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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진,윤소이 주연 무협액션 영화 무영검_발해의 전설속 여자 무사 홍라녀는 실재로 존재했을까?

by 마음heart 201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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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전설 속 여자 무사 홍라녀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이서진, 윤소이 주연 무협 액션 영화 무영검


무영검.無影劍, Shadowless Sword, 2005


이서진과 윤소이 주연영화 무영검 속에는 발해의 전설적인 여무사 홍라녀(紅羅女)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발해에 대한 자료가 워낙 희귀하다 보니 구체적인 자료보다는 단 몇 문장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홍라녀 전설과 녹라녀(綠羅女) 전설이 바로 그것인데 발해에 대한 역사의 부재와 소실 탓도 있겠으나 홍라녀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베일에 가려져 있어 여러 전설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첫째는 어녀거혼형(漁女拒婚型) 어부의 딸 홍라녀와 발해 황제에 대한 슬픈 전설과 두번째는 공주정독형, 발해공주 홍라녀와 어느 어부의 애절한 사랑에 대한 전설.그리고 세번째는 어매음탕형(御妹淫蕩型)으로 발해황제의 여동생에 대한 전설이 그것입니다.여러가지 전설이 혼합되어 있어 실존인물이라고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설은 결국 실존에 근거하여 파생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앞의 세가지에서 결국 홍라녀에 대한 확실한 출신 성분을 유추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하지만 그녀가 공주의 신분이라기보다는 천한 신분이었다가 입신양명한 자수성가 스타일이거나 발해 계층의 중간 신분으로 부유한 집안의 여식은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도 감히 해보는데 아무리 발해가 남녀성별을 크게 게의치 않았다 치더라도 여자의 신분으로 막강한 무예를 갈고 닦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재산과 부 그리고 신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무영검.無影劍, Shadowless Sword, 2005

네번째 전설은 영화 무영검의 모티브가 되기한 여왕좌강산형(女王坐江山型)으로 발해 황제를 큰 위기에서 구해주고, 훗날 여동생 녹라녀(綠羅女)와 같이 거란과의 전쟁에 종군하여 대승을 거두며 큰 공을 세워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여동생 녹라녀와 함께 발해 여황제로 즉위하는 여걸女傑에 대한 전설이며 다섯째는홍라녀거란형(紅羅女契丹型) 즉,거란에 붙잡혀간 발해 태자 대홀한을 구출하기 위해 홀로 거란에 들어가 태자 대홀한을 구출한 홍라녀에 대한 전설입니다.네번째 전설과 다섯번째 전설은 홍라녀가 어떤 식으로든 발해에 큰 공을 세웠다는 것으로 신분과 출신성분이 분명치 않은 홍라녀가 여자 신분으로 남자들도 하기 힘든 나라에 대한 큰 공을 세우자 그녀에 대한 여러 설들이 확산되며 여러 전설의 주류로 자리매김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외에도 홍라녀에 대한 전설은 몇가지가 더 있는데 대략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무영검.無影劍, Shadowless Sword, 2005

홍라와녹라형(紅羅와綠羅型) 홍라녀와 녹라녀가 자매로 나오는 전설. 두 자매의 애절한 사랑에 관한 전설과 홍라녀비무형(紅羅女比武型) 발해 공주 홍라녀가 발해 황제의 원수와 무예를 겨루어 승리하고 또 그 원수를 용서한 이야기에 대한 전설,홍라녀와 은도바특리형(紅羅女와 恩도巴特里型) 발해 3대 황제 대흠무의 외동딸 홍라공주(홍라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잔한 전설. 홍라와 지포형(紅羅와 支布型)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는 홍라녀의 슬픈 사랑과 홍라녀가 발해 황제에게 복수극을 하게 되는 전설,홍라와 경박 소용왕형(紅羅와 境舶 小龍王型) 발해공주 홍라녀와 어느 어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전설 그리고 홍라녀사후성신형(紅羅女死后聖神型) 어부의 딸로 태어나 발해 황제의 부인(황후)가 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보살펴주다 1년만에 세상을 떠나 백성들이 안타까워햇다는 전설 및 용녀거빙형(龍女拒聘型) 용왕의 딸 홍라녀와 어느 발해 황제의 이야기에 대한 전설,삼인동련홍라녀형(三人同戀紅羅女型) 용왕의 딸 홍라녀와 사냥꾼 삼형제의 슬픈 사랑에 대한 전설등으로 홍라녀에 관한 전설이 13가지나 된다는 것인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홍라녀가 발해 사람들 의식에 깊숙히 박혀 있는 존재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무영검.無影劍, Shadowless Sword, 2005

그럼 김영준 감독이 연출한 영화"무영검"속의 홍라녀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었나?7발해를 최초의 배경으로한 이 영화는 흥행에서 고배를 마셨다.조선시대 이외에는 정통 역사물이 전무했던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느날 갑자기처럼 삼국시대의 드라마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었는데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부터 고구려의 최후의 영웅 연개소문,백제의 근초고왕 그리고 그 시초점인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과 광개토 태왕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였지만 역사적 자료가 전무한 삼국시대의 드라마가 많이 쏟아져 나왔지만 발해를 배경으로하는 드라마는 전무해었는데 고구려 역사물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것들 역시 자료를 토대로 한 역사물이라기보단 창작물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왕좌의 게임 속 거구의 브리엔처럼 거친 남성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정도는 기본일 것 같은데

