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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폐라뮤지엄/- 미스테리 뮤지엄(국내)

망치 하나로 성인남성 4명을 죽인 70년대 어느 살인자 이야기_무등산 타잔 박흥숙 살인사건

by 마음heart 2022.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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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하나로 성인남성 4명을 죽인 70년대 어느 살인자 이야기/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살인사건



오늘의 미스테리 뮤지엄 사건, 사고에서는 1970년대 도시 빈민 철거민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는 박흥숙 살인사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 4명을 망치 하나로 살해한 살인마이지만 당시 상황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70년대 비극이 잉태된 광주 판자촌과 어린 시절 박흥숙

△박흥숙 살인사건_배경

박흥숙은 전남 영광군 출생으로 어릴 적 이름은 박정렬이었다고 합니다.편부모 가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부모가 가난했지만 도로변의 허름한 점포를 운영하였고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형도 세상을 떠난 뒤부터 본래 가난했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고 합니다. 박흥숙은 홀어머니와 남은 동생들을 잘 돌보는 효자였다고 주위 사람들은 기억하였는데 박흥숙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비상한 똑똑함과 지독한 가난함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가난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지면서 어머니와 막냇동생은 절로 가서 수발을 들며 허드렛일을 하며 연명했고, 그의 여동생은 남의 집의 식모로 일을 하며 살게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박흥숙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의 최종 학력은 국민학교였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바라던 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우리 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며 당시의 심정을 적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에 광주시내에서 열쇠수리공으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한 박흥순은 공부에 대한 열망 때문에 주경야독을 하여 다섯달 후 검정고시에 합격했으며 검정고시로써 고등학교 과정을 통과한 후 곧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박흥숙의 계획은 법관이 되어 가난으로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서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 하나였는데 박흥숙은 이때 자신의 거처로 무등산 산자락으로 들어가서 움막집을 세우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습니다. 당시 무등산 자락 주변에는 스무여 가구가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민들이 박흥숙과 그의 가족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훗날 박흥숙 살인사건 이후 형성된 박흥숙을 동정하는 여론은 주로 판자촌 주민들의 증언에서 기인했습니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산 중턱에 있는 무당의 집에서 무당의 수발을 들고 허드렛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는데 박흥숙은 평소 체격이 작고 허약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구한말 동학군 사이에서 읽히던 정도술이라는 무술 책이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그것을 수련했다고 합니다.

어릴적 몸이 허약하여 건강을 위해 무술을 스스로 단련했던 박흥숙

□박흥숙 살인사건_발생

1977년 4월 20일,광주시 동구청 소속의 건설반장인 오종환 반장과 철거반원 일곱 명이 무등산을 올랐는데 그들의 목적은 등산이 아닌 바로 이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기 위한 산행이었는데, 마침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구청에서 판자촌 주민들에게 알려 집들이 철거된 상태였지만, 갈 곳 없는 여덟 가구의 집들만 남은 상황으로 여기에 박흥숙의 집도 속해 있었습니다.결국 절박한 박흥숙과 철거반원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철거반원 중 일부가 어머니를 밀치며 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수사 결과와 증언에 의하면, 이때까지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리면서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며 그들을 동정하였다고 합니다. 나아가 철거반이 가재도구를 모두 움막집 바깥으로 옮길 때 박흥숙도 그들과 함께 가재도구를 옮기면서 철거에 협조했지만 불행한 박흥숙 살인사건의 시작은 철거 반원들이 집에 불을 지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철거반원은 단순 철거만 했다간 다시 지어 살 우려가 있으므로 상부에서 완전 전소를 명령했는데 집 지붕에 박흥숙의 어머니가 무당의 집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 30만 원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던 박흥순이 네 명의 철거반원들을 살해한(한 명은 중상을 입고 생존한 김영철) 결정적 계기는 움막집으로부터 삼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김복천과 그의 처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박흥숙은 "저 집에는 병에 걸린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선처해달라."라는 요청을 했고 철거반원은 이를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결국 그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본 박흥숙은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에 사로잡혔고, 결국 넘어선 안될 강을 건너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박흥숙은 따져 물었는데, 철거반장 오종환은 "어린놈이 지랄한다."라며 박흥숙을 깔보았고, 더욱 열 받은 박흥숙은 철거반장 오종환을 향하여 자신이 만든 사제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하고 맙니다.박흥숙이 사제 총을 만들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그가 열쇠공을 시작으로 금속을 다루는 일을 배웠기 때문이었는데 총을 든 그는 철거반장에게 부하 반원들을 모두 모으라고 위협을 가하여 철거반원 7명 중 5명이 불려 왔고,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지시하여 철거반원들을 묶게 합니다. 당시 그가 이들을 결박한 이유는 이 사람들을 결박하여 도망가지 않게 한 뒤 스스로 시내로 가서 당시의 광주시장에게 따지고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박흥숙은 포박한 철거반원들을 자신의 공부방으로 파 놓았던 구덩이에 넣은 다음, "불태운 우리 집에 사과해라"라고 호통을 쳤는데, 이 와중에 철거반원들은 마침 헐겁게 묶여 있던 포박을 풀고 반항하였고, 박흥숙은 망치로 그들을 공격해서 5명 중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데 이것이 박흥숙 살인사건의 전말입니다.

