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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뮤지엄

문명 잔혹사/아즈텍에서 고구려까지,

by 마음heart 201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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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인터넷,하늘로 솟을 듯한 고층 빌딩,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등은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 한 이후 끊임 없이 발전,계승시킨 문명이라는 범주속의 톱니 바퀴 같은 존재들이다.

이러한 거대 문명은 인간들만이 자연 화경속에서 살아 남고자 그들만의 집단을 만들면서 형성되었고 A라는 지역에 B라는 문명이 형성되고 C라는 지역에 D라는 문명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들 문명은 대체적으로 만날 기회가 거진 없었다.물론 무역 교류라는 형태로 멀리에서 멀리서 만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본격적인 문명간의 만남은 아니었다 본다.

항해술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힘의 균형은 문명간의 잔혹한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문명과 문명이 처음 만나는 시점은 미묘하며 늘 잔인하도록 슬픈 댓가를 치른다

그것은 마치 수십년을 따로 살다 처음 만나는 남녀와도 같아서 서로의 존재에 대해 탐색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상대에 대해 확신이 들어 서면 그제 서야 비로서 최초의 만남이 시작된다

 



 

 

 

아즈텍 문명을 파괴시킨 스폐인 군대

 

 

아즈텍 신전

[고대 문명이었던 아즈텍은 군사,사회,경제적으로 더이상의 발전 없이 정체 현상을 빗다

결국 스페인 군대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만다]

 

 

 

 

아즈텍 인들에게는 고대부터 전해져 오는 예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깃털 달린 뱀의 형상을 한 케찰코아틀이라는 신이었다.

이 아즈텍 신앙의 에언엔 신의 사자가 지상에 도래할 것이며 그 신의 사자들은 하얀 피부에 네 발달린 거대한 짐승을 타고 우레를 통해 신의 뜻에 이반되는 자들을 벌한다는 것이었다.

1519년 스폐인의 기병대가 처음 멕시코 해안에 당도했을때 아즈텍 인들은 툴의 재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툴이란 뜻은 중남미 인디언들의 언어인 나우아틀 말로 신을 뜻함)

그리하여 1519년 9월, 아즈텍 왕 목테수마는 보석을 가득 실은 수레들을 이끌고 툴이라 믿은 스페인 군대를 맞으러 떠났고 바로 그날 저녁 왕은 살해당하였고 스폐인 군대는 1년후 아즈텍의 수도 테노크니틀란을 파괴하였고 3개월동안을 도시를 포위하여 아즈텍 주민들을 아사시켰다.그렇게 아즈텍 문명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에 의해 지구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물론 아즈텍인들에게도 참사를 피할 수 있는 전조는 있었다. 그것은 1511년에 멕시코 연안에 난파당한 후 원주민들과 친해진 스폐인 선원 구에레로였다

그는 아즈텍 인들의 예언을 접하였으며 곧 스폐인 정복자들이 상륙할 것이라 여겨 원주민들에게 스폐인인들에 대한 정보를 가르쳐 주었고 그들과 맞설 수 있는 쇠뇌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때까지 인디언들의 무기란 것은 화살과 흑요석 날이 달린 손도끼 정도로 스폐인 군대의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무기라곤 쇠뇌밖에 없었다)

스폐인 군대는 승승장구했다.실은 살상에 가까웠다.스폐인 군대를 신의 사자로 여기는 인디언들을 그들은 잠시 잠깐의 환심을 산 뒤에 도륙하면 그만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구에레로의 마을에 도착했을때 스페인 군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군대다운 인디언들을 맞닥 뜨리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스폐인 군대는 몇 주 동안 인디언들과의 전투에 발길을 재촉하지 못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구에레로의 가르침은 아즈텍 전체에 퍼지지 못한 상태였고 스폐인 군대는 약탈자가 되어 아즈텍 문명을 말살시켰다.


