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타잔 박흥순=용산참사 |
21세기,공상과학영화에서는 이 시대에 엄청난 문명적 진보를 상상하기도 했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2009년 1월 20일 그 잘난 초고층 아파트를 짓기위해 철거민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부쳐 5명의 철거민 관계자와 한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은지도 벌써 2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투쟁은 최소한의 변화를 갈망하며 벌어진다.아니 변화는 차지하고라도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할 수 밖에 없다.그러나 비극으로 끝난 용산참사는 시간이 흐른후에 더욱 절망으라는 단어만을 잉태했다. 대법원은 용산참사 농성철거민 일곱명에게 징역4년에서 5년이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용산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지 2년여만에 2011년 1월10일 일본 오사카 총영사에 부임되어 보은인사로 국민적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그리고 그는 11월초 오사카 영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는데 이유는 내년 4월 총선때 경북 경주에 출마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20세기,1972년 5월 전라도 광주시의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무등산 무허가촌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당국은 군데군데 수채씩 흩어져 있던 무허가 건물들을 정비 차원에서 철거하고 몇 차례에 걸쳐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특히 광주시는 1977년 10월 10일부터 광주에서 개최될 제58회 전국체전을 대비해 무등산 일대에 대한 정화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으며 그해 4월 덕산골 세칭 '무당촌''에 남아 있던 10여 채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면서 속칭 무등산 타잔 박흥순의 참혹하고 슬픈 살인이 벌어지게 된다.무등산 타잔 박흥순의 살인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그의 살인 행각이 일방적인 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해 정상참작이라던지 당시 문제의 중심이던 강제철거는 전혀 논외로되었으며 단순히 잔인한 살인마에 대한 가십성 기사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강제 철거라는 명제 앞에 개인의 권리 따위는 싸그리 뭉게어지던 시절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박흥순과 반세기가 지나버린 지금에와서도 비극은 되풀이 되었고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도 않는 현실,그 현실 앞에 우리가 서있다는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사람도 변하건만 권력만이 늘 제자리 |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남자 박흥순, 이 참혹한 사건을 언젠가 포스팅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지만 우연찮게 그에 대한 영화가 나왔다는 정보를 접하고 보고 난 후 솔직히 너무 실망스러웠다.영화는 가난을 극복하려 했던 한 청년이 권력의 무책임한 개발의 논리로 행정집행을 지켜보다가 살인마로 변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지만 인간적 고뇌나 시대적 상황을 스케치하기보다는 액션에 좀 더 신경쓴 모습이었다(그렇다고 액션이 뛰어나지도 못하면서)무등산 타잔 박흥순의 이야기를 풀자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시대적 상황도 들여다 봐야 하겠지만 그에 대해 왜곡되었던 시선도 바라봐야 할 것 같다.박흥순은 물론 살인자이다.그것은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며 그에 응답한 댓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하지만 사이코패스와 같은 무차별 살인이 아닌바에야 그의 상황을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몫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이소룡을 동경하던 21살의 평범한 검정고시생 |
박흥순은 72년까지 철물점의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다 그만둔 뒤 반 지하 토담집에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평범하지만 조금은 불우한 이웃의 청년일 뿐이었다.그의 사진속 포즈들은 영화 속 이소룡의 흉내를 낼 정도로 당시 또래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경제 발전이라는 시대적 숙명 앞에 박흥순은 순순히 따르는 편이었다.무허가 움막의 퇴거 명령앞에 자신의 일기장에 "공부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라고 적으며 또 다른 공부방으로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다.
자,그럼 이렇게 평범했던 박흥순을 희대의 살인마로 뒤바뀐 그날로 타임머신 타듯 되돌아가보자.지금으로부터 34년전에 일어났던 무등산 타잔 박흥순의 철거반원 4명을 잔혹하게 죽인 그날로,
1977년 4월20일 당시 철거반장 오종황씨(당시41세)는 직원 6명을 이끌고 무등산 증심사 입구에 도착한다.이들 철거반원7명은 속칭 무당촌(광주시 동구 운림동 산145번지 무등산 중턱 덕산골)이라 불리던 무허가촌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으며 20여채의 무허가 건물은 이미 철거된 상태였고 4채 정도가 남아 있는 정도였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잔혹한 연쇄 살인마들(영화 추격자의 실제모델인 유영철이나 강호순)은 사회적 병폐와 개인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나온다 진단한다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지강헌이나 무등산 타잔 박흥순의 행위의 근원점은 부조리한 사회구조에서 찾아 보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접근 방식이라 여겨진다.박흥순에게는 당시 어머니 심금순(당시 51세),누이동생(당시18세),그리고 남동생 2명이 무허가촌에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싷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을 박흥순(당시 21세)은 철거 명령에 순순히 응하였고 철거반원들도 아무런 제지 없이 작업을 할 수 있었다.세간 살림을 대충 밖으로 모두 꺼내자 철거반원 중 한명이 집에 불을 지르라고 소리쳤다.이에 박흥순은 황급히 지붕위로 올라가 1만5천원짜리 천막을 걷어내려했다.박흥순은 철거반원들에게 지붕위에 쳐놓은 천막이라도 건지고 싶어 천막을 걷어낸 뒤 불을 지르라 외쳤던 것이다.
