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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급을 넘나들며 통산 88 KO승을 거둔 링위의 불도저 일본의 권성(拳聖) 호리구치 츠네오 피스톤 호리구치와 식민지 시대 조선의 주먹들

by 마음heart 202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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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급을 넘나들며 통산 88 KO승을 거둔 링위의 불도저 일본의 권성(拳聖) 

호리구치 츠네오 피스톤 호리구치와 식민지 시대 조선의 주먹들



▣일본의 권성(拳聖), 피스톤 호리구치를 이야기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복싱,권투의 역사는 기원전 1500년 전 경으로 거슬러 올라사는데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 시대의 미노스 문명에서부터 권투의 기원이 발견되었고,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의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기원전 4000년경)지역에서 더 일찍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고대의 권투모습은 손목과 손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으로 된 끈으로 팔을 감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후 콜로세움에서 권투를 즐겼던 로마제국의 몰락과 기독교의 전파로 권투는 위험한 행위라며 배척당하게 되며 당시 오락의 지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근대에 이르러 복싱은 불법으로 간주되기도 하였으며, 18세기에 와서야 현대적인 복싱의 룰이 완성되었는데 1786년 퀸즈베리 후작의 이름을 딴 '퀸즈베리 룰'이 제정되었고, 펜싱에서 풋워크를 접목하는 등 과학적인 스포츠로 자리 매기게 됩니다.권투가 과거 금지된 막싸움에서 스포츠로 거듭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미노아 문명의 젊은이들 권투장면. 글러브를 착용한 것이 눈에 띈다.

※퀸즈베리 룰

1.상대방은 패딩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
2.1라운드는 3분 동안 진행되며 1분의 휴식 시간이 있다.
3.손을 사용하는 것 이외의 모든 종류의 공격은 금지.
4.링 플로어에 닿은 권투 선수는 10초 이내에 일어나야만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복싱 산업이 다른 스포츠 산업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고 생활 스포츠로 자리잡았지만 복싱이 산업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면서 복싱 챔피언에게는 막대한 판돈과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복싱은 가장 근본적인 싸움의 형태이자 간단한 룰 때문에 주먹에 자신있는 많은 남자들의 도전대상이었고 사나이들의 로망이 됩니다.우리나라의 경우 1910년경 처음 권투구락부가 결성되었으며 일본보다 뒤늦은 출발이었지만 이후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하기도 합니다.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일본도 수많은 복싱 챔피언을 배출하지만 1945년까지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많은 젊은 복서들이 전쟁에 동원되는데 그런 가운데 훗날 일본의 권성(拳聖)이라는 칭호를 받는 선수가 탄생하니 그가 바로 피스톤 호리구치(본명은 호리구찌 츠네오)이며, 피스톤은 호리구치의 링네임이기도 했습니다.호리구치가 피스톤으로 불린 이유는 전형적인 인파이터로서 끊임없이 대쉬하면서 엔진 기관의 피스톤처럼 양손을 쉬지 않고 내뻗었기 때문입니다.피스톤 호리구치는 1914년 일본 도찌기현 우쯔노미야 태생으로, 오른손잡이 인파이터 스타일의 강타자였습니다.19세 때인 1933년 3월, 와타나베 마사오를 1회 KO로 뉘고 프로에 데뷔하여 1950년 4월까지 186전 145승(88 KO승) 25패 16무를 기록했습니다.통산 88KO승은 일본 역대 최고의 기록이며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으며 KO율도 60%에 달합니다. 피스톤 호리구치는 1950년 4월 오가와 고로와의 마지막 경기를 치른 6개월 뒤에 술에 취해 철로변을 걷다가 열차 사고로 사망하고 맙니다.이때 그의 나이 만 36세였습니다.일본이 낳은 최고의 인파이터 복서이자 일본에서는 겐세이(拳聖)로 높이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권성(拳聖) 피스톤 호리구치_페더급에서 미들급까지 체급을 넘나든 링위의 불도저

