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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2009년 박용택_통산 2천504안타에 빛나는 트윈스의 심장

by 마음heart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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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2009년 박용택

통산 2천504안타에 빛나는 트윈스의 심장



박용택은 LG 트윈스 소속 야구선수로 現 KBS,KBS N SPORTS 해설위원이자 예능 프로 최강야구에 출연 중으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였습니다.데뷔 때부터 주로 좌익수로 출전하였고, 입단 직후 당한 어깨 부상으로 송구에 약점을 보였습니다. 이후 2010년 LG 외야 빅5가 구성되자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하였고, 2011년도 역시 지명타자로 출전이 예정되어 시즌 전 장타자 변신을 선언하며 체력단련에 매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하며 시즌 후 외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후 12시즌부터 15시즌까지 중견수와 좌익수로 출전하다가 16시즌부터 지명타자로 전업합니다. 입단 당시 LG 감독이었던 김성근이 박용택에게 외야에서 하루에 공을 500개 이상 던지게 하는 가혹한 훈련을 시켰고, 그 여파로 어깨가 망가져 공격은 좋으나 수비에서는 줄곧 부진을 나타냈습니다.공식 별명은 구단에서 응모전을 통해 붙여 준 '쿨가이'와 지하철 광고로 인한 '메트로 박'이였으나 2009년 수위타자 관련 사건과 더불어 비판 반 밈 반으로 별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버렸으며, 현재도 김태균에 이은 KBO 별명계의 독보적 아이콘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팀의 암흑기동안 여러차례 산전수전을 겪었음에도 20년 가까이 팀을 꿋꿋하게 지탱해 준 LG 트윈스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데뷔 첫해인 2002년 LG의 마지막 포스트 시즌에서 2013년까지 무려 10년이 넘게 계속된 하위권과 포스트시즌 복귀 등을 전부 겪은 다사다난한 21세기 LG 트윈스 20년 역사의 산증인이며 같은 시기에 팀의 간판이었던 선배 이병규도 잠시 일본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박용택은 한번도 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박용택은 팀이 하위권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팬과 구단에서 가치를 저평가받았고, 주장으로서 청문회를 겪는 수모도 감내해야 했습니다.2020년대 들어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출장한 선수이자 리그 사상 첫 개인 통산 2,500안타 달성자입니다.물론 한미일 프로야구 사상 개인 통산 2,5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박용택을 포함해 총 109명으로 미국에서 101명이 2,500개 이상의 안타를 쳤고(사실 19세기 말부터 존재했던 리그임을 감안하면 적은 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시즌의 경기수도 한국과 일본보다 많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8명만이 2,500안타 고지를 넘어섰으며, 그 가운데 최다이자 유일한 3천안타 이상 기록자는 3,085개 안타의 장훈입니다. 단일 리그에서 세운 공식 기록상으로는 박용택이 한국 유일의 2,500안타 달성자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한-일 통산 2,842안타를 친 이승엽과 한-미-일 통산 2,716안타를 친 이대호도 있습니다.박용택은 20년간의 선수 생활 끝까지 팀이 우승을 한 적이 없었는데 KBO 리그에서 2000안타 이상을 친 타자 중 손아섭과 함께 유이하게 프로야구 우승 기록이 없으며 2000안타 클럽 중 박용택을 제외하고,양준혁부터 가장 적은 안타를 친 전준호까지 모두 우승 기록이 있습니다. 한편 KBO 리그만 한정했을 때 우승 기록이 없는 2000안타 클럽 멤버로는 같은 팀 프랜차이즈 타자인 이병규와 한화 이글스 프렌차이즈 타자인김태균,롯데 자이언츠 이대호도 있지만 이병규의 경우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2007년 우승 경험이 있고, 김태균은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2010년 우승 경험이 있으며 이대호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2014,2015년 연속 우승 경험이 있습니다.

