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떠난 최초의 갤릭호에서 애니갱까지 한국이민사 백년의 애환/
인천 가볼만한 곳 한국이민사박물관
대한민국의 인구 오천만,북한의 인구수 이천 오백만 그리고 전 세계 각지의 이민자 칠백여만,지금이야 이민이라는 것이 보편화 되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남의 땅에서 터를 잡고 사는 것이 호락할리는 없다.조선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그 어느 국가보다 폐쇄적이고 역동적이지 못했던 듯 싶다.중화 사상에 심취해 소중화 사상이 조선왕조 오백여년을 지배했으니 이탈리아의 탐험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모험심이 조선에는 결여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회적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다.인천에 가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무한도전의 추격전으로 널리 유명해진 차이나 타운과 수도권에서 반나절이면 바라볼 수 있는 바다가 있는 풍경의 월미도만을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마음이는 이미 3년여전에 문을 연 한국이민사 박물관을 뒤늦게 찾아갔다.월미도에서 하차하여 월미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나서 한국이민사박물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월미도의 바다가 보이고 월미산의 전망대도 눈에 들어왔지만 마음은 박물관으로 총총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그렇게 한참을 가자 드디어 반가운 글씨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주인 잘못 만나 고생하는 내 다리,운동 삼아가 노동이 되는 현장 ㅠㅠ"
조선인121명 우리 나라 최초의 국제 이민 사기에 당하다
2008년에 문을 열어서 그런지 건물이 깔끔하기도 했지만 홍보부족인지 한산하기도 해서 웬지 을씨년스러운 것이 괜히 서러운 마음이 절루 들었다.우리나라가(당시 대한제국)해외이민을 간 시기는 1902년 12월22일 인천항을 떠나 하와이로 떠나면서부터이다.이때 우리 선조들을 태우고 떠난 선박이 갤릭호이다.왜 이때의 이민이 국제적 사기였냐면 바로 무능한 군주 고종과 대한제국의 국력에 기인한다.아직 일제에 의해 합병되기이전의 대한제국은 일본을 제외한 미국이나 러시아등 열강의 힘을 필요로 했는데 이때 미국공사 알렌이 하와이(당시엔 포와라 불렀다한다)의 노동력이 부족한 점을 들어 고종을 설득,이민모집 고시가 전국에 나붙게 된다.국가가 가난하고 힘이 없으면 죽어나는 것은 밑의 백성들 뿐인건 예나 지금이나 만고의 진리인 것,하지만 아무리 못살고 먹을 것 하나 없다고해도 보도 듣도 못한 미지의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 내지는 각오가 필요한 일 것이다.이민공고는 사기에 가까운 감언이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만다.
당시의 조선(대한제국)은 1901년의 대기근으로 굶어 죽은 이들이 엄청났기에 이민공고에 내걸린 조건들에 많은 이들이 혹하였다한다.그때의 이민공고내용은 대충 이러하다.신체 건강한 이들은 언제라도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으며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또한 하와이는 기후가 따스하여 더위와 추위가 없다.원하는 이들에게는 학교에서 교육을 도와주며 학비는 일체 없다.1914년 기준으로 100원이 쌀 11가마니를 살수 있는 액수였는데 당시 월급으로 매월 15원(조선 기준으로 57원정도)을 지급하며 노동시간은 열시간에 일요일은 휴무한다.의식주를 고용주가 지급하고 병이 걸렸을 때도 고용주가 전액 지원하며 일체의 경비를 받지 않는다..뭐 이런 내용이였는데 이에 많은 조선 사람들이 몰리게 된다.
낙원은 없다!애니갱의 노예가 된 사람들
1902년 121명의 조선인들을 실은 갤릭호는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롤루 항에 도착한다.최초에는 121명의 조선인들이 있었지만 일본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20여명이 탈락하고 하와이에서 8명이 귀국조치 당하며 한반도 역사에 최초의 이민노동자는 93명으로 시작된다.그러나 듣던 것과는 달리 하와이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결코 낙원이 될 수 없었다.낙원은 고사하고 짐승과도 같은 노예생활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이런 상황이 알려지자 이민 반대운동이 조선땅에서 전개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자국의 이민 노동자가 불이익을 받는다며 반대하자 1904년 4월1일자로 해외이민 금지령이 내려지기에 이른다.그러나 해외이민금지령이 내려진지 얼마지나지 않아 천여명 조선인들이 국제 이민 사기범들에게 속아 넘어가 멕시코로 팔려가는 사건이 벌어진다.이들이 훗날 영화 애니갱으로 알려진 멕시코 이민 1세대들이다.
국가는 무엇때문에 존재하는가?
국가의 무능력에 죄없는 백성들만이 희생이 되었던 시절,그렇게 타국으로 팔려가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한줌 잿더미로 사라졌을 조선의 사람들,하와이로 이민 노동을 갔던 조선인들은 보통 싱글의 남자들이었는데 이들은 후에 사진맞선,사진 결혼이라는 신풍속도를 만들기도한다.노예와 같은 농장 생활에 적응하고 푼푼이 모은 돈으로 나름 기반을 마련하는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결혼적령기를 지난 하와이 이민자들과 조선처녀들을 중매하는 업체가 기승을 떤다.하지만 이역만리 타국으로 쉽사리 시집 오려 하는 처녀들이 있을리 만무한 법,그래서 등장한 것이 사진이었다.지금에야 흔한 것이지만 당시로써는 듣도보도 못한 최신 맞선이라 볼 수 있었다.조선 처녀들은 하와이에서 날라온 남정네들의 사진을 보며 결심을 굳히고는 했는데 막상 하와이로 가보면 사진 속 인물은 온대간데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그럴법도 한 것이 농장의 뙤약볕에서 하루 온 종일 일하는 이민 노동자들이 사진을 멋드러지게 찍기위해 양복을 빌려 입고 혹은 조명발로 까만 피부등이 숨겨진 사진을 본 조선처녀들은 실상을 알자 사기결혼이라며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던 적이 있었다 한다.
하와이로 간 이민노동자와는 달리 멕시코로 팔려간 이민노동자 1,033명은(이 숫자는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일가족이 압도적이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이들 역시 하와이 이민 노동자와 별반 다를바 없는 노예 생활을 했으며 이런 실상은 멕시코까지 인삼을 팔러갔던 인삼무역상들에 의해 전해졌고 이에 조선(대한제국)정부는 실태 파악을 위해 당시 외무부대신 윤치호를 하와이와 멕시코에 파견하기에 이른다.하지만 이들은 멕시코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하와이에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여비가 떨어진 까닭이었다.당시의 조선(대한제국)이 처한 실정이 그러했다.도리어 민간 차원에서의 구명활동이 정부보다 더 활발했고 이범수나 박희병은 맥시코 현지에 도착하여 진상 조사를 하기까지 했다.그러나 이들도 병에 걸려 도중에 귀국하거나 현지의 텃세로 인해 제대로 된 진상조사에는 실패하고만다.전 세계가 지구촌이라 불리우는 현재,700백만명이 넘는 우리의 동포들도 해외에 거주하고있고 또한 그에 못지않은 해외노동 이주자가 국내로 유입되고 있다.국민이 국가에게 바라고 원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단 한명의 해외 이민자라 할지라도 품안에 품을 수 있는 국력의 신장과 의지가 있을 때 태극기만 보아도 애국심이 솟는다는 그들에게 진정한 조국의 향기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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