피스톤 호리구치는 권성(拳聖)으로 불릴 정도의 천재 복서였는데 1933년 19세에 프로에 데뷔한 이래 호리구치는 25승[16KO] 2무라는 파죽지세의 연승행진을 거듭하여 겨우 1년만인 1934년 12월에 20세의 나이로 고이께 사네가쓰를 물리치고 일본 페더급 타이틀을 획득하기에 이릅니다. 공이 울리면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며 쉴새없이 주먹이 나오는 피스톤 호리구치에게 나가 떨어지지 않는 복서가 드물었으며 KO승이 별로 없던 당시의 복싱에서 놀랄 만한 KO율을 자랑했는데 25승 중 16KO승으로 64%의 KO율을 자랑했으며 당시 무패의 복서이기도 했습니다.하지만 지지않던 무패의 피스톤 호리구치는 1937년 1월 필리핀의 죠 이글에 첫 패배 (12회 판정패)할 때까지 호리구찌의 전적은 49승(35 KO) 6무였는데 이당시 KO율은 71%에 이릅니다.필리핀 죠 이글에 첫 패배를 기록한 호리구치는 잦은 경기로 인한 무리한 스케쥴에 그 원인이 있음을 직감하고 리턴매치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4개월 후에 가졌는데 리턴매치에서 피스톤 호리구치는 죠 이글에 12회 판정으로 설욕하는데 성공합니다.그러나 호리구치의 복싱은 쉴틈 없는 바쁜 나날이었고 진정한 파이팅 머신이었습니다.데뷔전부터 은퇴하던 해까지 거의 한달에 한번 이상 싸웠는데 1년에 무려 20전을 싸운적도 있고 36세로 사망하던 1950년에도 1월부터 4월까지 4개월동안 9전을 싸웠을 정도였습니다. 상대도 가리지 않았는데 원래 57kg 페더급이었던 호리구치는 라이트급(61kg)복서와도 무수하게 자웅을 겨뤘으며, 미들급(72kg) 복서와 싸우기도 했는데 1948년에 34세의 나이로 아라이 쇼기찌를 7회 KO로 눌러 일본 미들급 타이틀 획득하기도 합니다.만약 피스톤 호리구치에 현 시대에 태어나 좀 더 체계적인 관리하에 선수생활 했다면 3체급 석권의 신화도 달성했을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물론 가정이기에 당시 열악한 환경과 선수층에서 피스톤 호리구치만의 전적을 달성한 것일지라도 너무 많은 경기를 단기간에 펼쳐보였기에 피스톤 호리구치의 죽음(기차길 선로에서 술에 취한채 열차에 치여 죽음을 맞은 것부터 술에 취한 것과 펀치 드링크 현상으로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습니다.)역시 그 후유증이 아닌었나 조슴스레 추측해 봅니다.

▣일본의 권성(拳聖) 피스톤 호리구치 VS 식민지 조선의 젊은 주먹들

피스톤 호리구치의 최전성기는 만 23살부터 만 28살인 1937년∼1942년이었는데,이때 호리구찌의 발목을 잡은 복서는 항상 식민지 조선 출신의 복서였습니다.63승 1패 6무라는 화려한 전적의 피스톤 호리구치에게 브레이크를 건 복서는 현해남으로 열일곱에 일본으로 건너가 프로에 입문한 이후 1936년 밴텀급,37년 페더급 챔피언이 됩니다.현해남 최고의 인생 경기는 1939년 5월,일본의 복싱영웅 피스톤 호리구치(통산 전적 186전 145승 88KO 25패 16무)와의  경기였는데 호리구치는 한달에 한번 이상 경기를 할 정도로 타고난 파이터로 첫패배를 당했을 때 그의 전적은 39승 35KO 6무였으며체급도 가리지 않아 페더급 선수임에도 미들급 선수와 싸워 ko승을 거둬 미들급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일본 복싱 역사상 최고라 평가받는 선수였지만 현해남은 당시 63승 1패6무의 최전성기였던 피스톤 호리구치를 영악한 아웃복싱을 구사해 2-1 12회 판정으로 눌러 일본열도를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으며 1937~39년에는 미국으로 진출해 스물한 차례 경기를 치르기도 합니다.피스톤 호리구찌는 현해남에게 당한 패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오하시 쓰에오를 판정으로 누르고 다시 16연승을 거듭해 79승 2패 6무를 기록하다가 1940년 10월에 역시 한국 출신의 보꾸 류신(한국명 불명)에게 통산 3패째를 당하고 말지만 싸움기계인 호리구치는 다시 21 연승가도를 달려 100승 3패 8무를 기록하다가 1942년 7월 또다시 한국 출신의 복서인 공고 이사무에 판정패하여 4패째를 기록하고 맙니다.기막히게도 연승의 끝에 호리구치의 앞을 막은 것은 식민지 조선 출신 복서였습니다.

