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역사상 가장 강한 주먹이자 복서로 평가받다
올림픽 헤비급 3연패· 358승의 쿠바 펠릭스 사본
이종 격투기와 UFC가 세계에 정착하기 전 세게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라는 칭호는 보통 복서들에게 돌아갔습니다.오로지 주먹 하나로만 승부로는 단순함과 체급에 따른 공정함이 어필되는 스포츠가 바로 복싱이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아마추어 복싱과 프로복싱을 통틀어 세계 최고의 주먹이자 복서는 누구였을까?많은 이름들이 거론되지만 세계 프로복싱 헤비급의 내로라하는 주먹들은 거의 모두 올림픽을 거쳤기 때문에 아마추어 챔피언은 프로 팸피언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입니다.우리에게 전설로 회지되는 무하마드 알리가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으로 1960년 로마올림픽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고, 불도저 조 프레이저는 64년 도쿄올림픽 헤비급, 원조 핵주먹 조지 포먼은 68년 멕시코올림픽 헤비급을 각각 석권했습니다. 또 96년 애틀랜타올림픽 헤비급 금메달리스트 리딕 보우 역시 짧게나마 프로복싱 챔피언으로 군림했으며, 2004년 2월 WBC 헤비급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한 영국의 레녹스 루이스는 88년 서울올림픽 슈퍼헤비급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합니다.올림픽 복싱은 당대 최고의 주먹을 가리는 명실공히 최고 주먹을 가리는 전시장으로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타이틀은 아마추어 복서에겐 더없는 영예이며 프로복서가 되려는 선수에겐 엄청난 프리미엄이기도 했습니다.그렇다면 아마추어 최고의 복서는 누구였을까?바로 쿠바의 펠릭스 사본과 사본의 선배 데오필로 스티븐슨(테오필로 스테벤손) 꼽히는데 둘 다 올림픽 3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객관적인 전력으로 펠릭스 사본이 한 수 위라고 보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사본이나 스티븐슨 모두 공수에서 기본기가 완벽하고 가공할 만한 오른손 주먹을 갖고 있으며, 올림픽을 3연패했다는 공통점과 세계복싱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승부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스피드에서 펠릭스 사본이 선배 스티븐슨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펠릭스 사본,자신의 우상 데오필로 스티븐슨을 넘어서다
펠릭스 사본은 1967년 9월 22일 쿠바의 콴타나모 기지 인근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워낙 만능 스포츠맨으로 통했습니다. 육상에서는 100m와 200m 단거리 선수로 활약했고, 야구·역도·조정·농구 등 쿠바에서 활성화된 스포츠를 두루 섭렵했지만 15세의 나이로 쿠바 아마추어 복싱 챔피언이 된 후 한 종목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는데 70년대 복싱 영웅인 쿠바의 데오필로 스티븐슨이 바로 펠릭스 사본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는데, 1986년에 국가대표팀에서 스티븐슨과 함께 운동할 기회를 얻었는데 데오필로 스티븐슨의 뒤를 잇는 펠릭스 사본의 복싱 신화도 바로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사실 펠릭스 사본과 데오필로 스티븐슨은 공통점이 많은데 스티븐슨은 사본보다 먼저 올림픽 복싱에서 한 체급 3연패를 이뤄낸 유일한 선수로 1972년 뮌헨 올림픽,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헤비급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4년 후에도 4연패까지 가능한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쿠바가 정치적인 이유로 1984년 LA 올림픽을 보이콧하면서 출전이 무산돼 3연패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1972년 데오필로 스티븐슨은 당시 프로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에게 대적할 만한 유일한 상대로 꼽혔고 실제로 대결 제의도 받았으나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가 적극적으로 반대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스티븐슨과 알리 간의 경기가 벌어졌다면 아웃복싱을 하는 알리와 강펀치를 휘두르며 파고드는 스티븐슨이 세기의 승부를 연출했을 것입니다.
펠릭스 사본 역시 쿠바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불참하는 바람에 출전 기회를 놓쳤지만 그 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석권하며 선배이자 우상이던 데오필로 스티븐슨에 이어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합니다. 사본은 쿠바 복싱에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36세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출전을 준비했는데 선배 스티븐슨이 못다 이룬 4연패 꿈을 이루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제복싱연맹의 바뀐 나이 제한 규정에 걸려 올림픽 4연패 달성은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올림픽 4연패 달성에 좌절되자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다며 은퇴를 하고 맙니다.사본 역시 시드니 올림픽 당시 핵 주먹 마이크 타이슨에 필적할 만한 세계 유일의 복서로 꼽혔는데 실제로 미국 프로복싱 프로모터들이 수천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액수를 제시하며 경쟁적으로 맞대결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그는 프로로 전향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도 “타이슨과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맞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은 늘 표현했는데 마이크 타이슨과 펠릭스 사본의 꿈의 맞대결은 결국 성사되지 않아 크나큰 아쉬움을 남기기도 합니다.
