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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①한국인 최영의와 일본인 오야마 마스다츠라는 두갈래길 인생

by 마음heart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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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

①한국인 최영의와 일본인 오야마 마스다츠라는 두갈래길 인생



극진 카라테는 전 세계 120개국 143개지부 1200만명의 수련 인구를 가진,단일 도장으로는 비교조차 불가한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무술이며 이 극진 카라테를 창시한 오야마 마스다츠(大山 倍達.おおやまますたつ.Ōyama Masutatsu)는우리들에게는 최배달이란 이름으로 유명합니다.1950년대 일본 도쿄의 허름한 도장에서 시작하여 낡은 발레 스튜디오를 연습장소로 사용해야했던 극진회관 최초의 명칭은 오야마도장은 이후 비교를 거부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장으로 발돋움하였고 극진카라테는 풀컨텍트 카라테의 효시로 불리며 전 세계적인 무술로 발전했습니다.최배달의 극진 카라테의 융성은 국가나 단체의 지원 하나없이 오직 단 한사람의 무도가가 가진 절대적인 카리스마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에서는 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로 최배달이라는 무술인을 일본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으며 국내에서는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실제주인공이자 20세기의 전설적인 무도가라 불리는 최배달이자 최영의를 세상속으로 맞이하게 합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한국인 최영의와 일본인 오야마 마스다츠

1970년대 카지와라 잇키의 공수바보일대(원제는가라테 바카 이치다이(空手バカ一代)' 직역하면 공수도 바보 일대로 한국에는무한의 파이터로 출간됨)중간은 고우영의 72년도 대야망과 80년대 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최영의의 일생은 만화 바람의 파이터나 고우영의 대야망을 통해 한국에 알려진 내용이 전부가 아니며 일본 혹은 해외에 알려져 있는 최영의의 일생 중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일본에는 자서전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극진 관련서적들이 존재하지만 국내에는 최영의에 대한 전문적인 서적은 전무했지만 최영의 사후 점차 극진카라테가 한국에 상륙하고 최영의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도 전해지게 되지만 그럼에도 만화 공수도 바보일대나 대야망,바람의 파이터와 같은 만화로 최배달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픽션이 가미된 만화나 소설은 일본에서 출판된 자서전이나 기타 극진 전문서적과 비교해볼 때 매우 빈약한 자료라 할 수 있는데 인터넷의 활성화와 일본서적의 수입 등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최영의의 일생에 대한 또다른 일면을 접하고 알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최영의의 출생지에 관한 차이는 주목할 대목입니다. 최영의의 출생지는 전북 김제이지만 일본에서는 최영 의가 도쿄에서 출생하였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이와 같이 최영의의 출생지가 두갈래로 갈라지는 것은 그가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으로 귀화하였기 때문인데 만약 최영의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최배달은 20세기 무술계를 말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며 전세계에 무명을 떨친 국제적 거인 즉, 한국이든 일본이든 간에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한국인에게 있어 그는 한국의 최영의가 되어야 하고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일본의 오야마 마마스다츠가 되어야 했습니다.하지만 출생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최영의 스스로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일본인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과연 최영의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을까?이에 대해 최영의 생존 당시 측근 중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이창무 한국상영관협회장은 최영의 총재가 아마도 극진회관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에 귀화하였지만 한국인의 혼을 버리지 않기 위해
배달(13)이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는 사실이나 극진이라는 단어가 한국어 극진하다에서 따온 것이라는 내용, 가업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는 일본에서 자신의 후계자로 일족 대신 마쓰이 쇼케이(한국명 문장규)를 지목한 것도 마쓰이 관장이 실력면에서도 매우 뛰어나지만 젊은 30대라는 것과 재일교포라는 사실이 크게 착용하였다고 합니다.거의 전부가 일본인이라 할 수 있는 지부장회의에서도 한국인이 찾아오면 서슴없이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내용 등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전 세계에 강력하게 지부를 확대한 극진 카라테가 유독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내에 극진지부를 설립되지 않았던 이유는 최영의 총재의 태권도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보통은 한국의 태권도계가 최영의를 매몰차게 대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른데 과거 최영의 총재는 스스로 한국내 에 지부를 설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최영의는 극진 카라테와 태권도는 서로 경쟁하는 무술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무술이기 때문에 태권도의 종주국인 한국에 극진지부를 설립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고 합니다.당시 태권도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극진 카라테가 한국에 상륙하게 되면 그 형태상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국 내의 태권도가 큰 영향을 받거나 극진 카라테에 의해 고사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며 1994년 최영의 총재는 죽는날까지 생전의 다짐을 지켰고 극진 카라테는 2001년 3월이 되어서야 한국내에 첫 극진지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최영의가 미국의 뉴욕을 방문하였을 때어디선가 하나. 둘이라는 소리에 이끌려 뉴욕시내 좁은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그 소리는 미국에 진출한 태권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최영의는 멀리 타국땅에서 태극기를 걸어놓고 한국어로 한국의 무술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나는 어쩔 수 없이 일본에 귀화하여 일장기를 걸어놓고 가라대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런데 이곳은 머나먼 타국땅임에도 불구하고 태극기를 걸어놓고 한국어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만한 감동이 또 어디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합니다.우리는 몇칠 여행을 가기만해도 나라의 소중함을 느끼고 급 애국자가 되기도 합니다.평생을 고국에서 떨어져있던 삶을 단순히 귀화했다는 이유만으로 매국노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개개인의 삶을 너무 편협하게만 보는 시선은 아닌가 합니다.최영의 총재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최영의가 한국인의 혼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최영의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인데 "극진회관은 국적을 가리지 않지만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출생지를 밝힌 것입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일본에서의 한국인이란 자부심과 긍지