발해의 전설속 여자 무사 홍라녀를 이야기하면서 전설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발해라는 나라가 어떤 국가였는지도 살펴본다면,발해는 698년에 건국해 926년에 멸망하기까지 무려 228년간 15대를 이어간 중앙집권적 독립국가였으며 대외 정복활동으로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해 동북아의 최강자로 떠올랐는데 국토 면적은 한반도 전체의 2.2~2.8내에 달하는 50-63만㎢였고 강역은 북으로 아무르강에서 서로 랴오허 강, 남으로 대동강에 이르렀습니다.그러나 15대 와서 거란의 내침을 받아 역사를 마감합니다.중국의 당나라는 이런 발해를 가리켜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국가로 인정했는데 발해에 관한 역사기록들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 그리고 조선시대 ‘규원사화(揆園史話)’발해유민이 고려에서 썼다는 역사서 ‘진역유기(震域留記)’를 언급하는데 다만 이들 책은 발해 관련 내용이 매우 간단해 아쉬움을 남깁니다.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 시대(南北國 時代)’를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설정한 사람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었는데 그는 1784년에 쓴 ‘발해고(渤海考)’서문에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이라고 서술했으며 정약용이 저서‘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와 ‘발해속고(渤海屬考고)’에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로 소개합니다.발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것은 신채호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노력 덕분인데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박은식은 ‘발해사’를 통해 민족의 정통과 정기를 지키려 했고 장도빈의 ‘국사(國史)’, 권덕규의 ‘조선유기(朝鮮遺記)’등이 같은 지향과 비상을 보인 민족사학 저서였습니다.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발해사를 우리 민족사로 보려는 움직임은 사실 발해를 도외시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관련이 있는데 신라중심주의에 빠진 삼국사기는 발해사를 아예 무시해버렸는데 이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불완전성의 결과이기도 합니다.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 때문이었습니다.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발해사는 일제 관변 사학자들의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올가미에 걸려 만주사의 일부로 변조되었으며 여기에 하야시 다이스케는 ‘조선사’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신라가 있어 다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있을 수 없다는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내놓아 발해사를 한국의 정통사에서 분리시켰습니다.또 당나라에 유학한 일본승려가 펴낸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별다른 근거없이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며 ‘이중종족론’을 내세웠는데, 이를 근거로 중국은 물론 우리의 일부 학계까지 동조, 발해사를 민족이 모호한 영역으로 몰고 갔습니다.중국측 사서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도 발해는 지배층만 고구려인이었을 뿐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허나 고구려의 민족구성 자체가 한민족과 더불어 만주와 그 일대의 주민이었다는 점을 살펴 볼 때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 역사자체를 논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할 수 있습니다.특히나 발해건국의 역사적 뿌리는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고구려 마지막 태왕 보장왕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끌어 모아 부흥운동에 앞장 섰으며, 부흥운동을 일으킨 대부분은 나중에 고려로 망명, 역사적 정통성을 고려에 넘겨 주었습니다.발해의 2대왕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며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임합니다.중국의 ‘구당서’에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 특성을 구분짓는 근거로 가장 보수성이 강한 장례법과 무덤양식 역시 고구려와 발해는 똑같다고 합니다.발해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에 대해 전 중국 주은래 총리조차 생전에 역대 중국의 대국적 배타주의를 사과하면서 발해가 한국의 옛 땅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런 예전의 모든 것을 잊은채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발해가 중국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중국 역시 일본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이런 강대한 영토를 확장한 발해의 역사에 등장하는 구국의 영웅 홍라녀와 같은 여무사에 대한 전설은 발해라는 국가가 결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여성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축을 이루었다는 작은 실마리이자 단서는 아닐까 생각되어 집니다.발해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요나라에 의해 소리없이 사라진 것처럼 역사에서는 묘사하고 있으나 자료가 불충분하다하여 일제가 세뇌시킨 역사를 버젓이 국사에 올리는 일은 민족적 자존감을 상실한 행동은 아닌가 생각되는데 요나라 황제 야율아보기에 의해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는 함락되고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발해 황제와 신하들은 투항하였으나 그후로도 발해 곳곳에서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요동지방에 요나라가 세운 동란국은 서기 928년경에 완전히 철수하고 맙니다.발해의 계승국임을 자처한 후발해국과 정안국은 이 땅에서 70~80년간을 존속하였으며 발해 멸망 후 200여년후 1115년에는 마침내 금나라가 건국됩니다.금나라는 강력한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반이상이나 점령하였으며 송나라는 결국 남송과 북송으로 갈라져 버립니다.대륙의 강력한 주인으로 떠오른 금나라의 건국시조는 신라인 김함보의 6대 손이라 금사에 명백히 적혀 있고 금나라 건국세력은 발해 독립운동세력인 옛 발해인이었다고 합니다.통일신라가 아닌 남북국시대로 역사를 재정비한 선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나라 역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는데 일부 사학자들은 발해의 멸망 후 우리나라의 만주 지배세력은 끝난 것이 아니라 금나라에 계승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이들은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이라고 애써 무시하기도 합니다.그리고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만 발해 일부 세력은 고려로 망명했고 또 다른 세력은 요나라에 대항하였으며 요나라는 이 세력을 완전하게 제압하지 못한채 발해땅에는 발해의 계승국을 자처하는 도시국가가 난립합니다.대조영이 고구려 멸망후 30년후에 발해를 건국하였듯이 발해 멸망 후에 일어난 일들은 우리가 좀 더 역사를 단정짓지않고 유보해야 되는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으로 발해의 전설적인 여무사 홍라녀처럼 역사는 발굴하고 끊임 없이 연구하며 기존에 있던 것을 의심해야 하는 고독하고 지루한 작업이기도 합니다.더구나 일제강점기에 의해 왜곡되어진 우리 고대사 같은 경우는 더욱 철저하게 역사의 뒤편을 살펴보고 숨겨진 진실을 봐야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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