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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②최영의는 어떻게 지상 최강의 카라테를 완성시켰나?

by 마음heart 2024.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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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

②최영의는 어떻게 지상 최강의 카라테를 완성시켰나?



최영의는 아버지 최승현과 어머니 김부용 사이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부농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최영의는 어린 시절엔 공부엔 딱히 관심이 없고 골목대장을 하는 등의 문제아였다고 하며 이 시절 머슴 범수(고우영의 대야망에서 언급 혹은 차력 및 택견)에게 무술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습니다.아버지 최승현은 말썽꾸리가 최영의를 경성영창학교에 입학시키지만 최영의가 경성영창학교에서마저 퇴학을 당하고 아버지와의 골이 더 깊어진 최영의는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부친의 반대에도 도망치듯 형이 있는 일본으로 떠나는데 셋째형 최영범 말에 의하면, 당시 본인이 아버지 몰래 돈을 빼돌려 동생의 등록금과 수업료를 챙겨줬다 들켜서 불호령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영의는 청년 시절부터 힘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좀 더 큰 힘을 얻고자 일본대학에 가길 원했다고 합니다. 그런 동생이 이후 유명한 무도가가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그렇게 일본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들른 부산에서 최영의의 스승이자 친우였던 강유류 가라테의 조영주를 만나게 되고 최영의가 야마나시 소년 항공기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가라테를 지도해주게 됩니다. 항공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송도관 가라테와 강도관 유도(이후 꾸준히 강도관 유도를 배워 4단까지 획득함)를 배워 각 초단을 사사하고 대동류합기유술을 수련하기도 합니다. 이후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차출됩니다.

2023.02.04 - [- ☆ 知識을 낳는 뮤지엄] - 동아시아 최초의 헬창_일본 와카키 타케마루의 괴력법(怪力法,1938)

175cm 85kg을 평생 유지했다는 최배달의 십대와 이십대를 보면 유약한 소년이 아닌,장사 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카라테의 상징인 정권단련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머슴 범수의 모티브가 된 생애 첫 카라테 스승을 만나다

최배달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도일하기 전부터 강한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으며 단순히 선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강해지기 위해 기독교 단체가 설립한 YMCA 복싱 클럽에서 복싱을 배워 대회에서 우승(다만 이 당시 복싱 기술을 요즘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 저돌적으로 돌진하여 주먹을 겨루는 스타일로 무하마드 알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복싱 스킬은 크게 진보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하거나 괴력법이라는 웨이트 트레이닝 책을 보고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기도 합니다.175cm 85kg이라고 하지만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서 최배달을 연기한 양동근도 신장도 175cm이지만 체감되는 느낌은 최배달이 훨씬 거대한 느낌이기 때문입니다.당시 일제강점기 일본의 카라테를 연마한 이들은 교토제국대학의 강창수(일본명 나카무라 히데오),리쓰메이칸 대학의 조영주와 훗날 최영의 등이 재일 한인 공수도의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또한 일본 주오대학에서 병리학을 전공한 윤쾌병(윤희병)으로 미군정하에서 1945년 일본에서 한무관(전일본 공수도 연맹 렌부카이)을 창설했는데 일본인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윤쾌병은 일본에서 미군정하에서 호구를 착용,겨루기를 시도했는데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태권도와의 통합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으며 지도관내에서도 갈등이 생겨 버립니다.조선으로 돌아온 윤쾌병은 조선연무관에서 카라테를 지도하고 부산에 지도관을 개관합니다.1950년부터 서울대 수의대,건국대 축산대에서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9년부터 한국 야쿠르트사를 경영하며 무예계와 멀어집니다.

※최영의가 어린시절 무술을 가르쳐줬다는 머슴의 경우,이상지에게 배운 조선 차력,조칠대사에게 배운 중국의 십팔기,조선의 삼십육기와 실전공수도교범 속 조선 차력의 장씨,만화 공수바보일대에서는 소작인에게 중국고대권법 및 차력,바람의 파이터와 대야망에서는 택견과 태권도를 가르쳐줬다는 범수 등이 최영의가 어린시절 무술을 가르쳐줬다는 인물들입니다.그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차력인데 최영의는 제자들의 차력에 대한 질문에 고대 조선의 권법,중국무술,태권도의 원류 택견,한국 합기도 등 각기 다른 대답을 합니다.

