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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조선인 김신락이 아닌 일본인 모모타 미쓰히로 혹은 자이니치 리키도잔

by 마음heart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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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김신락이 아닌 일본인 모모타 미쓰히로 혹은 자이니치 리키도잔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




역도산은 한국계 일본인 프로레슬러로 일본 프로레슬링 업계를 개척한 최초의 스타이자 오늘날 한일 프로레슬링 계보도를 타고 올라가면 대부분은 그 뿌리가 역도산에 닿게 됩니다. 한창 잘나갈 때는 일본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역도산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지만, 1963년 한 나이트클럽에서 시비가 붙은 야쿠자의 칼에 찔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역도산은 조선인이었지만 철저하게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인으로 살면서 국적에 대한 정체성을 숨겼지만 그럼에도 역도산이 일본과 한국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여 지금까지도 역도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기도 합니다.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지만 어째서인지 김광호로 잘못 기재된 문헌도 있는데다1984년에 첫 출간된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에도 김광호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최영의가 한국에서 “최배달”로 알려진 것과 같은 것처럼 한국 성이 김(金)씨인 것과 일본 내의 공식 본명이 미츠히로(光浩)였던 것에서 유래한 듯 합니다.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現함경남도 신포시)출신입니다.김신락은 씨름 대회에 나갔다 하면 이기고 돌아오는 괴력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큰 형과 둘째 형도 씨름 장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김신락이 스모 수련을 받고 잠깐 돌아오기 전에는 김신락도 둘째 형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했으로 김신락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는 10대였지만 이미 결혼도 해서 아이도 하나 있었습니다.

역도산(귀화 전 김신락 金信洛,귀화 후 모모타 미쓰히로 百田光浩;1924년11월 14일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1963년 12월 15일 (향년 39세 일본 도쿄.175cm, 109kg

세상에서 가장 크게 웃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향에서는 참 많이 웃었는데, 일본으로 오니까 웃을 일이 없더라웃으면 가난한 조센지이 웃는다며 미쳤다고 하더라.그래서 결심했다.세상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되자고,

/역도산의 꿈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소년장사 일본에 입양되어 스모선수가 되다

김신락은 16살되던 1940년에 그의 씨름 실력을 본 일본인 프로모터가 김신락을 일본으로 데려갔으며, 모모타 가문에 입양되어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란 이름을 얻고 스모계에 입문하게 됩니다.역도산이라는 이름은 이때에 붙여진 시코나로 이 당시에 스모계에서는 역도산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꽤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도산의 스모 동료들은 명부상의 이름에 관계없이 그를 '김'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역도산 이외에도 조선인 출신으로 알려진 리키시로는, 지이노야마 쇼이치로(智異ノ山正一郞, 통칭 지이노야마)라는 선수도 있었는데 1922년생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이며 본명은 노하우(廬𤌤于). 1940년에 1월에 데뷔하여 주료 3번째(十両3枚目)까지 승급했지만, 1945년 11월에 자진 폐업했습니다. 일본 위키에서는 해방 후 귀국했다고 하며, 스모 지도자로 일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역도산은 1949년 5월 스모 계급의 세번째인 세키와케(関脇) 자리까지 올랐지만 평소 민물게를 즐겨 먹었는데 덜 익은 게를 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 폐디스토마 감염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져 1950년 9월에 자진폐업 하였는데 출신을 알게 된 스모협회 측이 그를 서군에 배치한 것이 원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역도산의 폐업은 스모 선수의 정규 절차를 무시하고, 부엌에서 스스로 부엌칼로 촌마게를 잘라버린 것이었다고 합니다. 역도산은 평생동안 화려하고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이때부터 이미 그 끼가 보여서 스모 선수인데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자유분방한 패션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현대 스모에서는 리키시들의 운전을 금지하고 있으며, 발각 시 실질적 해고 조치인 은퇴권고를 받는데, 운전 자체가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해고와는 달리 퇴직금은 그대로 나온다고 합니다.역도산은 일본 패망 이전에는 상당히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패망 이후에 급격히 자유분방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설경구 주연 영화 역도산 중
실제 역도산 스모선수 시절

