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엄마 대너리스&왕조 헨리 7세와 후우마이야 왕조 아브드 알라흐만 1세 그리고 궁예
왕좌의 게임과 쌍둥이처럼 닮은 실제 역사 속 인물들
왕좌의 게임 속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한명인 대너리스 타르가르옌 Daenerys Targaryen,영국배우 에밀리야 클라크(1986년생.157cm.52kg)가 연기했습니다.에밀리야 클라크는 런던에서 태어나 잉글랜드 버크셔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는 극장 음향 엔지니어, 어머니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8분의 1 인도인이라는 것으로 인터뷰에서본인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외증조할머니가 인도 출신 남자와 불륜을 통해 외할머니를 낳았고 때문에 남들보다 어두운 피부색으로 힘겨워 했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는 영국보다 인도를 더 사랑했고, 클라크가 16살에 돌아가셨을 때 인도에 유골을 뿌려드렸다고 합니다.세 살 무렵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일터를 찾았다가 보게 된 뮤지컬 쇼 보트를 통해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후 옥스포드의 세인트 에드워드 스쿨과 런던 드라마 센터 등에서 공부하며 연극 무대에 올랐으며 드라마 센터 시절엔 BBC 드라마 닥터스에 단역으로 출연했습니다.에밀리야 클라크는 2010년 드라마 센터를 졸업한 뒤,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영상화한 드라마 왕좌의 게임 대너리스 타르가르옌 역을 맡게 되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파일럿 촬영 당시에는 탬진 머천트가 해당 역을 맡았지만 정식방영에서는 클라크가 맡게 되었습니다. 드라마는 시즌 8까지 방영되었고 클라크는 시즌 종료 때까지 함께 하며 2019년 5월까지 긴 시간동안 출연했습니다.
2013년,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사라 코나 역을 맡았으며 왕좌의 게임에 같이 출연한 배우 레나 헤디 역시 사라코너 연대기에서 같은 역을 맡았습니다.영화는 2015년에 개봉하여 평론가들로부터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 면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겼으며 2016년, 영화 미 비포 유에서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로 출연했습니다.
왕좌의 게임에서 에밀리야 클라크가 연기한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은 몰락한 타르가르옌 왕조의 후손으로 아에리스 2세와 왕비 라엘라 타르가르옌의 딸이며 애칭은 대니(Dany)입니다.발리리아 계이기 때문에 타르가르옌 특유의 백금발과 보라색 눈을 가져 매우 아름다우면서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왕좌의 게임 세계관 속에서 세르세이 라니스터와 함께 손꼽히는 최고의 미인으로, 출생은 고귀하지만 태어나기 전 왕조가 몰락하는 바람에 공주 대접 받은 적은 사실상 없습니다.큰오빠인 라에가르 타르가르옌의 나이 차이는 25살이나 차이나고, 그로 인해 조카들보다 그녀가 더 어린데이 25살 차이가 얼마인가 하면 남매의 아버지인 아에리스 2세와 라에가르의 나이 차이가 16살정도로, 한마디로 아에리스에게는 손녀 같은 딸이고 라에가르에게는 딸 같은 여동생입니다.
