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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세계화에 가려진 최영의의 실전 스타일과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싸움 카라테의 진짜 모습_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

by 마음heart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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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세계화에 가려진 최영의의 실전 스타일과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싸움 카라테의 진짜 모습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



극진카라테의 세계화는 최영의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단 한명의 인물이 존재했기에 가능했으며 최영의에 대한 숱한 무용담과 강함을 동경하던 남자들은 극진 카라테의 아이덴티이기도한 풀컨텍트 카라테에 매료되어 전 세계에서 최영의의 극진카라테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몰려오기 시작합니다.풀컨텍트(Full Contact)라는 말은 직접 타격을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미국에서 킥복싱룰을 가리켜 풀컨텍트룰이라고 부른 것이 그 시초이며 초기의 극진 카라테는 실전카라테라는 말이 사용되었으며 풀컨텍트 카라테로 불리게 된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카라테가 일본을 벗어나 해외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지만 본격적인 해외전파가 시작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인데 2차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에는 외국군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몇몇 카라테 사범들이 이들에게 카라테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본국으로 귀국한 후 카라테를 전파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최영의도 그러한 사범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1951년부터 미군의 요청으로 카라테를 가르쳤습니다.그리고 1952년 3월 미국 시카고의 카라테협회로부터 초대를 받은 최영의는 최초의 해외원정을 떠나게 됩니다.최영의는 해외원정을 통해 그 자신의 명성과 함께 극진 카라테의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로 1960년에 이르러 16개국 72개지부가 발족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1965년 국제 카라테 연맹 극진회관이 발족하게 됩니다.
최영의가 왕성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극진카라테의 세계적인 융성,이른바 실전 무술 붐이 일어났는데 극진 카라테가 세계적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영의라는 개인의 존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아마추어의 영역에 프로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 풀컨텍트룰을 도입하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최영의와 대련하는 젊은 날의 최영의

당시까지 풀컨텍트룰은복싱이나 킥복싱, 무에타이와 같이 프로적인 성향이 강한 무술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극진카라테 이외의 다른 전통카라테들은 풀컨텍트룰이 아닌 슨도메(타격직전에 공격을 중지하는 것)룰을 적용하고 있었고 슨도메 이전에 보호구를 착용한 상태에서 직접 타격을 가하는 방구 조수가 적용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보호구 제작 수준이 극히 미비하였기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슨도메룰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며 이러한 이유들로 실전성과의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극진카라테가 들고 나온 직접 타격의 풀컨텍트식 수련과 조수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는데 혹자들은 극진의 풀컨텍트식 수련을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극진 관련 영상물에 보이는 수련들 즉, 나무에 거꾸로 메달린채 야구 배트로 복부를 강타 당하며 윗몸 일으키기를 한다던가, 밧줄을 타고 폭포를 기어오르는 수련, 누워있는 사람의 배를 밟고 달려가는 수련 등은 합숙 훈련에서나 볼 수 있는 강도높은 수련이며 이러한 것들이 극진카라테의 일반적인 수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혹독한 수련에도 불구하고 최영의의 극진 카라테는 실전 무술로 각광받았고 최영의는 영웅 이상으로 숭배되며 일본 사회에서 최고의 무도가이자 실전 무술의 고수로 신격화되기도 합니다.

끓임없이 자신의 정권을 단련한 최영의

사실 일본에는 최영의처럼 신격화, 영웅화된 무술가들이 꽤 있는 편인데,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사무라이의 상징처럼 알려진 이천일류를 창시한 미야모토 무사시, 유도를 창시한 가노 지고로, 유도를 브라질에 전파하여 브라질리안 주짓수를 탄생 시키는데 일조한 마에다 미츠요, 대동류합기유술의 다케다 소가쿠아이키도를 창시한 우에시바 모리헤이, 송도관 가라테 창설한 후나코시 기친과 미후네 쿠조(유도 10단), 시오다 고조(아이키도 유파 양신관 창시),사쿠라바 카즈시(종합격투기,그레이시 가문 격파),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 프로레슬링의 역도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도가들이 영웅화된 바 있지만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거대한 일파를 이루고 있는 무도가는 드물 뿐더러, 종합격투기와 더불어 일본 격투기의 양대산맥이자 세계 입식타격기의 최고봉이었던 K-1 출발이 극진카라테(좀 더 정확하게는 극진회 아시하라 도장 출신의 이시이 카즈요시(石井和義)가 1980년 독립해서 설립한 정도회관)인걸 생각해 보면 창시자인 최영의의 영향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순 없습니다. 킥복싱 또한 실전공수 vs 무에타이 기획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지금도 실전무술하면 극진카라테를 많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고 미숙할 때 자신을 가장 잘 들여다보기 마련인데 최영의의 수많은 무용담 중에서 특히 복서와의 싸움에 고전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실제로 최영의는 미국에 가기 전 복싱 동양챔피언 호리구치 츠네요의 체육관에서 복싱을 연마하며 복싱의 연구 또한 꾸준히 했다고 합니다.최영의는 미국에서 복서 출신 프로레슬러와 싸우게 되는데 커다란 덩치와 믿을 수 없이 빠른 스피드에서 나오는 강력한 펀치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최영의는 생전 한국에서 한 토크쇼에 출연하여 미국 프로복서 출신 레슬러와의 대결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펀치 한방에 이가 덜렁거렸고(시합이 끝난 후 이가 빠질 것 같아 잡아 뽑아버렸다고 함)정면으로는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아 사이드로 빠지다가 발기술을 모르기 때문에 발차기를 사용하여 겨우 이길 수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합니다.