"씨름대회에서 우승경력이 있는 거한이 술에 취해 작은 남자에게 시비를 걸었다.누나의농장에서 일하는 이상지라는 이름의 남자였다.거한이 이상지의 멱살을 잡자 거한은 날아가버렸다."

만약 어린시절 스승과의 에피소드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약간의 각색이 들어간 실제 자신의 스승을 묘사한 것이라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작은 키에 말도 안되는 괴력과 실력을 지닌 존재이며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무예고수라는 것입니다.최영의 사후 최영의의 일본인 제자 코즈마 카즈시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최영의의 인간사를 책으로 내기위해 최영의의 친형 최영범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많은 사실들을 듣게 되는데 최영의의 아버지 최승현은 말썽꾸러기 아들 최영의를 경성의 경성영창(중)학교로 입학시킵니다.최영의의 부모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경성영창학교는 서양식 기독교 학교였기에 최영의는 서양식 신식 교육과 서적에 큰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 시절 최영의는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라는 구절을 평생 수 없이 인용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같은 기독교 단체가 설립한 YMCA 복싱 클럽에서 복싱을 익혀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보디빌더 와키키 다케마루의 괴력법(1938년에 출간된 괴력법을 접했으니 최영의 나이 15세에서 16세 정도)을 읽고 감명 받아 홀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후에 조영주의 소개로 와카키 다케마루와 직접 만나 팔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했는데 결과는 최영의 참패,그후 최영의는 와카키 다케마루에게 여러가지 웨이트 트레이닝 지식도 전수 받았다고 합니다.최영의는 중학교 입학 전부터 복싱 글러브와 샌드백을 사달라고 아버지를 졸랐고 결국 첫째 형이 사주게되는데 최영범은 자신이 기억하기에 어릴때부터 영의가 복싱 등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그렇게 무술에 관심이 많던 최영의가 부산에서 만난 조영주는 최영의를 사로잡습니다.조영주는 키가 160cm에 불과했지만 가슴둘레 125cm에 80kg의 체중에 단단한 근육질 체형으로 만화 및 영화에서 묘사한 어린 시절 최영의의 스승은 모두 조영주를 모티브로 그려진 인물들이었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조영주는 언제부턴가 최영의의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고 사라지게 됩니다.