최영의는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에서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고, 태어난 시기가 1920년대 일제강점기인 바람에, 큰 형최일운이 일본의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할 때(전 우석대 총장), 일본에 있는 항공정비학교(현재는 일본 항공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타쿠쇼쿠(拓殖) 대학에 진학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되었다가(이 내용은 최영의의 저작들에서 나오는 내용으로,내용도 책마다 징용이었다느니 지원했다느니 학도병이었다느니 서로 엇갈리는데 실제로는 치바항공대에서는 신풍공격대가 출격한 일 자체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증언을 바탕으로 과거사를 재구성한 고지마 가즈시(小島一志)와 츠카모토 요시코(塚本佳子)의 조사에 의하면, 최영의는 치바현 다테야마에 있는 건설현장 함바의 노동자로, 특공대원이 아니라 징용공이었다고 합니다.최영의의 셋째형 최영범의 진술에 의하면, 전쟁통에 가미가제 부대에 끌려갈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평발이라는 이유로 겨우 빠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전후 일본 사회에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지원보단 징용공이 깔끔하긴 합니다)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치야코(智弥子;배우였던 후지마키 준(藤巻潤, 전격전대 체인지맨의 이부키 장관 역)의 누나로 2006년 사망)라는 일본인과 결혼한 후에 일본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내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구 등지에는 일본인 오야마 마스다츠로 알려지고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 카라테(당시 최초의 풀컨텍트 카라테 ) 역시 일본에서 발생한 무술이기 때문에 최영의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드높아질수록  그가 창시한 극진카라테도 세계적인 무술로 세계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그리고 그 명성은 최영의가 비록 한국인이라고 해서 극진카라테의 융성과 더불어 한국의 명성이 높아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최영의 개인은 한국인이었다고해도,한국인 최영의가 극진카라테를 만들었다고 해서 극진카라테가 한국무술이라고 주장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최영의의 일본 이름 오오야마 마스다츠는 최배달이라는 활동명을 일본어 본명으로 채택한 것으로 마스타츠(倍達)는 고대에 한반도나 한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이는 '배달'을 한자로 표기할 때 쓰는 '倍達'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으로 '배달의 민족' 할 때 그 배달을 뜻하는 것이 맞습니다. 본인이 고향을 떠나 평생의 반 이상을 외지에서 보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라와 고향을 생각하는 의미에서 고향의 대산과 배달 민족의 배달을 따서 '배달(마스타츠)'이라고 지었다고 밝혔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배달(delivery)이 아닙니다. 성으로 지은 오야마(大山) 역시 자신의 원래 성인 최(崔, 높을 최)를 파자하고(山 + 隹) '높다'는 원래 뜻을 살려 대산(大山)이라 지은 듯하지만 당시 창씨개명하는 한국인들 중 완벽하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 원래 이름의 한자를 그대로 쓰거나 파자하는 식으로 지었습니다.또다른 설로는 일본에서 신세를 지던 '오야마 시게루'(후에 최영의의 제자가 된다.) 집안의 성을 이은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참고로 마스타츠는 일본인들이 듣기에는 특이하면서 어색한 이름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가 외지인(특히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그래서인지 주변 일본인들이 개명하라고 많이 권유도 하였다고 하나, 본인은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썼는데 일본에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이 원래 한국에 있을 때 이름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며 한국명 최영의, 민족명 최배달 같은 식으로 구분한다고합니다.최영의는 일본에 있을 때 다양한 활동명을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최배달,최맹호(猛虎) 등의 한국식 이름을 썼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뒤에는 오오야마 마스타츠, 大山猛虎(오야마 모우코), 大山虎雄(오야마 토라오) 등을 썼는데 모두 호랑이, 배달과 관련 있는 이름들이었으며 영어권에서는 약칭인 마스 오야마(Mas Oyama)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최영의를 향한 일본 귀화 제의

최영의는 프로레슬러,복서등 해외 격투가들을 체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공수도 도장인 대산도장(大山道場)을 열었는데 최배달의 일본내 최초의 도장은 부지 사기사건을 당하며 문을 닫고 맙니다.그전까지는미국에서 모은 재산으로 꽤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사기 사건 이후에는 전기도 끊긴 초라한 달동네에서 생활하며 힘든 시절을 겪기도 했지만 최영의의 명성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젊은이들 때문에 다시 도장을 열었고,이때 영문으로 쓴 가라테 기술서 'What is Karate?' 'This is Karate'를 출판했는데 이것이 해외에서 히트를 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덕분에 일본인 제자들 뿐 아니라 해외에서 온 외국인 제자들까지 모여들면서 도장은 날로 번창하게 돕니다. 일본에서는 그냥저냥한 수준의 인지도였던 최영의가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지도를 얻었는데 젊은 시절 미국 등 세계에서 격투기 시합을 하고 다녔던 덕분에 입소문 덕도 좀 보았던 것 같습니다.이 당시 대산도장의 풍경은 변두리의 허름한 도장에 다양한 인종의 덩치들이 우글우글 몰려 거의 싸움 수준의 무지막지한 수련을 하는 살벌하고도 이색적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최영의는 1960년대 초기,사토 에이사쿠의 보디가드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500만엔 이상의 돈을 극진회의 빌딩 건설자금으로 융통했다고 합니다.(정달현;재일본 대한민국민단 선전국장)