역도산은 이 무렵에 나가사키를 출생지로 하고 있는 일본 호적을 얻게 되는데 역도산의 호적이 어떻게 처리된 것인지는 의문이 많은데, 일본 패망 전에 일본에 살던 조선인이라도 호적은 바꿀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역도산이 일본인 모모타 가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라고는 해도 '출생지'가 아예 다른 호적이 있는 것은 절차상 불가능한데 전후 혼란기를 틈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편법적인 수단을 써서 호적을 바꾼 것이 아닌가 추정되는데, 어차피 전후 혼란기였으니 돈만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역도산은 스모를 그만둔 후 친밀한 사이의 사업가였던 닛타 신사쿠(新田新作;일본군 출신으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온정적으로 대했고 그 때문에 나중에 미군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으며, 그 인맥으로 GHQ에서 발주받고 GHQ의 뒷빽으로 자금을 빌려 건설회사를 경영해서 큰 부를 쌓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역도산의 스폰서였으며 일본 프로레슬링의 대주주였고, 역도산의 두번째 결혼에 중매를 서기도 했다. 사후에 자신의 지분을 모두 역도산에 넘긴다)의 건설회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역도산은 이 때 생활이 무척 어려웠는데, 평생동안 다른 조선인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역도산도 이 때는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러 갈 정도로 의지했다고 합니다.닛타의 건설회사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던 중 술집에서 우연히 일본계 미국인 프로레슬러인 해롤드 사카타(1948 런던 올림픽 역도 82kg급 은메달 리스트 출신으로 007 골드핑거에서 중절모를 던져 상대방을 해치는 오드잡 역을 맡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드잡은 한국인으로 설정된 캐릭터였다)와 시비가 붙어서 싸웠는데 둘 다 서로의 힘에 감탄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레슬링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역도산이 자기 입으로 말한 무용담이고, 실제로는 영화 역도산에서처럼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해롤드 사카타가 그만두라며 숄더 클로와 스탠딩 크로스페이스 락을 걸자 꼬리를 내렸는데 이 증언은 역도산이 행패를 부린 바의 지배인이 증언한 것으로 역도산은 술에 취해 손님 한 명과 이를 저지하러 온 바운서 둘을 무자비하게 때렸는데, 이가 부러질 정도로 때리자 지배인이 해롤드 사카타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영화 "역도산"에서는 해롤드 사카타의 역할을 무토 케이지가 맡았고, 여기서는 헤드락으로 제압당하는데 덕분에 이 장면은 영화 내 프로레슬링 장면 중 최고로 박진감이 넘칩니다. 실제로 무토 케이지는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갔을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 출신이고 친근하고 개그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줘 실감이 안나지만 레슬링 업계에서도 현피 최상위권이라고 합니다.해롤드 사카타는 체구는 역도산과 비슷하지만 1948년 역도 헤비급 은메달리스트 출신에 자기보다 덩치가 몇배는 더 큰 프로레슬러들도 메다꽂고 던져버리며, 그런 유럽선수들에게 팔씨름한번 져본적이 없는 괴력의 소유자였는데 더구나 스모 선수로서는 처음 접해본 관절기를 걸려버렸으니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해롤드 사카타는 역도산의 투지와 근성에 크게 감탄했고, 역도산도 사카타와의 인연을 토대로 프로레슬링 세계에 뛰어듭니다.역도산은 먼저 일본에서 몇 차례 경기를 하여 가능성을 본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서 본격적으로 프로레슬러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전까지 스모 선수 특유의 펑퍼짐한 체격이었던 역도산은 하루에 1000번씩 복근 운동을 하는 맹렬한 훈련을 거쳐서 철저하게 프로레슬러 다운 몸매로 자신의 신체를 바꾸게 됩니다.하와이와 미국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가지면서 인맥을 쌓아 NWA 프로모터 자격을 얻게 되는데 특히 NWA 챔피언이자 인기 절정의 프로레슬러 루 테즈를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NWA 소속 프로레슬러를 초청할 수 있는 자격이기도 한데 정확히 말하면 NWA 소속의 타 단체 선수를 불러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당시 미국 프로레슬링 단체는 지역 단체들이고 이들이 NWA라는 이름 아래 각 지역 단체를 순회하는 것이었습니다.역도산의 단체가 다른 단체를 누르고 일본 최고의 단체로 군림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이 NWA 프로모터 자격이었습니다.다른 단체는 이 자격이 없어서 외국 선수들을 들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인데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 김일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김일 역시 NWA 프로모터 자격증이 있었고 일본에 인맥이 많이 있었는데 특히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의 정점 안토니오 이노키를 부르는 게 가능한 사람은 김일 뿐이었습니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역도산이 쏘아올린 프로레슬링 열풍

역도산은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1953년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日本プロレス協会)를 창설해 여러 차례 프로레슬링 흥행을 성공시켰는데 사실 1920년대에 이미 대일본 프로레슬링 보급회라는 단체가 있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기에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것은 역도산이 처음이었습니다.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활약할 때는 공식적으로는 규슈 나가사키시 모모타 가문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이 설정으로 영화도 만들어지기도 합니다.역도산은 프로레슬링 흥행을 위해 거구의 미국인 프로레슬러들을 초청하여 대결했는데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일본인(모모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일본 호적으로 옮겼으니 조선인 출신이기는 해도 국적은 일본인이 맞다)역도산이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서 2차 세계대전으로 패배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은 열광했는데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역도산의 마케팅 전략은 성공적이었으며 당시 막 꽃피기 시작한 TV 방송과 맞물려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프로레슬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역도산은 당대 일본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등극합니다.역도산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편지나 엽서의 받는 사람 주소 공란에 그냥 "日本 力道山" 이라고 적어서 우체통에다 넣으면 그대로 역도산의 집 앞으로 배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한국 프로레슬러 1세대 "박치기왕"으로 유명한 김일의 에피소드로 보이는데 김일이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복역하던 도중에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다." 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역도산의 집 주소를 몰라서 "日本 力道山" 이라고 썼는데 무사히 편지가 도착했다고 합니다.그리고 김일이 석방된 뒤에 연락이 되어 역도산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김일의 석방에는 역도산이 관여되어 있는데 역도산이 당시 자민당 부총재이면서 일본 프로레슬링의 커미셔너였던 오노 반보쿠에게 김일의 석방을 호소했다고 합니다.그렇게 프로레슬링의 거물이 된 역도산의 제자들 역시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큰 족적을 남겼는데 현 일본의 2대 메이저 단체인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한 자이언트 바바,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한 안토니오 이노키,그리고 한국 프로레슬링의 아버지이자 독립한 두 제자 대신에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를 물려받은 김일까지. 이런 관계로 현재 한일 프로레슬러들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대부분이 역도산에 도달하게 되는데 역도산은 무협소설로 치면 대사조(大師祖) 격이었는데 북미 프로레슬링에 루 테즈가 있었다면 한일 프로레슬링에는 역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또한 엄청난 돈을 동원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리키(力) 스포츠 팰리스라는 상설 프로레슬링 경기장 겸 복합 레포츠 빌딩을 건설하기도 합니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최강의 프로레슬러 철인 루 테즈와 시합하다

루 테즈.Lou Thesz. ( 1916년   4월 24일  ~  2002년   4월 28일)

