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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④프로레슬러,복서와의 대결과 승리를 가져온 미국 원정길의 숨겨진 진실

by 마음heart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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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프로레슬러,복서와의 대결과 승리를 가져온 미국 원정길의 숨겨진 진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



최영의는 이소룡과 더불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무도가의 범주에 들어있습니다.현대 미디어의 헤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최영의나 이소룡은 얼핏 비슷하지만 최영의가 자신의 실력과 무술세계를 바탕으로 아주 약간의 도움(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공수도 바보일대 속 오야마의 세계관 창조)을 바탕으로 극진 카라테를 융성시키는데 일조했다면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을 영화에 적극 차용하면서 팬들의 판타지를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며 이소룡이란 개인과 그 자신의 무술을 세계에 각인시킵니다.최영의는 만화라는 매체로 일본 전역에 오야마 판타지를 일으켰다면 이소룡은 영화로 세계에 브루스 리 판타지 광풍을 불러일으킵니다.이소룡을 무술가로 폄훼하는 이들의 경우 대부분 이소룡의 적응 체중과 파워를  문제 삼지만 이소룡은 실전 무술을 추구한 인물로,실전에서 체중은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체중이 승패를 온전히 좌우하진 않습니다.K-1 시합에서 70~80kg대의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이 100kg이 넘는 마이티 모를 하이킥 한방으로 KO시키는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하기도 합니다.규칙이 정해졌는 시합에서조차 이런 이변이 벌어지는 것은 스피드는 충분히 상대를 넉아웃시킬 수 있는 파워를 발휘한다는 점입니다.인터넷상에서 이소룡과 최배달의 대결로 설왕설래,많은 말들이 많고 최배달이 신장 175cm에 85kg대라면 이소룡은 170cm에 61kg 정도로 분명 둘의 체급 차이는 존재합니다.일반인과 이소룡의 싸움이라면 무술로 단련된 이소룡의 승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패의 승부사로 유명한 최배달 최영의이기 때문에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최영의 역시 강력한 한방의 극진 카라테 이미지에 가려져 있을 뿐 결코 스피드가 헤비급처럼 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강력한 일발필도의 한방은 테크닉을 중요치 않을 뿐 스피드가 이소룡보다 뒤떨어진다 보긴 힘들기 때문입니다.흔히 무술에서 상대를 한방에 보낼 수 있는 스피드는 순간 스피드로 최영의처럼 강한 피지컬에 스피드까지 보장되면 맞서 싸우는 상대방은 곤혼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헤비급 선수 마이티 모를 하이킥 한방으로 넉다운 시킨 카오클로이

사실 무도가로써 이소룡이나 최영의는 모두 훌륭한 정신에 끊임없는 신체적 단련을 화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이소룡의 경우 33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모든 유산은 영화상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것이 미완성의 단계이지만 최영의의 경우 72년이라는 생애동안 무술계에 미친 영향력은 이소룡 그 이상입니다.미디어로 인한 단기적인 파급력은 과거에도,현재나 미래에도 이소룡만한 인물이 나오기 힘들겠지만 최영의 역시 자신의 전 생애를 극진 카라테 보급에 힘쓰며 극진 카라테를 세계적인 무술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한 20세기 무술인에 올려 놓았다는 것입니다.그렇기에 최영의의 극진정신 "머리는 낮게, 눈은 높게, 입은 좁게, 마음은 넓게, 효를 원점으로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극진정신 속에는 최영의가 추구하는 여섯가지의 극진정신인 겸손,이상,지조,포용, 효도, 희생의 정신이 드러나 있습니다.이는 최영의의 자부심과 겸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늘 제자들에게 극진카라테는 최강이며 극진카라테를 수련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했습니다.최영의의 스승 중 한명인 키친  후나코시는 정권쥐기 3년, 서기 3년, 정권지르기 3년을 거쳐야 비로서 카라테를 알 수 있다" 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최영의는 "9년은 커녕 50년이 지나도 난 아직 정권조차 제대로 쥐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서로 정반대의 말처럼 들리지만 이러한 말이 그리 어색하지 않는 것이 이는 '입신의 경지' 라고까지 표현된 최영의의 강함과 달인의 겸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이소룡 역시"나는 세계 제일이라 말하지 않는다.그렇다고 2인자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라는 말을 했는데 앞서 말한 최영의의 자부심과 일맥상통하는 이소룡이 자신의 무술에 대한 자부와 자긍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최영의가 미국 원정길에 오른 이유

최영의는 맨손으로 황소와 50차례 이상 싸워 소의 뿔을 잘랐고 그중 4마리를 즉사시켰습니다.인간의 힘으로 동물을 제압한다는 것,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동물을 힘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며 신화나 전설 속 용사들에게서나 듣던 무용담인데 20세기 일본 열도에서 소와 싸워 이긴 무술인이 한국인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가슴 깊숙한 곳에 전해져오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그렇다면 최영의 이외에도 맨손으로 소를 때려잡은 사람이 있을까? 물론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유명한 무도가중에 무용담 한 두가지 없는 무도가는 없습니다.유럽의 누가 소를 단 한방에 때려 눕혔다더라,누구 누구가 곰을 맨손으로 곰을 잡았다더라 하는 썰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서도 최영의의 경우에는 특히 많은 무용담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며 최영의가 맨손으로 소와 싸우던 장면은 기록필름형식으로 존재하며 맥주병의 ㅁ모통 부분을 이권으로 도려내거나 수도로 병목을 격파하는 등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한 데몬스트레이션은풀컨텍스카라보다 더 먼저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최영의의 장기이자 특기였습니다.최영의의 무용담은 너무나 많지만 오늘은 미국 원정에서 복서와 레슬러와의 일전을 왜 치르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최영의의 미국원정의 미스터리와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둬야할 사람이 있습니다.최영의를 미국에 데려간 인물과 그가 최영의를 미국에 데리고 간 진짜 이유입니다.한 조선인 부부는 일제강점기에  오카무라로 성을 바꾸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일본계 미국인으로 미국사회에 정착합니다.그들에게서 태어난 오카무라 카즈오는 자라나 프로레슬러가 되는데 자신의 복잡한 출신배경을 이용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내 반일감정을 이용하여 악역 프로레슬러로 성공하려고 합니다.그가 바로 NWA 전설의 악역레슬러 그레이트 토고입니다.