프로복서 출신 프로레슬러와의 대결을 회상하는 최영의
극진 카라테 최영의의 초기 제자들 (좌)이시바시 마사시,(가운데)야마자키 테루토모(우)야스다 에이지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극진의 최영의가 남긴 유산,시합용 카라테가 아닌 오야마 싸움 카라테

최영의가 오야마도장을 열고 가르친 초창기 제자들(이시바시 마사시,야마자키 테루토모,야스다 에이지 등)이 기억하는 최영의의 극진 카라테는 상대가 공격할때 사이드로 돌아 카운터를 치거나 주먹을 흘린 뒤 도복을 잡아 유도식으로 넘기기나 주먹이 특기인 상대의 주먹을 때려 부수는 최영의의 전술은 이때의 경험으로 만들어 진 것이었습니다.

●이시바시 마사시;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부드럽게 들어가는 보법 등에 능하셨다,

●야마자키 테루토모;

상대의 몸을 때릴 필요 없어 정권을 쏘는 거야.

상대의 나와있는 앞손을 때려 자세가 무너지면 안으로 들어가!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야스다 에이지;

받아치지만 (카운터)원을 그리며 돌아 들어가는 움직임이었어.

격투기적인 요소를 추구하셨던 거라고 생각해.

상대가 들어가면 돌아 들어가 옆으로,죽기 살기로 쫒아가면 유도로 팡 매쳐버렸어

최영의가 극진카라테 극진회관을 설립하고 열었던 제1회 극진 전일본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소에노 요시지(添野義二, 1947년 9월29일~~ )는 극진카라테 출신이자 사도관공수도를 창시하고 세계공수도연맹 사도관이라는 공수도단체를 설립한 인물이자 사도관 9단)는 최영의가 초창기 오야마 도장 시절 가르쳤던 극진 카라테를 재현해줬는데 지금의 극진 카라테( 제2대 극진회관 관장 문장규에 의해 현재는 붙잡는 기술이 추가되었다고 한다)에는 없는 붙잡기와 던지기를 보여주는데 유도 4단이기도 했던 최영의는 극진 카라테에 유도를 접목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소에노 요시지는 최영의 총재가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 옆으로 빠진 후 허리 밑으로 들어가는데,중요한건 허리 높이에서 힘으로 들면 안되며 허리 밑에서 그 상태로 허리 돌리기 후 매치기를 실현해 보여줍니다.또한 와타나베 카즈히사는 팔십 중반의 노구이지만 칼을 든 상대와 싸울때의 호흡법과 대처방법,상대를 빠르게 제압시키기 위해 목에 정권을 꽂는 전술 등 "대산도장회 전승공수"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최영의의 실전 카라테,오야마 싸움카라테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무도가로써 모든 것을 이룬 최영의에게도 걱정꺼리가 있었습니다.당수(唐手)가 공수(空手,카라테)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 본토에 전해지면서 메치기(씨름),카타(품세)의 진정한 의미와 전술,무기술 등을 잃어버린 것처럼 안면 타격 금지의 풀컨텍트룰을 만들어 시합화하여 세계화하는건 단체의 홍보와 부흥면에서는 너무나 성공적이었으나 최영의가 젊은 시절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오야마 카라테(훗날 이름을 바꾸어 극진회관)혹은 싸움 카라테라고 불리던,진정한 의미의 실전 카라테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영의가 처음 오야마도장을 세운 당시의 이케부쿠로의 상권(우리나라 종로 같은 곳)은 야쿠자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는 곳이었고 최영의는 제자들에게 명분이 있는 싸움은 먼저 보고한다는 조건하에 용납해 주었기에(일반인들과의 사적인 감정으로 인한 싸움은 파문)제자들 또한 다양한 실전을 경험하게 됩니다.당시 오야마도장 시절(극진회관 설립전)을 함께 보낸 와타나베 카즈히사라는 믿음직스런 제자가 있었는데 작은 신장을 가졌지만 지금도 보통 3년은 걸리는 초단 승단(검은 띠 흑득)을 단 1년만에 해낸 재능과 성실함과 당시 최영의가 한국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극진회관 설립도 와타나베의 아버지가 재단법인을 신청해 주기도 하며,극진의 초대 사범을 맡아 아시하라,존 블루밍 등 유명 배우가 되는 후배들을 직접 육성하는 등 최영의는 극진의 중심에서 꾸준히 조력자 역할을 해준 와타나베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연락하여 오야마 카라테(극진의 초기 실전 카라테 모습)의 원형을 보존,계승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최영의가 처음 카라테 도장을 연 오야마(대산)도장 전경