1953년(쇼와 28년) 12월 6일,역도산은 당시 지상 최강의 레슬러로 평가받던 루 테즈를 일본으로 들러들여 시합을 벌입니다.역도산이 상대했던 루 테즈는 1932년 프로레슬링 업계에 입문했으며 원조 '네이쳐 보이' 버디 로저스와 함께 북미 프로레슬링의 조상격으로 칭송받는 대선수로, 프로레슬링의 아버지,프로레슬링의 대부,프로레슬링의 황제 등 수많은 영예로운 이명을 지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그를 대표하는 이명은 역시 철인 루 테즈로 프로레슬링에서 철인이라 하면 그건 곧 루 테즈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쓰입니다.루 테즈는 신장 188cm, 체중은 약 100~102kg으로,헐크 호건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근대~현대 프로레슬링의 기틀을 마련한 까마득한 태고적의 선수이자,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프로레슬링 스타였는데 당대의 프로레슬링 스타 중에선 역도산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변방의 패자였을 뿐. 루 테즈의 아성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당시에는 모든 프로레슬러들이 루 테즈 미만잡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아마추어 레슬링을 기반으로 한 뛰어난 기량과 거친 카리스마, 그리고 시멘트 매치를 즐겨 치루던 군기반장(일명 '폴리스맨')으로서의 행보, 무려 8년간 챔피언을 유지하면서 936연승 기록을 세우는 등 대단한 실전 능력을 겸비한 싸움꾼으로도 잘 알려진 대선수였습니다.그의 폴리스맨 시절 일화를 서술한 자서전인 후커(Hooker)에 따르면, 1964년 경 김일과의 경기 도중 김일이 그에게 슛(각본을 어기고 진짜 싸움을 거는 것)을 걸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런 김일의 머리를 주먹으로 찢어서 47바늘이나 꿰매게 만드는 중상을 입혔다고 적혀 있습니다. 참고로 이 때 김일은 35세, 루 테즈는 48세로 50을 바라보는 노장 중의 노장이었습니다.루 테즈는 50대가 된 이후에도, 자신을 실전으로 이긴 녀석에게 벨트를 넘겨주겠다며 공언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며 60세가 넘어서도 활발히 현역 생활을 했을 정도로 자기관리 역시 비범했으며 1990년 73세가 돼서야 현역에서 물러났을 정도입니다.루 테즈의 마지막 경기상대는 쵸노 마사히로였는데 경기결과는 쵸노의 서브미션 승리였으며 루 테즈는 은퇴 후 12년후인 2002년 86세에 사망합니다.

루 테즈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기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예로 들자면, 1970년대 중반 안토니오 이노키가 실질적인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은 뒤 집필한 그의 자서전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노키가 젊은 시절 미국에서 원정 경기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당시 대기실에서 쉬고 있는 이노키에게 루 테즈가 메인 이벤트를 치루기 직전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서 수고했다며 "Hey." 하고 어깨를 한번 툭 쳐준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이노키는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신인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루 테즈 같은 거물 중의 거물이 격려 차 해준 그 행동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어안이 벙벙했다고 합니다.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당시 업계에서 빈번했던 풋내기 선수들에 대한 베테랑 선수들의 텃새와 군기, 파벌, 기싸움 등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어중간한 선수들은 스타급 선수들에겐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분위기가 팍팍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루 테즈의 입장에선 그냥 사소한 행동이었겠지만 '나에겐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라고 합니다.루 테즈를 대표하는 기술이자피니쉬 무브인 백 드랍(이 기술은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의 수플렉스를 참고하여 만든 기술로 참고로 그는 아마추어 레슬러 출신이다) & 루 테즈 프레스 핀(피폭자는 역도산)이며 특히 루 테즈는 프로레슬링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비웃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들을 직접 응징할 정도로, 프로 레슬러로서의 자부심도 엄청났고 시멘트 매치를 즐겨 하는 등 대단히 실전적인 경기를 치루는 프로레슬러로 유명했으며, 상대방의 옆구리에 팔을 둘러 뒤로 넘기는 백 드랍을 피니쉬 무브로 사용했는데 여기에 백 드랍 직후 상대의 배 위에 올라타 짓눌러서 핀을 하는 동작을 연계기로 사용했는데 이게 그 유명한 루 테즈 프레스로 이 기술은 점보 츠루타와 스티브 오스틴이 즐겨 사용하는 그 기술이었는데 오스틴은 루 테즈 프레스 직후 펀치를 수차례 날리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루 테즈의 루 테즈 프레스는 그냥 상대방 위에 마운트 자세로 올라타 손가락을 깍지끼고 하는 핀폴용 기술이고 스티브 오스틴의 루 테즈 프레스는 말 그대로 보디 프레스와 결합한 공격용 기술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암튼 역도산이 루 테즈의 백 드랍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이를 봉쇄하기 위해 다리를 걸고 넘어지는 러시안 레그스윕을 개발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그의 백 드롭은 당시 최강급의 기술이었으며 이 밖에도 재빠른 체인 그래플링과 각종 관절기, 파워 밤(Reverse Slam(리버스 슬램)으로 약간 파일드라이버 형태로 시전해 현재의 파워 밤의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현대의 파워 밤을 정립한 레슬러는 후대의 테리 고디다),드롭킥,백 브레이커,페이스락,에어플레인 스핀(파이어맨즈 캐리 자세에서 그대로 빙글빙글 회전해서 상대방을 어지럽게 만든 다음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기술로, 직접적인 타격보다는 팬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것이 주 목적인 쇼맨십용 기술)등을 주 기술로 사용했습니다.루 테즈는 선수 활동 말고도 스승으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 내기도 했는데,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트리플 H의 스승으로 유명한 '킬러 코왈스키'가 있습니다. 트리플 H 특유의 정통파주의(트리플 H는 한동안 정식 프로레슬링 도장 출신이 아니면, 선수 취급도 안 했다),귀족주의, 엘리트주의적 사고가 여기서 설명이 되는데, 이런 전설적인 선수에게서 프로레슬링을 전수받은 자부심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입장에선 프로레슬링의 시조이자 태산북두인 사람의 제자로부터 지도를 받았으니 당연한 것,무협지로 치면 달마대사나 장삼봉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데 참고로 루 테즈는 2대 NWA 세계 챔피언인데 초대 챔피언인 오빌 브라운이 심각한 부상으로 얼마 못 가 은퇴했으므로 사실상 초대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데 이는 WWE의 초대 챔피언 버디 로저스와 2대 브루노 삼마르티노의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또, 챔피언이 된 후 거의 10년 간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 위상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1953년 12월 6일, 역도산과 루 테즈.의 경기 영상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역도산과 기무라의 쇼와의 간류지마 결투