그레이트 토고는 1950년대 떠오르는 악역 레슬러였지만 당시의 미국인들은 프로레슬링이 쇼(엔터테이먼트)라는 것을 몰랐기에 그의 시합은 늘 반일감정에 분노한 관객들과 폭도들로 인해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술에 취해 흥분한 관객들의 칼에 찔리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그레이트 토고는 미네아폴리스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 프로레슬링계 3대 지역 중 한곳이었던 미네아폴리스 전미 3대 프로모터 중 한명인 토니 스티커가 활동하는 곳이었고 토니 스티커는 슛(실제 싸움)에 강한 레슬러를 중용했는데(친동생 Joe Stecher는 타이틀 방어전에서 실전 승부를 한 마지막 챔피언으로 추정됨)열리는 시합들마다 언제 슛(실제 싸움)이 발생할지 몰라 항상 긴장감이 넘치는 시합이 이어지곤 했습니다.당시레슬러들은 슛(실제싸움)으로 프로모터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워크(각본)로 들어가고는 했는데 쇼맨이었던 그레이트 토고는 레슬러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든든한 보디가드,경기가 워크(각본으로 승패가 정해진 시합)가 아닌 슛(실제 싸움)으로 전환되었을때 자기 대신에 맞짱을 떠줄 강한 폴리스맨(특정선수나 프로모터의 이익을 위해 실전을 치루는 레슬러)이 필요했습니다.

미네아폴리스 레슬링 프로모터 토니 스티커와 친동생 Joe Stecher

그레이트 토고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무역상을 하고있는 오야마(최영의와 같은 이름)에게 자신의 태그팀 파트너로 활동할 레슬러 한명(프로레슬러 전향을 꿈꾸던 엔도 코키치)과 재일한국인 사회에서 자신의 폴리스맨 역할을 해줄 사람을 구해줄 것을 부탁합니다.그레으트 토고의 부탁을 받은 오야마는 당시 재일한국인으로 조영주에게 영향을 받아 마치이일가(家)로 시작해 동성회(토우세이카이.セイ)를 창설하며 세력을 늘려가게 되는 야쿠자 정건영(鄭建永.마치이 하사유키)을 만나게 되고 정건영은 흔쾌히 자신의 보디가드를  오야마에게 소개시켜 줍니다.그 보디가드는 정건영과 같은 건청(재일조선건국촉진총년동맹)출신으로 정건영과 함께 생사를 오가던 의형제,바로 최영의였습니다.

※정건영(鄭建永.1923년 ~ 2002년 9월 14일)재일교포 야쿠자이자 사업가로 우익 야쿠자 조직인 토우세이카이 회장을 역임했으며 통명은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 흔히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통했으며, 키 185cm에 몸무게 100kg의 거한으로도 유명했습니다.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조선건국청년동맹 도쿄본부 부위원장이 되었고 그 무렵 해결사 업체와 흥행회사를 차려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본에 진주해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운영 자금 조달을 위하여 발행된 PD(지금의 수표와 비슷한 지불 수단)를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이 만기 이전에 현금화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일본 국적이 아니었던 정건영은 이를 이용해 PD를 취급하는 회사를 차려 그 시장에 유입된 암달러를 끌어들이며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정건영은 이른바 마치이 일가를 형성했고, 비록 중퇴했지만 대학물은 먹은 이른바 인텔리 야쿠자를 자처하며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정건영은 최영의르 비롯하여 역도산과도 인연이 있었고 국내 인사 중엔 박종규 외에 김종필,정일권,김형욱,윤필용 등 박정희 정권의 실력자들과도 친분 관계를 가졌으며, 그들로부터 자신의 사업에 관한 적지않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물론 정건영이 금전적 지원을 해 준것은 불문가지.

야쿠자 정건영과 최영의

최영의는 당시 건청의 간부였으나 건청 간부직 사퇴 후 경제적으로 빈곤해져 정건영의 문객이자 보디가드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그레이트 토고의 제안을 들은 일본인 아내 후지마키 치야코는 너무나 기뻐하였고 최영의는 그레이트 토고를 만나러 가게 됩니다.그날의 일에 대해 최영의의 일본인 아내 후지마키 치야코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엔도씨(최영의와 함께간 레슬러를 꿈꾼 유도선수)가 있잖아..
맛상(최영의)의 아내는 이상해..라고,남편이 외국에 가버리는데 어째서 그렇게 싱글벙글 하고 있는거야..라고,
이상하지 않아?있는거 아냐.누군가(남자)?라고 얘기를 들었대요.

