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2012년 김태균
한미일 프로야구 사상 최다 86경기 연속 출루에 빛나는 출루머신
김태균은 야구 명문 천안 북일고 3루수로 1학년부터 팀의 중심타선에 들어간 초고교급 선수였습니다.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WBSC U-18 야구 월드컵을 재패한 황금 세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3학년 시즌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한화 이글스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김태균을 1차 지명, 2000년 7월에 계약금 1억 6천만원을 받고 입단했습니다.2001 시즌 초반엔 1군에 자리가 없어 2군에 머물렀으나 5월에 승격 후 주로 대타로 기용되며 날카로운 타격을 보였고, 곧 대선배 강석천의 3루를 빼앗아 버렸으며 김태균의 놀라운 활약에 고무된 이광환 감독은 김태균을 4번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연소 4번 타자 기록이기도 합니다. 시즌 내내 기복없는 활약을 보여주며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4강에도 올려 놓았으며 준플레이오프에서도 4번으로 출장,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홈런포를 뽑아내며 큰 경기에서도 강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믿었던 송진우 등 베테량들이 부진하며 2패로 스윕당해 광탈했지만, 10대 4번 타자 김태균의 흔들림 없는 활약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습니다.시즌 종료 후 성적은 타율 .335와 20홈런, 이것이 대타 출장을 포함하여 1군 88경기 출장으로 이뤄낸 기록으로 이 압도적인 활약에 준수한 성적으로 풀 타임을 소화한 삼성의 박한이는 김태균에 밀려 신인왕 투표에서 2위에 그치게 됩니다. 데뷔 시즌의 20홈런은 풀 타임 기준으로는 절반을 약간 웃도는 245타수에서 기록된 것으로, 풀타임을 뛸 경우 40홈런을 칠 거포로 다들 기대했으며 비록 3루 수비는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원래 3루수였던 강석천의 수비가 과히 좋지 않았고, 마땅한 대안도 없어서 한동안 주로 3루를 맡았습니다.
전년도의 활약에 등번호를 10번으로 바꾸고 기대감 크게 2002 시즌을 맞이하였으나, 시즌 전 받은 라식 수술 부작용과 더불어 소포모어 징크스로 거하게 말아먹어 모든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시즌이기도 합니다.2001 시즌과 비교해보면 홈런과 득점, 장타율까지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삼진도 100개를 돌파하였으며 0점대 WAR로 시즌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결국 시즌 후 등번호를 다시 52번으로 바꿨는데 이 해 52경기 3루수 출장 후에는 1루수 전업을 하게 돼 이후로는 두 자릿수 이상 3루수 출전이 없었습니다.3년차이던 2003년에는 데뷔 시즌에 버금가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는데 문제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40홈런을 넘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연습생 신화 장종훈의 후계자로 한화의 거포로 기대받던 김태균은 3년차에도 폭발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소포모어 징크스를 떨쳐내고 타율 0.319에 데뷔 첫 30홈런(31홈런) 150안타를 기록하였으며 장타율은 .572로 개인 최고 장타율을 기록하였지만 삼진은 106삼진을 기록하며 개인 최다 삼진을 기록하였고 현재까지 개인 최다 삼진으로 남아있습니다.2004 시즌에는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뒤, 투고타저시대가 찾아옴과 동시에 프로야구의 흥행이 저조했고, 무엇보다도 김태균 본인이 한결같이 괜찮긴 하지만 리그를 씹어먹는 수준은 아닌 정도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대중과 언론의 관심 밖에 있어야만 했으며 또한 이 당시 팀의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그래도 2년 연속 20홈런과 데뷔 첫 100타점을 기록합니다.2005 시즌 포스트 장종훈으로 김태균을 키우던 한화 구단은 2000년대에 들어와 부진하던 장종훈을 은퇴시키기로 결정하고 연습생 신화의 주인공 장종훈이 은퇴하게 되고 김태균에게는 "포스트 장종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게 되었으며 팬들 역시 김태균을 장종훈의 후계자로 여기며 전성기 장종훈 만큼의 임팩트 있는 성적을 기대했었지만 스타일 자체가 너무 달라 장종훈과 같은 임펙트있는 시즌은 보내지 못합니다.2005 시즌 김태균은 안타, 타점, 장타율 각 2위와 타율 3위, 출루율 5위를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경신했습니다. 