기무라 마사히코와 역도산

역도산하면 빠지지 않는 시합이자 사건이 바로 유도의 귀신 기무라와 대결한 쇼와의 간류지마 시합입니다.1954년 12월22일 쿠라마에 국기관에서 열린 기무라 마사히코(당시 37세) 대 역도산(당시 30세;다만 역도산의 실제 나이는 이보단 많았을 것으로 추정)의 일본 프로 레슬링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 시합은 에도시대에 미야모토 무사시가 사사키 코지로와 벌였다는 간류지마 결투에서 이름을 따와 "'쇼와(시대)의 간류지마 결투"' 또는 '''쇼와의 간류지마 전투"'라고도 불립니다.이 무렵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모두 진검 승부라고 믿고 있었으며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등 일반 신문과 NHK에서는 '스포츠'로서 보도되기도 합니다.대결은 역도산이 도중에 각본을 깨고 기무라를 가라데 찹 연타로 다운시키고(일단 프로레슬링 경기이므로 '가라데 찹'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역도산이 평소 프로레슬링에서 사용하던 찹 기술보다는 스모의 손바닥 치기에 더 비슷하다)다운된 기무라의 안면에 사커킥과 손바닥치기를 연타하며 결국 KO로 끝나는데 시합 후 기무라는 이가 부러지고 눈꺼풀이 찢어졌으며, 쓰러진 매트에는 직경 50cm 정도의 피웅덩이가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이 사건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관계자들의 상반된 증언이 나오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사실 쇼와의 간류지마 시합을 먼저 제의한 것은 기무라 마사히코였습니다.역도산과 기무라는 그 해 2월 미국에서 샤프 형제를 초청, 14연전에서 승리하여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유도계 제1인자였던 기무라는 프로레슬링계에서는 역도산에 밀리면서 No.2이자 역도산의 태그팀 파트너 정도의 역할로 기무라가 거구의 서양 레슬러에게 맞서다 결국 밀리거나 당하기 시작하면 역도산과 태그하고 서양의 거구들을 역도산이 물리치는 식이었기에 역도산의 주가는 높아지지만 기무라는 그다지 강함을 어필하지 못했고, 이에 울분이 쌓이게 됩니다.기무라는 아사히 신문 지상에서 "진검 승부라면 내가 더 위다."라는 식으로 토로하고, 역도산이 이에 응전하는 형태로 경기가 잡히게 되며 경기 직전 각본 조정으로 무승부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쇼와의 간류지마 참극

기무라와 역도산의 쇼와의 간류지마 시합은 중간까지는 서로 상대 기술을 주고받는 것을 반복했는데 경기 도중 역도산은 갑자기 프로레슬링 규칙에서는 반칙과 같이 펀치를 기무라의 턱에 날린 후 곧바로 특기인 가라데찹을 연타합니다.참고로 역도산은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에서, 본인이 기무라에게 먼저 급소를 맞고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격분해서(실제 분노조절장애도 좀 있어보이던 역도산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고의적으로 각본을 깼다기보단 진짜 '열받아서' 폭발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실전으로 가버렸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기무라가 역도산에게 발차기로 급소를 가격하는 장면이 있어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어쨌든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수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기무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역도산은 기무라의 머리를 발로 짓밟고 걷어차는 등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정신을 못차리던 기무라는 계속 공격만 당하다가 충격적인 KO패로 승부가 마무리됩니다.당시는 물론 지금와서 봐도 상당히 잔인한 방식의 공격인데, 언뜻 보면 휙휙 날리는 따귀 같지만 전부 귀를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무라가 어안이 벙벙해져서인지 몰라도 따귀처럼 들어오는 고막치기를 막아내질 못했고, 크게 동요된 상태에서 다시 고막을 가격 당하는데,고막을 손바닥으로 제대로 맞은 상태에선 누구라도 제대로 서 있질 못하는데 격투기를 좀 아는 사람들이 보면 낭심 가격과 비슷한 급소를 공격하는 상태인 것입니다.기무라가 서 있질 못하고 기어가면서 테이크 다운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미 서 있을 만한 레벨이 아니며 그마저도 실패하고 짓밟혔으며 중간의 살벌한 사커킥은 덤이었습니다.흑백 화면이라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 말에 의하면 링 위에 직경 50cm의 피웅덩이가 펼쳐졌다고 합니다.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경기는 일본인들의 유일한 위안이자 볼거리였다

기무라의 스승인 우시지마 다쓰쿠마(牛島辰熊)는 놀라서 기무라를 일으키러 링으로 달려가지만, 기무라는 이미 의식을 반쯤 잃어 일어날 수 없었으며 기무라와 선후배 관계로 기무라를 존경하던 최배달은 역도산의 수법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역도산에게 도전하였으나 무시되었습니다. 최배달은 기무라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역도산을 길거리에서 쫓아다녔다고 합니다.시합 후 기무라는 역도산이 무승부로 하기로 합의되었던 각본을 무시하고 자신을 기습하는 바람에 패배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상당히 큰 논쟁이 야기되었는데 프로레슬링이니까 각본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프로레슬링에 각본이 있었다는 것 자체도 논란 거리가 되었으며 반대로 역도산은 기무라가 먼저 합의에 없는 공격을 하는 등 각본을 어겼기 때문에 자신도 실전으로 대항한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어찌 됐든 대결 영상을 보면 도저히 깔끔한 프로레슬링 승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친 시합이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워크가 무너진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기무라 역시 역도산의 수법을 용서하지 못해 단도를 품고 찌를 기회를 노렸다고 하는데 기무라 마사히코는 1993년 75세 나이로 암으로 죽기 직전, 과거 야쿠자의 칼에 찔려 사망한 역도산을 떠올리며 "역도산을 죽인 것은 야쿠자가 아니라 나다. 내가 죽음이라는 말을 빌어 그를 죽인 것이다."라고 인터뷰에서 발언하기도 합니다.이 경기로 역도산은 이미지는 좀 구겨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레슬링 대스타의 입지를 굳힌 반면, 어찌됐든 망신을 당한 기무라 마사히코는 독자적으로 프로레슬링 단체를 개양했으나 결국 자신의 프로레슬링 단체조차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을 거듭하고 맙니다. 결국 프로레슬링계에서 완전히 잊혀졌으며, 승자와 패자의 명암은 완벽하게 갈리게 됩니다.기무라가 역도산에게 무참하게 학살 당하는 장면 즉,역도산이 기무라를 이겼다는 논란의 흐름은 시대에 따라서 상당히 바뀌었는데 이 시합 직후 사회적으로는 "기무라가 역도산에게 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지만 그것이 90년대 이종격투기 붐이 일어나면서 그레이시 가문이 주목받게 되고, "그레이시 일족에게 이겼다."는 경력 때문에 기무라는 재조명받게 됩니다. 반면 역도산은 일찍 죽으면서 옹호하는 의견은 점점 줄어들고 여기에 인터넷 활성화와 함께 커진 혐한 세력의 성장도 이 사건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었는데, 혐한 세력은 이 사건을 "가짜 일본인 행세"를 하는 "재일 조선인 역도산"이 "순수 일본계 무도가 기무라 마사히코"를 비겁한 수로 쓰러뜨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서도 혐한적인 증오를 내비치게 됩니다. 즉,역도산 개인의 문제를 재일조선인, 일본인 등의 국적 나누기로 일반화시켜 혐한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역도산과 기무라가 대결한 쇼와의 간류지마 시합