그게 그러니까..남자의 사회에선 그런 농담이 있을진 모르지만,
나는,에..이상한 소리하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치야코 그렇게 싱글벙글 했어?"라는 거예요.그래서 '기뻐서"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나는 감격해서 기뻤다고,그랬더니 얼굴색이 살짝 바뀌는거에요.
그래도 나는 이상하다고
"자신이 정한 사람이 미국에 가는거에요.당신
미국이에요 당신!일본이 아니라고요..선택받아서 가는거 아니에요?라고
이건 아내로써 최고의 영예이기도 하고 오야마가의 명예이기도 하다고,
정말 당시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저는 찰팥밥 지어서 크게 난리 피웠을거에요.."라고 하니까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그런 의미도 있구나"라고

/아내 후지마키 치야코가 미국 원정길에 오르는 최영의와의 대화내용
"실은 토고선생은 한국인이고 그 대리인도 한국인,마치이(정건영)도 한국인,
그런 라인 안에서 내가 경호원으로서 특별히 뽑혔던 겁니다"

"토고가 자신의 보디가드는 아니어도,
어쨌든 강렬하게 어필 할 수 있는 인간을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이 좋다고
그런 이유로(최영의는)발탁되었어"

최영의와 엔도 코키치
최영의의 첫번째 카라테 스승 조영주와 김치순

사실 이 이야기는 최영의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의 제자들만 아는 이야기였습니다.그리고 이소식을 들은 최영의의 첫번째 스승 조영주는 최영의를 고주류(강유류,剛柔流 ) 카라테도장이 아닌,한청본부(재일한국청년동맹, 在日韓國靑年同盟) 무도장으로 부릅니다.

"영의는 프로레슬링을 하러 미국에 간것은 아니지만 토고 옆에 붙는 역할도 있었으니까요.
한 두번은 반드시 실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그때를 위해 저는 철저하게 눈찌르기와 금적(낭심)차기를 연습시켰죠."

/조영주가 미국으로 떠나기전 최영의를 훈련 시키며

"결국 최영의씨는 돈벌이를 위해 그레이트 토고에게 이용당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영의씨도 미국에서 한건 올리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영주)선생도 최영의씨의 미국행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프로레슬러와 진검승부를 할 때를 위해 눈찌르기와 같은 기술들이랑,
연무로 보여줄 맥주병(목)자르기랑 동전구부리기를 열심히 최영의씨에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김치순


"빕을 먹지 못하니까 갔던거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으면 안갔어요.
뭐,그런거죠.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잔뜩 있었으니까....

아니,그게 전부 크잖아.
나는 170,175cm 정도 되죠.그리고 80kg밖에 안나가죠.엔도는 나보다 15cm 크지만,
그래도 그쪽에 가니 역도산 정도 되는 애들이 굴러다니는거야.
190cm, 2m 되는 애들 그리고 200kg 되는 애들이 얼마나 있었다구.

확실히 난 미국에 가서 프로레슬링이랑 마주해서
프로레슬링에 무적의 카라테의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그것에는 큰 이유가 있어요.
그건 카라테라는 걸 몰랐으니까.미국애들이,
지금이랑 비교하면 그건 아니야.."

/미국원정길을 떠난 이유에 대한 최영의 인터뷰 중

그렇게 최영의는 그레이트 토고의 보디가드이자 폴리스맨으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고 최영의하면 빼놓을 수 없는 미국 원정의 전설을 써내려가게 됩니다.최영의는 미국 원정길에서 가장 강한 상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 질문에 "타무 라이스(톰 라이스)라는 복서 겸 프로레슬러였다고 대답하기도 합니다.아마 만화 등에서 익히 들어온 이름일 것입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거짓말이라 의심받은 최영의의 미국 복서,레슬러와의 대결

최영의는 실전 카라테 극진 카라테를 완성시키기 위해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장깨기를 하고 소뿔을 꺽었으며 미국에서 많은 프로레슬러,복서들과의 시합을 통해 지상 최강의 카라테를 완성하기에 이릅니다.극진회관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극진회관은 전세계 1,200만명의 수련생을 둔 대형단체로 성장해 나갑니다.그렇게 커나가는 극진 카라테에 대한 시기와 비난,반발 등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1994년 최영의(최배달)총재가 세상을 뜨고 인터넷 보급,발달이 가속화되면서 최영의 총재의 일대기나 무용담 등에 의문을 품고 입증 자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본의 프로레슬링 팬들이 있었는데 최영의와 함께 미국에 함께간 엔도 코키치가 한 잡지 인터뷰(1995년)에서의 발언이 이 싸움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야마(최영의)군은 어디까지나 카라테의 데몬스트레이션으로 갔어!
(중략)....
시합같은걸 누구랑 했어?
정말로 오야마군이 누군가와 시합했다는 것을 누군가 입증해 보세요.
프로레슬러를 쓰러트렸다 어쩐다 오버하고 있는데 그거야말로 프로레슬러를 모욕하는 거라고"