휘문고 시절의 박용택

박용택은 휘문고등학교 출신으로 1998년 LG 트윈스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은 후 고려대학교를 거쳐 졸업 후 LG에 입단합니다.지명 당시인 1998년 무렵, 휘문고는 LG의 연고학교였으며 고졸우선지명이 존재하던 시절 LG와 OB는 서로 고등학교를 갈라 선수들을 지명하기로 했는데 하필 OB 연고학교에는 유망주가 씨가 마르는 바람에 LG에게 매달려 LG가 지명하지 않은 선수 중에서 지명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해서 박용택의 고교 동기인 유재웅은 두산에서 뛰게 되었습니다.계약 당시 스카우트 팀장과 계약금 2억 3천만 원 + 연봉 2천만 원으로 총 2억 5천만 원으로 계약했는데 그 당시 타자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있던 이현곤,김민우가 더 높은 액수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이현곤이 해태 타이거즈에 3억 5천만 원, 김민우가 현대 유니콘스에 3억 4천만 원 정도를 받았습니다.당시 고졸 선수로 함께 들어온 선수 중 김광우가 3억,서승화는 5억이었는데 서승화의 경우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입단 협상 건이 걸려 있어 어느 정도 납득이 됐지만, 김민우, 이현곤의 경우는 전혀 납득할 수 없어 구단에게 계약금을 올려 받을 방법을 재차 물어봤다고 합니다.당시 구단 측의 대답은 계약하지 말고 마무리 캠프에 가서 김성근 감독한테 인정받고 오라는 것이었는데 구단 입장에서도 주전의 실력을 갖춘 것을 증명해야 주전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던 박용택은 거리낌 없이 구단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신인들, 특히 고졸 선수들을 선수로도 생각을 안 한다고 만약에 선수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2천만 원, 3천만 원으로도 계약을 할 수도 있다며 겁을 줬지만, 그의 선택은 바뀜이 없었고 그렇게 계약하지 않은 채로 석 달을 지옥 훈련했는데 그러자 김성근 감독이 박용택에게 "야! 너 왜 계약 안 해?"라며 물어봤고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자 김성근 감독은 박용택을 주전 감으로 인정해 구단과 계약을 하게 되었는데 계약금 3억 원 + 연봉 2천만 원으로 도합 3억 7천만 원으로  LG 트윈스와 계약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고 합니다.

2002년 플레이오프 MVP 수상 당시

박용택은 2002년 데뷔할 때부터 줄곧 주전을 차지했으며, 2000년대 중반 투고타저가 심해지던 시기에 LG의 중심 타자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다만 2009년에 타격왕에 오르기 전까지는 2할 중후반대의 타율,두자릿수 홈런,두자릿수 도루의 평범하다고 하기엔 잘하고 뛰어나다고 하기엔 평범한 성적을 냈기 때문에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는 평도 들었지만 독특하게 4번 타자 도루왕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박용택은 2002년 데뷔 시즌부터 주전을 차지하여 타/출/장 .288/.359/.467 9홈런 타점 55 득점 68 도루 20개로 준수한 성적을 올리고 팀도 4위로 가을야구에 진출하였습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에서 결승 홈런 포함 2홈런 10루타라는 눈부신 활약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의 1등공신이 되었는데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으로 마감하였는데  이 한국시리즈가 박용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가 되고 맙니다.2003 시즌 김성근 년감독 대신 이광환 감독이 다시 부임하였으며 박용택 본인은 2년차 징크스로 부진하였는데 133경기 전 경기에 출장하고, 42도루로 이종범에 이어 도루 2위에 올랐으며 11홈런으로 개인 첫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지만 타율(0.257)과 출루율(0.321), 장타율(0.391) 등 세부스탯은 전년도보다 떨어졌으며 팀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타격성적을 기록했고 6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2004 시즌에는 전년과 달리 타/출/장 .300/.357/.471 16홈런으로 2002년 데뷔 당시의 성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데 4월에는 데뷔 후 첫 끝내기홈런을 쳤으며, 20-20의 가능성이 높았으나, 후반기에 부상과 부진으로 결국 은퇴할 때까지 20-20은 기록하지 못합니다.팀의 4번타자까지 맡으며 전반기에만 15홈런을 기록하며 맹활약하였고 사직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 현대의 클리프 브룸바를 제치고 우승을 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족저근막염으로 인해 단 1홈런에 그친채 장타와 타율 모두 하락하며 9월초 시즌아웃되는데 그와 이승호가 부상으로 빠지고, 알 마틴과 이동현까지 이탈하자 LG는 치열한 4강 경쟁에서 순식간에 떨어지며 6위로 추락했습니다. 도루 역시 전년도 도루 2위, 42도루를 기록했지만 이해 도루가 10도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잔부상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박용택은 2005 시즌 타/출/장 .280/.344/.432로 작년보다 부진했지만 90득점 43도루로 각 부문 1위를 차지하며 2000년대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개막 이후 허리와 어깨 통증 때문에 줄곧 지명타자로 기용됐으나, 한 달 동안 타율 2할 초반에 출루율이 3할이 안되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으며 팬들 사이에서는 박용택의 타격 자세에 대해 시즌 초반부터 말이 많았습니다. 타석에서 홈플레이트와 30cm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독특한 자세 때문이었는데 시즌 초반 박용택의 부진이 겹치면서 홈플레이트로 더욱 다가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주를 잇기 시작했습니다.5월 들어 좌익수 수비를 맡기 시작하자 타격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1,2번이 아닌 4번으로 기용되었습니다. 5월 타율 0.394의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4홈런과 22타점 12도루를 기록해 20경기 연속 안타 및 9경기 연속 타점 행진을 벌이면서 배영수와 함께 5월 MVP에 선정되기도 합니다.