조영주(1908 또는 1913~20010,젊은 시절 우람한 근육이 인상적이다)
조영주가 검도호구에서 착안한 카라테,태권도 보호장비

일본으로 도일하던 15살 어린 최영의가 부산에서 만난 조영주는 당시 25세에서 30살 안팍의 젊은 무도가였습니다.조영주는 조선인으로 일본무덕회 강유류 공수 9단 범사로 유도,권투,카라테를 수련한 격투가이자 무도인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민단 단장도 역임했습니다.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친구이며 민단을 함께 만든 박열의 경성보통고 10년 후배이기도 합니다.조영주는 총검술 호구응 변형해서 카라테 시합 보호장비를 고안하기도 합니다.사실 우리의 국기 태권도의 겨루기와 호구가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미군정기 일본에서 조선인 사범들에 의해 검도 호구에서 차용하기 시작해 국내 태권도에 그대로 유입된 것입니다.1961년 전국체전 태권도 호구는 검도호구였습니다.조영주는 어린 최영의에게 강유류 카라테를 지도한 스승으로 어린 최영의가 아마도 처음 접한 무술이었을 것입니다.(만화 대야망이나 바람의 파이터에서 묘사된 어린 최영의의 스승 범수는 어쩌면 조영주를 모티브로 했을지도 모릅니다.최영의는 형이 유학하고 있던 일본행을 결심하고 부산에 가서 아는 분이 경영하던 제지공장에서 일하며 준비합니다.당시 어린 최영의가 일본에 가는 방법은 밀항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밀항 여비를 준비하는 동안 최영의는 생애 첫 카라테를 배우게 되는데 그가 바로 강유류 카라테의 조영주였습니다.조영주는 중학생때부터 조선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로 족선 독립을 위해선 공산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해 당시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던 교토 대학에 유학 중이었는데 공산주의 교터 대학 교수의 부당해고에 시위가 일어났고 조영주도 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한 후 공산주의에 실망하고 입명관대학에 들어가 "아시아가 일치 단결하여 언젠가 있을 미국과의 최종 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동아 연맹에 공감하고 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조영주는 한국에서는 권투와 역도를 배웠지만 일본에서는 강유류 카라테를 배우고 얼마 안있어 간사이 제일의 카라테 실력자가 됩니다.최영의가 밀항 준비를 위해 부산에서 머물고 있을때 조영주는 부산에세 강연회를 열고 민족화합을 호소했는데 어린 최영의의 눈에는 그런 이야기들보다 그의 단련된 육체에 더 매료됩니다.최영의의 어린 눈에 보기에도 당시 조영주의 정원찌르기는 권투의 펀치와 달랐고 발차기는 신장 이상의 높이에 달했다고 훗날 최영의는 회상했습니다.강연 이후 최영의는 곧 일본에 갈 예정이니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를 탑니다.

앞줄 왼쪽부터 사와이 켄이지.최배달,조영주,우시지마 다스쿠마

최영의는 시모노세키에 상륙 후,형이 있는 도쿄에 가고 싶었지만 경찰의 단속을 피해 조영주가 있는 교토로 향했습니다.그렇게 조영주와 다시 만난 최영의는 동아연맹의 기숙사에서 살면서 매일같이 카라테를 조영주에게 사사받습니다.몇달 후,최영의는 조영주에게 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상의했고 조영주는 교코 대학을 중퇴하고 입명관에 재학하면서 최영의의 꿈을 이해한 조영주는 그러나 그해 육군 사관학교의 모집은 이미 끝났고 최영의가 중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에 우선,야마나시현의 비행기 정비기술을 가르쳐주는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추천해 줬습니다.그렇게 조영주의 추천으로 18살의 최영의는 야마나시 항공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갔습니다.최영의는 수업이 끝나면 바퀴 택(자전거 택시) 아르바이트와 가끔은 밤거리에 나와 불량배나 야쿠자에게 싸움을 팔아 용돈을 벌기도 합니다.그렇게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3년간 공부와 조영주에게 배운 카라테 연습을 계속하던 최영의,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불합격이 되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은 깨져 버립니다.최영의는 다시 교토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희지하고 있던 조영주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아연맹 선생에 의지하여 도쿄로 향했는데 도쿄도 의회 의원에 입후보하겠다는 선생 자택에 최영의는 거주하면서 포스터 붙이기와 접대,보디가드 등의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송도관 카라테를 배운 최영의는 8개월후에는 초단을 따게 됩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 후나코시 기친의 송도관류 (松涛館流 쇼토칸류) 카라테와 미야기 초준 (宮城長順)의 유류 (剛柔流 고주류)카라테

