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석주명 피살사건
한국의 파브르 곤충학자를 누가 잔혹하게 살해했는가?
석주명 피살사건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나비 연구가이자 생물학자,곤충학자,동물학자,언어학자,역사학자,박물학자로 한국의 생물분류와 제주어의 연구를 주도한 한국 박물학계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나비 사랑에 한평생을 바친 인물로 가장 유명하며,과거 일본 학자들이 대략적으로 연구한 대한민국 나비에 대한 일부 오류도 바로잡았는데 현재 대한민국에 서식하는 나비들의 한국 명칭은 모두 석주명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석주명 피살사건_41살에 죽을때까지 곤충 연구에 완벽한 기한 완벽주의자
석주명은 1908년 10월7일 평안남도 평양부 이문리(里門里)에서 태어났으며 광주 (廣州) 석씨 평양파의 30대손인 석승서(石承瑞)와 전주 김씨 김의식(金毅植)의 3남 1녀 중 2남으로 자라났습니다.송도고등보통학교,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鹿児島高等農林学校)를 졸업하였습니다. 집이 평양부에서 대단히 큰 요릿집을 한 터라 어려서는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일제강점기 치하라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연극을 한 게 독립운동을 부추겼다며 관공서에 불려가 혼이 나거나, 아버지가 요릿집을 하면서 독립군에게 자금을 보태다 들켜서 문초를 당한지라 애국심이 커졌습니다. 이후 고등학교에서 덴마크를 비옥하게 만든 엔리코 달사스에 대해 배우며 농업을 연구하여 조선의 농토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농업에 흥미를 잃었다가 (아마도 농작물의 병충해에 관해) 곤충에 관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어 곤충학으로 넘어갔습니다.그는 총 13년 동안이나 중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처음에는함흥부의 영생고보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재직하였다가 나중에는 그의 스승인 원홍구를 따라서 개성 송도고보에 재직하면서 전국 각지로 나비 채집여행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그는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의 의뢰를 받아서 한국의 나비들의 동종이명 총 목록을 작성한 조선산 접류 목록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을 1940년에 출간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이렇게 해서 일본의 곤충학자들이 게으르게 분류하며 종류만 921종으로 늘려놓은 나비를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정확하게 248종으로 분류하였습니다. 특이한 나비를 보면 그걸 잡으러 몇 시간이나 쫓아 산과 들을 헤매기도 했다고 합니다.배추흰나비를 16만 마리나 사육하며 개체변이를 연구하기도 했고, 국내 대부분의 나비 이름은 그가 지어주었으며 특히 지리산을 헤매며 지리산팔랑나비를 발견한 사례는 유명합니다. 동시대에 교류한 학자로는 조복성 선생이 있으며, 그가 발견한 나비의 종류와 이름은 '조선산 나비목록' 등에 저술되어 있습니다.또한 그는 '조선적인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당대의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함께 국학 운동을 전개하여 펼쳤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면서 학문적인 성과물은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국제주의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석주명 피살사건_여동생은 한복연구가 석주선
석주명의 여동생 석주선(石宙善 1911~1996)도 유명한 인물로, 한복 등 한국의 전통의상 및 장신구 연구의 선구자였습니다.1.4 후퇴때 피난을 가면서 자신의 자료들과 함께 석주명의 나비 표본 및 연구 문서들을 함께 챙기려 했는데, 석주선의 자료는 옷이란 특성상 부피가 너무 커서 모두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석주명의 나비 자료만 챙기고 자신이 연구한 복식 자료는 보따리에 싸서 편지를 써놓고 기둥에 매달아 놨는데,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남겨뒀던 옷은 단 한 벌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석주선은 처음부터 다시 옷들을 모아야 했고, 이렇게 모은 옷들은 단국대 부속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석주선기념박물관을 세웠습니다.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긴 것과 별도로 인간관계는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엉망이었는데 부인 김윤옥과 사이가 매우 나쁘기로 유명해서, 이런 가정사가 당시 신문에 실릴 정도였는데 석주명 본인의 성격이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외골수인데다 부인은 정반대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습니다. 심한 가정불화 끝에 딸 하나만 남긴 채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꽃을 모르는 나비학자'라며 그의 사생활을 가십거리로 다뤘습니다. 훗날 딸의 증언으로는 자세한 것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고모 석주선이 오빠를 감싸주는 것 때문에 둘 사이를 악화시켰다고 합니다. 특히 부인 김윤옥과 시누이 석주선 간 관계는 매우 나빴는데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석주명이 고지식하면서 가정에 무관심한 것으로 특히 석주명은 완벽주의자에다 고집이 너무 강해서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대인관계도 영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잘 해주는가 하면 질책을 많이 하다 보니 역시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휘하의 실습생들에게도 갑질을 하여 그들이 석주명의 갑질에 빡친 나머지 사과하라고 시위까지 했는데, 석주명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결국 휘하 실습생들이 화가 치밀어 집단으로 그만 둔 탓에 석주명은 휘하에 실습생이 한 명도 없어 혼자서 연구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지금보다 상하관계에 훨씬 엄격하던 시절이라 요즘 같으면 갑질이라고 비난받을만한 행동도 당연시 되며 넘어가던 시대였는데도, 아랫사람들이 스승에게 집단으로 항의할 정도였으니 석주명의 평소 행동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석주명 피살사건_일화들