와타나베에게는 신장이 155cm밖에 안되는 카토 시게오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카토는 자신의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나게 연습을 하는 노력파였고 와타나베는 그런 카토를 정말 많이 아꼈습니다.카토는 훌륭하게 성장하여 극진의 지부장에까지 오르지만 그런 카토도 1985년 극진을 탈퇴하여 킥복싱 체육관 후지 GYM을 세우게 됩니다.카토는 극진을 탈퇴하기 전 자신이 아끼던 제자 한명을 최영의에게 맡기는데 재일교포 2세이며 누구보다 극진을 사랑하고 동경한 이 아이는 "극진의 용" 야마자키 테루토모(극진카라테 전일본 카라테 제 1회 우승자)의 눈에 띄어 그의 개인지도를 받게 됩니다.이 아이가 훗날 최영의 총재의 유언에 따라 극진회관의 제2대 관장에 오르는 문장규(일본명;마쓰이 쇼케이)였습니다.최영의는 죽기 전 항상 "노인이 이끄는 부족은 반드시 멸망한다.조직을 이끌 사람은 반드시 그 시대를 이해하고 있는 젊은이여야 한다."는 소신을 늘 말해왔으며 31살의 문장규(일본명;마쓰이 쇼케이)는 극진카라테 전일본 카라테 제 4회 대회에서  이제는 전설이 된 앤디 훅을 누르고 우승하기도 합니다.

최영의의 실전 카라테를 전승하고 있는 와타나베의 대산도장회 전승공수와 와타나베의 제자 카토 시게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최영의와 극진의 용" 야마자키 테루토모 그리고 2대 극진회관 관장이 되는 문장규(마쓰이 쇼케이)

하지만 최영의의 일본측 유족은 유언에 의문을 품고 유언장의 유효성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까지 이어져 도쿄 지방법원에서 "유언장은 무효"라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결국 이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극진회관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ㄱ정통 극진카라테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단체들이 난립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시작합니다.문장규(일본명;마쓰이 쇼케이)의 스승의 스승이었던 와타나베는 각 분파의 상담 고문역을 맡았었지만 그는 결국 극진을 위해 극진이라는 이름을 내려 놓습니다.그리고 와타나베는 남은 자신의 인생을 스승 최영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에 쓰겠다고 다짐합니다.그리고 와타나베의 제자이자 문장규의 스승이었던 카토의 킥복싱 체육관에 복싱 경험이 있는 개성있도 잘생긴 청년 한명이 들어오는데 카토는 그 청년을 프로 킥복싱 선수로 만들도 싶었고 카토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 청년에게 "넌 천재야,니 펀치를 맞으면 모두 쓰러져.넌 쫌만 있으면 챔피언 된다.."라며 매일 부추겼습니다.결국 카토의 가스라이팅에 자신을 진짜 천재라고 착각한 청년은 프로 킥복싱 선수가 되는데 이 청년이 시합 순간 최고 시청률 31.6%를 달성한 K-1이 낳은 최고의 슈퍼스타 고바야시 마사토입니다.

(좌)마츠이 쇼케이(문장규 극진 2대 관장,(가운데)카토 시게오 (우)고바야시 마사토

만약 상대가 팔이 긴거 같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 상대가 먼저 찌르기(주먹)를 낸다고 해도 이쪽이 먼저 팔보다 긴 다리로 금적(낭심)차기가 들어가니까

/최영의의 오야마카라테,실전 카라테를 전승하고 있는 와타나베 카즈히사

최영의의 극진카라테는 최영의 자신이 평생을 쌓은 업적이었지만 최영의의 명성에 힘입어 세계적인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안면 타격을 금지하는 풀컨택츠 카라테로 접근성을 용이하게 합니다.하지만 그 자신이 오야마도장 시절 가르치던 실전 카라테(오야마카라테,싸움카라테)는 점점 잊혀지고 사장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오야마도장 초창기 제자였던 오타나베 카즈히사에게 부탁,대산도장회 전승공수라는 이름으로 그 맹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최영의의 실전 싸움카라테는 시합용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각종 급소를 단 일격에 가격해 쓰러 뜨리는 기술들을 담고 있습니다.인간의 신체에 자리잡은 급소들은 사실 작정하고 가격하기에는 매우 힘듭니다.인간은 자신의 약점 부위를 본능적으로 방어하려 하기 때문이며 그런 관계로 급소 부위를 타격하는 훈련 역시 꾸준히 연마해야 실전에서 120% 극대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최영의의 극진 카라테가 시합용 카라테의 부흥속에 실전 싸움카라테는 사라질 뻔하지만 오타나베 카즈히사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비록 최영의 사망 후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극진카라테의 오늘을 있게 해준 근본이자 뿌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스승과의 약속을 지켜나가고 있는 또다른 극진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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