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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91·1992 이정훈_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악바리

by 마음heart 2023.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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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1991·1992 이정훈

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악바리



1991·1992년 타격 2연패를 이룬 이정훈은 빙그레 이글스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의 신인왕이며 현역 시절 커리어의 대부분을 빙그레,한화 이글스에서 이뤄냈습니다.이정훈은 대구 출신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1987년 1차 지명으로 내야수 강기웅,류중일과 좌완투수 장태수를 연달아 지명하는 바람에 2차 지명으로 밀리면서 빙그레 이글스의 2차 1순위(전체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습니다.이정훈은 이때 나를 뽑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여 같은 대구 출신인 이강돈,강정길과 함께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에서 핵심 멤버로 활약했습니다.당시 삼성의 전력으로서는 타자보다 투수가 더 아쉬운 상황이었는데 특히 외야 요원은 장효조-혀규옥-장태수로 이어지는 날고 긴다는 쟁쟁한 멤버들로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이정훈이 삼성에 입단했다면 신인왕은 고사하고 주전 자리를 제대로 챙겼을지 미지수,실제로 이정훈이 신인이던 1987년은 삼성이 KBO 리그에서 전무한 팀 타율 3할(원래 유일한 팀타율 3할이었지만 2014년 삼성이 팀타율 .301을 기록하며 깨졌고, 이후 극 타고투저 성향이 지속되며 2017년 KIA, 2018년 두산 등이 팀타율 3할을 넘겼다. 하지만 2014년이 희대의 타신투병 시즌이었기에 wRC+ 등의 세부 스탯은 1987년이 압도적이며 1987년 135.1, 2014년 107.9. 애초에 1987년 135.1이 KBO 팀 wRC+ 역대 1위이다.,2014년은 오히려 wRC+ 기준으로는 삼성의 정규리그 5연패 기간인 2011~2015년 중 두번째로 낮았다. 17년 기아와 18년 두산 역시 wRC+는 87년 삼성보다 낮다)을 기록하며 타자 전원이 거의 3할을 치던 막강한 타선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투수 쪽은 김일융이 트레이드로 일본에 복귀하는 통에 좌완 투수의 공백을 메워야 할 상황. 게다가 그 전해 해태 타이거즈와의 1985년 한국시리즈에서 투수력의 격차를 실감하면서 패했기 때문에, 좌완투수 장태수를 지명한 것은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정훈은 데뷔해인 1987년 22게임 연속 안타 기록을 수립하고 타율 0.335(3위), 안타 124개(1위)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을 수상하였으며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그리고 근성 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악바리 별명과 더불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1991년 17홈런, 1992년 25홈런을 쳐봤을 정도로 장타력도 어느정도 받쳐주던 편이었습니다. 1992년에는 여기에 21도루까지 추가해 20-20을 찍기도 했습니다.

이정훈은 1987년 데뷔부터 1992년까지 3할을 넘지 못한건 1990년(.291) 단 한 해 뿐일 정도로 꾸준했으며,1991(.348), 1992(.360) 2년 연속으로 타격왕을 차지했습니다. 다만 1991년은 김영덕 감독의 타율관리를 빙자한 타이틀 만들어주기로 장효조(0.347)와 같은 팀 (장종훈(0.345)을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얻은 타이틀이라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이정훈 타격왕 밀어주기로 롯데 장효조를 5연속 고의사구로 거르고, 이정훈은 출전시키지 않았고 장종훈은 홈런과 타점 신기록이 진행 중이어서 계속 출전시켰는데 장종훈에게는 이만수 이후 트리블 크라운에 도전할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물론 장종훈의 경우에는 단일 시즌 홈런, 타점 신기록이 걸려있어서 타율이 떨어지는 부담을 감수하고 계속 뛰었으며 당시 장종훈에 대해서는 홈런 신기록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서 타격왕 경쟁은 '이정훈 대 장효조' 구도로 진행되었습니다.이정훈은 이듬해인 1992 시즌에 타율 .360으로 다시 타격왕을 차지해 1년 전의 논란을 자신의 실력으로 떨쳐 버렸습니다. 이정훈 이후로 2010~2011년에 이대호가 타격왕 2연패를 달성하기까지 20년동안 타격왕을 2연속으로 차지한 타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수 시절에 우승 경력은 없는데, 빙그레에서 4번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삼성에 있었을 때도 팀의 부진으로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1999년 한화 코치로 있으면서 첫 우승을 맛보았습니다.1987년부터 1992년까지 1989년을 제외하고 5시즌 동안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1991년 개최된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6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맹타를 휘둘러 한국 프로야구 타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타율(.391)을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국내에서 내로라는 타자들이 일본 투수들의 공에 고전하여 빈타에 시달렸고, 특히 한대화는 1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기기도 했습니다.이처럼 이정훈은 한때 국내 야구계를 대표하는 왼손 타자 중 한명이였습니다.