 

 

 

 십자군 전쟁,성전으로 얼룩진 욕망의 살육

 

 

 

 

십자군 전쟁의 본래 목적은 예루살렘 해방이었다.

이 신성하고 거룩한 결의의 원정대는 그러나 얼마못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1096년 교황 위르벵 2세의 명에 의해 제 1차 십자군 원정대가 구성되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칼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순례자일뿐이었다. 그들은 목적도 없이 끊임 없이 동쪽으로 향해 갔고 식량이 떨어 지자 갖은 약탈을 자행 했으며 인육을 먹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신성하고 거룩한 뜻을 가진 십자군은 반인 반수의 악마가 되어 겨우 터키 해안에 이르렀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니케아 토착민들이었고 그들은 가차 없이 십자군 병사들을 도륙하였다

 

제 2차 십자군 원정은 4천5백여명의 기사들과 수십만의 순례자로 재정비 되어 떠났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장자 상속법에 의해 모든 봉토를 장자에게 빼앗긴 지차(서자)들이었다.엄격한 종교적 계율에 의해 상속권을 박탈 당한 이들은 타국의 성을 점령하여 영토를 손에 넣고 싶어 하였다.

기사들의 이런 욕망은 현실로 나타나 성을 하나씩 정복할때마다 그곳에 정착하였고 그들끼리 정복한 성과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한예로 타렌트 가문의 보에몽 공작은 사리사욕을 위해 터키 남부의 도시 안티옥을 빼앗기로 결심한다.십자군이 이탈하려는 십자군을 제지하기 위해 서로 피를 흘렸으며 서로의 야욕을 위해 원정나온 동방의 적이나 토후와 결탁하는등 십자군 원정의 본래 순수한 목적은 사라지고 오로지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백인들의 사적 재산으로 전락한 흑인 노예들

 

 

 

 

아프리카에는 흑인들이 토착민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숲과 평원에 터를 잡고 살았고 바다란 것을 알지도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이웃의 탐욕스런 왕 하나가 노예 전쟁을 일으켰다. 포로가 된 이들은 사슬에 묶여 해안으로 끌려 갔다.

포로가 된 흑인들은 끝없는 항해로 대부분 죽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였지만 살아 남은 이들의 삶 또한 나을 것은 하나 없었다

노예로 끌려 간 흑인들에게 생전 처음 보는 바다와 하얀 피부색을 가진 백인들은 말그대로 외계 생명체였다.

알 수 있을까, 그들이 경험 했을 공포를..


이상한 옷을 입고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며 피부색도 이상한 이 백인 이란 종족, 거기에 설상 가상 이 하얀 피부를 가진 종족은 흑인들과 먹는 것도 너무나 달랐다.

백인들의 식사에서 보통 포도주가 등장한다.

상상해보라, 포도주를 먹는 백인을 바라봤을 흑인들의 마음을..

분명 흑인들은 그것이 죽은 동료와 자신들의 피라고 여기며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거대한 문명의 보고寶庫,인도

 

 

 

 

 

앞서 이야기했지만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힘을 겨루는 충돌에서부터 시작한다.

인도에 대한 대규모 침탈의 시초는 터키와 아프가니스탄의 회교도들에 의해 자행되었다.1206년 델리는 그들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5대에 걸친 술탄 왕조가 계속되었는데,그들은 인도 전체를 점령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술탄 왕조는 무너져 갔다. 계속되는 전쟁과 학살에 병사들이 염증을 냈고 인도 문명, 풍습에 동화되어 가며 붕괴하였던 것이다.술탄의 마지막 왕조인 로디 왕조는 타무르 후손인 바뷔르에 의해 무너졌는데 그는 1527년에 무굴 제국을 세우고 인도의 중앙까지 진출하자 무기를 버리고 인도의 음악,문학,미술에 심취하였다. 하지만 오랑제브에 이르러서는 회교를 인도에 강제로 이식하려했고 그것은 거부감과 함께 대대적인 봉기로 촉발되었으며 곧 나라는 분열 되었다.