박흥숙은 이건태를 시켜 오종환을 나일론 끈으로 묶게 했다. 그때 실신한 어머니 곁에 있던 박흥숙의 여동생이 '펑''하는 소리를 듣고 올라왔다.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나일론 끈을 던져 주며 이건태를 묶게 했다.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시장과 담판을 지으러 갈 테니 이들을 다시 꽁꽁 묶으라고 시켰다. 여동생은 오빠를 만류했지만 별 수 없었다. 내가 시청에 갈 때까지만 참아달라며 이들을 묶고 난 후 곧바로 산을 내려갔다.
여동생은 증심사 입구 보해상회로 들어가 전화로 시장실(당시 시장 전석홍)을 불렀다. 전화로는 안 될 것 같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이때가 오후 2시 45분. 시장 부속실에서 직원에게 우리 오빠가 사고를 저지를 것 같다. 빨리 사람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괜찮으니 빨리 가보라고 했다. 이때가 오후 3시 20분. 여동생은 다시 시내를 거쳐 황급히 계곡으로 향했다. 한참을 올라가는 데 어머니가 경찰에 붙들려 내려왔고 자신도 함께 연행되었다.
여동생이 산을 내려간 직후 30분 남짓 되는 시간에 덕산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박흥숙의 왜곡 사건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체포소식이였다. 8일 2차 법정에서는 박흥숙이 자수한 과정도 언급되었다. 그러나, 4월23일자 대부분의 신문들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이모 집에서 검거''라는 제목으로 박흥숙이 검거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박흥숙은 검거된 게 아니라 자수했다. 그것도 경찰이 아니라 당시 중앙정보부를 제 발로 찾아간 것이었다. 박흥숙은 범행 직후 여수로 도피했다. 여수행 기차 안에서 외항선을 탄다는 정모를 만났다. 정모는 '인민 공화국''이니 ' 남조선''이니 하는 이상한 말을 자주 사용했다. 정모와 여수의 한 여인숙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21일) 아침에 다시 정모와 함께 서울행 풍년호 열차를 탔다. 22일 낮 12시께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정모를 중앙정보부에 신고(78년 2월 2일 항소심에서 변호사 이기홍은 박흥숙이 자수하면서 신고 한 사람이 진짜 간첩으로 판명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면서 이에 대한 정상도 참작해야 한다는 취지의 변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모을 중앙정보부에 넘기면서 그도 내가 무등산에서 발생한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수했다. |
'1m 65cm 키에 다부진 몸매, 나이 21세, 일명 박정렬, 얼굴은 둥근 편이고 눈썹이 약간 길며 늘상 해군 작업복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다님' 박흥숙의 신상정보다. 박흥숙은 자신의 가족이 살던 무허가 집을 철거하려 온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람으로 세칭 '무등산 타잔 사건'의 주범이다. 오종환은 불을 안 지르겠으니 얼른 내려 오라고 설득했다. 박흥숙은 지붕에서 내려왔지만 철거반은 다시 집을 지울 수 없도록 목재 등을 모아 소각하려 했다. 불이 붙자 박흥숙의 어머니는 그 동안 푼푼이 모아 천장에 숨겨둔 돈 30만원이 떠올랐다. 집안으로 뛰어 들려는 심씨를 철거반원이 밀쳐냈다. 심씨는 쓰러져 실신했다.