/엔도 코키치,한 잡지 인터부 중

최영의와 엔도 코키치
야스다 에이지와 카토 시게오

엔도 코키치의 이 발언은 최영의의 명성에 금을 내기 시작했고 몇몇 격투기 관계자와 극진 내부에서도 야스다 에이지(원조 싸움 10단,미카즈키게리(초승달차기)의 원형 삼각차기의 창시자),카토 시게오(극진회관 2대관장 마츠이 쇼케이(문장규),전 k-1 챔피언 마사토의 스승) 등이 최영의가 미국에서 프로레슬러와 싸우는 사진을 봤다고는 했지만(8미리 영상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음)입증할 방법은 없었습니다.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일본 프로 레슬링 관계자들이 엔도를 비판하며 하나,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엔도는 최영의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공수바보일대에서 사이드킥처럼 그려졌었고 수없이 최영의와 관련된 취재에 시달렸었기 때문에 인터뷰에 개인적인 원한이 담겨 있다는 점,무엇보다 예전에 엔도는 자신들과의 인터뷰에서 최영의가 미국의 프로레슬러들과 시합을 했으며 상대 레슬러 이름까지 거론해놓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그들은 최영의가 프로레슬러들과 시합 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고,그리하여 코지마 카즈시(주식회사 몽현사 대표,월간 공수도,월간무도공수도 전 편집장),코이즈미 에츠지(프로레슬링 고고학자라고 불리는 프로레슬링 전문가),사쿠라이 야스오(프로레슬링 평론가,전 도쿄스포츠 기자,이사 편집국장),나가레 토모미(본명;미야모토 코지,프로 레슬링 연구가 겸 역사가),미야타 레오(격투기사 연구가)등의 진실을 쫒는 추격전이 벌어집니다.그리고 최영의가 사망하고 12년이 지난 2006년에 발간된 "다시 쓰여진 최영의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습니다.그들은 최영의가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름 Mas togo의 이름이 실린 기사들을 수집하는데 성공했고 당시의 NWA와 산하 마이너 프로레슬링 시합기록+(그레이트 토고의 시합기록)신문기사,그리고 최영의가 미국에 갔을 당시 아내 치야코와 그의 스승 조영주,신문사 마이니치와 방총일보에 보냈던 편지,최영의가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해(1953년)실린 주간 산케이에 실린 특집기사(제일 과장이 없을 것으로 추정)등을 모았고 그것들을 통해 알게된 최영의의 실제 미국 원정기간은 최영의를 다룬 미디어에서 묘사된(만화나 대필 자서전)11개월이 아닌,1952년 3월29일 하네다 국제 공항을 출발하여 1952년 9월16일 요코하마 공항에 도착하는 약 반년 정도되는 기간이었습니다.

2006년에 발간된 "다시 쓰여진 최영의의 역사"는 최영의의 미국 무용담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최영의가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름 Mas togo의 이름이 실린 기사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12년만에 사실로 밝혀진 레슬러와의 대결

●하네다공항 오후 2시 출발행 팬아메리카항공 프레지던트호 탑승-3월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역도산과 만남-3월31일

●샌프란시스코(4월2일),로스앤젤레스(4월3일)를 거쳐 시카고 도차그그레이트 토고와 만남-4월4일

●오늘밤 여기에서(미네아폴리스)카라테연무를 하게 되었습니다만,매일(하는)연습으로 손을 다쳐버려서
오늘밤은 출장을 중지하고 다음주에 출장하기로 했습니다.다음 주는 TV출연도 있고 전미를 돌게됩니다.
...중략...

●캐나다에 갔다가 다음주 다시 여기로 돌아옵니다.4월22일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아내 치야코에게
"조선생님 5월9일 디랜드(아이오와주 데모인의 교외도시)에서 연일 시합이었고,어제도 이겼습니다.
내일 아침 시카고로 돌아갑니다.5월9일 아이오와 데모인 -스승 조영주에게

●캐나다여행(일)을 무사히 끝내고,다시 시카고로 돌아왔습니다.지금까지 인디아나주를 시작으로
미시건,위스콘(위스콘신으로 추정),미네소타,아이오와,일리노이의 각주를 돌며
카라테의 기술을 공개(연무)했습니다.-방총일보에

●나 지금 TV출연을 끝내고 막 도착했어요.....중략....
내일 오후 시카고를 출발해 자동차로 40시간 걸려 플로리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오늘밤은 무리했는지 손목이 파랗게 부어올라 지끈지끈 아파 아마 10일간은 허비해야겠네요.
연습도 시합도 공개(연무)도! 5월13일 시카고-아내 치야코에게

●오늘 6월2일 이번달로 계약이 끝나(그레이트 토고와의)아마 다음달 초에 일본으로 출발할 거 같아
...중략...
토고선생,하네다씨(매니저),엔도군(엔도 코키치)넷이서 그날(최영의의 생일 5월4일)작은 파티를 해줄거 같아요.
토고선생은 뭔가 선물을 주실거래 .6월2일-아내 치야코에게

●여기는 아이오와주의 칼제리(북부의 찰스시티로추정)라는 인구 2만명의 작은 시골마을,
오늘밤은 시합한 것 중에서 가장 지쳤다고 느꼈어..중략...내일 또 이 마을에서 80리는 떨어진 곳에서 시합해!
6월29일 아이오와 팔스시티 -아내 치야코에게

●유타주에 30일,1일,2일 이렇게 3일간 묵고,3일째 밤에 솔트레이크시를 떠나,광활한 애리조나의 평야를 지나,
네바다주에 들어가 캘리포니아까지 왔습니다.지금 편지를 쓰는건 로스앤젤레스시의
토고선생의 자택에 묵고 이어서에요. 7월4일 -아내 치야코에게

●오늘 엔도군은 먼저 하와이로 떠났습니다.이번달 말에 하와이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키무라 선생(키무라 마사히코)도 로스엔젤레스에서 만났는데 하와이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먼저 떠났습니다. 7월 15일 -아내 치야코에게

●하와이에 도착 -7월 22일

●키무라 마사히코와 약 10일간 각지를 순회,하와이 거주 한국인 커뮤니티 :동지회"주최의 연무회에 참가.
하와이 거주 한국인들과 따뜻한 휴식을 갖는다.
아메리칸 프레지던트 라인즈사의 클리블랜드호 탑승 하와이에서 출발 -9월7일