19세기에는 영국이 인도를 무력으로 정복하는데 성공하지만 결코 나라 전체를 통치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인도라는 거대한 제국 안에 소규모의 영국 문화를 이식하는데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아시아의 후진국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되기까지

 

 

 

일본은 고대 국가에서부터 근대에 오기까지 아시아 삼국중 모든 문물을 받아 들이기까지 늘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런 상황이 역전되는 계기가 찾아 온다.문명과 문명의 만남이 무조건적인 파괴만 오는 것이 아니라 발전 역시 시사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일본에 최초로 상륙한 유럽인은 16세기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다이묘들에게 새로운 유럽의 기술을 이식해 주었으며 그중 하나가 조총이었다. 조총의 도입으로 그 전꺼지 칼을 차고 싸우던 사무라이의 룰은 헝크러지기 시작했다.오다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를 창설하기까지 한다

포르투갈인들이 전해 준 신문명은 일본인들에게 환영받았지만 그들이 해 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기독교라는 외래 종교가 그전까지 일본인들의 사상을 지배하던 종교와 충돌함으로써 일본은 쇄국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일본인이 기독교에 분노한 것은 간단했다. 일본 고유의 종교는 여러가지 종교가 융합된 것인데 기독교 교리의 배타성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모든 신앙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고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그들의 조상신조차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불에서 타고 있을거라 말함으로 위정자들을 분노케 하였다

결국 예수회 선교사들은 학살당하였고 시마바라 폭동이 일어났을때는 기독교로 개종한 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중국이란 공룡에게 도륙 당한 호랑이 고구려

 

 

고구려 장군총

[고구려는 동아시아 역사를 관통하는 전통적 강국이었으나 신흥 강국 중국과의

외교,군사적으로 잘못된 판단 끝에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 하고만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공룡은 지구상에 살아 있는 모든 쇳덩어리를 먹어치우는 불가사리와 너무나 닮았다.

중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며 자신들은 신의 후손이라는 소위 중화 사상이 자리하게 되는데 고대 중국의

식성은 주위의 모든 국가를 통합하기에 이른다

70년에 이르는 고구려 정복도 그 일환인데 중국의 중화 사상과 고구려의 천손 사상이라는 자존심이 맞붙은 일대 대전이었다

중국만큼은 아니어도 고구려라는 나라 역시 문명과 군사,사상적인 측면에서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일 무이하게 문명적으로 중국의 중화 사상에 상처를 주는 존재였다.

결국 혼란했던 중국 문명을 통일한 수나라의 양제가 3백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패하였고 무리한 군사 동원과 내치에 실패한 수나라는 붕괴 하고만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는 처음에는 혼란한 내부 사정으로 평화의 제스처를 취했으나 곧 국력을 회복하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고만다.고구려라는 동 아시아의 호랑이는 중국이라는 덩치 큰 공룡의 수많은 침공을 방어하였지만 오랜 전쟁으로 민심이 이반 되고 지도층의 분열로 멸망 당하고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만다.

그러나 중국의 정복 전쟁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눈에 가시같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하고 고구려 지도층과 문화등을 중국이 대부분 먹어 치우지만 고구려 전체를 통치 할 힘이 없던 중국은 그 힘이 약화된 사이  발해라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국가의 등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고구려의 천손사상이라는 것은 기실 다를 것 하나 없는 사상이었다.

중국이나 고구려나 고대부터 존재하였지만 이 두 문명이 때늦게 충돌한 것은 서로의 힘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서 상대방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기어코 고구려라는 국가를 손아귀에 넣으려 했고 고구려는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주체를 지키려 들었기에 서로간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계가 하나된 시점에 극단적인 문명간의 충돌은 자제되고 있지만 이것을 지탱하는 벽이 무너진다면 또다시 하나의 문명이 또 다른 문명을 잔혹하게 파괴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기실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어찌보면 악연과도 같이 잔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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