▦식민지 조선 청년의 울분을 링위에 쏟아부은 젊은 주먹들

일본의 권성(拳聖) 피스톤 호리구치의 길을 막아선 조선의 복서들 외에 당시 식민지 조선의 스포츠는 일제의 통제 속에서도 대중의 열광적 환호와 함께 나름 성장해 갔는데,이중에서도 최고의 빅 카드는 언제나 일본 선수들과의 경기였습니다. 일본과의 스포츠 대결은 복싱을 비롯하여 어떤 종목을 막론하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고는 했는데 일본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민족의 자긍심이 되었고 식민지 조선 백성들은 그 맛에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풀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조선의 스포츠가 일본을 완전히 압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축구와 야구의 경우에는 조선을 방문한 일본팀들과는 대등한 경기를 벌였지만,적지인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밀리기 일쑤였으며 자전거의 엄복동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인들이 데려온 일본 선수들을 곧잘 제쳐버리긴 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승부를 겨룬 적은 없었습니다.마라톤의 손기정이나 남승룡 정도가 조선이던,일본이던 아니면 다른 타국 등을 가리지 않고 일본 선수들을 압도하는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이었으며 그와 더불어 유일한 종목이 바로 복싱이었는데 식민지 조선의 복서들은 한국과 일본 위주로 활동하던 여타 종목들과는 달리 일본선수들을 압도했을 뿐 아니라 상하이,마닐라,콜롬보,하와이는 물론 미국 본토에까지 원정경기를 가서 이름을 떨친 유일한 종목이었습다.1912년 단성사의 주인인 박승필이 유각권투구락부를 출범시켜 유도,씨름과 함께 권투를 선보인 이래 주로 YMCA에서 행해지다가 1928년 제 1회 전조선 권투선수권 대회가 열렸으니,다른종목에 비해서는 정착이 다소 늦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초기엔 권투장갑 끼는 것 외엔 규칙에 대한 개념이 없어 벨트 아래고 위고 그냥 막패는 식이었다고 하며 선수가 링에서 내려와 싸우기도 했고,당연히 패싸움으로도 번져 아수라장이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지만 곧 기량이 일취월장하여 1929년 11월 제2회 일본 가미야마대회에서는 조선 선수들이 출전해 5명의 우승자를 배출해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며 이후 황을수,김창엽,박용진,현해남 등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고, 그중 YMCA 영어과 출신으로 메이지대학에 재학했던 황을수는 1931년에 최초로 필리핀 마닐라로 건너가 원정경기를 갖기도 했습니다.황을수는 1932년엔 마라톤의 김은배,권태하 등과 함께 조선인으로선 최초로 LA올림픽에 출전하게 됩니다.

