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도 혀를 내두를 납치,살해 그리고 도심 총격전과 인질극의 최악의 대만 납치범들
내일의 죠 카지와라 잇키의 딸 납치살인 바이샤오옌 사건
바이샤오옌 사건은 1997년 4월14일 타이베이현(현재 신베이시) 일어난 납치 살인 사건으로 대만 범죄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거론되는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대만에서도 온갖 잔혹한 범죄가 발생하지만 피해자의 연령, 사건이 전개된 상황, 잔혹한 살해 수법 때문에 독보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바이샤오옌(白曉燕:백효연, 1980년 6월 23일~1997년 4월)은 대만의 배우 겸 가수인 바이빙빙(白冰冰:백빙빙, 1955년 5월 17일~)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내일의 죠,거인의 별,공수도 바보 일대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 스토리 작가 카지와라 잇키였으나 카지와라의 폭력과 바람기를 견디다 못해 이혼한 바이빙빙은 바이샤오옌을 임신한 상태에서 대만으로 귀국했고 출산한 뒤 자신의 성을 붙여 키워 왔습니다.대만의 명배우로 소문이 자자한 어머니 덕에 TV에도 자주 모습을 보였지만 바이빙빙은 딸을 유명인의 2세로 키우기보단 그냥 일반인처럼 키웠습니다.
▣내일의 죠 카지와라 잇키의 딸 납치살인 바이샤오옌 사건_사건 발생
1997년 4월 14일, 바이샤오옌은 평소처럼 학교로 등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길가에서 범인들에 의해 유괴되었는데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을 납치하자마자 폭행 후 윤간하고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해 버립니다. 이들은 바이샤오옌의 반나체 사진과 절단한 새끼손가락, 그리고 그녀가 직접 쓴 메시지를 보내 500만 신 대만 달러(한화 약 2억 원) 가량을 몸값으로 요구하며 협박했으며 하루 뒤인 4월 15일 범인들은 바이빙빙에게 돈이 준비되었는지 전화를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립니다.이틀 뒤인 4월 16일 범인들은 돈이 준비되었는지 다시 한 번 전화를 했는데 당시 바이빙빙은 바이샤오옌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몇 분 후에 바이샤오옌이 신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그리고 바이샤오옌이 납치된지 삼일 뒤인 4월 17일 범인들은 바이빙빙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돈이 준비되었는지 물었고 범인들은 몸값을 받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이후 바이빙빙은 어찌어찌 해서 500만 달러를 마련해 범인들에게 건네주고 딸을 되찾으려 했지만, 경찰 측의 누군가가 언론에 바이빙빙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몸값을 건네주기로 한 장소에 기자들이 먼저 진을 최고있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고 장소를 옮길 때마다 반복되자 범인들은 결국 몸값을 받는 걸 포기해 버립니다.
▣내일의 죠 카지와라 잇키의 딸 납치살인 바이샤오옌 사건_또다른 가해자 기레기들에게 울며 사정한 바이빙빙
결국 마지막 전화가 걸려온 다음날, 바이빙빙은 아침부터 기자회견을 열어서 기자들에게 "우리 아이는 백지의(무력한) 아이입니다. 제발 방해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읍소했으며 이 사건의 또 다른 가해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 기레기들에게 울면서 부탁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이후 범인들은 매번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하자 분노하였고, 아지트로 돌아와서 바이샤오옌을 윤간하고 집단 폭행한 끝에 잔혹하게 살해한 후 시신의 손발을 묶어서 타이베이의 하수도에 유기해 버립니다.
바이샤오옌이 사망한 후에도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고 바이빙빙에게 전화로 몸값을 요구했고 4월 25일 타오위안에서 거래를 하기로 했으나 범인들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 같은 날 4월25일,경찰이 범인들의 아지트를 급습해 범인들 중 4명을 체포했고 나머지 3명은 도주합니다.바이샤오옌이 사망한 지 약 일주일이 지난 4월 28일 마침내 바이샤오옌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시신은 훼손이 심각해 발견자는 처음에 사람이 아닌 돼지의 사체로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법의관의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였으나 심한 폭행으로 간장이 파열되었고 복강은 과다출혈로 부풀어 오른 데다 늑골도 대부분 부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지 머리카락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고 두 눈은 도려낸 데다 목이 졸려 죽는 과정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는 혀도 잘려 있었다고 합니다. 귀에는 폭죽을 집어넣어 그 폭발 때문인 듯 고막이 파열되어 있었고, 몸 안에는 두 개의 쇠파이프가 박혀 있었으며 못도 무려 48개나 나왔는데 그녀의 시신을 검시한 베테랑 법의관은 "법의관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토록 끔찍한 시체는 처음 봤다"고 크게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내일의 죠 카지와라 잇키의 딸 납치살인 바이샤오옌 사건_범인들의 잔혹한 살해와 유기,도심 총격전과 인질극
일부 대만 언론이 시신 발견 시의 사진을 그대로 찍어 보도했고 이 사진은 일본에까지 넘어가서 일본 언론들에도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자들의 행태에 이전에 피해자의 몸값을 건네려 할 때의 기자들의 기레기 행태까지 더해져 유족들은 크게 분노해 "기자 유죄"라고 적은 큰 플랜카드를 집 앞에 붙일 정도였습니다.이렇게 참혹한 시신이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장례식은 가발을 씌우고 생전 얼굴을 본뜬 가면을 붙여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경찰은 주범격인 린춘성(林春生:임춘생, 1959년 9월 14일~1997년 8월 19일), 가오톈밍(高天明:고천명, 1960년 6월 18일~1997년 11월 17일,처음 공개수배될 당시 가오톈민(高天民)으로 표기되었으나 린춘성이 사망한 이후 새로 나온 수배지에는 가오톈밍(高天明)으로 표기되었다),천진싱(陳進興:진진흥, 1958년 1월 1일~1999년 10월 6일)을 공개수배했습니다.당시 바이샤오옌 사건에 격노한 리덩후이 총통은 "당장 모든 수를 총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잡아내라. 