(좌)사토 에이사쿠(극진회관 초대 회장이자 제 61대,62대,63대 일본 내각총리대신(국무총리,수상) ,우)모리 마츠헤이(극진회관 2대 회장,제 5대 환경청장관)
최홍희(국제태권도연맹(ITF)창립자

당시 최영의 총재와 친교가 두터웠던 태권도(명칭) 창시자 최홍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1966년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저는 도쿄에 들렀습니다.
내 친구가 최영의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려고 하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야마 마스다츠(최영의)는 조선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아주 어렸을때 고향을 떠나 삶의 대부분을 재일조선인으로 지내왔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서 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막게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의 카라테 공적을 기리고,그리고 그의 한국에 있는 동생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한국은 그와 같은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에,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우리는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 함께 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렇게 해주었다면 그의 이름은 한국 역사에 남았을 것입니다.

오야마(최영의)사범은 내 말을 잘 이해했다며 집에가서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다음날 아침,나는 오야마사범의 친한 친구인 이성우씨로부터
전날 오후 나와 오야마사범이 이야기를 한후,오야마가 이씨를 방문한 것을 들었습니다.
오야마사범은 이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때 일본에 왔다.
사토 에이사쿠 총리 덕분에 오늘 여기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사토 총리가 자신에게 일본인이 되라고 권해 주었다.
이씨와 이야기한 후,
저는 오야마 사범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야마 사범을 한국에 불렀습니다.
우리는 서울과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했습니다.저는 그를 위해 태권도 연무회를 기획했어요

/태권도타임즈 115호 (2000년 1월 발행)최홍희 인터뷰 중

최홍희와 함꼐 28년만에 고국땅 한국에 들어온 최영의

극진 카라테 최영의의 28년만의 귀국을 태권왕이라 홍보한 대한민국 방송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한국과 일본,이중국적자가 된 극진의 별

그렇게 최영의는 1967년 10월 최홍희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무려 28년만의 귀국으로 최영의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의 성묘를 하고 전북대학교장을 하고 있던 큰형과 동생,누나 등 가족들을 만나 기쁨을 나누기도 했지만 각지의 명사들의 분에 넘치는 환영에 난처해 하기도 합니다.원래 10일 정도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은 3주로 연장되기도 하며 그후로 최영의는 일년에 두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한국 방문을 빼먹지 않게 됩니다.

영의는(귀국 이후 죽기전까지) 매년 8월이랑 1월(설)에는 제사를 위해 반드시 돌아왔습니다.

/최영범-최영의의 친형

하지만 최영의는 일본으로 돌아간 1968년 일본으로 귀화하게 되는데 28년만의 귀국은 조국에 대한 그의 애국심과 결속력을 강하게 자극하는 동시에 망설이고 있던 일본으로의 귀화를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을까?최영의의 심경의 변화에 대해 최홍희의 인터뷰가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그의 고향을 방문했고 그는 동생,친척들과 재회했습니다.
저는 또 KBS에 그의 인터뷰도 기획했습니다.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그는 김포공항에서 저에게 얘기했습니다.

"최장군 용서해 주세요.단순하게 생각해서,
저는 이런(복잡한,박정권과 ITF연맹과의 대립)환경에서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리고 그는 한국을 떠났습니다.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일 것을 맹세했습니다.
제가 형이었고,그가 동생이었어요.

/태권도 타임즈 115호(2000년1월 발행)최홍희 인터뷰 중

(좌)최영의 친형 최영범(우)전두환과 함께한 최영의
김치순(재일 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상임고문)

최영의가 1960년대 방한했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최영의를 만나 "지금 한국에서는 태권도라는 한국 무술이 발전하고 있는데, 당신 무술이 들어오면 태권도가 망한다. 그러니 가라테로 소개하지 말고 태권도로 소개해 달라"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당시 대한뉴스 영상에는 태권왕 귀국이란 제목으로 최영의가 한국의 태권도가들을 가르치는 영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로 소개가 가능했던 것으로 "태권도가 정착하기 전에는 한국에 진출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는데 이 에피소드는 일본의 격투가들 사이에도 알려졌다고 합니다.그렇게 일본에 귀화해서 일본인이 된 최영의는 어째서 한국 국적도 포기하지 않고 이중국적자가 되었을까? 최영의는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이고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되는 기묘한 신분인데 이는 롯데 신격호와 마찬가지로 한일관계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1960년 당시 시간에서 20여년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합니다.1945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이후 행정부가 마비되는데 당시 일본에는 약 240만명의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 패망이후 대부분 한국(한반도)으로 귀국했지만 배를 구할 수 없고,귀국하여도 기댈 곳 하나 없던 50만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에 남게되는데 이들에게는 조선의 관청을 대신하여 조선인이 신청하면 호적등본을 발행해주는 기관이 존재했습니다.

종전직후,일본국민이나 재일조선인은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군 최고사령부,聯合國軍最高司令官總司令部)의
지휘아래 배급제도에 의한 일일의 식료품을 배부받았습니다.
호적에 따라 식료품의 양이 결정되었기에 배급을 많이 받으려고
위조호적을 만든 재일조선인들이 있었습니다.호적은 간단히 만들 수 있었는데
이름 한글자를 바꾸거나 생년월일을 바꾸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호적이 되었습니다.