현제 우리가 알고있는 무도가 최영의의 극진카라테는 일본으로 도일한 직후 송도관 카라테와 강유류 카라테, 복싱, 유도(4단)등 여러 가지 무술을 배우며 형성됩니다.최영위가 창시한 극진 카라테 역시 카라테 이외에 무에타이나 중국무술 등 여러 가지 무술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러나 극진카라테가 가진 형태상의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극진카라테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강유류 카라테로 보인다는 것입니다.최영의가 조영주에게 강유류 카라테를 사사받은 후 후나코시 기친의 송도관류 (松涛館流 쇼토칸류) 카라테(명실상부 가라테의 유파들 중 가장 유명한 유파) 를 배우게 되는데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나코시 기친 (船越義珍,1868-1957)이 창설한 송도관 카라테의 주요 특징은 주로 카타 (形/품새)를 포함한 전통적인 스타일의 수련을 중요시하고, 대련 때 실제 타격은 전혀 이뤄지지 않습니다.심지어 주먹이 실수로 닿을까봐 주먹과 발 보호구까지 착용하고 대련하는데 다만 유파 소속 단체 중 료토 마치다가 소속된 일본공수협회(JKA)는 맨손 맨발에 악의적이지 않은 한 다소간의 접촉도 허용합니다. 전통 유파의 대표주자로 격으로, 세계적으로 도장도 많고 지명도도 높으며, 수련 인구 또한 모든 공수도 유파 중에 제일 많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각종 영화 등에 등장하는 가라테 사용자들의 상당수가 송도관류를 근본으로 한 합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배우 장 클로드 반담도 이 쇼토칸류를 수련했으며 태권도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또한 후나코시 기친은 오키나와 전통무술의 한 유파인 수리수의 명수였는데 수리수란, 그 형태상 극진과 같은 접근이 아닌 원거리전이 장기였으며 스피드와 타이밍을 중시하는 유파로서 순간적으로 접근하여 일격을 가한 후 신속하게 회피하는 타입이기도 합니다.

송도관 카라테 창립자 후나고시 기친(1868년 11월 10일 오키나와 류큐 왕국 슈리죽 출생~1957년 4월 26일 (88세)일본 도쿄 사망),오른쪽 사진은 도쿄 남쪽 가마쿠라 엔가쿠지 사찰 후나코시 기념비

그렇다면 최영의의 극진 카라테에 영향을 준 강유류 카라테의 토대가 된 것은 또다른 유파인 나하테로서 접근전을 장기로 삼고 있으며 힘과 호흡법을 중요시하는 유파입니다.강유류 (剛柔流 고주류)의 시조는 미야기 초준 (宮城長順,1888-1953)으로 원거리에서는 쇼토칸, 접근전에서는 고주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접근전을 중시합니다. 심지어 유술기를 사용해 넘어 뜨리기도 하며 또 쇼토칸과 다르게 기술이 들어가도 시합이 중단되지 않는 자유 조수를 하고 있습니다. 극진 카라테 역시 강유류에 많은 영향을 받아 쇼토칸과 더불어 전통 유파중에선 해외 지부가 많으며 지명도는 높은 편입니다. 쇼토칸이 슈리테와 토마리테에 기반하고 있는데 비해, 고주류는 나하테에 기반하고 있는데 슈리테를 가리켜 "체격이 왜소한 사람에게 알맞은 무술"이라고 하고 나하테를 일컬어"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사람에게 알맞은 무술"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당시로 볼 때 최영의의 체격은 결코 왜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영의 본인에게도 슈리테를 토대로 한 송도관 카라테보다는 나하테를 토대로 한 강유류 카라테가 좀 더 알맞았을 것입니다. 강유류 카라테와 극진카라테는 연관성이 짙지만 극진 카라테의 성립으로 인해 전통카라테와 풀컨텍트 카라테라는 구분이 생겼기 때문에 그 연결성이 다소 희석되었습니다.강유류와 극진카라테는 조수스타일에서 볼 때도 매우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규칙 등의 측면에서는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극진 카라테를 수련했다면 강유류 카라테와의 유사성이 상당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영의는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나올때 어머니와 한 약속"훌륭한 사람이 되기전까진 돌아오지 말라"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 모두에게 칭찬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나서야 돌아가고 싶었던 최영의였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갈수록 커져만 갔습니다.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최영의는 강유류 카라테 뿐 아니라 송도관 카라테,강도관 유도를 배워 4단까지 획득하고 여기에 대동류합기유술까지 배우는 등  무척이나 열심히 무술을 연마해 나갑니다.사실 최영의가 처음부터 무도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보통은 어린 시절 최영의의 꿈이 파일럿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최영의 스스로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또한 군인이 꿈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에게 가해지는 푸대접과 박해속에서 어린 최영의가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는 것은 매우 힘 든 일이었을 것입니다.일본내에서의 한국인에 대한 박해 속에서 최영의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으로부터 그동안 배워온 무술을 쓰기 시작하고 더 강한 상대들 때문에 더욱 더 무술을 연마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아마 최영의 자신도 처음 무술에 입문하였을때 그것이 평생의 업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최영의는 그 스스로가 실전의 달인이었으며 그의 무도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역시 실전성이었습니다.전통카라테를 거부하고 풀컨텍트 카라테의 효시라는 극진카라테를 만들게 된 계기도 당시의 전통카라테가 실전성과는 거리가 먼 수련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전이란 마치 날씨와 같다.
우리는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내일의 날씨를 예상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들어 맞지는 않는다.실전도 이와 같아서 양자간의 무술 실력뿐 아니라
육체적인 능력, 주변의 상황등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
실전은 그만큼 그 결과가 불분명한 것이며, 때문에 실전의 달인이라는 것은
무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명예로운 것이다.