작은 오빠 비세리스를 두려워했으며 도트라키의 칼 드로고와 정략결혼하고 칼리시의 경험을 통해서 오빠에게서 벗어나 용감하고 강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미숙한 면도 많은데 노예들을 힘을 통해 조건 없이 해방시키듯 약자를 위해서 힘을 쓰지만 강자에게는 잔혹하게만 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하피의 아들들의 테러가 계속 일어나자 미린 귀족들로부터 잡은 인질 아이들을 죽일 것을 요구하는 스카하즈 모 칸다크의 말을 거절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하피와 연관이 있는 걸로 의심되는 상인의 딸들을 고문하라고 명령하는 등 일관성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또한 측근들의 충언이 마음에 안들면 화를 잘 내며 독선적으로 그들의 충언을 거절하기도 하는 등 충동적인 면모도 보여줍니다.대너리스는 노예제 폐지로 인해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고 곳곳에서 문제와 마찰이 빚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노예제에 대해 좀처럼 타협하려 하지 않는 조금은 독선적이고 고집스런 성격은 오히려 대너리스가 웨스테로스의 혼란을 잠재우고 백성들을 편하게 할 성군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대너리스가 로버트 바라테온처럼 훌륭한 정복자가 될 수는 있지만 성군이 될 재목은 아닌 것 같다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미린 지배를 전후해 주목받지 않았던 정치력 부족이나 폭력적인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으로 미사라 불리게 된 이후 대너리스는 미사의 면모와 용들의 어머니의 면모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미사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려는 면모이며, 용들의 어머니는 전쟁, 정복, 불과 피로 대표되는 타르가르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면모이기 때문입니다.왕좌의 게임 속 대너리스는 웨스테로스 대륙에서 벌어진 일과는 동떨어져 있는 또다른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지만 미린인을 제외한 대너리스의 주변인들은 대너리스에게 하루빨리 웨스테로스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으며, 특히 바리스탄 셀미는 대너리스가 웨스테로스에 입성한다면 영주와 백성들은 라에가르 왕자의 여동생을 환영하며 깃발을 들 것이라 타르가르옌 왕가의 재건을 촉구하기도 합니다.이런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이라는 캐릭터는 실제 역사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어떤 역사적 인물이 대너리스 타르가르옌과 닮은꼴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튜더 왕조 개창자 헨리 7세
왕좌의 게임 용엄마 대너리스 타르가르옌과 닮은 역사적 인물로는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는 들 수 있습니다. 장미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헨리7세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잉글랜드의 미래가 대양으로의 진출과 식민지 개척에 달려 있다고 보고 그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헨리 7세는 영국 해군의 초기 모습을 갖추었으며, 대양 항해를 가능케 하는 정책들을 통해 영국이 미래에 제해권을 장악할 기초를 마련했는데 이러한 노력을 통해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전해 나갈 본격적인 기틀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어린 망명객에서 튜더 왕조를 개창하다
헨리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어머니는 그를 두고 곧 재혼했습니다. 헨리는 삼촌인 펨브룩 백작의 손에서 자랐는데 마거릿 왕비가 에드워드 4세에게 패하고, 헨리 6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가 살해된 튜크스베리 전투(1471년 5월) 이후 펨브룩 백작은 어린 헨리를 데리고 브르타뉴 공작령으로 피신했습니다. 일종의 정치적 망명을 했던 것입니다.헨리가 성인이 되면서 리처드 3세의 찬탈로 요크 왕가가 분열되고, 버킹엄 공작의 반란이 일어나자 랭커스터 가문 사람들은 모두가 헨리의 왕위계승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헨리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가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위해 싸울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들이 헨리를 적극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가문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적자에 가까운 왕실의 핏줄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 마거릿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고, 할머니는 헨리 5세의 왕비였던 프랑스의 왕녀 발루아의 캐서린이었습니다. 또 그의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복형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랭커스터 가문이나 요크 가문의 혈통이 다 끊어진 상태에서 헨리는 랭커스터 가문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였습니다.리처드 3세는 조카를 살해하면서 왕위에 올랐다는 의혹 때문에 좀처럼 귀족과 젠트리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었으며, 일부 귀족은 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랭커스터 가계의 왕위계승권자이며 프랑스에 망명해 살고 있는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리처드의 왕권은 헨리 튜더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1485년 8월 7일 헨리 튜더는 군대를 이끌고 밀퍼드 헤이번에 상륙한 뒤 진격하다가 보스워스 평야에서 리처드가 이끄는 군대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튜더 군대의 측면 공격과 정면 공격에 리처드 군대의 병사들이 사기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한 뒤에도 리처드는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으며 늪에서 무참히 살해 당합니다. 