/김치순(재일 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상임고문)

호적의 작성이 '자기신청'이었던 탓에 결과적으로 복수의 호적을 가진 조선인도 적지 않았는데 전후 일단 조선에 돌아갔지만 생활고로 인해 다시 일본에 밀항해 돌아온 사람도 많아 일본에 도착한 후 이름이나 생년 월일을 바꿔 호적을 신청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나기태,재일한인역사자료관 사무차장,연구원)이런 상황에서 28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최영의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됩니다.아버지의 반대에 호적이 파일 것을 각오하고 십대때 일본으로 건너 온 최영의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77살의 나이로 자신을 기다린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데 생각치도 못한 한국 호적에는 일본에서 신청한 조선호적에 기입되어 있던 최영의는 1923년 6월4일생,기혼.아내 후지마키 대루코(후에 치야코로 개명)였지만 한국인 호적에 기입되어있던 최영의는 1922년 6월4일생 미혼으로 이 둘은 법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고 이는 자신의 조선호적을 귀화시켜도 한국의 호적은 여전히 남아있음을 의미했습니다.원래라면 자신의 나라에서 호적을 말소해야하는 귀화절차도 조선 국적인 최영의는 외국인등록증을 반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에 일본으로 돌아온 최영의는 간단하게 일본인으로 귀화할 수 있었고 그의 일본인 아내와 딸들도 조선인에서 일본인으로 귀화 처리가 됩니다.

일본인 아내와 세명의 자녀들을 둔 최영의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한국과 일본 두곳에 호적을 둔 아버지 최영의

최영의는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인 1964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당시 일본과 대사급 외교 관계가 없었던 제 3공화국 체제에서는 최영의의 일본 국적 취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네이버 등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1923년 6월4일생의 그의 한국 국적이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85년까지 이중국적을 허용했으므로 일본 내에서도 그의 한국 국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중국적이지만 이중국적이라 말할 수 없고, 최영의는 한국인이고 오야마 마스타츠는 일본인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지속된 것입니다.최영의총재의 뒤를 이어 극진회관 2대 관장에 취임한 문장규 관장도 KBS와의 인터뷰에서"오야마(최영의)선생님도 그 마음이 변한 것은 없었다고 생각해요.그래서 오야마선생님은 일절 귀화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저도 국적을 바꾸라고 권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만,그때 귀화하는건 할 수 없다고 제 나름대로 말씀 드렸더니 그건 귀화가 아니라고 "너 자신이 변하는게 아니란다.귀화를 하는게 아니라 일본의 국적을 츼득하는 것,편의적으로 말야"그런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그리고 최영의는 1970년 홍순호라는 한국인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극진회관 2대관장 묹장규(일본명;마쓰이 쇼케이(松井章圭).
최영의의 세 아들들과 장남 최광범

어머님이 일본에서 유학할 때 아버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어머님은 24세,아버님은 45세였습니다.
사실 아버님에겐 어머님을 만나기 전,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사람이어서 집안 어른들이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을 데려오자 집안 어른들이 비로소 인정했다고 합니다.한국인이었으니까요.
1974년에 제가 태어나자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님은 귀국 후 한국과 일본을 왔다갔다 하며 생활하셨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공식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영의의 장남 최광범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

한국인인 그녀와 태어난 세명의 아들들은 1922년생 한국인 최영의의 호적에 입적되었습니다.김치순(재일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상임고문)은"한국대표부(주일한국대사관의 전신)가 생기기 이전부터 재일조선인을 위한 호적을 만드는 관청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지금도 최영의씨처럼 한국의 가족은 한국의 호적에,일본의 가족은 일본의 호적에 넣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이런 경우 본인이 죽었을때 유산상속의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지금 저는 그런 한일의 유족들 사이에 생기는 유산문제의 조정,중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최영의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경우처럼 중혼을 하면서 장남 최광범을 52살에 본 아들이며 일본 호적에서는 치야코(智弥子) 사이에 3명의 딸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중혼죄가 있는데, 일본 법원에서 한국의 호적과 일본의 호적이 생일이 다르므로 동일인물이 아니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물론 지금이였으면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최영의의 한국 프로필에는 생일이 1922년 6월 4일, 일본 프로필에는 1923년 7월 27일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한국의 경우 2010년 5월 3일까지는 자동으로 바티칸 국적이 부여되는 추기경을 제외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았던 나라였으며 이는 당시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런데 최영의는 귀화 후 한국 대사관에 국적 상실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국적 말소 처리가 되지 않았는데 사실 최영의뿐 아니라 외국에 귀화한 한국인들 중에도 잘 몰라서 혹은 귀찮아서 국적상실 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국적상실 신고는 당사자가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안 할 경우 한국 정부에서도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하며 최영의의 한국 태생 아들들은 전부 한국 국적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최영의가 일본에 귀화한 순간 한국의 국적법상 한국 국적은 자동상실되었다고 봐야 하지만 과거 행정체계가 미비해 생긴 일종의 오류로 인해 의도치 않게 이중국적자처럼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최영의는 1985년 KBS 인터뷰에서 일본 국적을 취득한 이유에 대해,