/최영의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일본내 조총련과 민단의 이념 투쟁속에서 키워진 최영의의 실전 카라테

최영의는 전쟁 후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체육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와중에 최영의가 당시 의지할 사람은 같은 조선인이자 카라테 스승인 조영주 뿐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의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도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고, 민단 소속의 조영주(후에 민단 단장 역임)는 최영의를 재일조선인연맹(북한)조총련과의 투쟁의 중심으로 데려갑니다. 조영주는 최영의를 민단의 청년조직인 재일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남한)의 간부, 훈련부장, 건설대대장 등으로 끌어 올렸고, 싸움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최영의에게 조영주는 본격적으로 강유류(剛柔流 고주류) 가라테를 가르칩니다. 이때 강유류 초대 사범인 야마구치 고겐을 만나 사사받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20대의 젊은 최영의는 같은 조선인과의 싸움을 통해 실전 가라테의 기반을 쌓게 된 것으로 이 때문인지 최영의는 이 시절의 이야기를 절대 무용담처럼 늘어놓지 않았는데, 훗날 당시 친교를 쌓은 무도가들의 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려진 행보이기도 합니다.즉,민단에서 조총련과의 투쟁의 역사는 최영의 자신이 크게 내세우지 않았기에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우영의 대야망에서는 총알이 바로 귀밑을 스쳐갈 정도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고 하기도 합니다.우리가 알고있는 최영의의 무용담 대부분은 일본 무술가들과의 대립 및 도장깨기,소 뿡 부러트리기,해외 복서와 레슬러와의 대결이지만 적어도 이 대결들은 준비,땅 소리와 함께 싸우는 낭만파 싸움이었지만 재일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남한)VS재일조선인연맹(북한)과의 싸움은 이념 대결이었기에 쥐도새도모르게 목숨을 빼았길지도 모르는,진정한 실전이자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젊은날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한 최영의의 모습

