 비록 크기는 예전만 못하지만 메이저 킥복싱 단체로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이제 시대는 K-1에서 보여줬던 이종 격투기가 아닌,UFC를 대표하는 종합격투기의 시대로 넘어왔고 더이상 K-1이 보여준 매력적인 이벤트성 시합은 큰 이목을 끌지 못하게 됩니다.극진 카라테의 최영의를 비롯하여 많은 무도가들은 기본을 중시합니다.결국 격투시합이라면 기본에 충실하게 성장했다면 어떠했을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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