빙그레 이글스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 장종훈과 이정훈

이정훈은 선수 시절의 전반 6시즌과 이후 5시즌의 기록이 같은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딴판인데, 이는 온갖 잔부상에도 특유의 근성으로 출전을 강행하는 바람에 노쇠화가 급격히 찾아왔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1993년에 손목 부상을 당했는데,손목 통증 때문에 속칭 "대포 주사"로 불리는 데포메드롤을 세 번이나 맞고 나섰으나, 그 부작용은 은퇴할 때까지 고스란히 그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었습니다. 이정훈은 후배를 데리고 무리하게 연습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그 상황에서도 계속 타격 연습을 할 정도로 몸을 무리하다가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렸다고 합니다.일본 및 미국의 의료 수준으로는 충분히 수술 후 재활하면 완치가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오로지 근성만으로 극복하려는 당시 국내 풍토로 수술 시기를 놓쳐 버렸는데 이정훈 본인도 이런 수술 방법이 있는지 은퇴 후에 알았다고 합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교타자가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는데 이정훈은 170cm의 작은 체격에 비해서 단단한 체형과 파워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체격의 한계 탓에 노쇠화가 빠르게 온 것이 아닌가 추정되는데 사실 170cm도 반올림으로 올린거고 실제 키는 168cm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삼성에서 지명하지 않은 건 물론 타선이 충분히 좋았던 덕도 있지만 이정훈의 작은 체격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도 합니다.1993년 시즌부터 성적이 급락했으며, 1994년에 김영덕의 후임으로 부임한 강병철 감독은 이정훈을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정훈은 1994년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 되었는데, 1995년 시즌 후 부임한 백인천 감독 역시 이정훈, 강기웅,이종두 등의 노장 선수들을 싫어하는 편이었다고 합니다.물론 이정훈은 삼성 시절에도 악바리답게 연습벌레였고, 당시 신인이었던 이승엽은 이정훈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하며 그의 좌우명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도 이정훈을 통해 얻었다고 합니다.암튼 이정훈은 이로 인해 1996년 시즌 후 1:2 트레이드로 OB베어스로 이적,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방출당하며 은퇴합니다.고향 팀인 삼성에 있었을 적에는 7번을 달은 적이 있으며(1995년 한 시즌만), 나중에 0번으로 바꿨을 때에는 최저 타율인 0.213를 기록했고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97년 OB에서 뛸 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정 팀 한화 정민철의 노히트노런 경기에 출장하여 대기록의 희생양 중 한 명이 된 적도 있습니다.이정훈은 곡보급 투수라고 불리던 선동열을 상대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를 통틀어 선동열을 상대로 9타수 5안타라는 기록을 찍기도 했습니다. 선동열 역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는 타자로 이정훈을 꼽았는데 아무리 유인구를 던져도 자신감 있게 속지 않고 제 스윙을 가져가는 선수가 이정훈이었다고 합니다.이정훈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전반기 6시즌 동안 성적을 살펴보면 총 583경기에 출장,2.084타수 683안타,타율 0.327,2루타 111개,3루타 29개,홈런 58개,266 타점,396득점,113 도루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타격왕 2연패까지 달성하지만 후반 5시즌은 그야말로 폭망하여 총 335 경기에 출장하여 988타수 235안타,타율 0.238, 8 홈런을 기록하는데 그치면서 11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선수 초반기의 재능만으로는 장효조를 잇는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교타자로 성장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본인 자신과 스포츠계의 부상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선수의 재능을 부셔버린 대표적인 선수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정훈 통산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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