박흥숙 살인사건이 일어난 판자촌 현장
영화 무등산 타잔,박흥순 중

  ○박흥순 살인사건_그 후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은 놀라서 도주하였고, 박흥숙의 여동생은 시내로 내려가서 광주 시청으로 가서 시장을 만나려 했으나 시장은 만나 주지 않자 시청 직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한 뒤 없어진 집터로 갔지만 박흥숙의 어머니는 공무집행 방해죄, 여동생은 살인방조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박흥숙은 광주 시내로 내려와 예금해 두었던 돈을 찾아 머리를 깎고 양동시장에서 하늘색 재킷을 산 뒤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로 이동, 여수에서 1박을 한 다음 여수역에서 서울로 향했으며 서울역 앞의 여인숙에서 다시 1박 후 상계동의 이모 집에서 숨어있다가 시민의 제보로 붙잡히는데 여기까지는 경찰의 거짓 조작 발표이며 박흥숙이 자수 후 진술한 그의 도주 행각은 실제로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박흥숙이 진술한 실제 도주 및 자수 경로는 광주에서 여수로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 기차 안에서 해외로 나가는 배를 타는 정 모 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에 의하면 정 모 씨는 북한의 간첩으로 의심되는 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가 간첩임을 확신한 박흥숙은 날이 늦었으므로 우선 여인숙에서 1박을 한 다음 서울로 향하였는데 서울에 도착한 그는 간첩신고를 하러 중앙정보부를 찾았고, 더불어 자신이 광주 무등산에서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이라고 자신의 실명을 밝히며 자수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중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고 검거, 즉 자수하여 연행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는 박흥숙의 진술에 의한 것이니만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제보로 붙잡힌 것이 아닌, 스스로 자수한 것은 재판부에서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자수를 하여 검거된 박흥숙은 자신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반성했는데 법정 진술에 따르면 죄를 뉘우치고 어떤 극형이든 받겠다고 언급했습니다.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인정을 했으니 최소한 박흥숙이 자수를 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되었으며 이후에 빈민촌 철거 과정에서 발생한 철거반원들의 폭력이 사건의 배경이라는 점과 박흥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여 박흥숙에 대한 구명운동이 있긴 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으며 박흥숙은 결국 사형 선고 후 딱 3년이 되던 1980년 12월24일 만 26살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박흥숙 살인사건_박흥숙에 대한 당시 언론의 왜곡보도