1루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였으며 이 해에 KBO 올스타전에 출전해 홈런 레이스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거포로서 팬들의 기대치를 더욱 높이기도 했습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덕분에 프로야구가 갑자기 다시 흥행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 한화의 감독은 김인식으로 미디어와 팬들은 한화를 주목할 수 밖에 없었고, 기대에 걸맞게 2006년 준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내게 되지만 하필 이 시기에 김태균은 커리어로우를 기록합니다. 특히 2할9푼대와 13홈런이라는 추락으로 인해 김똑딱이라는 오명을 쓰고 미디어의 차디찬 관심을 받게 되지만 사실 2006년에 김태균은 한화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시즌 중엔 부진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을 했기 때문인데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타격감을 보여 주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MVP까지 차지하는 등 한국시리즈 진출의 1등 공신으로 등극했기 때문입니다.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두 개의 홈런을 쳐 낸 덕에 시즌 종료 후 한화 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지는 않았습니다.2007년 시즌 성적은 사실 따지고 보면 좋은 성적이었긴 했는데, 2007 시즌 자체가 워낙 투고타저의 극을 달렸던 한해였던 탓에 다른 년도, 다른 선수들의 기록과 비교했을 때 그리 대단치 않게 보였다는 점이 문제라는 문제로 김태균은 오랜 기간동안 '포스트 이승엽 내지 포스트 장종훈을 꿈꿔온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습니다. 신인시절 좋은 기억을 갖고있는 팬들에게 김태균이란 타자는 3할 30홈런이 기본으로 요구되는 선수였기 때문입니다.2008년 시즌 남다른 타격감을 선보여 부상에도 불구하고 맹타를 휘둘러, 결국 자신의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인 31홈런을 기록하며 자신과 치열하게 홈런 경쟁을 하던 롯데 자이언츠 카림 가르시아를 제치고 2008 시즌 홈런왕을 차지하는데 데뷔 8년만의 홈런왕 등극으로 데뷔 2번째 골든글러브도 덤으로 수상합니다.2009 시즌 김태균은 두산과의 경기중 포수 최승환과 부딪힌 후 헬멧이 벗겨진 상태로 뒤통수를 땅에 박아서 뇌진탕 후유증으로 부진하다 결국 시즌 말 부활하기는 합니다.작년 성적보다는 못미치더라도 .330 19홈런 62타점을 기록하며 최하위인 팀 클린업에서 활약하였고 FA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갔습니다.
김태균은 2009시즌 종료후, 결국 한화를 떠나 치바 롯데 마린즈와 3년 계약을 맺었는데 본인이 워낙 일본행을 원했던데다가 치바 롯데 마린즈의 신임 감독인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이 우타 거포 보충을 요청하였고, 무엇보다 구단주 신동빈이 직접 데려오라고 지시를 해서 그 덕분에 프론트가 재빨리 움직여 우선 협상이 바로 끝나자마자 계약을 해버렸는데 당시 한화도 심정수의 계약금보다 훨씬 웃도는 70억 ~ 80억이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김태균이 치바 롯데와 계약한 액수는 총 7억엔으로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90억원 정도가 됩니다.일본 진출 첫 시즌인 2010년 시범경기에서는 0.342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희망을 알렸지만 정작 시즌 개막 경기 세이부전에서는 52년만에 4타수 4삼진이란 굴욕을 겪었으며 다음날 호아시 가즈유키의 팜볼에 농락당하여 6연타석 삼진에 이어 1사 1, 2루 득점찬스에서는 병살타. 마지막 타석에서는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되는 등 9타수 0안타 6삼진을 기록합니다.그러나 이후 연속 홈런을 치는 등, 5월이 오자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김태균은 일본 롯데리아 김치태균버거라는 메뉴도 있어서 현지에서의 인기도 상당했지만 치바롯데에는 자기이름걸고 음식내면 부상 혹은 부진이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그리고 일본 올스타에 선발되었는데 같은 시기에 임창용도 올스타에 선발되었지만 임창용과 김태균은 서로 상대 팀으로 홈런레이스에서는 한국인 최초 1위에까지 올랐습니다.