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에서 중국의 여류화가가 된 판위량과 판찬화의 화혼/
조건없는 사랑
기생에서 최초의 여류화가가 되기까지
예전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에 관한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었죠.예전 장이모 감독이 만든 "화혼"을 통해 처음으로 중국 여류화가 판위량(원래 이름은 장취량)을 접했는데 서프라이즈를 통해 다시 그녀를 보면서 포스팅의 욕구가,세상을 살면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지는 몇가지 일들이 있는데 헤어진 연인과의 사이를 다시 되돌리는 것과 태고난 가난같은 것은 숙명처럼 대부분 사람들을 절망속에 이끌기도 하죠.나혜석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당시의 시대에서 가장 최신 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었지만 너무 앞선 교육탓에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박제되어간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죠..중국의 나헤석과도 같은 존재인 판위량은 그러나 여류화가로써는 더욱 크나큰 성공을 거둡니다.판위량(1895~1977)의 성공에는 그녀의 재능과 노력이 분명히 큰 작용을 하였지만 몸을 파는 창기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가 되기까지는 헌신적으로 판위량을 외조한 남자 판찬화가 있었기에 가능했었습니다.요새 드라마중에 "사랑을 믿어요"를 가끔 보는데 극중에서 남편 이재룡이 아내 박주미를 몇년간 유학보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드라마 같은 설정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판찬화는 그림에 소질을 보이는 아내 판위량을 위해 그 현재보다 더 인식 자체가 부족했던 시절에 유학을 보내줍니다.판위량의 재능위에 남편이 보내준 무한 신뢰와 사랑,믿음이 없었다면 중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 판위량은 일개 창기로써 홍등가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사랑조차 조건을 따지고 재며 그것이 영리하고 지혜로운 것이라 믿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이 둘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과 생각꺼리를 안겨 줄 것이라 믿으며 판위량과 판찬위의 조건 없고 무조건적인 사랑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죠.
불행한 운명에서 평생의 그리움을 만나다
판위량의 어린 날들은 불행의 연속이었다.첫돌도 되기전에 부친을 여의었고 두살때엔 유일한 형제 완반을 잃었다.설상가상 여덟 살 무렵에는 어머니마저 이승과 하직하여 천애고아가 된 판위량은 외삼촌에 의해 양육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외삼촌의 도박빚으로인해 연화관이라는 곳의 창기로 팔려간 판위량,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열네살이었다.물론 가만히 생각해보면 봉건주의 사회에서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이 빚까지 졌을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공간과 시간만 다를뿐,중국이나 조선이나 대한민국이나 없는 이들은 판위량처럼 어떤 형태로든 팔려가는 신세였다는 것이다.어려운 형편속에서 외삼촌의 빚 때문에 기녀로 팔려간 판위량,그녀의 나이때에는 도리어 자신이 처한 환경의 극랄함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평생 거친 남자들 품에 살아야하는 지옥같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판위량의 첫손님은 그녀의 일생에 수호천사가 되어주는 남자 판찬화였다.당시의 판찬화는 결혼한 유부남으로 판위량이 속한 우후현의 세관 감독 관리로 갓 부임하던 차였다.우후현이라는 곳은 뇌물 수수가 오랜 관습처럼 자리잡던 곳으로 그곳의 상인들은 전임 세관 감독들처럼 갓 부임한 판찬화에게 역시 뇌물과 여자를 제공하며 자신들의 비리를 눈 감아 줄 것이라고 여겼다.유부남이었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판찬화에게 어린 초짜 기생 판위량이 판찬화와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자,그렇다면 중국 최초이자 서양 사회에까지 널리 알려진 판위량의 남자, 판찬화는 어떤 인물이었을까?판찬화는 1883년 둥청 태생으로 판위량보다 12살이 많았다.당시의 중국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런 청나라 말기였으며 판찬화는 자라나며 능욕당하는 조국에 대한 연민과 신문물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품은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판찬화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중 쑨원을 만나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속하게되고 훗날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국민당에 가입하기도 한다.이무렵의 조선이나 중국이나 자유연애가 성행하는데 아직까지 관습의 습속에 매여있던 판찬위의 부모들은 그가 잠시 유학길에서 돌아온 사이 정략결혼을 시키기도한다.판찬위는 열여덟살에 일본 유학을 하여 십여년을 공부한뒤 스물 여뎗살즈음 귀국하는데 그때가 1909년경이었으며 고향에서 가까운 우후현의 세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며 운명적인 사랑 판위량을 이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남자,예술가의 남자가 되다
우후현의 상인들이 뇌물과 여자로 판찬위를 매수하려하지만 판찬위가 굼꾸는 새로운 중국이라는 목표에 있어 그와 같은 구태의연한 관습과 부정부패는 척결해야 할 것들이었다.처음 판찬위는 판위량도 도려 보내려 했으나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연민을 느끼게 된다.거기에다 상인들의 농간으로 판위량이 뇌물로써 보내진 것을 알게 된 판찬위는 도리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함으로 상인들을 아연실색하게 한다.판찬위는 갈 곳 없고 절망뿐인 판위량에게 한줄기 빛처럼 그녀의 인생을 180도 바구어 주는 남자가 되었던 것이다.위태한 중국의 정신을 일깨우고 싶어한 판찬위의 정신은 고스란히 어린 기생 판위량에게 전이되었다.