시드니올림픽 결승전 상대였던 데이비드 디파이억본(캐나다)도 “이제 사본의 적수는 타이슨 밖에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습니다.프로모터로부터 마이크 타이슨과 경기하는 대가로 1000만 달러를 제의받았던 펠릭스사본과 마이클 타이슨의 경기가 성사되었다면 알리와 스티븐슨의 경기와 반대로 핵주먹 타이슨의 인파이팅과 원투 스트레이트 위주의 아웃복싱을 하는 사본의 재미있는 승부가 됐을 것입니다. 아무튼 스티븐슨이나 사본 모두 쿠바가 아닌 자유진영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프로복서로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을 것입니다.
▣미국의 죄수복서 마이클 베네트와 펠릭스 사본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펠릭스 사본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96년 애틀랜타올림픽 그리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복싱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그 사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6연패를 했는데 사실상 7연패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99년 미국에서 벌어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동료 선수가 억울하게 판정패했다며 결승전을 보이콧했습니다. 그래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은 사본에게 중요한 경기였는데 99년 미국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결승전을 보이콧하자 사본이 미국의 죄수복서 마이클 베네트에게 겁을 먹고 기권한 것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네트가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베네트와 치른 경기는 사본으로서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습니다.그래서 사본과 베네트가 맞붙은 시드니 올림픽 8강전은 ‘사실상의 결승전’으로 통했는데 둘 다 거칠 것 없이 무서운 기세였습니다. 사본과 맞선 선수들은 강펀치를 피하려고 애쓰다 경기를 끝내기 일쑤였는데 한 선수는 “한 대를 맞고 보니 또 맞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쓰러져서 경기를 끝냈다”고 토로하기도 했을만큼 펠릭스 사본의 펀치는 압도적이고 무서웠다고 합니다. 물론 베네트도 만만치 않아서 힘과 패기를 갖춘 그는 “사본과의 대결이 기대되고 자신도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당시 펠릭스 사본의 유일한 적수로 꼽히기도 했습니다.베네트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먼저 치고 들어오는 선수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던 사본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기세였지만 딱 1분에 불과했습니다. 사본은 긴 리치를 이용해 점수를 쌓아 나갔는데 1라운드에서 벌써 7-2. 2라운드는 난타전이었습니다. 베네트가 실점을 의식해 역시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왔으며 사본도 맞불작전을 폈습니다. 결국 2라운드 스코어도 10-4. 이미 사본이 17-6의 리드를 잡은 후였습니다.그래도 1999년 세계선수권자인 베네트는 끈질겼는데 3라운드에서도 주먹을 크게 휘두르며 맞서 싸웠고 1분 정도 지나자 사본에게 강펀치를 적중시키기도 했습니다. 베네트는 사본이 잠시 휘청거리는 틈을 타 강한 훅을 날렸지만 그 순간 사본의 거침없는 원투 스트레이트가 베네트의 얼굴로 날아들었고 곧바로 강력한 올려치기가 뒤따랐습니다.베네트의 턱 전체가 울릴 정도로 강한 펀치였습니다.결국 주심은 심판의 권한에 따라 사본의RSC(Referee Stop Count) 승을 선언했습니다. 3라운드 1분57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더 이상 그 누구도 펠릭스 사본의 절대적인 능력을 의심할 이는 없었습니다. 베네트를 꺾고 4강전까지 가볍게 끝낸 사본은 결승전에서 러시아의 술타나흐메드 이브라구이모프에게 21-13으로 판정승을 거두고 마침내 올림픽 3연패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펠릭스 사본 통산 성적 358승17패_아마추어 복싱의 전설로 남다
헝가리의 파프 라슬로 역시 복싱에서 올림픽 3연패를 이룬 선수였는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미들급, 1952년 헬싱키 올림픽과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연이어 라이트미들급을 제패했습니다. 두 체급에 걸쳐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딴 것으로 한 체급에서 내리 세 대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는 스티븐슨과 사본밖에 없습니다.펠릭스 사본은 생애 통산 358승17패를 기록했는데 승률이 9할6푼에 달합니다. 패배는 거의 모두 무명 시절의 당한 것이었으는데 198cm의 큰 키와 2m가 넘는 리치를 자랑하고, 그 긴 팔로 레프트 잽을 던지다가 가공할 만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내뻗으며 또한 돌고래처럼 솟구치는 어퍼컷이 위협적이었습니다. 빠른 스피드와 유연성도 겸비했는데 힘과 기술 양 면에서 그를 따라잡을 선수는 없었습니다. 미국 프로복싱 프로모터들에게 끊임없이 프로 선수로 전향하라는 유혹을 받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펠릭스 사본은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의장의 충실한 추종자였습니다. “내 목표는 카스트로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바치는 것”이라고 늘 강조했고, 결국 끝까지 아마추어에 남아 아마추어 복싱의 전설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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