당시 한국 국적으로는 공산 국가에 들어갈 수 없었을 뿐더러
일본과 다른 나라를 자주 왕래해야 했습니다.
일본에서 외국인의 출입국 단계는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그 모든 단계를 간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라고 밝혔는데 물론 국적 여부를 떠나 최영의 본인도 상기했듯 일본인들에겐 생소한 마스타츠(倍達)라는 특이한 이름을 고집한 것이나 후계자로 재일 한국인 문장규(일본에서는 마쓰이 쇼케이(松井章奎)라는 통명을 썼고, 문장규(文章圭)는 본명입니다. 재일 한국인 2세이며, 남평 문씨 34세손입니다)를 선택한 점, 본인 스스로 한국계에 대한 자부심이 남아있다는 인터뷰 내용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민족 및 국가에 대한 정체성은 상당히 뚜렷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한국과 일본 두곳에 호적이 있었기 때문에 1994년 최영의 사망 후 유산 상속 문제는 최영의의 일본 가족과 한국 가족들 역시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1200만명이 수련하는 극진회관의 관장이자 국제적 활동 당시 총재라 불리던 명성과는 달리 최영의의 죽음은 무척이나 쓸슬하게 맞이합니다.최영의가 진단받은 병명은 "원발성 폐악성종양",최영의가 세상을 떠나기 한달간의 기록은 애석하게도 그의 유가족들이 아닌,최영의의 비서 와타나베 야스코의 비서일지와 최영의에게 왕진을 하며 링겔주사를 놔주던 우메다 요시하루의 증언,그리고 세이로가 국제병원의 담당의사 타나카 쥰지의 진료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최영의가 죽기전 한달간,그의 일본인 딸들은 그와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고 최영의의 한국인 아들들은 그와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72년 생애보다 더 외로웠을 죽음,그 마지막 한달

일제강점기였던1938년 16살에 도일한 최영의는 죽음을 맞은 1994년 4월26일 약 56년간 그 누구보다 외롭지만 치열하게 살다갔지만,원발성 폐악성종양을 진단받고 죽음을 맞은 한달간이 그이 일생에서 가장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우메다 요시하루(오코하마토호병원 원장,극진회관 전 심의위원장,재단법인극진장학회 대표이사)는 

저도 의사지만 전문분야 외의 것이었으므로,
수술을 하는가,수술을 하지 않고 항암제를 쓸건가,
어떤 치료법이 적절한지 등의 이야기를 (의사)선생임께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수술 가능한 상태가 아닌 진행성의 폐암이라고 했습니다.
수술이 가능하지 않는다면 함암제를 쓸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연명 가능하다면 해주길 바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연명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오오다(왕진 담당의)선생님이 얘기했습니다.

"만약 제 부친이 이 암이라면 저는 항암제를 쓰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대중요법 밖에 없습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그러자 1994년 3월28일 다음날인 29일 최영의는 퇴원하고 싶다고 말했고 우메다 요시하루는 담당의에게"대중요법이라면 제가 치료를 진행할테니 퇴원시켜 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담당선생님은 퇴원해도 괜찮다며 "나중에 상태가 안좋아질테니 그때는 다시 돌아와 달라"며 허락해 주었고 최영의 총재님께 "그정도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자택에서 치료받으시겠어요?라고 물으니 '응,그러고 싶어.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부탁해"가 아닌"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어찌나 퇴원하고 싶으셨던걸까하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자택에서 요양하던 최영의는 4월1일 극진회관 총본부 4층 개인실로 몸을 옮깁니다.당시 최영의 총재의 자택에는 아내와 가정부가 있었지만 아내는 요리나 간병이 서툴러서 최영의에게 오이즈미 자택은 결코 편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차라리 극진회관 총본가 내제자나 비서들이 세심하게 돌봐주기 때문에 총본부로 옮기는 것이 최영의에게는 더 편한 장소였습니다.원래 병원에서 퇴원할땐 자택에서 조용히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최영의는 우메다 요시하루에게"앞으로 20년이라고는 말못하지만 10년은 살고싶어.선생 어떻게 부탁드립니다"라고하며 고개를 숙이고 "(극진의)신회관(건물)을 세우는 것과 공수백과사전(최영의의 유작)을 만드는 것이 최영의의 마지막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아버지(최영의)의 병문안을 온 장녀가 우메다 요시하루를 불러 세우더니 진실을 얘기해 달라고 하자담당의에게 들은대로 이야기해 줬습니다.그 이상의 것은 담당의사 선생님에게 물어 달라고,그런데도 딸은 세이로카병원에 가지 않고 그대로 오사카로 돌아가 버립니다.세이로카 병원에 전화를 했지만 담당의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최영의는 15일 내제자의 입료식에는 무슨일이 있던 참석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기침과 가래를 어떨게든 해달라고 했으며 우메다 요시하루는 다음날 링거를 놓으러 오겠다고 답하고 돌아갔습니다.