그렇게 최영의는 민족의 비극인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과 피를 통해서 실전 카라테의 기틀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 가고 있었고 미국에 가기전까지 무려 7년간의 전쟁(이 기간에 입산수도가 2번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목숨이 위태로워 도피했다는 것이며 최영의는 그 도피기간 중 무술을 더욱 연마한 것이다)의 역사를 결코 자신의 무용담으로 내세우지 않았지만 운병희(개명후 윤쾌병;한무관 지도사범이자 지도관 관장으로 한국야쿠르트를 설립,명예회장,대한수의사회장,건국대 초대가축병원장),김치순(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상임고문,한국신문 사장,200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킨죠 히로시(일본 공수도연수회 종사범),나카무라 타카시(일본 공수도연수회 회장) 등 최영의와 친교를 쌓은 무도가들과 제자들의 통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영의는 자신의 만화나 영화 속 어릴적 무술 스승의 모티브였던 조영주에 대하여 그 어떤 발언이나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조영주는 일본인들에게도 인정받는 무도가였지만 자신이 조선인,한국인임을 언제나 당당히 밝혔으며 다른 재일교민들 장훈(일본명:하리모토 이사오),추성훈(일본명:아키야마 요시히로),홍창수(일본명:토쿠야마 마사모리),신격호(일본명:시게미츠 타케오)과는 달리 일본식 이름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조영주는 훗날 최영의의 제자들에게 최영의와의 추억을 담담하게 추억하며 여전히 그를 귀여운 제자로 기억했지만 최영의는 제자들이 그의 스승 조영주에 대하여 물어봐도 숨을 거둘때까지 굳게 입을 다물었다는 것입니다.최영의의 제자들도 스승의 조국 한국과 일본의 숨은 진짜 역사를 알고있었기에 더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조영주에 이끌려 민단 청년조직 재일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남한)에 소속되어 재일조선인연맹(북한)과 피의 투쟁을 하던 시기 최영의는 길에서 남자의 항문에 경찰봉을 밀어넣는 미군을 때려 눕힌 것을 시작으로 미군과도 잦은 싸움을 벌이곤 했습니다. 최영의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후 당시 미군에 대한 일종의 원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최영의는 이런저런 싸움이 더해져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고, 곤란에 처한 최영의에게 스승 조영주와 야마구치 고겐은 입산수도를 제안합니다. 최영의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3년을 목표로 삼고 같은 조영주의 제자인 야시로와 함께 야마나기 현의 미노부 산에서 1차 입산수도를 시작합니다. 판잣집에서 각종 수련도구를 가지고 살았는데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저자 요시카와 에이지가 후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당시 최영의는 하숙집 딸 후지마키 치야코와 결혼하여 이미 유부남이었고, 산에 있을때 치야코는 첫째 딸을 출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같이 산으로 들어간 야시로는 외로움과 격한 수련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날 밤 사라져버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최영의도 회의감에 빠졌으나 조영주가 편지로 그를 격려하였고 하산의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한쪽 눈썹을 미는 걸 제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련을 계속하던 차 요시카와 에이지가 더 이상 후원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오고 최영의는 14개월만에 하산하게 됩니다.최영의는 하산 몇개 월 후인 1947년(쇼와22년) 교토에서 개최 된 전후 최초의 전일본공수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우승 후 첫 입산수도 당시 약속한 3년을 채우기 위해 1948년 4월 치바 현의 기요즈미 산으로 들어가 1년 8개월간 입산수도를 마치고 내려옵니다. 이때 최영의는 기존 가라테의 슨도메 룰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지라, 가라테 관계자들에게 직접 타격제를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대 가라테는 무도도 격투기도 아닌 가라테 댄스다.' 같은 발언들로 인해 일부 가라테 유파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기 시작하자 이에 최영의는 일본 각지의 유명 도장들을 찾아가 일명 도장깨기를 신청합니다.그리고 최영의에게 패배하고 도장을 그만두는 인원들이 많아지면서 그의 이름이 일본 무도계에서 알려지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 신청과 무도계의 비난에 난감해 하던 최영의는 영화 쿠오바디스의 소와 주인공이 싸우는 장면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소를 때려 잡기로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소와 싸운 카라테(밑의 영상은 실제 장면이 아닌 연출된 장면이라함)