일본의 권성(拳聖) 호리구치 츠네오(피스톤 호리구치)
조선인 최초의 올림피언 황을수

복싱이 주먹을 쓰는 운동이라 경성의 이른바 주먹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는데 제 1회 대회때는 유명한 수표교 건달 김창엽이 "나도 출전하겠소" 하며 신청을 했는데 건달패로선 당연히 링 위의 선수들이 같잖아 보였는지 부하들까지 몰려와 요란하게 응원하는 가운데 몸집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김창엽이 곱상하게 생긴 김충성과 밴텀급 경기에 나섰지만 아무리 주먹이라해도 복싱이라는 스포츠는 그리 만만한게 아니었습니다. 예상 외로 1라운드를 막상막하로 보낸 김창엽은 2라운드에서 김충성의 주먹에 나가 떨어져 KO패하고, 이를 본 수표교 건달들이 몰려 나와 김충성을 서로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경기장이 아수라장이 됩니다. 결국 이 경기는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고, 김창엽에게는 망신살만 뻗친 일이 되고 말았지만 이후 김창엽은 정식으로 복싱을 배워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복서가 됐고,1932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 10회 극동선수권대회에서는 동양챔피언에 오르기도 합니다.현해남은 피스톤 호리구치의 연승을 깨고 통산 2패째를 안기는 등 조선 복싱의 강함을 알리는데 그중 미국에 최초로 건너가 그곳에서만 51전을 치르고 세계랭킹 6위에까지 오른 조선 청년이 있었으니,그가 바로 복싱의 신으로 불리던 독침 서정권입니다. 1912년 순천 갑부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29년 열일곱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최초의 올림피언 황을수에게 권투를 배웠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서정권은 이듬해 전일본 아마추어선수권 대회 등 3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1931년 열아홉에 프로로 전향합니다.그리고 프로 데뷔 1년 동안 28전 전승의 신화를 만들어내지만 서정권은 일본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193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미국 무대 데뷔후 4연속 KO승을 거두며 일약 밴텀급 세계랭킹 6위까지 오르게 됩니다.서정권이 미국에서 3년만인 1935년 귀국했을 때 식민지 조선은 난리가 났었는데 총독부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라고 차를 내줄 정도였고 동대문에서 열린 귀국 환영경기에선 여운형이 6000여 관중 앞에서 격려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그날의 감격스러움은 당시 한 월간지의 기사 한토막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5척 어린 청년 앞에 전세계의 코끼리 같은 양키들이 피하고,그의 앞에 무릎을 꿇음에 우리들은 그와 피와 산천을 같이 하였음을 영광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중략)..
이리하여 아, 동방에도 우리 반도에는 세계적으로 우러러보는 새로운 영웅 한분이 나타났다."

서정권은 이 경기에서 강적 라슈 조를 4회 TKO로 물리치지만 이후 살인적 스케줄,경기 후유증,도박,그리고 돈만 밝히는 미국 복싱 프로모터들의 착취로 인해 결국 더 이상의 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서정권은 오직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수년간 고군분투하며 세계 최고의 기량과 겨룬 최초의 조선인으로,이광수도 스포오츠열이라는 글에서 서정권을 찬양해 마지 않았습니다. 복싱은 진정으로 조선인들을 미치게 했는데 마라톤에서,자전거경주에서,야구에서 아무리 대단한 선수가 나왔어도 복싱처럼 일본선수를,서양선수를 눈앞에서 합법적으로 두들겨 팬 종목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함성과 함께 "때려라" "죽여라" 가 절로 나왔는데 당시 조선의 미디어가 지금과 같았더라면 박찬호,박지성못지않게 온 국민의 열광적 환호를 받았을 복서였을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출신 복싱의 신 스콜피온 서정권