일본식 무도지상론의 관점에서 보면 쇼와의 간류지마 대결은 각본이 무너진 시점에서 그 자체로 실전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영상 10분 35초 대에 역도산이 기무라의 턱에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본격적인 실전 상황은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무라는 후일 일격을 받은 순간 이미 정신을 잃어 대처할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시합 영상을 보면 첫 번째 공격에서 이미 그 정도로 강렬한 타격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실제 이 대결에서도 기무라가 일격을 받은 다음 아예 반격을 안 한 것은 아니며, 도중에 기무라가 붙잡기를 시도하면서 반격을 시도하거나 심판의 수차례의 스톱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얻어맞다가 결국 다운을 거듭한 끝에 그로기 상태가 돼버립니다. 각본이 있는 시합이라고 방심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무도가로서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너무 무력하게 무너진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각본에 대한 논쟁은 결판은 나지 않고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링 위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기무라는 무도가로서 명성에 크나큰 흠과 망신을 당합니다. 이 때문에 역도산이 당시 유도 강자로 이름이 높았던 기무라를 박살내서 프로레슬링의 입지를 높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리 합의된 각본을 어기고 공격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다만 이 시합이 역도산이 기무라를 묻어버리기 위해서 파놓은 시멘트 매치였다고 해도, 프로레슬링은 1대1 경기의 형식을 띠고 있는 만큼 마에다 아키라처럼 실력으로 벗어나는 경우도 있는데 기무라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기무라는 이미 역도산과 경기전 합의한 이후부터 훈련도 제대로 안하고 술만 마셔대서 몸상태도 별로였으며 역도산은 계획적으로 담글라고 대비를 해논 상황이라면 어느정도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도산은 분노조절장애 수준의 모습을 보여줘도 사업적으로는 철저히 계산적이고 영악한 면이 있었고. 이 경기후 결과적으로 기무라가 창설한 프로레슬링 단체는 완전히 망해버리고 역도산의 단체가 부동의 최대단체가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이 논란은 21세기에도 잔잔히 이어지고 있는지, 2011년에는 일본에서 마스다 도시나리 저 '기무라 마사히코는 왜 역도산을 죽이지 않았는가'라는 논픽션 검증이 가미된 책이 출판되기도 했는데 이 대결이 '쇼와의 간류지마'라 불린 것은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토지로가 싸웠다는, 간류지마의 일화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역도산은 무사시,기무라는 코지로

역도산은 경기 전이건 도중이건 어쨌건 각본을 어기고 기무라를 제거할 생각을 가졌던 반면, 기무라는 어디까지나 '프로레슬링 경기'로서 임했는데 심지어 경기 전날까지도 술을 마셨을 정도였습니다.그리하여 역도산은 병법과 심리전으로 승리한 쇼와의 미야모토 무사시,기무라는 실력은 있었으나 심리전에서 패배하고 만 쇼와의 코지로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그렇다면 둘의 대결이 진검 승부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기무라 본인은 정식으로 실전으로 싸웠다면 역도산을 이길 수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검 승부라면 이길 수 있었다."는 기무라의 의견에 동조하기도 했는데 일단 기무라 역시 기무라 락이라는 기술을 남긴 테크니션이었으며,브라질리언 주짓수 대가 엘리오 그레이시를 이긴 경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기무라가 역도산을 그렇게 쉽게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분명 기무라는 유도에서는 뛰어난 테크니션이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가라테와 복싱 경험도 있어서 타격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종합격투기에도 대응할 수 있는 경력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이 당시의 유도, 가라테, 복싱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당시의 복싱은 타격 방어 기술의 발달이 부족하여, 거의 힘과 맷집만 믿고 서로 두들겨 패는 막싸움에 가까운 선수가 많았는데 복싱의 특징적인 타격 방어가 프로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운 것은 무하마드 알리가 기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당시 유도는 당시 드물게 있었던 유권 흥행에서 복싱과의 대결 기록이 남아 있는데, 유도가들은 복싱의 안면 펀치에 쩔쩔 맬 정도로 타격 방어 기술이 부족했는데 이 무렵의 유도는 이후의 주짓수 등과는 달리, 타격에 상당히 취약했던 것입니다.기무라 역시 이 점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경기에서 기무라는 역도산의 타격을 거의 방어하지 못했는데 영상에서는 '가라데 촙'이라고 하지만 실제 모양을 보면 스모의 손바닥치기에 가깝다는 분석입니다. 그런데 사실, 역도산이 썻던 스모의 손바닥치기는 현대의 종합격투기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기술은 아니지만 방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충분히 효과적인 타격이었던 것입니다.원래 프로레슬링은 주먹으로 치는 것은 반칙이므로 역도산은 주먹 기술보다는 춉이나 손바닥치기에 더 익숙했을 것이며 그리고 맨주먹으로 잘못 치면 부상을 입을 가능성도 있어서 함부로 주먹을 사용하기 힘들고 또 원래 역도산은 스모 선수 출신이기도 했습니다.또한 역도산도 힘이 센 장사로 이름이 높았으며 스모에서 세키와케 계급까지 올라갔고, 미국에서 레슬링을 배웠으므로 완전 사짜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프로레슬링은 분명 쇼 비즈니스지만 당시 프로레슬러는 실제 폭력 상황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에 싸움에 약했다면 프로레슬링 계의 톱에 서있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리고 기무라의 베이스가 된 유도의 경우 상대방이 두껍고 긴 도복 같은 상의를 입었을 때 진면목이 나오눈데 상의 탈의를 한 상대로는 현대 종합격투기에서도 그렇듯이 거의 레슬링 같은 방식이 되는데 이러면 유도는 매우 불리해집니다.거기다 상대방이 탈의한 상체에 기름이라도 바르면 더욱더 기술 자체를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테크닉과 피지컬 그리고 그날의 컨디션