소각을 마친 철거반원은 위쪽으로 50m 떨어진 김복천(당시 75세)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넋을 잃고 있던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이러다가는 위쪽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위험하다고 말하며 철거반원을 따라 급히 올라갔다. 박흥숙은 이건태를 시켜 오종환을 나일론 끈으로 묶게 했다. 그때 실신한 어머니 곁에 있던 박흥숙의 여동생이 '펑''하는 소리를 듣고 올라왔다.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나일론 끈을 던져 주며 이건태를 묶게 했다.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시장과 담판을 지으러 갈 테니 이들을 다시 꽁꽁 묶으라고 시켰다. 여동생은 오빠를 만류했지만 별 수 없었다. 내가 시청에 갈 때까지만 참아달라며 이들을 묶고 난 후 곧바로 산을 내려갔다. 여동생은 증심사 입구 보해상회로 들어가 전화로 시장실(당시 시장 전석홍)을 불렀다. 전화로는 안 될 것 같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이때가 오후 2시 45분. 시장 부속실에서 직원에게 우리 오빠가 사고를 저지를 것 같다. 빨리 사람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괜찮으니 빨리 가보라고 했다. 이때가 오후 3시 20분. 여동생은 다시 시내를 거쳐 황급히 계곡으로 향했다. 한참을 올라가는 데 어머니가 경찰에 붙들려 내려왔고 자신도 함께 연행되었다. 여동생이 산을 내려간 직후 30분 남짓 되는 시간에 덕산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박흥숙은 철거반원 7명 중 5명을 위협해 묶이지 않은 사람끼리 서로 묶도록 하고 직경 3m, 깊이 1m정도의 구덩이에 이들을 몰아 넣었다. 그리고 모두 뒤돌아보게 한 후 철거용 쇠망치로 뒤통수를 내려쳐 4명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미리 빠져나온 두 명을 제외하고 유일한 생존자는 김영철로 그는 뇌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오후 3시 50분이 되어서야 경찰과 기동타격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해 무등산의 봄은 이처럼 끔찍한 상처를 안은 채 녹음 속으로 빠져갔다. 박흥숙에 의해 공무원 4명이 살해된 이 사건을 사람들은 지금도 '무등산 타잔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등산 무허가촌의 철거과정은 72년 5월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시작돼었다. 당국은 군데군데 수채씩 흩어져 있던 무허가 건물들을 정비 차원에서 철거하고 몇차례에 걸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특히 광주시는 77년 10월 10일부터 광주에서 개최될 제58회 전국체전을 대비해 무등산 일대에 대한 정화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광주시는 그해 4월 덕산골의 세칭 '무당촌''에 남아 있는 10여 채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기로 하고, 12일자로 철거집행 통보를 보냈다. 이날 뜯길 집은 총 7채로 그중에는 박흥숙이 72년 양동 철물점의 열쇠수리공을 그만 두고 공부하기 위해 지은 반지하형 토담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흥숙은 71년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한 이후 이 토담집에서 고등학교 검정고시와 고시를 준비해 왔다. 4월 11일자 박흥숙의 일기에는 내일이면 집이 뜯기게 되는가. 걱정뿐이다. 공부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겠다라고 쓰고 있다. 자신의 공부방을 순순히 내주었던 박흥숙은 이번에는 땅굴이라도 파서 공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박흥숙은 4월 20일 철거반원이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공부방을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비극은 예고되어 있었던 것일까. 박흥숙이 20일 4명의 철거공무원을 살해한 장소는 자신이 공부방으로 쓰려고 파다 만 땅굴이었다. 사건 직후 경찰은 '철거반원피살사건 수사본부''(당시 본부장 박종주 전남도경 수사과장)를 차리고 박흥숙을 찾아 나섰다. 수사는 별 진전이 없었다. 22일에는 현상금 50만원 내걸었다. 그러던 22일 오후 4시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친척집에서 박흥숙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수사본부로 날아왔다. 박흥숙은 22일 밤 12시께 광주로 압송되어 살인, 공무집행방해, 총포화약류 단속법위반 등의 혐의로 긴급 구속되었다. 수사본부는 범인 박흥숙은 사고 당일 시내로 내려와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갔다가 다시 서울행 기차로 서울에 잠입, 범행 50시간 만에 서울 모기관원에게 잡혔다고 모호하게 발표했다. 박흥숙은 검거되었지만 '무등산 타잔''을 둘러싼 세간의 이목은 그냥 묻혀지지 않았다. 사건의 참혹성도 그렇지만 범행동기, 검거기관, 그리고 박흥숙의 특이한 재능과 성장과정 등을 둘러싸고 갖가지 의혹과 소문이 떠돌았다. /김기곤기자 ggkim@kwangju.co.kr **덕산골 ''무당촌'' 어떤곳? 도시 빈민들의 거주지 철거반원 살해 사건 직후 언론은 무등산 덕산골을 '무당촌''으로 부르며 이곳을 마치 사이비종교의 소굴이자 범죄의 온상인 양 보도하기 시작했다. '전남의 제1호 도립공원이자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이 사이비종교의 아성으로 말썽을 빚더니만 끝내 살인극''(한국일보 4월22일). '광주 무등산 중턱에 무당·점쟁이·박수 등 미신집단이 모여 무당촌을 형성''(중앙일보 4월21일). '풍치 좋은 계곡이 바로 사이비종교 단체가 집단을 이루고 있는 덕산계곡'' (전남일보 4월21일) 등. 