범인이 저항하면 발포해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8월 19일 범인 세 명과 경관 800명이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경관 두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범인 중 한 명인 린춘성은 6발의 총탄을 맞았고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습니다.10월 23일,다른 한 주범 가오톈밍이 타이베이 성형외과에 난입해 자기 얼굴을 성형하라고 강요했고 의사가 협박을 받아 수술을 마치고 나자 그 범인은 "내 얼굴을 봤으니 죽어줘야겠다."라면서 의사 부부를 살해하고 간호사는 강간 후 살해했지만 11월 17일에 다시 경찰에 발각되었고 결국 본인도 자살하고 맙니다.마지막 남은 범인 천진싱은 도주를 계속하다가 11월 18일 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의 주재무관 관저에 침입해 5명의 인질을 잡고 인질극을 벌였는데 그러나 민진당의 셰창팅이 범인을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 직접 교섭한 끝에 결국 투항하여 체포되었습니다.이후 재판에 넘겨진 천진싱은 1998년 1월22일 5건의 유괴,강도,살인에 대하여 모두 사형, 다른 폭행 사건 등으로 징역 59년 6월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99년 10월 6일,사건 발생 2년 반 만에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내일의 죠 카지와라 잇키의 딸 납치살인 바이샤오옌 사건_사건 이후 떠돈 썰들
바이샤오옌 사건의 원인을 두고 바이빙빙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자들(외성인)이 중심이 된 폭력단을 규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 것이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들은 반일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바이빙빙이 일본인과 결혼해 딸을 두어 눈엣가시처럼 여기다가 바이빙빙에게 보복하기 위해 피해자를 납치해 끔찍하게 살해했다는 것. 물론 명백한 증거는 없으며 이를 진술할 범인 셋은 이미 자살 혹은 사형으로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추적도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합니다.바이빙빙이 피해자를 보통 사람의 아이처럼 키운 이유도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여서 세간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아서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한편으로 피해자가 표적이 된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본인이 당시 리덩후이의 뒤를 이어 차기 총통으로 주목받고 있던 롄잔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언론에 피해자의 납치 사실을 흘린 장본인이 롄잔의 측근이고 평소 반일 성향이었던 롄잔이 바이빙빙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이라는 것입니다. 롄잔은 이를 부인했으나 이 소문의 영향인지 결국 롄잔은 천수이볜에게 패해 민진당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의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쑹추위가 친민당을 만들어 나가는 바람에 보수표가 나뉜 것이었습니다.
바이빙빙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사형제 폐지 반대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며, 대만 정부는 이러한 흉악범죄를 이유로 사형제를 유지하고 매년 수 명씩 사형을 집행하고 있습니다.비슷한 시기에 난징에서도 잔혹도에서 쌍벽을 이룬 댜오아이칭 사건이 일어났으나 해결되지 못하고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일각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바이빙빙의 과오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이 주장에 의하면 바이빙빙은 일본에서 카지와라 잇키를 통해서 야쿠자와 연관되게 되었고 대만에 돌아온 뒤에도 야쿠자와 관계를 유지했으며, 바이빙빙은 야쿠자가 소개한 대만의 어떤 그룹과 함께 대만에서 파칭코 사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룹이 파칭코 사업에 실패하자 바이빙빙에게 투자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바이빙빙이 이를 거부하자 이 그룹은 바이샤오엔을 납치해 투자금을 받아내려다 실패하고 바이샤오엔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입니다. 2015년, 바이빙빙은 1973년 대만 가오슝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다이쭝칭의 살인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다이쭝칭에 의하면 73년 가오슝의 자택에서 누군가에게 총을 맞았지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합니다.그러나 다이쭝칭을 살해하려 한 범인을 잡는 데는 실패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는데, 공소시효가 끝난 이후 다이쭝칭은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다이쭝칭을 살해하려 한 범인이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바이빙빙이었고 300만 대만 달러(한화로 약 1억 5천여만원)를 받았다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에 바이빙빙은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다이쭝칭의 발언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는것이 이 당시는 바이빙빙이 일본에서 임신한 채로 대만으로 돌아왔고 바이샤오옌을 낳은 후 15일만에 일을 했다는 시기이기 때문인데 그런 사람이 300만 대만 달러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한편 이와 별개로 이 사건이 반일 성향과 연관지어서 삼합회와도 연관이 있을 거라는 가설도 등장했었습니다.범인들이 도주 당시 인질극을 벌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주재무관 맥길 알렉산더와 그의 가족이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주범 3명 중 유일하게 체포된 천진싱은 자식으로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체포 후 어느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입양 보내졌다고 합니다.사실 대만에서는 정상적으로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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