당시 역도산은 기무라보다 15킬로그램 이상 무거워서 2체급 이상 위인데다가 기무라의 키도 170(175라는 곳도 있음)으로 역도산보다 꽤 작거나 비슷했고 게다가 당시 기무라는 훈련량이 많지 않아서 이전보다 오히려 벌크가 줄어든 상태였다는 것입니다.역도산과 기무라의 대결 영상을 보면, 역도산의 덩치가 월등히 커서 기무라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일 정도이며 나이도 역도산이 일단 공식적으론 7세 아래로 젊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역도산의 실제 나이는 1~5 정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연령차는 그렇게까지 없을 수도 있다는 지적도 존재합니다.회고에 따르면 기무라 마사히코는 프로레슬링을 말 그대로 '쇼'라고 생각하여 그다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고, 캬바레 클럽 운영을 하는 등 외도를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기무라의 신체는 벌크가 그리 크지 않으며 심지어 경기 전날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는 증언도 존재합니다.반면 역도산은 기무라를 꺾기 위해 유도 기술에 대응하는 훈련까지 하며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당연히 전날까지 컨디션을 철저히 갖추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역도산은 경기에서 흥분제와 진통제 등의 약물까지 사용하는 일도 많았다고 하며 이 시합에서도 도핑을 하고 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즉, 기무라가 잘 해야 평소 수준 혹은 그 이하의 나쁜 컨디션에서 경기에 임했던 것과는 반대로 역도산은 그 이상의 컨디션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기무라와 역도산이 붙은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 자체만 요약하자면, 당시 유도계에서 최강자 취급을 받던 기무라 마사히코가 아내의 병원비와 생활고 등으로 프로레슬링 무대에 뛰어들어 한동안 역도산과 한 팀으로 활동했으나 역도산은 미국 프로레슬러들과 1:1 매치로 인기를 끌었지만, 당대 북미권 트렌드가 1:1 매치보단 2:2 매치로 가는 추세였고 이에 역도산도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인력풀이 좁던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자신과 파트너를 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다 마침 관심을 가지던 기무라 마사히코를 끌어들였다고 합니다.하지만 기무라는 유도계에선 최강자 취급을 받던 자기가 프로레슬링계에선 역도산 뒷바라지나 하는 신세다 보니 자괴감이 들었는지 이후 독립하여 자기 프로 레슬링 단체를 창설하고 역도산과 대립하게 됩니다.그러다 역도산과 매치가 성사되고, 당연히 실전보단 대중의 관심을 받아 이익을 챙기는 엔터테인먼트 목적이 강한 프로레슬링계였던만큼 각본에 따라 처음 시합은 무승부, 이후로는 둘이 합의하에 1승 1패를 주고 받는 식으로 워크가 정해지는데 문제는 실제 시합 도중 기무라에게 로블로를 당했다고 주장한 역도산이 격분하여 워크를 깨고 그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고, 기무라는 영문을 알 수 없이 맞다가 쓰러지고 맙니다.이것을 쇼와의 간류지마(昭和の巌流島) 사건이라고 불렀고 이 사건으로 기무라의 위상은 추락하고, 역도산도 영웅 이미지가 많이 깎이게 되지만 다만 라이벌을 완전히 밟아놓은데다가 강함을 과시한 것이므로 역도산에게 손해만 있지는 않았지만 반면 기무라는 업계에서 사실상 몰락하고 맙니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역도산의 정체성

영화 역도산에선 조선인도,일본인도 아닌 역도산이 자신을 세계인으로 칭하기도 하지만 사실 역도산은 일본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으며,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몇몇 자식들도 아버지가 한반도 출신이라는걸 말한 적이 없어 그냥 나가사키 출신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한반도에 오면 자신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걸 딱히 숨기진 않았던 모양으로 김일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을 지도할 때나 사석에서나 한국어를 한번도 쓰지 않는 독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합니다. 유일한 예외로 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잡담하던 중 역도산이 "밥에 키쿄를 넣고 비벼먹고 싶네"라고 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몰라 "키쿄가 무엇입니까?"라고 머뭇거리자 역도산이 "긴타로,기쿄가 뭔지 모르나? 도라지란 뜻이다."라며 도라지를 한국어로 했다고 합니다. 그 '도라지'라는 말이 김일이 역도산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말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역도산이 방한했을 당시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라고 한 것을 보면 진짜 한국어를 까먹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독학으로 영어도 구사했을 정도로 언어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던 역도산이 진짜 다 까먹었을지는 미지수지만, 지금으로선 확인할 방법도 없습니다.여담으로 함경도 출신이니 아마 한국어를 구사했다면 북한 억양과 비슷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역도산도 먹을거리에 대해선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평소 친구의가게에 자주 들러 불고기에 마늘을 듬뿍 얹어서 김치와 같이 먹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친구의 실명은 진명근이라고 알려졌으며 가게 이름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에서는 콘고엔으로, 노컷뉴스에서는 고탄다로 소개했는데 확실한 건 진명근의 아내는 일본인이었는데 역도산을 통해 들은 아리랑과 도라지의 가사를 노년이 되어서도 기억했다고 합니다.설경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역도산에서 역도산의 친구인 불고깃집 주인 역을 박철민이 맡은 바 있습니다.역도산은 진명근이 운영하는 불고깃집에 새벽 또는 밤 늦게 찾아가 불고기에 마늘과 김치, 그리고 소주까지 양껏 먹고 마신 후 돌아갈 때엔 입냄새를 지우려고 껌을 한 움큼 씹으며 갔다고 합니다.이 일화는 설경구의 역도산 영화에서도 잘 재현되었는데 하정우 못지않게 불고기와 껌을 매우 맛있게 먹는 설경구의 혼신의 먹방 연기가 킬링포인트집,또한 집 안에는 한국 노래 레코드를 쌓아둔 방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이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남몰래 고국인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낸 이야기들은 대다수가 역도산의 셋째 부인인 다나카 케이코의 자서전을 통해 밝혀지기도 합니다.위와 같은 일화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철저하게 난 조선인도 아니다란 식으로 자기 뼈속까지 부정했다기보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으나 자신이 일본에서 프로레슬러 활동을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될건 없으니 일본에선 어쩔수 없이 감췄다 정도로 보는게 맞을 듯 싶으며 스모 선수 때만 해도 조선인이란걸 주변인들이 알았고 딱히 감추지 않았지만 역도산이 일본인의 영웅이어야 했던 까닭에 일본 대중들에겐 자신이 일본인으로 알려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을 것입니다.이렇게 행동해서인지 1968~1971년 연재된 만화 타이거 마스크에서도 역도산 일대기를 다루면서 일본인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21세기에도 그가 조선인이란 걸 모르는 일본인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제자들을 항한 무자비한 구타의 진실