여담으로 이 소 잡은 일화가 원체 유명하다보니 실체 논란이 있기도 한데, 최영의 본인도 후술되어있듯 가족들에게 직접 말했고, 최영의의 제자 겸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의 30대 시절(사기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재산을 몽땅 날리고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는데 사기사건 이전에는 미국에서 제법 돈을 벌어서 당시 기준으로 꽤 호화주택에서 살았다고 합니다)일화를 '사나이의 성좌'에서 그린 적도 있는걸 보면 아예 없던 일은 아니며 이때 최영의는 사기를 당해 돈이 쪼들려 푼돈이나마 만져보려고 젊은 시절 했던 소 잡는 이벤트를 다시 시도했는데, 소가 도대체 덤비지를 않고 죽어라 도망만 다녀서 대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관객들은 사기라며 돌을 던지고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당시 카지와라는 이때 수모를 당하는 최영의의 낙담한 얼굴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차라리 소뿔에 받혀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저런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최영의가 소를 어찌저찌 잡아서 소뿔을 후드려팬건 맞지만, 여느 유명 무술인들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현재로선 영상처럼 확실한 근거 자료(유튜브 등지에 돌아다니는 최영의가 소뿔 후려치는 영상은 이후에 만들어진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상이다)가 남아있진 않아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애초에 최영의의 진짜 평가받아야 할 업적은 이런 일화성 이야기의 진위나 사실유무보다는 술계에 남겨놓은 유산들로 최영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당시 가라테계에서 파격적이었던 풀 컨텍트 방식의 대련체계 도입과 거대 일파 성립, 이를 기반으로 한 인재 배출 등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지, 제대로 된 영상 자료 하나도 찾기 힘들었던 시대의 무용담을 신화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최영의는 소를 때려잡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만화 바람의 파이터와 그의 아들에게 밑의 조항 6가지들을 열거했는데 

1)두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를 100회이상 할 수 있을것.
2)서전트점프의 높이가 1m를 넘어야 할 것 
3) 벤치프레스를 150~160 kg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4) 단청을 손가락 세 개로 잡아끌어 배에 붙일 수 있을 것.
5) 한 손 새끼손가락으로 턱걸이 15개를 할 수 있을 것.
6) 엄지와 검지만으로 동전을 구부릴 수 있을 것.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로 최영의는 이와 같은 것들이 가능했고 그 이상의 것도 가능했다는 것입니다.최영의는 스피드도 뛰어났고 기술적으로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힘이 장사였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이로운 것은 악력계도 부서져버려 측정 불가능했던 악력으로 최영의는 엄지와 검지만으로 동전을 휘고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선채 앞뒤로 이동이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이 정도의 악력이라면 그저 붙잡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거기에다 최영의는 뛰어난 스피드의 소유자이기도 했는데 공중에 떠있는 종잇장에 정권으로 구멍을 뚫어버리는 경이적인 스피드는 가히 환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 가공할 스피드로 인해 최영의만의 독특한 정권지르기 자세(팔굽과 손목이 굽은 자세)가 나온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최영의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은 기술적인 능력으로 상대를 제압한다기보다는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파워 파이터의 느낌이 강한데 그의 기술적인 면을 살펴보면 지극히 실용적이지만 화려하다는 느낌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물론 기술적인 수준이 낮다는 의미가 아니며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화려한 동작으로 자신의 위력 없음을 감추려는 무술가들이 많다는 것은 언급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반면 최영의의 경우에는 그가 가진 기술들의 위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화려할 필요가 없는데 마치 걷는 듯이 팔을 앞뒤로 흔드는 동작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때려 누일 수 있는 정권일격이 최영의의 힘이라는 것입니다.신이 내려준 피지컬이라 불리는 윤성빈이 100m를 11초에 주파하고 서전트점프를 1m이상을 뛰는데 최영의는 그런 윤성빈의 피지컬에 20대때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점령 당한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과의 싸움을 통해 실전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며 그야말로 무적의 카라테맨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앞서 살펴봤듯이 최영의의 전설같은 무용담들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스승 조용주를 따라 피의 전쟁을 치르며 쌓여져 온 것이며 복마전같은 삶 속에서도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앞으로 전진하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오늘날 세게에서 가장 압도적인 극진 카라테를 완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최영의는 이렇게 자신을 채찍질하듯 단련했고 자신의 강함을 몸으로 실천하고 증명하여 신용을 얻게된 최영의가 했던 말이기에 더욱 마음에 와닿는 최영의 어록은 듣는 이의 가슴에 크나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実践なければ証明されず、証明なければ信用されず、信用なければ尊敬されない。
실천이 없으면 증명할 수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받을 수 없고,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

/최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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