2005년 KBO 시상식에서 이병규와 함께

2006 시즌부터 극심한 투고타저가 시작되었는데 박용택의 2006 시즌 성적은 타/출/장 .294/.361/.462 16홈런 25도루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팀은 역시나 나락이었고 이순철 감독이 사퇴한 이후 양승호 감독 대행이 분투해 보았지만 팀과 본인은 데뷔 첫 최하위인 8위로 크게 부진하였습니다.2007 시즌은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병규가 NPB로 진출 후, 없었을 때인 2007~9년 즈음 박용택은 LG의 유일한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이대형과 오지환이 등장하면서 인기가 조금 밀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거기에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임을 감안했을 때 사실상 3할에 20-20을 찍은 거나 다름없는 성적을 냈으나 이종욱과 이대형에 밀려 골든글러브는 놓쳤는데 이 둘은 각각 3할+도루 순위 1,2위를 다투던 선수였고 당시에는 도루의 가치를 높게 쳐줬고 결국엔 투고타저니 뭐니 해도 풀타임 1년차에 3할 도루왕을 기록한 이대형에 비해 작년과 비교해 떨어진 성적을 낸 박용택의 기록은 평범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2008 시즌 투고타저+소녀어깨로 우익수+부상의 트리플 크라운으로 커리어로우 시즌을 보냈습니다. 타율 .257, 출루율 .325, 장타율 .323의 초라한 성적으로 인해 "박용택의 기량은 이제 한계"라는 평가를 받는 처지에까지 놓였고 팀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승률을 기록하며 다시금 8위를 기록했습니다.