●요코하마 공항에 도착 =9월16일


/최영의가 아내 치야코와 스승 조영주에게 보낸 편지 속 6개월간의 미국원정 내용 중

사쿠라이 야스오(프로레슬링 평론가)가 밝힌 프로레슬러 톰 라이스 와 최영의의 대결 비화

우선 프로레슬링 팬덤(2ch 등)의 본격적인 반감을 사게 된 톰 라이스와의 시합부터 살펴보면,시작은 나가레 토모미(프로레슬링 연구가 겸 역사가)가 직접 톰 라이스를 인터뷰한 내용으로 "저는 톰 라이스 본인을 자주 만났어요.저는 오야마(최영의)씨와의 시합에 대해서 몇번이나 질문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시종,"처음 들어봐,그런 이야기는""모른다"고 말했습니다.그리고 당시 최영의의 발자취와 톰 라이스의 시합 기록을 비교해 보면,두 사람의 시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그리고 1950년대 당시의 최영의를 인터뷰했던 사쿠라이 야스오(프로레슬링 평론가)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오야마(최영의)씨가 톰라이스랑 싸웠다"라는 이야기는 제가 오야마씨 본인에게 들었습니다.
하지만,오야마씨는 톰 라이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어떤 레슬러와 시합을 했는지에 대한
저의 질문에 오야마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스콜피언이라는 레슬러랑 싸웠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되묻자 "레드 스클피언이라고 했던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건 레드스콜피언 즉,톰 라이스가 아닐까하고..복서 출신의 털 복숭이라고..
그래서 저는 당신이 싸운건 역도산과 시합을 했던 톰라이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오야마씨는"시합은 이겼지만 프로레슬링 시합(쇼,워크)을 한것 뿐이니까"라고 차갑게 대답했습니다.
(최영의는 쇼 프로레슬링 시합을 한 이야기를 꺼려했다.)

/사쿠라이 야스오 인터뷰 중

최영의는 1953년 상반기에 다시 미국에 가게되고 1개월 정도 머무는데 이때 톰 라이스와 시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격투기사 연구가인 미야타 레오는 "1953년 상반기에 약 1개월 정도,다시 미국에 가셨습니다.시카고에서 소랑 싸운 것도 이때고 단기간이지만,샌프란시스코랑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을 했습니다.이 시기에 센프란시스코에서 톰 라이스랑 싸월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으며 코이즈미 에츠지(프로레슬링 전문가) 역시 "만약 1953년 상반기라면,그 때 톰 라이스는 확실히 샌프란시스코에서 시합하고 있었습니다만,오야마(최영의)씨랑 시합을 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그래도 상대가 톰 라이스였다면,시합은 어디까지나 워크(각본시합,쇼)겠죠."여기에 더해 사쿠라이 야스오는 당시 업계 비밀이었던 사실 하나를 밝히는데,

오야마(최영의)씨를 모델로 한 "공수바보일대"안에 그려진
프로레슬러와의 시합은 거의 오야마씨 본인에게 물어본 것이 아닌,
저와의 이야기(취재)가 토대가 된 것입니다.
즉 오야마씨 본인이 모르는 가공의 에피소드로 가득 채워진 것이
"공수바보일대"인 것입니다.

만화 공수바보일대와 최영의 대필작품 싸움공수, 나의 공수수행

프로 레슬러 톰 라이스에 관한 최영의와의 인터뷰를 친분이 있던 당시 카도 시게오(전 도쿄스포츠신문사 운동부 부장)와 카지와라 잇키(만화작가,내일의 죠,거인의 별,타이거마스크,공수바보일대 작가)에게 이야기하자 아주 흥미로워하고 재밌어 했는데 카도는 얼마뒤(1956년 7월13일)일본에서 이루어진 역도산과 톰 라이스의 시합(역도산의 승리)뒤에 "역도산의 성장과 승부에 자신은 눈을 돌리게 한 것이 있었다....내가 진 이유는 몇년 전 재팬카라테의 마스오야마와의 데스매치에서 패한 디 오리엔트(동양)의 사무라이가 무서워졌다."라는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냈고 후에 카지와라 잇키는 이 가상의 이야기를 논픽션이라고 속여 연재해 최영의 vs 톰 라이스의 실화를 가장한 스토리를 완성하였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만화 공수바보일대를 토대로 대필자서전,국내외 미디어 및 만화 등에서는 말을 맞추듯 톰 라이스와의 에피소드가 정사처럼 등장하기 시작합니다.여기에 더해 프로레슬링 전문가들은 최영의의 시합영상이 남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변호해 주었는데 코이지미 에츠미(프로레슬링고고학자라고 불리는 프로레슬링 전문가),사쿠라이 야스오(프로레슬링 평론가,전 도쿄스포츠 기자,이사 편집국장),나가레 토모미(본명 미야모토 코지,프로레슬링 연구가,역사가)는 당시 프로 레슬링은 복싱 등의 프로스포츠와는 달리 레포트북이 없었고 서커스쇼같은 볼거리 취급을 받았기에 NWA같은 일류선수들이 아니라면 공식레코드를 남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심지어 그레이트 토고의 시합기록조차 자기네들이 미국 프로레슬링 매니아들에게 부탁하여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정식레코드로 남기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문할 수도 있는 것이 같이 시기 활동했던 역도산과 기무라 마사히코의 시합영상이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역도산이나 기무라의 인지도와 최영의의 인지도는 비교할수조차 없으며 역도산과 기무라가 활동하던 지역이 일본계동양인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렇다면 최영의가 이야기한(주병진쇼에서도 얘기함)이종 격투기 시합은 도대체 어디서 한 것일까?최영의는 그레이트 토고의 시합 일정이 비어있을때도(+토고와의 계약 종료 후)아내 치야코와 스승 조영주,신문사 등에 보낸 편지들에서 시합을 했다고 적었는데 프로레슬링 관계자들은 당시 미국에서 열리던 AT(Athletic Show)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의는 아메리카에서 몇번이고 편지로 활약을 알려왔다.-조영주