총재님이 본부의 4층 창문에 만개한 벚꽃을 가르키는거에요.선생 봐달라고
"이 벚꽃 아름답죠? 라고 밑에 층에서는 제자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오는 거에요
"선생님 이 소리를 듣는게 좋습니다." 라고
이 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된다고.
그 장면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날 간호사를 데리고 진료를 하러 갔습니다만,
그때도 마츠이(쇼케이)를 중심으로
신회관을 만들어 공수백과사전을 완성하지 못하면 죽을 수 없다"고 얘기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날부터 일주일간 학회가 있기에 한동안 올 수 없다고
총재님께 양해를 구하고 돌아갔습니다'

/1994년 4월7일을 회상하며

최영의의 기관지 천식 발작이 도져 최영의는 세이로카병원에 급히 후송되어 응급조치를 마친참에 노구치와 비서 와타나베,내제자 쿠마가이가 도착했으며 몇가지검사를 끝마쳤을때는 밤12시가 되어갔습니다.최영의는 목소리가 명확하게 나오진 않았지만 "우메다 선생 ,미안해,고마워.."라고 얘기하고 있는듯 했으며 와타나베,쿠마가이가 손발을 비비며 눈물을흘려주고있다고 정말로 고맙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와타나베는 주위에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한국의 가족들과 연락을 취해 가족들의 비자를 준비했고 우메다는 최영의의 뜻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최영의와 신뢰관계가 깊은 최영의의 고문변호사 요네츠 이츠오를 부릅니다.그리고 이날 네팔 원정의 보고를 위해 제자 고다 유조가 방문합니다.고다 유조는 최영의 총재가 상당히 컨디션이 나빠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암인줄은 모른채 네팔의 건은 맡겨 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좌)우메다 요시하루(오코하마토호병원 원장,극진회관 전 심의위원장,재단법인극진장학회 대표이사),우)다 유조(극진회관 최고고문)

1994년 4월17일,요네츠 이츠오,우메다 요시하루 등을 포함한 5명의 입회인과 함께 최영의의 고문변호사 요네츠 이츠오는 최영의는 유언서 작성에 들어갑니다.최영의의 유언서 입회인 안에는 아내도 있었지만 유언을 작성할때는 최영의가 양해를 구해 아내는 밖에 나가고 없었습니다.최영의는 유언을 두개로 나누어 달라고 했는데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부분을 앞에 것과 나누어 달라는 것으로 그건 한국 가족들에 대한 최영의의 성의였습니다.최영의는 자신이 건강해지면 자신이 이런 유언장을 썼다고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그리고 다음날 인 18일,네팔 원정 출발전 인사차 들른 마쓰이 쇼케이(문장규)에게 최영의는 이야기합니다."너는 내 대리인이니까 건강하게 잘 다녀오려무나.."그렇게 유언서를 작성하고 2일 뒤에 최영의의 고문변호사 요네츠 이츠오는 최영의에게 서명을 받기 위해 왔지만 그날 상태가 입으로 숨을 쉬고 몸시 지쳐보일 정도였는데 최영의는 힘을 내 일어나려 애썼지만 요네츠 이츠오는 무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쉬시라고 했고 유언서의 내용을 확인받고 다시 서명을 받으려 했지만 최영의가 옆으로 누워 고통스러워하자 "괜찮습니다.뒤는 저희가 알아서 할테니 편히 쉬고 계세요'라고 얘기합니다.유언서에 본인의 사인이 없어도 법적으로 문제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입회인 3명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물론 최영의 유언서 작성때 입회인은 5명 이었지만 말입니다.그리고 4월21일,극진을 지탱하게 될 두 사람이 최영의의 병실을 방문합니다.바로 로야마 하츠오(노초웅)와 나카무라 마코토(극진 2회,3회 세계 선수권 우승자,술에 취해 구라모토 나리하루(주성춘)와 싸워 진적이 있음,최영으의 중매로 결혼함)로 최영의는 로야마를 부른 뒤 "오,와줘서 고마워,이렇게 돼버렸어 나"라고 말하고는 다시 "앞으로는 젊은이들 중심으로 해(이끌어)주질 바래.오야마가 없어쟈도 극진카라테는 미래영겁 무도카라테로 있어주길 바라네"라고 로야마에게 이야기하자 로야마도 "오쓰,알겠습니다.꼭 열심히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로야마는 당시에 대해"총재님의 얼굴을 본것만으로도 눈물이 멈추지 않게 되었습니다.후에 나카무라 마코토도 최영의에게 불려 들어갔는데 "조직은 화합이 중요한거다.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 있어도 그게 조직이다.너라면 할 수 있어.술은 적당히 하렴.난 언제나 널 걱정하고 있어!"라는 최영의의 말에 나카무라는 "총재님 그런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주십쇼.제가 할 수 있는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나카무라 마코토는 울고 있었습니다.

최영의의 2장의 유언장
로야마 하츠오(노초웅)와 나카무라 마코토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두개의 유언장과 장레식에 참석못한 한국 유족

최영의는 22일과 23일에는 가슴에서 물을 빼내고 있었는데 물을 빼면 좀 편안해 했지만 물을 빼내는데 30분 이상이 걸렸고 하도 시간이 걸리자 최영의는 "의사선생을 한방 때려버릴까?하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웃기도 했습니다.최영의는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였습니다.4월25일,간호사와 처제는 아내 치야코에게 밤에 간병할 것을 충고했으나 아내 치야코는 비서 와타나베와 내제자 쿠마가이 카츠히토에게 간병을 맡긴 뒤 집으로 귀가 하였습니다.한국 가족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있던 와타나베는  25일 저녁 최영의의 한국인 아내 홍순호에게 연락해 "오날밤이 고비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홍순호는 아들들과 함께 첫번째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김포공항에 도착해 와타나베에게 국제전화로 연락을 취합니다.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전해온 와타나베의 말은 최영의 총재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저도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남의 눈 거릴낄 것 없이 울었습니다.
슬프고,분하고,한심해서 저희들은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최영의의 장남 최광범