2009 시즌 박용택은 불같은 활약을 보였는데 본인 말로는 김용달 타격코치와 6년 동안 타격폼을 계속 바꿔왔으며 2009년에야 몸에 맞는 타격폼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합니다.주로 팀의 1번타자로 출장하여 안타 168개(리그 2위) 타율 0.372(리그 1위) 홈런 18개,74타점, 91득점(리그 5위) 도루 22개,출루율 0.418(리그8위) .장타율 0.582(리그 5위) OPS 0.999(리그 6위) 2009시즌의 엘지의 득점루트를 보면 박용택 안타- 이대형 땅볼, 도루 - 정성훈 진루타 or 뜬공 - 페타지니 안타였습니다.타격 부분에서 거의 모든 기록이 시즌 10위안에 들 정도로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고 시즌 후 2009년 수위타자를 차지하였고, 골든글러브 외야수부문을 수상하였습니다.다만 박용택의 타격왕은 밀어주기라는 비난의 대상으로 주로 고의성 사구를 4번이나 지시한 김재박 감독에게 쏟아졌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 나왔다가 3타수 무안타로 타율이 3할7푼2리로 떨어지자 바로 교체되며 겨우 3할 7푼 타율을 유지한 박용택 역시 '졸렬택'이니 뭐니 온갖 비난을 들으며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게다가 박동희와 김재박의 대담에서 김재박이 박용택 자신이 못 나가겠다고 했다고 밝혀서 박용택은 더 까였는데 1980년대나 90년대에나 있었던 타이틀 밀어주기가 21세기에 일어나 버려 수위타자 경쟁 사의 흑역사 주인공으로 남아버립니다.프로 야구 40년이 넘어가는 KBO 역사상 몇 없는 3할7푼 이상의 고타율의 수위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수위타자 타이틀 역사상 오점을 남기게 된 셈입니다.그 이전의 0.370이상의 타자는 감독겸 선수였던 백인천(1982, 단 시즌 경기수가 80경기였지만 백인천은 유일무이한 4할을 치고맙니다.), 장효조(1985, 1987) 이종범(1994), 마해영(1999)이 있습니다. 2009년 이후로 .370 이상을 기록한 선수에는 서건창(2014), 에릭테임즈(2015), 최형우(2016), 김선빈(2017)까지 단 4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2009 시즌 막판의 타율 관리로 급격히 늘어난 안티팬들의 공격으로 정신적 충격이 워낙 컸는지 2010 시즌 전반기 내내 죽을 쑤던 박용택은 타율이 1할대에 머물며 2군으로 강등되기도 했지만 7월 들어 월간 타율 3~4할을 왔다갔다 하는 크레이지 페이스로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결국 타율 0.300로 시즌을 끝마쳤습니다. 2010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한 박용택은 소속팀 협상 기간에 아무 마찰없이 계약기간 4년(3+1년)에 계약금 8억(5억+3억), 연봉 3억 5천만원 등 총액 34억원에 계약했습니다. 2011 시즌 박용택은 붙박이 지명타자로 뛸 것을 선언하고, 몸을 불리면서 20홈런 이상을 쳐주며 20-20클럽 가입도 가능할 거라는 기대가 많았지만 115경기,타율 0.302,15홈런,64타점,13도루에 그치고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도 홍성흔이 가져갑니다.2012 시즌 다이어트를 하고 돌아온 박용택의 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0.305 (8위), 안타 152개 (2위), 76타점 (9위), 82득점 (4위), 홈런 11개 (15위, 외야수 3위), 30도루 (5위), 득점권 타율 0.416 (1위), OPS 0.813 (외야수 1위) WAR 5.86 (8위) 리그 최고의 외야수로 활약하며 개인 통산 두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이 해의 5.86의 WAR은 개인 한 시즌 최대 WAR이었습니다.2013시즌 박용택은 타율 0.328,156안타,7홈런,출루율 0.393을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신인 시즌 이후 11년만에 포스트시즌 그것도 플레이오프에 출전하게 되었으며 통산 세번째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2014 시즌 124경기에서 159안타 타율 0.343,9홈런,73타점을 기록한 박용택은 통산 2번째 FA를 맞이해 우선협상 마지막날 원소속 구단과 4년 50억 원(계약금 18억 원, 연봉 8억 원, 옵션 0)에 재계약 했습니다.2015 시즌 박용택은 KBO 최초 4년 연속 150안타를 쳐내는 등 총 128경기 출장 159안타, 타율 0.326,18홈런,83타점을 기록합니다.2016 시즌 박용택은 KBO 최초 5년 연속 150안타를 달성과 개인통산 2,000안타를 세우며 시즌 성적 138경기 출장,176안타 타율 0.346,11홈런,90타점을 기록하며 정규 시즌에서는 이름값을 했지만 포스트 시즌에서는 존재감 없는 활약과 후반기 들어서 타격감이 계속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2017 시즌 박용택은 역대 7번째 KBO 통산 8천타석을 달성했으며 KBO 역대 2번째 2200안타와 첫번째 6년 연속 150안타를 동시에 달성,최종성적 138경기에서 175안타 타율 0.344,14홈런,90타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4번째 골든글러브이자 지명타자로서는 첫 골든글러브를 획득합니다.2018 시즌 박용택은 최다안타를 비롯한 여러 누적 기록을 세우면서 개인으로서는 뜻깊은 한해였는데 클래식 스탯도 훌륭하며 40세라는 나이에 주장까지 하면서 타격장인 양준혁과 장성호도 실패한 10년연속 3할이라는 대기록에 성공하기까지 합니다.총 134경기 159안타 타율 0.303,15홈런,76타점을 기록합니다.

시즌 이후 3번째 FA가 된 박용택은 LG와 2년 25억에 계약하며 2020년을 끝으로 은퇴를 시사합니다.하지만 2019 시즌 64경기 출장에 그친 박용택은 타율 0.282,1홈런,22타점에 그쳤으며 2020 시즌 역시 97경기 출장에 타율 0.300,2홈런을 끝으로 20년간의 프로생활에 은퇴를 하게됩니다.비록 팀의 우승과 국가대표로써의 족적은 크게 남기지 못했지만 프로야구 최초의 개인통산 2,500안타 돌파 등의 기록을 달성하며 팀의 간판스타로서의 명성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20년에 가까운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끝냈습니다.박용택은 프로통산 20 시즌을 뛰면서 2237경기 출장(1위),8139타수(1위)2,504안타(1위),통산 타율 0.308,2루타 441개(통산 4위),3루타 44개,213홈런,3672 루타(3위),1192타점,1259득점(3위),313 도루,793볼넷,출루율 0.370,장타율 0.451을 기록합니다.

박용택 통산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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