덕산골은 산수가 좋아 시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종종 올라와 굿거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덕산골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은 시내에 집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산중턱으로 올라와 살던 빈민들이었지 결코 무당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굿거리를 하러 온 사람들에게 제물과 편의를 제공하고 그 사례로 몇 푼씩 받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박흥숙의 일가도 이런 일을 하며 받은 돈을 생활비에 보탰다. 박흥숙은 무당골에서도 가장 뛰어나 굿거리 10여 개를 몽땅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수입이 많고 그동안 절약하여 광주시내에다 집을 샀다(전남매일 4월21일)는 것도 근거가 없는 얘기였다. 당시 철거반원 김영철도 박흥숙의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집 앞에는 굿을 하러온 사람 3개 팀 정도가 있었지만 그 어머니가 직접 무당행세를 했던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한 '철거반원에 대항해 낫과 몽둥이로 주민들 집단 난동''(동아일보 4월 21일)등의 보도로 주민들을 공범으로 단정했다. 사건 당일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올라갔던 이인행(현 65세·상무지구서 식당·당시 동구청 건축과 녹지계 공무원)은 그곳은 이미 철거가 거의 마무리되어 주민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박흥숙의 동생 박모씨도 당시에는 우리집과 그 위로 당뇨병과 폐결핵을 앓고 있는 부부가 살았고, 조금 더 위로 거동도 불편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 분씩 살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박흥숙 혼자서 건장한 철거반원 5명을 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란 추측으로 마을 주민들을 범죄자들로 몰아갔던 것이다. 77년 무등산 철거반원 살해<중> 1977년 5월 어느 날. 김현장(당시 26세·조선대 금속학과 재학중·82년 3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사형 선고·현 광주에서 급식업체 운영)은 흠씬 뿌려대는 비를 맞으며 무등산 덕산골을 찾아갔다. 산중턱의 어느 허름한 집 앞에 이르렀다. 실례합니다. 혹시 철거된 박흥숙의 집을 아십니까? 한 여인이 방안에서 나왔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무슨 일이시오. 난 박흥숙의 이모 되는 사람이오라고 대답했다. 그 집은 마을 산지기의 집으로 박흥숙의 이모가 살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박흥숙의 여동생도 함께 있었다. 김현장은 이모와 여동생으로부터 박흥숙의 성장과정, 덕산골에서의 생활, 사건의 과정 등을 밤새도록 들었다. 김현장은 다음날 아침 젖은 옷을 대충 빨아 입고 덕산골을 내려왔다. 곧바로 친구 이양현(당시 26세·현 삼능건설 전무)을 찾아갔다. 김현장은 이양현에게 박흥숙 사건의 전말을 취재해 그 진상을 밝혀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광주에서 사회운동을 하던 몇몇 사람들은 '무등산 타잔'' 사건이 잔혹한 살인극이지만 그 이면에는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어 이루어진 강제철거와 이주가 빚어낸 사회적·제도적 문제와 얽혀 있다고 생각했다. 김현장은 소형 녹음기를 들고 덕산골에 살았던 주민들과 박흥숙 가족들의 이야기를 녹취했다. 녹음된 테이프가 다섯 개나 되었다. 박흥숙이 초등학교때부터 사건 직전까지 꼼꼼히 써 온 일기도 면밀히 살펴보았다. 김현장은 당시 취재과정을 회상하며 덕산골에 살았던 사람들은 워낙 큰 사건이라 두려움 때문에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박흥숙은 산을 잘 뛰어다니고 짐승처럼 날쌨다는 것과 어머니나 주변사람들에게 했던 것을 보면 박흥숙은 파리 한 마리도 쉽게 죽일 사람이 아니다라는 정도의 언급뿐이었다고 말한다. 김현장은 박흥숙의 일기 속에서 박흥숙의 생활과 심성, 그리고 무허가 집에 대한 철거통보를 받았을 때의 개인적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김현장은 박흥숙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그에 대한 연민과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 어렵게 취재를 마친 김현장은 내방동 이양현의 자취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뜻을 같이 했던 몇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르뽀를 썼다. 무책임하게 휘갈겨댔던 언론의 보도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원고지 126매 분량의 이 르뽀는 당시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대화'' 8월호에 '무등산 타잔의 진상''이란 제목으로 실리게 되었다. 당시 조선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철거반원 김영철도 이 글을 읽게 되었다. 김영철은 그 때의 느낌을 이렇게 말한다. 그 쥐딱지 만한 새끼가 뭐 대단한 것처럼 쓰여 있어서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 놈은 잔인한 살인자일뿐이다. 나라도 사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그래서 뭐하냐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 당시 상황을 회고하는 김영철의 목소리는 박흥숙에게 품었던 분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다시 김영철의 말이다. 