하지만 일본에서 맞이한 첫시즌인 2010시즌 김태균의 성적은 타율 0.268에 21홈런 92타점으로 괜찮은 성적(특히 타점은 리그 6위다)으로 보이나 득점권 타율 0.236로 사실상 꼴지에 랭크되어 있고, 병살이 24개로 단연 선두에 랭크되어 있었습니다. 삼진 역시 1위 라쿠텐의 야마사키 타케시에 7개 뒤진 140개로 2위,장타율은 거포형 1루수로서 부족한 .429였으며, 타격의 대표적 세부스탯인 WRC+은 115, WAR은 2.2를 기록하면서 클래식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습니다.200안타를 넘게 때린 니시오카 츠요시와 4할 출루율의 이구치 타다히토가 김태균 앞에서 밥상을 차리는 리그 최고 테이블 세터진의 롯데에서 4번을 치면서 타점이 92개밖에 되지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1루수이면서 실책이 8개나 된 것도 평가를 깎아먹은 요인이 되었습니다.사실 김태균은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는데, 6월까지 18홈런 65타점으로 상당한 성적을 보여줬지만 이후 3달동안 3홈런 27타점에 그치면서 후반기에는 6번으로 타순이 밀리게 되는데 92타점도 오히려 이 시즌의 팀 타선을 생각하면 좀 부족한데 1번타자인 니시오카 츠요시가 일본야구 타석수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공격 기회가 많았던 것이 이 시즌의 지바 롯데였습니다. 4번인 김태균의 앞을 친 3번 타자 이구치의 출루율도 .412였으며 김태균에게 돌아온 만루찬스가 23회나 됐다고 하니 오히려 92타점은 적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김태균은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활약을 했는데 7경기 모두 선발 출장해 29타수 10안타 타율 .345 2타점. 장타는 단 한개도 없었고 팀도 주니치를 상대로 접전끝에 4:2로 이겨 한국에서는 단 한번도 못한 우승의 한을 일본에서 풀었습니다.2011 시즌 이전 해인 2010 시즌보다는 적응한 모습으로 더 나은 성적을 올릴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일본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전력난이 심해지면서 대폭 늘어난 낮경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손목 부상까지 겹치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몇경기 만에 1군에서 사라져 버렸으며 그러던 중 김태균이 부상 장기화와 지진의 여파로 인한 심리적 충격 등을 이유로 치바 롯데구단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FA 자격을 보유하게 됩니다.이때부터 김태균에게는 김도망이라는 별칭이 추가되는데 국내로 복귀하는 김태균을 비난하기 바빴으며 일본언론 역시 김태균을 맹비난했고 이승엽과 2012년 복귀하면서 일본 야구계에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아집니다.그렇게 일본 리그에서 퇴단한 김태균에게 한화는 계약기간 1년에 옵션 없이 순수연봉만으로 15억 계약을 했는데 연봉 15억은 국내 스포츠 선수 사상 최고액으로 계약금 없이 1년 15억이기 때문에 FA로 따지면 4년 60억이라 크게 비싸지 않다는 의견과, 그래도 일본에서 죽 쑤고 왔는데 15억은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2012 시즌 김태균은 복귀했지만 팀이 막장이 되어버린 것과 일본 복귀 때 저지른 만행 탓인지 팬들의 관심은 싸늘했으며 일부 팬들은 김태균의 역대 전적을 고려해볼때 6월 이후 반드시 DTD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해마다 찾아오는 잔부상이 어김없이 또 찾아왔는데 타격 시에 손가락이 울리며 통증이 오는 상황대문에 6월 후반기부터 결장이 잦아졌으며 대타로 출장해보기도 했지만 되려 타율만 갉아먹고 타율이 4할 밑으로 추락합니다.하지만 김태균은 개인 통산 200홈런(역대 18번째)뿐만 아니라 개인 통산 600득점과 2,000루타를 동시에 달성하기도 하지만 이후 체력탓인지 점차 부진하면서 4할에서 한참 떨어진 0.363으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타율 1위와 출루율 1위를 타이틀을 가져갔습니다.2010년 후반 들어 세이버매트릭션들에게 굉장히 재평가받는 시즌인데, WAR과 WRC+ 스탯에서 리그 최정상을 기록했음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2012년의 KBO리그는 00년대 이후 손에 꼽을 투고타저 시즌이었는데 타율 2위 강정호와 약 5푼이상 차이나고 wRC+에서 중시하는 출루 2위 박석민과도 4푼 이상 차이나는 등 세이버 스탯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합니다. 