역도산의 제자자이언트 바바(ジャイアント馬場ば ば;본명 바바 쇼헤이(209cm.141kg)

역도산은 성격이 급하고 거칠어서 자신의 체육관 제자들을 훈련시킬 땐 구타가 일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체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거의 학대에 가까운 대접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이언트 바바의 경우 "사부님, 사부님은 왜 정수리에 챱을 쓰지 않습니까?"하고 질문했더니 갑자기 역도산이 바바를 마구 두들겨패고는 "바보자식아. 그럼 상대가 죽잖냐!"하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역도산은 찹으로 코코넛을 깬 적이 있을만큼 강력한 가라데 찹을 보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바바는 역도산이 특별관리한 케이스라서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부드러운 취급을 받았는데도 저 정도였다고 합니다.특히 역도산에게 가장 많이 맞은 게 1위가 김일,2위가 이노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너무 구타가 심해서 그냥 학대 수준으로 밖에 안 보였다고 합니다. 김일의 경우 역도산이 박치기를 하려면 머리가 단단해야 된다면서 갑자기 신고 있던 게다를 벗어다가 김일의 머리를 마구 내리친 적도 있었다.김일이 박치기를 주무기로 삼은 이유는 역도산으로부터 "너는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수련해야지?"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수련했는데 정작 역도산은 나중에 이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그나마 김일은 그렇게 맞고도 죽기 전까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계속 표했지만, 이노키는 심한 푸대접에 프로레슬링 포기까지 생각했을 정도였고 이후에도 역도산한테 악감정이 꽤 남은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이언트 바바같은 거인은 알아서 스타가 될 수 있지만 김일이나 이노키 같은 케이스는 오로지 근성으로만 스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다른 제자보다 더 혹독하게 대한 것이다'라는 역도산의 위로로 겨우 앙금을 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도산의 제자 안토니오 이노키(191cm,102kg)세계적인 복서 무하맏 알리와의 세기의 이종격투기 시합으로 유명해진다

김일이 말년에 투병생활을 하던 시절 찾아온 한 일본인 프로레슬러 친구는 '넌 스승에게 엄청나게 미움받았거나 엄청나게 사랑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역도산의 이런 난폭한 성격은 영화 역도산에서도 묘사되는데, 어느날 높으신 분들이 가족을 데려와서 역도산과 그 제자들의 연습을 구경하는데 제자들이 시원찮아서 아이들이 시큰둥해하자 직접 링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기술을 걸자 아이들은 그제서야 좋아했으나 역도산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자 겁에 질려서 울어버립니다.역도산을 그나마 옹호하는 측에선 이런 난폭함이 자신이 조선계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울분과 억압 때문에 더 심해진 것 아닐까란 추측도 하며 또 역도산은 말기에 경기력을 위해서 흥분제 등의 약물을 남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성격이 더 난폭해졌다고 보기도 합니다. 허나 그 과정이 어찌됐든 결론적으로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고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건 사실로 보입니다.한편, 일본에선 대부분의 프로레슬러들이 역도산의 밑에서 연습을 했었던 탓에, 이것이 대물림되어 일본 프로레슬링 전반에 걸쳐서 구타문화가 심각한 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마에다 아키라는 심지어 TV생방송 중에 선수들을 두들겨 패는 경우도 몇 번 있었으며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도 자기 체육관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폭력을 가하는 게 촬영되어서 인터넷에 돈 적이 있는데, 군기 잡기나 체벌 레벨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 레벨,게다가 트레이닝 지도 중에 그냥 아무나 보이는 대로 마구 때려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물론 이런 스포츠계 폭력 문화는 역도산이나 프로레슬링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남들도 다 그래란 식으로 잘했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런 성격은 체육관 밖에서도 비슷했는지, "역도산이 사람을 팼다"는 식의 기사는 당시 스포츠 신문 단골로 등장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역도산 본인의 해명으로는 자신이 유명하다 보니까 워낙 시비를 걸어오는 인간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런 성격 때문에 시비 거는 야쿠자를 두들겨패다 칼을 맞고 사망하기에 이릅니다.사족으로 북미의 프로레슬링 업계도 일본 레슬러들의 영향을 받은건지 어쨌는지 선수들의 가혹행위가 존재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김일(金一) 일본명 :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郎);185cm, 120kg-1970년 당시 국내에 프로레슬링 열풍을 몰고오며 김일하면 박치기는 고유명사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우상이 된 식민지청년 프로레슬러 역도산_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역도산의 죽음 그후