조선생님 5월9일 디랜드(아이오와주 데모인의 교외도시)에서 연일 시합이었고,어제도 이겼습니다.
내일 아침 시카고로 돌아갑니다.5월9일 아이오와 데모인 -스승 조영주에게

여기는 아이오와주의 칼제리(북부의 찰스시티로추정)라는 인구 2만명의 작은 시골마을,
오늘밤은 시합한 것 중에서 가장 지쳤다고 느꼈어..중략...내일 또 이 마을에서 80리는 떨어진 곳에서 시합해!
6월29일 아이오와 팔스시티 -아내 치야코에게

●캐나다여행(일)을 무사히 끝내고,다시 시카고로 돌아왔습니다.지금까지 인디아나주를 시작으로
미시건,위스콘(위스콘신으로 추정),미네소타,아이오와,일리노이의 각주를 돌며
카라테의 기술을 공개(연무)했습니다.-방총일보에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AT(Athletic Show) 카니발 흥행쇼와 브라질리언 주짓수 미츠 야마시타의 증언

AT(Athletic Show)쇼는 19세기 중반 미국 서부개척시대부터 행해지던 카니발 흥행쇼로  AT쇼의 주된 볼거리는 서커스와 프로레슬링,그리고 프로복서VS프로레슬러 혹은 유도가등과의 이종격투기 시합이었습니다.당시 메이저의 NWA를 제외한 다른 프로레슬러들의 무대는 AT쇼 중심의 서커스 무대였고 최영의가 자신의 저서 등에 소개한 프로레슬러들 사진이 대부분  AT쇼 등의 서커스 무대에서 활동했던 프로레슬러였기 때문에 최영의가  AT 등의 서커스카니발등에 나간것은 확실하다고 보았고 이 이야기는 미디어 등에 알려진 것과는 달랐지만 최영의의 주변인물들과 최영의 본인의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미국에서의 행적과 일치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서커스에 나갔습니다.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서기나
자연석 격파같은게 대호평이었어.
콜라나맥주병을 수도로 베는 것도
나는 서커스에서 인기를 얻었다.
프로레슬러나 권투선수와의 경기도
대부분 서커스에서 했다.물론 전승이다.
서커스경기는프로레슬링처럼
승부조작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의 독무대였다.

그리고 극진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에게서 최영의가 복서와 싸우는 이종 격투기 시합을 봤다는 증언이 나옵니다.나카무라 요리나가는 일본 1세대 종합격투가로 슈토(실전 프로레슬링에서 시작한 종합격투기)체육관 지도사범이었던 그는 브루스 리(이소룡)에 대한 동경으로 절권도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납니다.거기에서 그는 댄 이노산트를 만나 절권도를 일본에 가져오게 되고(1992년 IUMA 일본진번국술관 설립,현재까지 이노산트아카데리에서 지도 중),90년대 미국에서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힉슨 그레이시(450전 무패)를 포함,다양한 무도가 등을 만나게 됩니다.그리고 그는 힉슨의 친형 호리온 그레이시(1993년 UFC를 창설)의 아카데미 도장에서 보조 지도원을 하고있는 동양계 미국인 미츠 야마시타(mits yamashita)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를 회상한 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이소룡의 절권도 마지막 제자 댄 이노산토와 나카무라 요리나가
450전 무패 힉슨 그레이시와 친형 호리온 그레이시
(좌)나카무라 요리나가 ,(가운데)미츠 야마시타,(우)오야마 시게루(한국명 조일삼)

나카무라 요리나가는 미츠 야마시타의 증언을 토대로 최영의가 미국에서 복서 및 프로레슬러와 싸웠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데,

"40여년전 중학생때 미츠 야마시타씨가 TV에서 봤대요.오야마(최영의)총재는
도복 차림으로 링에 올랐고 상대는 몸집이 큰 복서,오야마 총재는 맨손으로 묵직하게
허리를 숙여 자세를 취하고,풋워크는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주위를 장신의 숸투선수가 잽을 내면서 풋워트를 사용해 도는 전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복서가 상당히 빠른 펀치를 내서,오야마 총재는 버틴채 틈을 엿보는 전개가 계속 되었는데
그 가운데 좀처럼 뛰어들 수가 없어 오야마 총재는 꽤나 짜증난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오야마 총재는 기다림에 지친듯 상대를 향해 점프,
이것은 앞으로 날카롭게 뛰어든 것을 외국인(미츠 야마시타 지칭)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뛰어들자마자 최영의 총재는 권투선수의 바디에 무려 관수를 일겨그명치에 작렬해
단 한방에 권투선수가 KO되었다고 합니다.
야마시타씨는 그레이시 주짓수를 하고있어서
가라데나 타격계 격투기는 잘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그 경기만큼은 대단했다,그것은 대단했다"라고
Mas Oyama(최영의의 영어이름)에 관해서는
격이 다른 존재로서 존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갓핸드가 실제로 싸웠을때의 모습을 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신 것 같아요.
아마시타 씨는 격투기의 전문가로,입장도 있는 인물이며,게다가 입장으로서는
카라테의 라이벌(당시 미국의 무술도장은 태권도,가라데,주짓수 3파전)로 있는 인물.
그런 그가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받아 들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카무라 요리나가가 전한 미츠 야마시타의 증언에 대해 오야마 시게루(한국명 조일삼)은"오야마(최영의)총재는 현역 시절의 관수는 거의 눈을 노렸었어.우중단 역찌르기(바디 스트레이트)가 어마어마하게 강하고,그것을 맞고 서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의 위력이었기 때문에 아마 정권이었겠지"(피고있던 손을 쥐면서 찌르는 정권은 미국인에겐 관수로 보일 수도 있다.)