그래서 클래식 스탯을 중시하는 골든글러브는 홈런, 타점왕 박병호에 밀려 차지하지 못했으나 세이버매트릭스 기록으로 따지면 2012년 최고의 타자는 김태균이었습니다.2013 시즌 최종성적은 101경기 .319 110안타 52타점 10홈런 73볼넷 67삼진 1실책 .444(출루율 1위) .475 .920으로 2013시즌 한화 타선이 기대와는 다르게 소총타선이 되어버렸으며 그 책임은 역시나,전반적으로 기대보다 못한, 그것도 스탯관리만 주야장천 한 시즌으로 평가됩니다.2014 시즌은 2008년 커리어 하이에 버금가는 성적을 기록한 해로 개인 통산 최고 타율(0.365)이었지만 201안타를 쳐 .370의 타율을 기록한 서건창때문에 타격왕 달성에는 실패하고 출루왕 타이틀을 가져가는데 만족해야했으며 한국 복귀 이후 최다 홈런(18홈런), 최다 타점(84타점)을 기록했지만 극악의 타고투저 시즌임을 감안한다면 4번 타자로서 뭔가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드는 시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15 시즌 김태균은 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면서 한국 복귀 이후 최다를 기록했지만 전반기의 맹활약에 비해 후반기의 부진이 아쉬웠던 시즌으로 똑딱이는 탈출했으나 타율을 엄청나게 희생했으며 순수 출루율은 상당히 높았지만 괴수용병 에릭 테임즈에 의해 출루율 2위에 그치며 결국 4년 연속 출루왕 도전은 실패했고 OPS 1.00도 지키지 못했습니다.2016 시즌은 2012년이나 2014년 때의 선구안과 정교한 컨택트를 유지하면서 전성기에 버금가는 장타력을 그대로 보여 준 역대급 시즌이었는데 초반 먹튀행각을 보이며 엄청나게 까였지만 5월 초순 이후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결국은 2008년의 커리어하이를 경신하였습니다.김태균은 이해 역대 최연소 3,000루타, 역대 최초 300출루-300루타, 한 시즌 최다출루 (310출루), 역대 3번째 1,000볼넷, 통산 출루율 1위 등 여러 기록을 달성하였으며 단일시즌 기록에서도 타율 0.365, 193안타, 94득점, 136타점, 104볼넷 등, 홈런 부문을 제외하고는 본인의 커리어 사상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물론 홈런 23개도 2009년 이래로 가장 많이 쳐낸 홈런이었습니다.2017 시즌 한미일 프로야구 사상 최다 86경기 연속 출루를 기록하며 출루 커리어하이의 정점을 찍었지만, 이후 부상 이탈이 늘어나면서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습니다.최종성적은 94경기 121안타(2루타 22개) 17홈런 76타점 0.340/ 0.413/ 0.545 (타출장) OPS : 958로 마감했습니다.시즌을 지명타자로 시작했음에도 불구, 햄스트링 부상과 로거김 이후로 갑작스럽게 스윙이 커진 탓인지 옆구리도 터져버렸습니다.
2018 시즌 김태균은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으며, 타격감도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며 팀에 김태균이라는 큰 공백을 남긴 시즌으로 간신히 14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은 달성했으나 13년 연속 100안타 기록은 마감했는데 2017 시즌 86경기 출루 기록 달성 이후 부상이 부쩍 늘었는데 일본 복귀 이후 지속되던 격년제 징크스까지 스스로 깨버립니다.2019 시즌 팀 타자들이 대부분 제 역할 못하는 와중에 3할을 찍긴 했지만, 피지컬이 떨어지고 그로 인하여 눈야구로 볼넷을 얻어내는 능력도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나빠지면서 김태균에게 기대하는 스탯을 찍지 못하는등 노쇠화의 기미를 보이면서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특유의 안타를 만들어내는 능력만큼은 살아있었으나 그거 빼면 안그래도 반발 계수를 조정한 공의 여파로 장타율이 급격하게 줄어서 시즌 홈런을 6개 치는데 그쳤고, 출루율도 .382로 완전히 죽지는 않았으나 전성기 김태균이 타율과 출루율간 갭이 1할을 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쉬운 수준이었습니다.총 127경기 출장 132안타,타율 0.305,6 홈런,62타점을 기록합니다.2020 시즌 FA로 단년 계약을 맺는 등 부활의 의지를 갖고 맞이한 시즌이었지만 저조한 성적을 보이며 아쉬운 모습을 보이다 8월 중순 팔꿈치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으며 10월 21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습니다.총 67경기에 출장 타율 0.219,2 홈런,29타점의 성적을 기록합니다.김태균은 일본 프로야구 2시즌을 제외하고 KBO 리그에서 19년을 활약하며 2015 경치 출장,6900타수 타율 0.320(통산 5위),2,209안타(통산 4위),399개 2루타(5위),311홈런,1,358타점,1024득점,볼넷 1249개(통산 2위),출루율 0.421(통산 3위)를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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