학창 시절 공부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 시간에도 땅콩을 먹고 걸어다니면서 공부를 했으며 이는 교사가 되고 나서도 연구에 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의 오류를 바로 잡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터라 생전에 학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으며 게다가 신분이 일반 교사라 주변에서는 '기껏 교사 주제에 잘난 척은...' 이러면서 냉소를 보냈지만, 어느 날 도쿄에서 온 고생물학자가 그를 찾아 온 뒤로는 주변의 평이 확 달라졌다고 합니다. 일설로는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외국인 교수였는데, 길을 헷갈린 김에 학자로서 관광을 나왔다가 석주명이 연구하던 개성의 연구소를 소개받아서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석주명 본인은 누추하고 그렇게 전문기구 없이 누추한 나비연구소라고 생각해 소개했는데, 그 교수는 참으로 과학적이고 이렇게 전문적으로 나비를 연구하는 곳은 처음 봤다며 극찬했다고 합니다.석주명은 지독한 일 중독자였는데 학교에서는 연구실과 교실 사이의 왕복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 측에 요청해 자신이 맡은 학급을 연구실이 있던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집에서도 방문한 손님을 10분 이상 만나지 않았고,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서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재와 안방을 연결하는 벨을 달아 볼일이 있으면 그걸로 부인을 불렀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러다 보니 부인이 벨 호출을 정말 싫어하였고 부부관계가 크게 벌어졌다는 것. 게다가 부인이 아파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도 간호는커녕 나비 채집을 하러 가버렸다고 하니 남편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일제강점기 말에 부인과는 이혼했다고 합니다.짧은 시간에 수많은 나비 표본을 확보한 비결은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때 200마리나 되는 나비 채집 숙제를 내는 것. 이것이 초딩 곤충채집 여름방학 숙제의 시초가 됐다고 합니다. 석주명이야 온갖 지방에서 사는 학생들 덕분에 채집여행을 다닐 수고는 굉장히 줄였겠지만 학생들은 곤충 채집한다고 고생해서 이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긴지부전나비 — 학명(學名)과 일본명(日本名)에 일치(一致)시켜서 긴지를 땄다. 긴지는 岡島銀次氏의 이름이요 필자(筆者)가 씨(氏)에게 헌(獻)하여 명명(命名)했던 것이다. 씨(氏)는 필자(筆者)의 은사(恩師)이고 일본 곤충학회(日本昆蟲學會) 회장(會長)이었었다.".
- 석주명 저, 『조선(朝鮮) 나비이름의 유래기』, 서울, 백양당, 1947, p.9.
▩석주명 피살사건_국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석주명
광복 이후에도 나비 연구에 최선을 다했지만 6.25 전쟁의 참상을 피해가진 못했는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불려가서 조사받기도 했고,타자기로 연구기록을 정리할 때는 간첩질로 의심받을까봐 삼복 더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했습니다.1950년 10월6일 미군의 폭격으로 전소된 국립과학관의 재건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친구가 "고구마를 삶았으니 먹고 가라"고 붙잡는 통에 시간을 지체해서 허겁지겁 뛰어가다가 대낮에 술을 마시던 국군들 중 1명과 부딪혔는데 그들은 "저기 조선인민군 소좌가 간다."라며 석주명을 붙잡아 총으로 쏴 죽이고 "빨갱이 두목을 잡아 죽였다."라고 낄낄대며 시신을 가마니로 싸서 개천에 던졌다고 합니다.행인들 중에는 석주명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술에 취한 채 총을 들고 설치는 자들의 기세에 눌려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 석주명은 "나는 공산당이 아니오. 나는 석주명이라 하는 나비 학자요!"라고 외쳤지만 술 취한 사내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니 북한군 장교다!", "나비나 인민군이나 다 같은 버러지들이지."라고 조롱 했으며 석주명의 시신은 군인들이 가마니에 싸서 강물에 던져 버렸으나 이후 회의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던 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수습되었습니다.당시 한국 사회는 북한 괴뢰군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죄 없는 사람들을 북한 괴뢰군으로 몰아 죽여 출세하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강간과 약탈을 일삼는가 하면 북한군이 거쳐간 마을 주민들을 "빨갱이들을 도왔다"라는 명목으로 고문하고 학살하는 등 썩어빠진 군경과 경찰, 우익 청년단이 득세하던 시대였습니다. 석주명도 그 전쟁의 혼란스러운 사회에 휘말려 죽은 피해자였는데당시 화가 이인성도 검문하던 경찰의 실수로 어이없게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건들을 고발하면 빨갱이로 매장당하기 십상이었다고 합니다.이 사건은 외신 보도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을 살해한 군인들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는데 군인이 아니라 우익 청년단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습니다.20세기에는 석주명 박사를 다룬 어린이 위인전이나 동화책에서 북한군이 살해했다, 폭격이나 사고로 사망했다 등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석주명 이야기는 그의 사인을 사실대로 알려주면 어린 학생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그냥 일생을 나비 연구에 바쳤다고만 쓰기도 합니다.2001년 웅진출판사에서 출간한 '만화로 만나는 20세기 큰 인물'이라는 위인전에서는 제대로 다뤘는데 국군이 석주명 박사를 사살한 후 시체에 침까지 뱉고 거적때기로 대충 덮어둔 걸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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