역도산의 스모 선수 시절 공식 프로필은 176cm, 116kg였으며 프로레슬러 시절 공식 프로필 신장은 180cm이었는데, 관중들에게 크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4cm 뻥튀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세대의 다른 프로레슬러들도 역도산처럼 공식 프로필 신장을 뻥튀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역도산의 세계 챔피언 경력은 WWA 세계 챔피언 등극으로 단 한 번이지만 당시 일본 프로레슬링계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프로 레슬링계에서는 역도산의 NWA 인터내셔널 헤비웨이트 챔피언 타이틀이 사실상 '세계 챔피언과 동등'했기 때문에 '역도산의 세계 챔피언 경력이 단 한 번 밖에 없다'는 주장은 애매한데 원래 어지간한 프로레슬링 단체는 타국인이나 타 단체 선수에게 매우 폐쇄적인데 사실 함부로 벨트를 유출하면 그만큼 그 단체의 격이 낮아지기 때문이었고 원래 NWA에서 챔피언십을 벌여 루 테즈를 꺾었으나 벨트를 유출할 수는 없어서 NWA 챔피언 벨트를 주는 대신 NWA 인터내셔널 헤이웨이트 챔피언으로 퉁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십 초대 주인이기도 합니다.역도산의 레슬링 스타일은 현대 프로레슬링의 팬들이 보기에는 다소 심심한 스타일일 수도 있는데 수십여년 전 프로레슬링은 바디슬램같은 현대 프로레슬링의 기본 기술들이 경기를 끝낼 정도의 위력을 가진 기술이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보기에는 경기 초반에 나올 법한 기술이 경기 내내 나오다가 경기가 끝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도산의 전매특허이자 루 테즈의 936연승을 끊은 가라테챱만큼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했는데 설경구가 출연한 영화에서는 현대 프로레슬링 팬들을 배려해서였는지 경량급 레슬러들이나 쓸법한 허리케인라나를 쓰는 등 시대와는 맞지 않는 액션이 나오기도 합니다.역도산의 난폭한 성격은 어린시절부터 있었는데, 어릴적 둘째형과 싸우다 솥뚜껑을 집어던져 목에 상처를 입힌건 유명하며, 이후에도 어린 딸이 오랜만에 만난 그를 못알아보고 울어대자 바닥에 내팽겨쳤다고 하며 그렇게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난폭한 성격이었지만, 자민당의 거물 정치가였던 오노 반보쿠(大野 伴睦)만은 존경해서 오노가 술을 삼가라 하면 군말없이 따랐다고 합니다.또한 역도산은 아주 특이한 개인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리컵을 과자처럼 입으로 베어물고서 잘근잘근 잘게 씹어서 삼켜버리는 상상만해도 끔찍한 개인기였는데 당연히 입이 피투성이가 되는지라 주위사람들이 그 흉측한 모습에 기겁을 하고 무서움에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자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술에 취했을때나 가끔 보여주는 개인기였다고 하고, 지인들에 따르면 저 개인기를 선보일때는 역도산이 기분이 매우 나쁘거나 아니면 기분이 매우 좋거나 둘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북한에서 역도산 만화가 그려졌는데 일본어로도 번역되기도 했는데 내용은 음모론이 절정을 이뤄 황당한 스토리인데 이 북한 역도산 만화는 한국에서도 나왔는데 감수를 맡은 전직 프로레슬러 김남훈이 곳곳에 왜곡이 많다고 당시 실화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만화 마지막을 보면 역도산이 병원에서 죽는데 당당하게 나오며, 죽을 때도 아주 거룩한 분위기로 죽기까지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조용하게 슬퍼하고 무슨 성자가 죽는 분위기로 그렸는데 감수를 맡던 이가 "세상에 이런 왜곡을. 그가 죽을 당시에는 기자들에 지인들, 팬, 내연녀나 자기가 생모라고 주장하는 여성, VIP나 야쿠자들이 몰려와서 주변은 엉망이었다."는 글귀를 써 붙일 정도였으며 북한 찬양 부분은 삭제되었는데, 특히 한국 번역판에서 유언은 나는 위대한 조선사람이라지만 원본과 그걸 직역한 일본판에 의하면 김일성 찬양 유언이었다고 합니다.만화 역도산 줄거리는 역도산이 일본으로 가서 일본 레슬러들을 이기고, 특히 미국의 강한 레슬러들을 거꾸러뜨리고 걸핏하면 미국인들이나 미군들과 시비가 붙어서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준다는 것이며 북한 찬양과 김일성 찬양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함경도 출신 실향민 역도산이 김일성에게 고급 승용차 준 건 미화가 철철 넘치는데 내용은 수묵화인데, 그린 이는 김태권(남한의 만화가와 동명이인)으로 이 만화는 "영웅 역도산"이라는 한국 서적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역도산은 당대 일본 뿐 아니라 한국,북한 모두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역도산은 북한 땅인 함경도 출신에 김일성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면서도 남한과의 교섭에도 적극적이어서 1963년 1월에 서울을 방문하여 한일간의 스포츠 교류를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역도산의 남한 입국은 표면적으로는 야마구치구미의 조장 다오카 가즈오의 권유로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 뒤에는 당시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노 반보쿠(大野 伴睦)나 총리를 지냈던 기시 노부스케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어쨌든 그의 사망 당시에는 북한뿐만이 아닌 남한에서도 대한뉴스에서 주요 소식으로 방송하여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애도를 표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남북한의 정치적인 의도였고, '일본에서 활약하여 전세계에 위엄을 떨첬고, 그러면서 언제나 조국을 생각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북한에서는 조선인) 역도산'이라는 프로파간다성 홍보로 잘 써먹기 위한 목적을 감안해야 합니다.역도산 사후 많은 대중매체에서 다루지는데 만화왕국답게 만화 주인공의 주요 모티브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타가키 케이스케의 만화에서는 영 좋지 않게 그려지며 바키 본편에서는 역강산이란 이름으로 마운트 도바의 회상에 잠깐 등장하는데, 본편에서는 의외로 크게 비하당하진 않아 지하투기장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것으로 언급됩니다.그런데 오로치 돗포가 주인공인 바키 외전 권인에서는 한마 유지로의  부친인 유도가 한마 유이치로를 상대로 승부 조작 경기를 벌였다가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오로치 돗포에게 지하투기장에 호출돼서 코까지 잘려가며 탈탈 털리고 언론에 반칙 경기를 시인한 것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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