박흥숙 재판 때 내가 나가서 박흥숙을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들이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뭐하게 그러느냐며 막았다. 박흥숙의 첫 재판은 77년 7월 2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박흥숙은 법정에서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저지른 범행을 깊이 뉘우쳤다. 나의 죄는 백 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양동에서의 열쇠 수리공 일을 그만두고 60일 동안 굶주려 가면서 무등산에 집을 지었다. 흩어져 살았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었고, 나는 이 집을 어머님께 선물로 바쳤다고 진술하자 방청석은 순간 숙연해졌다. 박흥숙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 번째 재판은 8월 28일 열렸다. 이 날은 박흥숙이 자수한 과정도 언급되었다. 4월 23일자 대부분의 신문들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이모 집에서 검거''라는 제목으로 박흥숙이 검거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박흥숙은 검거된 게 아니라 자수했다. 그것도 경찰이 아니라 당시 중앙정보부를 제 발로 찾아간 것이었다. 박흥숙은 범행 직후 여수로 도피했다. 여수행 기차 안에서 외항선을 탄다는 정모를 만났다. 정모는 '인민 공화국''이니 '남조선''이니 하는 이상한 말을 자주 사용했다. 정모와 여수의 한 여인숙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21일) 아침에 다시 정모와 함께 서울행 풍년호 열차를 탔다. 22일 낮 12시께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정모를 중앙정보부에 신고했다. 그리고 내가 무등산에서 발생한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수했다. 이에 대해 박흥숙의 여동생은 당시 서울에는 이모네 가족이 살고 있지도 않았다면서 오빠를 면회하면서 들었던 당시의 기억을 힘들게 꺼낸다. 사건 직후 나와 어머니가 광주경찰서에 잡혀 있었는데 오빠는 우리 둘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수를 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있었던 일은 밖에서 말하지 않기로 각서를 썼다는 말도 했다고 전한다. 78년 2월 2일 항소심에서 변호사 이기홍은 박흥숙이 자수하면서 신고 한 사람이 진짜 간첩으로 판명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면서 이에 대한 정상도 참작해야 한다는 취지의 변론을 했다. 78년 6월 28일 광주에서는 전남대생 200여명이 '민주학생선언''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 12명이 구속되었다. 그 중 한 명인 박병기(당시 24세, 현 전남대 철학과 강사)는 7월 5일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박병기는 징벌방이라 불리는 독방에 갇혔다. 그때였다. 옆방에서 누군가가 벽을 두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난 박흥숙입니다. 내 이름을 들어봤습니까? 박병기는 깜짝 놀라 아!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란 말이오 박흥숙은 다시 말을 건넸다. 처음 밥을 먹기는 힘들 것이오. 내가 뭘 줄테니 그걸 국에 타서 먹으시오 잠시후 박흥숙은 왼손을, 박병기는 오른손을 자신들의 배식구로 내밀어 무언가를 주고 받았다. 박흥숙이 건네준 것은 '쇠고기 다시다'' 한 봉지와 날달걀 하나였다. 박병기는 11월 출감 때까지 박흥숙과 '통방''(수형실에 갇힌 채 서로 얘기하는 것)를 하며 운동도 늘 함께 했다. 박병기는 당시 박흥숙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박흥숙은 학습능력이 무척 뛰어났다. 머리가 비상할 정도로 좋았다. 토론과 대화 그리고 지속적인 독서를 통해 사회적 의식도 급속도로 바뀌어 갔다. 사회가 뒤짚혀져야 한다는 얘기도 곧잘 했고 그에 대한 논리적 근거도 설득력이 있었다. 어느 날 박흥숙은 박병기에게 중국어 공부를 시작할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병기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데 중국어 공부는 뭐하게 할거냐?고 다소 냉랭하게 받아 넘겼다. 그러자 박흥숙은 내일 죽더라고 새로운 것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문화권도 중국에 가깝고, 앞으로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며 중국어를 익혀야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도 밝혔다. 박흥숙은 혁명을 하려면 몸이 튼튼해야 한다면서 박병기에게 몇 가지 수련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 번은 박흥숙이 '혁수정''(사형수의 허리와 손목을 함께 묶은 가죽 허리띠)에 묶인 채 바닥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박병기는 박흥숙이 뛰어 오른 높이에 놀랐다. 족히 자신이 서있는 머리 높이는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흥숙의 말이 더 걸작이었다. 난 이 자세에서 3m정도는 뛰어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흥숙의 운동신경과 무술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의 이야기와 당시 살해과정에서 건장한 철거반원 5명을 혼자서 '제압''했다는 것을 종합해보면 보통수준은 넘은 것 같다. 여동생은 오빠는 산속을 뛰어다니고 높이뛰기 같은 것을 자주 했다. 고시공부를 하려면 체력이 중요하다는 말도 많이 했다고 말한다. 김현장도 박흥숙의 토굴 공부방 앞에는 기억(ㄱ)자로 꺾인 튼튼한 나뭇가지가 있었는데, 내가 뛰어서도 잡을 수 없는 높이로 뻗어 있었다. 나보다 훨씬 작은 박흥숙이 그 나뭇가지에서 얼마나 자주 운동을 했던지 나뭇가지는 닳고닳아 반질반질해져 있었다고 기억한다. 