▩극진카라테를 창시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오야마 마스다츠 최배달_최영의의 짧은 영어실력과 왜곡된 기억이 만들어낸 가짜 레슬러 파문의 진실

최영의가 일본에 돌아온 1년 뒤인 1953년 주간산케의 특집기사에서 최영의가 밝힌 본인이 싸운 프로레슬러 중 이름을 기억하는건 2명이었습니다.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상금을 걸고 시합한 죠지 배커와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싸운 유도 챔피언 출신의 딕 리르(몇몇 기사,자서전 등에는 딕 레리라고 표기하기도 함)였습니다.

링에 오른 그에 대해,나는 무심코 그의 힘과 기술을 오산했다.
지금까지 싸운 상대는 너나 할 것 없이 덩치만 컸지만 조지 베커는 나와 비슷비슷한 체격이다.
이 남자도 기껏해야 1,2분 안에 쓰러트릴 수 있다고 방심했다.
고으그의 출발은 대단히 빨라 탁,탁,째빨리 나의 왼쪽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펀치를 넣어 왔다.
이것이 멋지게 나의 왼쪽 턱에 작렬함과 동시에 나의 몸은 링 밖으로 획 날아갔다.
서서히 일어났지만 링에는 그 조지 베커가 호시탐탐 내가 링의 가장자리에
손을 대기를 기다리고 있다.그 생각대로 뛰어들면 결국 내 생명의 등불은 꺼져버릴게 분명,
적의 허를 찌르고 그의 배면에서 링에 뛰어오름과 동시에
등 앞에서 주특기의 (정권)찌르기를 한방 그가 이쪽으로 향하는 순간
몸이 무너지는 것을 노려 오른 무릎으로 그의 고환을 걷어찼다.
......중략.....

여기서 최영의가 밝힌 죠지 베커와의 시합내용은 우리에게 낯이 익습니다.최영의와 죠지 베커(George Becker)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과 죠지 베케의 프로모터 짐 크로켓(James Allen Crockett Sr.-Jr.는 NWA의 전 회장)과 단체 흥행에 참가했다는 기사는 발견되었지만 이 시합에 대한 완벽한 입증 자료는 나오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또한명의 레슬러 딕에 관한 코즈마 카즈시의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카지와라의 동생이자 최영의의 제자였던,극진을 떠난 마키 히사오가 그의 자서전에서 과거 최영의와 싸웠다는 프로레슬러 딕 리르가 실제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하자 최영의가 진지하게 화를 내고 너무나도 억울해하며,이에 반박할 수 있는 책이나 기사를 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하지만 코지마는 거절하였습니다.코지마는 사진을 조사해 보았지만 딕 릴이라며 주간지나 서적에 실린 사진 속의 남자는 루 뉴먼(Lou Newman)이라는 전혀 다른 이름의 프로레슬러였습니다.코지마는 제자로써 최영의를 존경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그 역시 최영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딕 리르는 정말있어.나는 실제로 싸웠으니까...
나는 아메리카에서 몇 명의 프로레슬러랑 싸웠어 이건 진짜야.
근데 아메리카인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진 않으니까,
얘가 누군지 저게 누군지 판단할 수 없어.
신문기사 말이 나와서인데 그런게 있으면 나는 잘 스톡(모으고)하고 있어.
(그런데) 신문에 실리지 않은걸 어쩌겠어.
자료가 없으니까 거짓이다라고 정해버리는건 분통터져!

..중략..

얘가 딕 리르라고 생각해(앨범 사진을 가리키며)

체격이 이런 느낌이었으니까...아마 이거겠지

최영의와 대결한 프로레슬러 죠지 배커와 유도 챔피언 출신의 딕 리르
최영의와 죠지 베커(George Becker)그리고 프로모터 짐 크로켓
카지와라의 동생 마키 히사오와 실존하지 않다고 주장한 딕 리르

최영의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코지마에 대해서 "내 명령을 정면에서 거절한건 아시하라(히데유키)랑 코지마 뿐이야...중략...라고 했지만 그러나 프로레슬링 전문가들 코이즈미 에츠지(프로레슬링 전문가),사쿠라이 야스오(전 도쿄스포츠 기자,이사 편집국장),나가레 토모미(프로레슬링 연구가)등은 이를 흥미롭게 조사하기 시작했고 최영의의 편지,기사 등에서딕 리르,딕 래리 등으로 기억에 따라 이름이 바뀌는 것을 참고하여, 당시 최영의의 영어실력을 놓고 봤을때 이름을 잘못 알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는데 당시 최영의는 일본의 모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당시의 상황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엔도는 나보다 당시 영어가 됐어
틀림없이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가지고 온게
샌드위치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아이스크림 과자였던거야
"이거 아니야"라는 말을 할수가 없는거야
그게 말이 안나와
나도 말 못하고..
땀 흘리면서 참고 참고 보고만 있었으니까..