당시 박흥숙 살인사건에 대하는 경찰과 언론의 행태는 중립적인 사실 보도보다는 남은 판자촌 사람들의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프레임에 맞춘 경향이 강했는데 박흥숙에 대해 사실 관계를 왜곡하여 나쁜 점만을 부각하여 보도하는데 박흥숙의 어머니인 심금순 씨가 무등산에서 거대한 굿판을 벌여 광주시내의 돈을 긁어가는 무당이다라는 보도가 마구 쏟아졌는데 현실의 심금순 씨는 무당의 잡일을 돕는 대가로 생계를 꾸리던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나아가 언론은 당시 판자촌과 무등산 일대를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곳이라고 왜곡하기까지 합니다. 박흥숙이 무예를 연마해서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력과 완력을 지닌 사람처럼 보도됐지만, 박흥숙이 배웠다는 무술은 조선시대의 무예였던 정도술이 고작이었는데 박흥숙의 살인에서 등장한 사제총기에 관해서 당시 언론은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박흥숙이 이전에 만든 총이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로 그 총은 쇠파이프로 만든 딱총 정도의 성능으로 박흥숙이 사제총을 제작하고 사용한 이유는 산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호신용 무기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살해 현장인 그의 공부방 즉 구덩이에 관해서 경찰과 언론은 그가 사람이 오면 죽이기 위해 이전부터 파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집이 철거될 것을 예상한 그가 집이 철거된 이후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비상용으로 파놓은 구덩이였습니다. 박흥숙의 체포에 관한 내용 보도 역시 상당히 많이 왜곡 보도되었는데 당시 경찰의 보도 내용과 달리 박흥숙은 자수를 했고, 상계동의 이모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광주지방경찰청창이 받은 보고에는 그가 서울방향으로 도주한 후에 믿기지 않지만 중앙정보부에 자수해서 검거됐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경찰 내부의 보고체계와 발표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인데 박흥숙이 간첩신고를 하면서 이를 신고한 자신이 살인범 박흥숙이라고 같이 밝혔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가 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언급되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판결문에도 인정이 됐다는 것입니다. 박흥숙이 여수행 기차를 탔고 서울에 와서 자수를 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사실로 인정되었고 체포되었다던 당시 보도 내용이 거짓말인 것입니다. 당시 언론은 박흥숙 살인사건의 발단인 무허가 판자 건물을 철거하면서 불을 질렀던 사실을 보도하지 않으며 숨기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전부터 있던 도시빈민 철거에서 벌어진 여러 사례로 인하여 민심을 악화시킬 수 있단 것이었습니다. 신인 르포작가 김현장은 월간 대화지 1977년 8월호에 '무등산 타잔과 인간 박흥숙'이란 기고문을 내면서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무등산 타잔,박흥숙과 실제 박흥숙
박흥숙에 대한 왜곡보도가 판을 쳤던 당시 신문기사들

∽박흥숙 살인사건_판결

원심은 그의 살인 수법이 아주 잔혹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고 피고는 항소했으나 광주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박흥숙이 심신 미약 등 자신의 행위를 판단할 수 없는 지능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사유였는데 변호사는 해당 범행이 피고의 첫 범행이고, 사용한 총은 미리 살인을 위해 준비된 도구가 아닌 호신을 위해 만들어두었던 것이며 망치도 공부를 하기 위해 땅굴을 파려던 것으로 결과적으로 범행에 사용한 흉기와 둔기는 준비된 살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생애는 원래는 올바른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정황상 우발적 범죄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는 점을 들었으나, 광주고법은 이전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책으로 무술을 연마한 점(이를 자칭 '와장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피고가 도주를 위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 명확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심신 미약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의 성품이나 자백을 한 점 등을 참작해줄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범행의 수법과 수단이 아주 잔인하고 이전의 생애 전반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원심을 유지했습니다. 박흥숙 살인사건은 당시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국가의 도시계획과 건물 철거 등의 문제가 근본 원인이었는데 정부에서 처음에는 도시 빈민들의 판자촌 인구에 관해 해당 인력이 국가경제 발전에 필요하여 묵인을 해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도시미관 훼손과 묵인해줬던 무허가를 뒤집으면서 내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집행한 철거와 강제이주는 굉장히 폭력적이면서 무계획적이었고, 이로 인한 피해는 가난한 주민들에게 전가됩니다. 21세기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대한민국은 안정화된 대도시를 이루었지만 과거, 무분별한 사다리식 행정의 문제점, 하층민의 보호받지 못한 인권 등은 미래에 법관이 되어 가난한 가족을 일으켜 세우려던 26살의 한 젊은이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으며 무고한 가장 4명 역시 죽음의 길로 인도합니다. 박흥숙 살인사건의 가해자 박흥숙은 어쩌면 당시 사회와 언론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살인마였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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