박병기의 회고에 의하면 박흥숙은 그 사람도(철거반원) 불쌍한 사람인데 후회스럽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참혹한 살인극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예정된 죽음'' 앞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감옥 밖에서는 박흥숙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갔다. 박흥숙 사건은 '수출 100억 달러 돌파''(77년 12월 22일)를 내걸고 외형적 경제성장만을 외치던 개발독재가 낳은 사회적 비극이라는 인식에 공감해 갔다. 급기야 78년 2월에는 '박흥숙 구명을 위한 회''가 결성되었다. /김기곤기자 ggkim@kwangju.co.kr **박흥숙의 초등학교 시절은?** 박흥숙은 1954년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들은 군서면 남죽리 종산마을로 이사했다. 그때 박흥숙도 군서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당시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듬해에는 형마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식구는 박흥숙과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뿐이었다. 당시 박흥숙의 옆 마을에 살면서 같은 학교를 다녔던 박준수(현 48세·영광군 불갑면장)의 기억에 의하면 박흥숙은 머리가 좋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 군서 초등학교 4학년 전체 140명 중에서 항상 1, 2등을 했다. 박준수는 흥숙은 무척 성숙했으며 의지가 강했다. 인내력도 대단했지만 한 번 폭발하면 못 참을 정도로 급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박흥숙과 나 그리고 김병석(현재 외국계 회사 근무)은 늘 함께 다녔고, 우리는 박흥숙이 만든 파이프 총으로 새나 꿩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박흥숙의 증조할아버지는 동학군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당시 운동도 무척 잘했던 박흥숙은 친구들에게 우리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무술관련 서적(김현장이 직접 본 그 서적은 '정도술''이라는 책자이며 동학군의 무예 교습서로 사용)이 있어 그것을 보고 혼자 무예를 익힌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흥숙은 초등학교 졸업후 당시 원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던 비인가 중학교(지금은 없어짐)에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다니지 못하고 미리 광주로 떠난 가족들에게 갔다. 그리고 양동의 열쇠 수리공으로 일했다. 박준수는 77년 4월 친구의 사건을 서울에서 대학 재수를 하는 도중에 들었다. 무척 놀랐지만, 살던 집이 불태워지고 어머니가 쓰러진 일을 당한 박흥숙이 감정을 억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김병석은 박흥숙의 소식을 듣고 군입대를 거부하는 등 큰 충격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77년 무등산 철거반원 살해<하> 1980년 8월 어느 날. 김상윤(당시 32세·현 광주문화자치회의 회장)은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김대중으로부터 정동년(전 광주시 남구청장)이 받은 자금을 이용해 내란을 획책했다는 것이었다. 김상윤이 징벌방 18호실로 막 들어섰을 때 어디선가 18방!하는 청년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혹시 광주사태로 들어온 사람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그렇소! 난 김상윤이라 하오라고 크게 대답하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 형님이시군요. 난 무등산 타잔 박흥숙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박흥숙은 징벌방 1호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김상윤은 77년 박흥숙 사건을 사회구조적 문제가 빚은 가슴 아픈 비극이라 생각하고 박흥숙의 구명에 뜻을 같이 했던 터라, 박흥숙을 만났다는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박흥숙 구명 활동은 김현장이 주도했다. 78년 3월. 김현장은 광주YWCA 이사회를 찾아갔다.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살인자''가 아닌 '인간'' 박흥숙의 구명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김현장은 어렵게 마련한 집이 불태워지고 어머니마저 철거반원에 밀려 실신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죄에 대해 사회의 관용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박흥숙이 극형인 사형만을 면할 수 있도록 하자고 부탁했다. 당시 광주YWCA 이사로 일하고 있던 안성례(전 광주시의원)는 그 때를 회상하며 살인을 저지른 큰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박흥숙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점을 감안해 그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안성례와 같이 YWCA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김현장의 호소를 듣고 그 자리에서 서명에 동참했다. 박흥숙 구명 활동에 참여했던 정현애(전 광주시의회 부의장), 노영숙(현 광주 충장로 베토벤 음악실 운영) 등은 당시 사회운동을 하다 구속된 양심수 가족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송백회''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서명 작업에 들어갔다. 