이 전투는 장미전쟁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였고, 이를 계기로 장미전쟁은 막을 내리고 왕실도 튜더 왕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보스워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헨리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는데 헨리는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통해 두 가문의 왕권을 통합하여 장미전쟁의 진정한 막을 내리고, 왕위에 올라 영국 왕조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튜더 왕조를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헨리 7세의 즉위와 결혼 이상의 것이 필요했기에 헨리 7세는 특히 군주제를 회복하는 동시에 요크 가문의 잦은 반역 음모로부터 왕권을 위협받지 않도록 방어해야만 했습니다.헨리 7세의 통치 초기에는 그의 왕권을 위협하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로벨 경과 램버트 심널, 그리고 퍼킨 워벡의 반역 시도였습니다. 1486년, 과거 리처드 3세의 시종이었던 로벨은 요크파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반역을 일으켰지만 그의 거사는 쉽게 무너졌고 그는 반역자로 처형 당합니다. 결국 로벨이 소유했던 광대한 토지는 몰수되어 헨리 7세의 소유지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 1487년 옥스퍼드셔에서 온 하층민 출신의 젊은이 램버트 심널은 헨리 7세를 왕위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를 했는데, 그는 아일랜드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어 더 위협적이었지만 6월 16일 심널은 스토우크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헨리 7세는 붙잡힌 심널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가엷게 보아 그의 추종자들을 처형하거나 사면한 뒤, 그를 왕가의 하인으로 삼아 왕실의 부엌일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1490년대 중반에는 다시 장미전쟁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1496년 퍼킨 워벡은 에드워드 4세의 가장 어린 아들인 요크 공 리처드의 행세를 하면서 잉글랜드를 침범했습니.워벡의 음모는 스코틀랜드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쉽게 제압되었으며 퍼킨 웨벡은 1497년 8월 헨리의 손에 체포되었고, 1499년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헨리 7세는 잉글랜드의 미래가 대양으로의 진출과 식민지 개척에 있다고 생각하고 국가가 크고 작은 상선들을 건조하여 상인들에게 대여함으로써 대양진출이라는 그의 꿈을 실현시켜 나갔으며 또한 헨리 7세는 결혼 동맹을 통해 튜더 왕조의 위상을 높였습니다.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왕위계승자인 첫째 아서 왕자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는데 15세기 후반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스페인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틸의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막 하나의 거대 왕국으로 통합되고 있었습니다. 헨리 7세는 1489년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왕녀인 아라곤의 캐서린을 며느리로 맞기로 합의,당시 두 사람은 어렸기 때문에 1501년에 이르러서야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1501년 스페인의 캐서린과 잉글랜드 아서 왕자의 결혼으로 튜더 왕가의 대외적 위상은 높아졌습니다.헨리 7세는 활발하게 많은 업적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1503년 엘리자베스 왕비가 먼저 죽자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으며 헨리 7세는 쉰두 살의 나이로 1509년 4월 숨을 거뒀습니다. 그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히던 때의 잉글랜드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고, 빈발했던 반란의 소용돌이는 자취를 감추고 평화와 안정 속에서 활기차게 번영하는 모습을 보이며, 왕국의 밝은 미래가 열렸다고 합니다.
대너리스의 또다른 닮은꼴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1세
왕좌의 게임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의 역사적 또다른 닮은꼴로는 후우마이야 왕조를 개창자한 쿠라이시의 매라고 불리며 스페인에서의 그의 영토는 압데라만(Abderraman)이라 부르기도 합니다.우마이야 왕조의 10대 칼리파 히삼의 손자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히샴의 아들 무아위야와 베르베르족 출신의 여성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아브드 알라흐만 1세의 생애는 드라마틱한데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족들을 모두 학살했을때 간신히 혼자서만 살아남아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는데 이에 대해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수영해서 빠져나왔다고도 합니다. 베르베르족의 도움을 받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인 모로코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만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까지는 아니고 몇 사람 더 살아있었는데 같이 다마스쿠스를 탈출했으나 도중에 헤어져버린 누이들과 그의 아들 술레이만 등으로, 이들이 알 안달루스에 도착하자 감격한 알 라흐만은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했다고 합니다.당시 스페인의 우마이야 추종세력의 도움으로 아바스 휘하 스페인 총독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코르도바에 정착하여 756년 우마이야조를 세웠습니다. 건국 과정 역시 드라마틱한데, 불과 3백의 지지자들과 함께 수천 혹은 수만의 총독 군대와 싸워 연전연승하였는데 전투 시에는 늘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무력이 강했기에 적들을 여럿 베어 넘겼다고 합니다. 