전라남도 순천 출생의 서정권은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서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복싱의 창시자 와타나베 밑에서 수련하면서 무역학교에 다녔다.1930년 10월 제 5회 전일본선수권대회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고토히로를 1회 TKO로 물리쳤으며, 이를 시작으로 많은 경기에서 연승하였다.특히, 일본의 우상인 라이트급 챔피언 피스톤 후리구치를 4회 KO로 물리쳐버리자 일본의 제일인자라 하였다.이로 인하여 국권 상실하에서 암울한 시기를 지내던 우리민족에게 커다란 기쁨과 감격을 안겨주어,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것과 유사한 성원을 받았다.1931년에 프로로 전향, 같은 해에 당시 전일본 플라이급 챔피언 가시와 우라코로와의 대전에서 1회 KO승의 신기록을 수립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의 무서운 펀치가 전 일본에 알려져 ‘복싱의 신’이라 불렸으며, 그 뒤 적수로 대전할 선수가 없어 고심하던 중 1932년에 프로권투선수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원정을 하게 되었다.원정경기에서 잭카노와 대전하여 TKO로 물리친 뒤 계속 매시합에서 3연속 KO승을 거두어 미국에서도 그의 명성이 드높았다. 1936년에는 세계챔피언인 양도미와 3번에 걸친 경기에서 1승1무1패로 세계 6위에 올랐는데, 이 경기는 무승부처럼 보이지만 적지에서 단신으로 싸운 입장에서 본다면 승리와 다름없다는 당시의 평을 받았다.대전료는 모두 고향으로 보내어 선산과 제각(祭閣)을 마련, 주위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4년 동안의 미국원정을 마치고 귀국, 후진육성과 권투발전에 여생을 보냈다.
서정권(1912년 ~ 1984년)프로데뷔이후 27연승 무패 행진을 이어갔으며 플라이급에서 대적 상대가 없자 밴텀급으로 체그을 올린 후 페더급,라이트급의 선수들과 싸웠다.위 사진은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 서정권의 파이팅 포즈


당시 해외에서 성과를 거둔 복싱선수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배경은 조금 서글픈데 1930년대 조선출신 선수들이 일본,중국,필리핀으로 가서 경기를 치러야 했는데 1940년에는 2차대전이 점점 확전되면서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대부분의 일본인 선수들이 군대에 들어가 일본권투계는 조선출신 선수들의 독무대가 되는 듯했지만, 일본이 곧 복싱 금지령을 내려 42년경부터 젊은 복서들은 다시 떠돌이 복서의 길로 들어서야 했는데 나라를 잃으면 스포츠 선수들마저 고아스포츠의 고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어쨌든 마라톤과 함께 가장 세계적 수준에 근접했던 당시 복싱은 스포츠 세계화의 효시였는데 한국 스포츠사에서 세계화를 논할 때 흔히들 70~80년대의 프로복싱을 그 단초라 이야기 하지만, 그 기반은 이미 일제 강점기에 다져졌다는 것입니다.해방후 올림픽 메달이 가뭄에 나는 콩보다 더 귀할 때 조국에 연이어 메달을 선사한 것도 바로 복싱이였기 때문입니다.다시 피스톤 호리구치 이야기로 돌아와보면,왕성한 싸움꾼이자 복서였던 피스톤 호리구치는 1944년 1월 아끼야마 마사시를 판정으로 누른 후 1년 반의 공백을 가집니다.1946년 5월에 링에 돌아오지만 이때 호리구찌는 32세였고 솜씨도 예전같지 않아 이후 패배가 많아지는데 당시 호리구치는 너무나 호전적인 복싱 스타일로 인해 신체적인 대미지가 많이 누적되어 있었으며, 주변에서 은퇴를 권유했으나 복싱을 신앙처럼 생각하는 사나이였기에 은퇴 권고를 듣지 않았습니다.하지만 호리구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부진의 늪에 빠져 마지막 3년 간의 전적은 13승 17패 3무의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고 맙니다.이런 피스톤 호리구치는 한국인,당시 조선인들과 인연이 있었는데 최배달로 유명한 무술가 최영의가 당시 호리구치의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우기도 하는데 최영의의 일화 중 주먹으로 드럼통을 가격하는데 모두 찌그러뜨릴 뿐 자신처럼 드럼통을 뚫어버리진 못했는데 유일하게 드럼통을 뚫어버린 사람이 바로 피스톤 호리구치였다고 합니다.오직 주먹 하나만으로 살아온 사나이 호리구치는 왕성한 파이팅과 하드 펀치, 끊임없는 대전, 복싱을 향한 사랑과 열정으로 인해 "권성(拳聖)"으로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일본 최초의 세계 챔피언은 시라이 요시오이지만 대부분의 일본 복싱 전문가들은 피스톤 호리구치를 일본 최초의 복싱 영웅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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