그 때는 거리에서 일반 시민을 상대로 서명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평소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을 찾아 서명 운동을 펼쳤다. 박흥숙에 대한 구명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77년 9월 12일 마지막 결심 공판 직후부터였다. 박흥숙은 이 날 공판에서 나 같은 기형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어떤 극형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결심 공판이후 박흥숙 사건의 이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78년 2월에는 '박흥숙 구명을 위한 회''를 만들었다. 이 구명회는 박순천, 김옥길, 오지호 등 63명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건이라기 보다 그 동안 우리사회가 추진해 왔던 고도경제 성장의 그늘 아래서 소외된 도시 빈민의 무주택 문제가 빚어낸 사건이자, 대책 없이 진행된 행정상의 횡포가 부른 참극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은 박흥숙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78년 2월 18일 항소심 선고공판은 박흥숙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 날 법정에서 박흥숙은 장시간의 최후진술을 했다.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죽어 가는 몸으로서 더 바랄 바가 없다고 말했다.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집이었지만 짓지 않으면 안 되었고, 한푼의 대책도 없이 올 데 갈 데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하며 애절한 호소도 했다. 마지막으로 조국의 무궁한 번영을 빌고 이웃들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내가 가야할 곳을 향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까 합니다라고 맺었다. 이 날 방청석에서 박흥숙의 최후진술을 들었던 김현장은 그 때를 회고하며 자신의 감정을 들춰낸다. 박흥숙은 사형선고를 받고 초연해 하고 늠름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내가 부산미문화원방화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박흥숙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음을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는 무척 힘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충격은 박흥숙에게도 전해졌다. 박흥숙은 비록 몸은 갇혀 있었지만 눈과 귀는 세상을 향해 열어놓고 있었다. 박흥숙이 감옥에서 '광주''소식을 듣고 분노하고 좌절하며 괴로워했다는 소식도 밖으로 들려왔다. 다시 80년 8월 광주교도소. 김상윤은 박흥숙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한다. 키는 작지만, 얼굴과 몸은 통통했다. 살갗도 깨끗해 뽀얀 빛을 띠었고 가난하거나 고생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좋은 인상이었다. 또한 김상윤은 박흥숙은 머리가 좋고 책도 많이 읽고 있었다. 그러나 대화를 하다 보면 시야가 좁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한다. 김상윤의 이런 판단을 뒷받침해 줄만한 일기가 있다. 박흥숙이 18세이던 72년 12월 어느 날의 일기다. 엊그제 당선된 제8대 대통령 취임식 날(12월 27일) 나는 대한 국민의 일원으로서 대통령 각하에게 국민총화를 위한 무궁한 지도력과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기원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게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라고 쓰고 있다. 김상윤이 독재자라 생각해 저항했던 박정희가 박흥숙에게는 축복을 비는 대통령이었다. 김상윤의 기억에 의하면 박흥숙은 늘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무술을 자랑하는 얘기도 가끔 했다. 박흥숙은 사람이 못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하며 내가 지금은 묶여 손을 쓸 수 없지만 내 이마에 붙은 파리를 발로 때려잡을 수도 있다는 말을 '능청스럽게'' 했다. 하지만 김상윤은 박흥숙의 '능란한 무공''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박흥숙은 80년도만 넘기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밖에서 이루어지는 구명운동의 분위기도 큰 도움이라고 생각했지만,박흥숙 스스로 자신의 삶과 죽음에 관한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형을 확정 받은 사람에게 사형집행은 통상적으로 3년 이내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년을 넘기면 사형을 면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사형집행은 큰 기념일 하루 전에 이루어진다고 판단했다. 박흥숙의 계산법이 정확하다면 그에게 80년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 24일은 최대 고비였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박흥숙은 크리스마스를 일 주일 가량 앞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상윤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운명의 날, 24일이 왔다. 이 날 오후 6시 '지도''('지도''라고 쓰인 완장을 찬 일종의 모범 수감자)들을 마지막으로 입방이 완료되었다. 