같은 날 4월 26일 세이로카국제병원 의사 타나카 쥰타가 서명한 오야마 마츠다츠와 최영의 2개의 사망진단서가 작성됩니다.그리고 일본 유족들은 최영의의 한국가족들에 대해서 알게됩니다.그리고 최영의의 셋째 딸 오야마 키쿠토는 최영의가 죽은지 이틀 후인 28일 되어서여 뉴욕에서 돌아왔고 기자회견 자리에서 "아버지 생전에 귀국할 수 없었던 것은 비서 와타나베에게 의뢰한 비행기 티켓이 도착하지 않아서라고 해명했습니다.최영의가 한달에 한번 한국에 들어가 한국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감추어 주었던 것은 최영의의 비서 와타나베 야스코였습니다.와타나베는 최영의가 한국에 가는 일정을 모두 출장,원정 등으로 기록해 그의 휴식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감추어주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묻듯 같은 해 5월18일,야타나베 야스코는 최영의의 아내 치야코에 의해 해고되었고 한국 가족들에겐 최영의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최영의가 세상을 뜬지 2개월뒤 극진회관 2대 관장으로 취임한 문장규가 얼마안되어 한국 가족들을 찾아옵니다.힐튼 호텔에서 만나게 된 문장규로부터 아내 홍순호는 최영의의 유언서와 유품을 받게 됩니다.최영의가 애용하던 모자를 품에 끌어안은채 그녀는 통곡했습니다.최영의의 장남 최광범씨는 어머니가 결코 지성적인 여성은 아니었다고 회상합니다.영어를 하실 줄 아신다던지,교양이 있으시다던지 그런 여성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가정적이고,요리도 잘하고,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신 굉장한 여성이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에 대해서도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저희 가족은 아버지의 병을 알고나서 몇번이고 일본에 가려고 생각했지만 저희가 가면 문제가 발생할 건 눈에 훤히 보였기에 최광범의 어머니 홍순호씨는 참고,또 참았다고 합니다.매일 울면서 그렇게 참아내는 어머니르 보며 세 아들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최영의의 장남 최광범은 아버지 최영의와 아머니에 대해 회상하면서 둘의 사이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알려진 아버지는 강한 무도가였습니다.
저희 아들들에게도 "남자는 강하지 않으면 안돼"라고 늘 얘기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시면 언제나 다리가 아프다던지 허리가 아프던지 몸의 불편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렇게 초인적인 활약을 하신 아버지셨으니까 후유증이 상당히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아버지의 몸을 어머니가 돌보시듯
하루종일 마사지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해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일부러 마사지잔문학교에도 다니셨을 정도에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사지를 받으며 주무시는걸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상냥하고 정성스런 어머니셨기에 마지막까지 소중히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무술가를 사랑한 무술가들

우리들에게 최영의 최배달은 만화 바람의 파이터나 공수도 바보일대와 각종 미디어에서 다루는 무패의 승부사이자 전세계 1200만 수련생들을 둔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불세출의 무도가입니다.최영의 최배달을 유명하게 해준 만화 속 최배달은 온갖 수련을 통해 인간 그이상의 능력을 발휘한 초인으로 묘사되지만 만화나 영화 속 최영의 최배달 이미지는 결국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최영의 최배달의 진정한 성과는 시대를 앞서나간 풀컨텍트 카라테의 도입과 극진 카라테를 통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종합 격투기의 시대를 이끌었다는 것입니다.그외 만화 그 이상의 최영의 최배달의 무용담들은 결국 만화의 재미를 위해 살이 붙여지는 작업을 통해 신격화된 가짜 최배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진짜 최배달은 일본 사회에서 조센징으로 억압받고 차별 받으면서도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일대종사를 이룩한 인간 최영의의 불굴의 의지일 것입니다.그렇게 극진 카라테를 창시한 초인 최배달이 아니라,한국을 그리워하고 나이 들어 갖은 통증에 아파하던 인간 최영의가 진짜의 모습일 것입니다.최영의는 겉으로 보이는 강한 모습 보다 훨씬 여린 사나이였습니다.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과 보낸 사람 때문에 평생을 끙끙 앎던 마음 여린 남자였습니다.또한 최영의는 가슴 따뜻한 청년이기도 했습니다.카지와라와 극진회관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몇몇 카라테 단체에서 비난 받았지만 다른 무도단체들은 가만히 있었습니다.그들이 인정한건 최영의의 실력 뿐이 아니었습니다.그들이 인정한 최영의는 무도에 열정이 가득한 따뜻한 창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야마다 타츠오(일본권법공수도 총사)는 최영의와 그의 극진카라테에 대하여 위와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실탄 사격을 안하고 공기총만 쏴본 놈(슨도메카라테)이 뭐를 말하든 통용되지 않아.
오야마 마츠타츠(최영의)를 앝보면 안돼.
놈은 목숨을 버리고 싸우는 인간이다.그런 놈이 제일 강하다

또한 시오다 고죠(요신칸 아이키도;양신관합기도 설립자)는 최영의에 대해서

오야마군(최영의)은 타쿠쇼대학의 후배로 이름이 알려진 공수가지만,
소를 죽였다느니 어쨋내느니 하길래 어떤 남자인가하고 생각했더니
실로 성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번 오야마군에게 아이키도(합기도)를 지도했습니다만..
그는 힘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어서 꽤나 고생했습니다.그래도 감이 날카로운 남자였습니다.