(전문가들은)D R(또는 L)이니셜이 들어가는 프로레슬러들을 찾아내 그들의 시합기록과 최영의의 발자취(+그레이트토고의 시합기록)가 겹쳐지는 레슬러들을 추려냅니다.그러자 최영의가 딕 리르라고 주장한 루 뉴먼과 굉장히 닮은 체격의 한 인물이 등장했고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맨손 격투기를 지도했으며 유도 미드퍼시픽 챔피언 출신에 14년동안 125경기에 실격(반칙)패한 남자,그의 이름은 딕 레인즈(Dick RANES)였습니다.당시 잡지에서는 그의 이름을 딕 리르라고 표기하기도 했습니다.최영의(경호원+폴리스맨)와 엔도 코키치(태그팀 파트너)를 미국에로 데려간 그레이트 토고의 당시 마케팅 전략은 간단하면서 유치한 것으로 자신들을 친형제인 토고브라더스(첫쨰-그레이트 토고,둘째 코우 토고(엔도 코키치),셋째 마스 토고(최영의,오야마 마츠타츠)라고 관객에게 소개한 후 막내 마스 토고(최영의)가 링위에서 카라테 연무 및 격파 시범,관객에게 망치로 손을 때려보게 하는 퍼포몬스를 선보이고 막내가 이정도로 강한데 형들인 우리는 얼마나 강하겠어?라는 식으로 관객들에게 어필하였고 동시에 상대 레슬러들과 폴리스맨에게 우리들과 약속한대로 시합하지 않으면 내 막내동생과 싸워야한다는 무언의 암시를 주었습니다.

토니 스티카(프로모터)와 잭 뎀프시 그리고 최영의와 잭 뎀프시

그리고 최영의는 그레이트 토고와 함께 미네아폴리스에 진출합니다.미네아폴리스에서 글레이트 토고는 딕 레인즈와 시합이 잡히게 되는데 그 시합의 특별심판은 뎀프시롤로 유명한 전 복싱 헤비급 챔피언 잭 뎀프시였기에 보통의 이벤트는 아니었다고 추측됩니다.이 시합에 대해 최영의의 친형 최영범씨는 회상하기를"아!그리고 언젠가 프로레슬러흫 때려 눕힌 후 곧바로 두박스에 달하는 맥주병목을 손날로 날려버리자 어떤 중년 한명이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당신은 신의 손(God Hand)이요.언젠가 당신의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아들한테 자랑해야겠소"하고 돌아갔다는데 아,글쎄 나중에 알고보니 그 중년이 미국프로복싱의 전설적인 KO왕 잭 뎀프시였다는것이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당시 그레이트 토고와 딕 레인즈는 이 시합이 첫시합이었는데 서로가 첫시합인 레슬러들은 시합 며칠전에 서로 만나 앵글(시합의 스토리)을 조정하는게 당시의 상도였습니다.딕 레인즈는 미네아폴리스의 프로모터 토니 스티커의 폴리스맨이었는데 당시 지역 단체의 폴리스맨들은 팆;역에서 진출해온 프로레슬러 선수가 관객들 앞에서 지역의 메인 레슬러들을 쓰러트릴 수 없게 미리,또는 돌발행동 시 밟아버리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그리하여 이 앵글조정은 양측이 고용한 폴리스맨들의 출돌,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최영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잡지 월간파워공수(1986년 6월호) 인터뷰에서 "그래서 그 딕 리르가 나오게 됐다는 거에요.뭐라냐면 "나는 여기 프로레슬러이면서 이곳의 유도챔피언이다.별것도 아니잖아.이런 잽(Jap)따위"그래서 결국 그 딕 리르랑 싸우게 되었습니다만..."

"나는 원래 토고선생의 경호원으로 고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었거든.
미국에서 가라테를 시연해서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당시 난 먹고사는게 막막해서,어찌됐든 돈이 궁했던거야.
순수하게 카라테를 하고 싶어도 내세울게 없는 환경이었던거야"

이에 대해 스승 조졍주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최영의를 불러 금적(낭심)차기 등 미국 복서 및 레슬러 등과 싸울때의 대비와 연습을 시켰고 김치순은 당시 최영의가 금전적으로 형편이 너무 않좋아서 미국으로 떠난 것이라 증언하기도 합니다.

"검지랑 중지 2개로 그의 얼굴 아래부터 눈을 찔러 올렸다,
"앗"하고 그의 양손이 그의 눈을 가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오른 무릎으로 그의 고환을 꽝 타올림과 거의 동시에
오른 주머ㅓㄱ을 그의 두터운 가슴에 먹였다.(정권)찌르기를 넣었다.
한번 단 한번,그는 반격도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최영의가 싸웠다고 밝힌 날 1952년 5월3일(주간 산케이.1953년 1월18일호
그레이트 토고와 딕 레인즈의 실제시합날짜 1952년 5월7일(미네소타주 로체스터)

딕 레인즈와 잡지 월간파워공수(1986년 6월호)

최영의가 세상을 뜬지 12년후,최영의의 제자들조차 의심히고 믿지 못했던 딕과의 대결은 애석하게도 프로레슬링 전문가들에 의해 진실이었다는 것이 세상에 밝혀지게 됩니다.그런데 최영의는 한국 방송 주병진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결이란 질문에 톰 라이스와의 대결 일화를 말합니다.그럼,최영의는 왜 주병진쇼에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요?여기에는 최영의의 무용담을 만화로 만든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의 무용담을 왜곡시키고 극진회곤조차 최영의 위에서 마음대로 휘두르던,그야말로 극진의 비선실세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최배달 최영의는 불패의 승부사지만 일본에서는 최영의의 제자들조차 그의 무용담에 의심을 품었고 만화가가 극진을 자기 맘대로 휘두려는 등 한국인으로써 말도 못할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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