그때였다. 박흥숙은 형님!하고 격정적인 목소리로 김상윤을 불렀다. 김상윤은 일 주만에 듣는 박흥숙의 목소리였다. 무척 흥분된 목소리로 박흥숙은 몸도 기분도 아주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자신이 예측했던 사형집행일(24일)을 넘겼다는 생각에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박흥숙은 지난 일 주일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9시경. 막 죽음에서 빠져 나온 박흥숙에게 교도소 교무과 직원 두 명이 찾아왔다. 박흥숙 나와!하는 소리에 박흥숙은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보안과 직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순히 따라갔다. 통상 교무과 직원은 면회나 감형등을 관장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갖고 동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흥숙은 그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 날 저녁 박흥숙은 자신이 매일 운동하던 광주교도소 운동장 뒷편 사형집행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날은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렸다. 동생과 어머니는 눈바닥에 누워 눈물로 박흥숙을 보냈다. '무기형으로만 떨어져라 그럼 살 수 있다''는 박흥숙의 삶에 대한 간절함을 80년 겨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77년 4월 살해된 철거공무원 유족들 앞에서 무릎꿇고 눈물을 흘렸던 전석홍(당시 광주시장)은 그 때의 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시 공무원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며 애써 언급을 피했다. 당시 살해된 가족들은 박흥숙의 끔찍한 범행에 분노하며 비통해 했다. 80년 12월 박흥숙의 가족들과 그의 구명을 애원했던 다수의 사람들도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 혹독한 80년 광포한 시절이 아니었다면 아마 박흥숙은 살았을 것이라는 얘기도 떠돌았다. 살해된 공무원과 사형 당한 박흥숙. 이들은 모두 번지르르한 외형을 추구하고 개발만을 일삼던 불온한 성장사회와 무원칙한 행정이 낳은 시대의 피해자라는 목소리도 커다란 경종처럼 울렸다. 12월 25일. 박흥숙의 주검은 지금의 광주시 운림동 '배고픈 다리'' 근처 밭 한편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가족들과 강신석(현 65세·무진교회 목사), 안성례, 정현애 등은 간단한 장례를 치렀다. 죽음 직전 박흥숙은 자신을 무등산에 묻어 달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묻힐 땅도 없었고, 당국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결국 박흥숙은 강신석이 마련한 지금의 광주대학교 뒷편 기독교 묘지에 묻혔다. /김기곤기자 ggkim@kwangju.co.kr ** 사건이후 박흥숙 가족은? ** 1978년 박흥숙은 광주 교소도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박병기(현 전남대 철학과 강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몇년 전 나의 경험인데,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문제가 많더라, 내가 직접 법관이 되어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의 박흥숙의 경험은 다음의 이야기와 연관된다. '박흥숙은 74년 친구들과 사소한 일로 싸워 벌금형을 받은 폭력전과 1범''(전남매일 4월 23일자)이라는 딱지를 달았다. 박흥숙의 여동생은 그 내막을 이렇게 말한다. 동네 주머니와 어머니가 우리가 심은 나무를 놓고 다툰 적이 있었다. 그 때 오빠가 싸움을 말리는 중에 아주머니가 넘어져 오빠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아주머니의 부상은 오빠 때문이 아니라 그 전에 염소뿔에 받쳐입은 부상이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염소 주인이 충분한 보상을 해줘 잘 마무리되었다. 당시 박흥숙은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무슨 억울함 당해 법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박흥숙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모멸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이 대물림되는 우리 사회에서 계층상승의 유일한 돌파구는 고시합격이기 때문이다. 박흥숙은 자신의 토굴집에서 고시를 준비했다. 살해 사건이 있기 한 달 전에 광주 동신중학교에서 사법고시 1차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만약. 박흥숙에게 비극의 그날이 없었고, 또 고시에 합격했다면 그의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건 직후 박흥숙의 가족은 운림동 천막집과 계림동 대인시장의 단칸방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왔다. 여동생은 우리 가족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어디서 말 한마디 못하고 죄인처럼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 오빠가 초등학교 때부터 사건 직전까지 꼼꼼히 써왔던 일기를 찾고 싶어했다. 당시 누군가에게 일기를 전달받은 것 같으나 주거가 불안정했던 상황이라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 오빠의 마지막 유품인데 그거라고 꼭 찾고 싶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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