그저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아슬 아슬한 삶의 위치에서 젊고 개혁 의지 강한 판찬위의 두번째 부인(물론 현실적으론 첩이었겠지만)이 된 판위량은 판찬화에게서 새로운 세상과 문물에 대한 가르침과 문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어느날은 판찬화의 친구인 홍야 선생의 작업실을 구경하던 중에 그림에 대해 강렬한 이끌림을 경험하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녀의 숨겨진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판위량이 판찬화를 만남으로써 구원받은 것은 육체적 제약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판찬화로부터 주체적 인간으로써의 자각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끊임 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속의 새로운 학문과 예술에도 눈을 뜨게 된다.판찬화가 판위량을 아내(첩)로 맞이한 것은 그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점차 그녀가 지닌 지식에 대한 갈망과 문화,예술에 대한 의지와 노력에 감동하게 된다.그런 판찬화에 대한 판위량의 사랑 역시 지극하였다.판찬화에 대한 존경과 동경은 그의 아이를 낳고 행복함을 꿈꾸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불임임을 알게된 판위량은 결국 본 부인을 불러들여 아이를 갖게 할 수밖에 없었다.판위량은 여자로써 판찬화에게 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판찬위는 판위량의 재능이 묻히는 것이 안타까웠다.결국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판위량이 상하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에 있는 " 프랑스국립미술학교"로 유학할 수 있게 모든 것을 지원하게 된다.지금같아도 어려운 결정이었을 아내의 유학 문제였으니 당시 첩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던 판위량과 판찬화의 결정이 얼마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을지 짐작하기도 힘들다.그러나 판찬위의 적극적인 지원탓에 판위량은 십여년의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한다.그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등지에서 서양화와 조각을 배운뒤 상해의 상해미전에 초빙되어 서양화주임이 되었으며 졸업한 학교의 교수가 되기도 한다.일개 기생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던 작고 여린 여자아이가 중국 최초의 여류화가라는 화려한 닉네임을 달고 금의환향하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연인의 아름다운 이별
처음 그녀의 행적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만 같았다.중국 예술계는 그녀의 귀국에 촉망받는 여류화가로써 그녀의 입지는 탄탄해 보였다.하지만 전통적인(당시의 중국사회에서)가치관에 의해 그녀의 출신 성분은 늘 공격의 초점이 되었고 자신뿐만 아니라 판찬화까지 곤경에 빠트리기도 하였다.판찬화는 의연하게 아내 판위량을 감싸주었지만 결국 판위량은 중국 생활을 견디지 못한채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사랑하는 남편이자 연인이었던 판찬위를 등 뒤로 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판위량의 영혼은 황폐해질 데로 황폐해졌다.그녀의 이상은 높아질데로 높아졌건만 중국사회는 고루할데로 고루하여 그런 그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런 사회에 절망하고 그리운 사람을 두고 떠나야 했던 판위량,그런 자신과의 고투는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던 것이다.
"내가 사랑한 것은 선생님의 인품이요.예술입니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고생도 달게 받는 그 정신,
/텐수신
지독하게 외롭고 힘든 파리 생활의 버팀목은 열살이나 어린 제자 텐수신,그의 판위량을 향한 마음은 극진 그 자체였지만 판위량은 그런 제자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 들일 수 없었다.지독히도 외로운 파리에서의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존재 텐수신을 연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낯선 타국에서 둘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오누이처럼 죽는 날까지 함께 한다.판위량은 이 후 격동의 세월을 겪은 중국에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판찬화 역시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그녀를 그리워 하지만 그녀의 예술 활동을 염려하여 자신이 임종조차 알리지 못하게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판찬화의 죽음을 일년 후에나 알게된 판찬위는 오열하고만다.자신을 받아들여준 날선 관리 판찬위,하지만 이후 판위량을 믿고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줬던 판찬위는 그녀에게 단 하나의 가족이자 연인이었던 것이다.이후 판위량은 작품활동을 중단한채 두문불출하다 몇년 후에 판찬위의 곁으로 떠나가고만다.이승에서는 함께할 시간도,행복도 많지 않았으나 저승에서는 그 모든 것을 누리기라도 하려는듯이 그녀는 판찬위를 따라가고 말았다.판위량의 작품에는 끊임 없이 나체가 등장한다.조선 후기의 신윤복의 춘화에서도 느껴지듯이 판위량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속박을 나체,누드로 표현하려 하였다.그녀의 작품속 누드는 자유를 향한 끊임 없는 갈망이었으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자 관습과 속박에 대한 반역이었다.
판찬화와 판위량
판찬화는 어리고 나약한 한 소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보지 않고 엄연한 인격체로써 대하며 그녀의 자아 성취에 아낌 없는 사랑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판찬화의 사랑은 마치 부모들의 조건 없는 사랑처럼 무조건적이었다.중국의 공무원으로써 판위량의 출신성분으로 힘겨워 할때도 유일하게 그녀의 편이 되어준 것은 판찬화 뿐이었다.판위량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그녀를 파리로 보내기로 한 것 역시 판찬화의 결정이었다.판위량은 자신의 성을 남편인 판찬화의 성으로 바꿀 정도로 판찬화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하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개척할 의지와 용기가 분명하게 있었다.기생의 신분으로 처음 판찬화를 만났을때 그녀는 분명하게 말한다. 갈곳이 없다고,,그렇게 갈 곳이 없던 판위량은 결국 단 한명의 자기 편을 만들고 인생을 개척해 나간다.
"흙탕물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듯이 아름다운 에술의 혼으로 꽃 핀 판위량에게는 판찬위라는 아른답고 조건조차 없던 사랑이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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