야마구치 고시(전일본공수고강유회 회장,강유류(고쥬류 2대 계승자,야마구치 고겐의 3남)는

저는 아직 어렸으니까 오야마선생님에게 아주 귀여움 받았습니다...

중략..

무릎위에 앉아서 오야마 선생님이 얘기하는 이런저런 무용담을 들었습니다.
조(영주)선생님과의 관계도 있어서인지 오야마선생님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언제나 온후한 분이였고 잘난체 하신적도 없었고..
어릴때의 감상은 정말 상냥한 분이였습니다.

(좌)야마다 타츠오(일본권법공수도 총사),(가운데)시오다 고죠(요신칸 아이키도;양신관합기도 설립자).,(우)이시바시 마사시(전 대산도장 지도원)
(좌)야마구치 고시,(가운데)오카노 토모사부로(국제송도관;쇼토칸),공수도연합경교숙 총사범),(우)긴죠 히로시(일본공수도연수회 종사범)

오카노 토모사부로(국제송도관;쇼토칸,공수도연합경교숙 총사범)는"기고 선생님은(쇼토칸 창시자 후나코시 기친의 3남)전쟁 후 오야마(최영의)가 장어랑 미꾸라지를 가지고 병안안 와줬다고(당시 투병 중)기뻐했다"고 하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엔 최영의의 극진카라테가 일본 무도계에 이단 취급을 받으며 배척 당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최영의는 당시 일본 카라테계의 희망이었습니다.그가 미국에서 돌아와 소와의 공개 결투를 했을때 흥을 돋우기 위해 각 유파의 공수도가들이 대련과 연무를 선보였고 이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카라테의 유파가 통일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긴죠 히로시(일본공수도연수회 종사범)은 이에 대하여

역도산의 카라테춉에 의해 유명해진 카라테를
진짜 공수가가 실연한다는 것으로 당시의 공수계는 큰 소동이었습니다.
오야마씨는 기대받는 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기게 유파를 떠나 많은 카라테관계자가 그날의 연무에 협력했습니다.
앞선에는 야마다 타츠오 사범의 제자가 시합을 해
강유류(고주류)를 시작으로
화동류(와도류)의 사람들도 연무를 했던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공수계가 일체가 되어 오야마 선생님(최영의)을 응원했습니다.그것만으로도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이시바시 마사시(전 대산도장 지도원).오야마(최영의)는 극진회관의 총재이자 일본 카라테계의 어른이었습니다.자신의 명성과 그림자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고 먹고 사는지,극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있던 진정한 어른이었습니다.최영의는 일본에서 한 평생 공수도 바보 오야마 마츠다츠를 연기하였고 죽기 얼마전에는 한국에서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을 연기하며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끝까지 지켜주려한 어른이었지 결코 사기꾼이 아니었습니다.최영의는 만화 공수바보일대의 붐으로 인해 오야마(최영의)는 자신의 의지와는 먼 일본인 오야마 마츠다츠를 연기하는 것을 요구받게 되고 어느새 그것은 곧,의무로 바뀌었습니다.최영의에겐 본래의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낼 장소가 필요했으며 언제 미치기 시작할지 모르는 정신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도,거짓없는 자신을 드러낼 편히 숨쉴 수 있는 장소를 최영의는 바라게 되었고 그곳이 바로 한국의 가족이었습니다.만화 속 허구의 오야마 마츠타츠를 끝까지 연기하기 위해선 한국인 최영의의 존재는 필요불가결했고,그런 자신을 지지해주는 한국 가족들과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최영의는 무도가로써 한국에서 활동하는 길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지상 최강의 사나이 최배달이라던지 세계 제일의 공수가 오야마 마츠다츠가 아닌,인간 최영의로서 맨얼굴을 드러내 오야마 마츠타츠를 연기해온 피로를 풀어줄 곳은허상의 오야마와 인간 최영의를 동시에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한국의 가족들 뿐이었습니다.그리고 최영의가 죽기 2년전  이케부쿠로의 한국 냉면집에서 제자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최영의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한명의 인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도 나에겐 살아가기 힘든 나라였어.
한국에 돌아가면 나한테 싫은 소리들을 하고,
일본에선 한국인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 받아.
하지만 미국이나 해외에 나갈땐 공수가 마스 오야마로 통용돼.
그래서 나는 미국이 좋았습니다.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한국이 막연히 그리워지는 일이 많아집니다.
코지마 언제 같이 한국에 가자

/1992년(세상을 뜨기 2년전)이케부쿠로에 위치한
자신의 비밀 단골가게 한국 냉면집에서 제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만화와 영화속의 최영의 최배달은 무적의 무도가이자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불패의 승부사이지만 그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 나라 잃은 백성으로 타국인 일본땅에서 조센징이라고 무시받고 아파하던 시대의 청춘이었으며 한국에는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일본에는 평생을 수련해온 극진 카라테를 두고 이중국적의 시대적 환경 속에 남몰래 아파했던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극강의 무술인으로 자리잡았던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하지만 그는 어쩌면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한 내 아버지의 자화상일지도 모를 일입니다.사랑하는 아버지의 고단한 손과 발을 어루만지며 오늘은 "사랑합니다..아버지"라고 불러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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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2021·2022 이정후_전 세계 유일무이 부자 타격왕과 리그 MVP 등극으로 날아오르다  (0) 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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