또한 총독 유수프 알 피흐리에게 여러차례 사면을 베풀었으나 그가 끝내 저항을 지속하자 잡아 죽였습니다. 이러한 정복에 있어 아불 라흐만은 우마이야 왕조의 왕자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상태였으므로, 이베리아 반도 내 무슬림들은 그의 통치를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이전 우마이야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도 어느정도 선정을 펼쳤습니다. 나중에는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조과 아바스 왕조가 각각 쳐들어왔고 둘이 손을 잡기도 했지만 둘 다 격퇴했습니다.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언젠가 바그다드로 돌아가 찬탈자이자 가족들을 죽인 아바스 왕조에 복수하고 왕위를 되찾는 것이 꿈이었지만, 아바스 왕조와 스페인 하나뿐인 알 라흐만의 힘의 차이가 워낙 커서 꿈일 뿐이었다고 합니다.763년 압바스 조의 이프리키야 총독 알 알라 이븐 무기쓰가 안달루스 서남부의 베자를 장악하고 도전해오자 수세에 몰린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수도 코르도바까지 포기하고 카르모나 요새에서 항전하였습니다. 알 알라는 카르모나를 포위하였고, 2개월간의 포위 끝에 성내이 식량이 고갈되자 이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최후의 수단으로 7백명의 결사대를 편성해 포위를 뚫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성문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칼집을 화염에 던진 그는 아사하느니 전사하자고 외치며 나아가 방심하던 포위군을 공격,불의의 기습에 적군은 와해되었고, 알 알라는 전사하였습니다. 극적으로 승리한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압바스 장교들의 수급을 소금에 절여 메카 순례객들 편에 바그다드로 보내었다고 합니다.야사에 의하면 쿠라이시의 매라는 별명은 놀랍게도 필생의 라이벌이자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었던 알 만수르가 지어 준 별명으로 쿠라이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일족, 초대 정통 칼리프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의 우마이야 가문과 아바스 왕조의 아바스 가문을 모두 포함하는 무슬림 최상위 혈통의 일족을 말합니다. 어느 날 정원에서 쉬고 있던 알 만수르가 주위의 신하들에게 "쿠라이시의 매는 과연 누구일까?"라고 가벼운 질문을 던졌는데 신하들 중 하나가 당연히 알 만수르 자신을 말하는 줄 알고 "당연히 칼리프인 당신 아니십니까?" 하고 되묻자 알 만수르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 난 아니야."라고 하자 신하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쿠라이시 출신의 여러 영걸들 이름을 차례로 말하자 전부 고개를 내젓더니 "쿠라이시의 매라고 불릴 인물은 아브드 알 라흐만 한 사람 뿐이다. 휘하에 병사 한 명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와 유럽을 돌아다니며 오로지 믿을 것은 자신의 용기와 지혜 하나만으로 무수한 강적들을 물리치고, 기독교도 침략자들로부터 국경을 지켜내고, 수많은 반란을 진압하여 마침내 대제국을 건설했다. 쿠라이시의 매라는 이름은 이 사람 아니고는 불릴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후고구려 건국자 궁예
개인적으로 앞의 두 역사적 인물들보다 좀 더 왕좌의 게임 속 대너리스의 삶과 죽음까지 빼다 박은 인물은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라고 여겨집니다.궁예(弓裔, 857?~918, 재위 901~918)는 진골의 집안에서 태어나 ‘나라를 망칠 놈’이라는 예언과 함께 모진 인생역정을 시작하였지만 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을 모아 드디어 후고구려를 세우는 왕이 되었습니다. 궁예는 미사라고 숭상받은 대너리스처럼 살아있는 미륵으로 추앙 받았으며 관심법(觀心法)이라는 특유의 술책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습니다.대너리스가 왕좌의 게임 막바지에 흑화되듯한 궁예 역시 포악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심을 잃고, 드디어 부하인 왕건에 의해 내몰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대너리스 역시 가장 믿었던 존 스노우에게 죽음을 맞습니다.궁예의 출생을 살펴보면,궁예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으로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유력 왕족의 후손임을 내세우려 했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실은 진골 가운데서도 몰락하여 지방으로 흩어진 집안의 후손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궁예의 출생과 대너리스의 출생 모두 몰락한 왕가에서 출생한 후 버려지듯 고국을 떠났다는 것입니다.외가에서 태어난 궁예는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하니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일관(日官)의 예언을 듣는데 데려가서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아이를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마침 젖 먹이던 종이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으며 궁예는 승려로 살다가 진성여왕 5년(891) 무렵, 조정에서는 유력한 신하들간에 패가 갈리고 도적은 벌떼처럼 일어나자 절을 나선 궁예는 처음에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갔지만 기훤이 오만무례하자 이듬해 양길(梁吉)을 찾아갑니다. 양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습니다.궁예가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우두머리로 올라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절을 나선 지 3년 만인 894년, 궁예는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무려 3천5백 명 이상의 대군을 편성하였는데 이때 그는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궁예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습니다.궁예가 미륵보살로 불리던시기가 이즈음인데 세달사의 분위기나, 신라 말 강릉에 미륵사상을 전하는 진표(眞表) 같은 승려의 끼친 영향이 궁예의 통치술 구축에 일조하였는데 이때의 미륵보살 궁예는 곤궁한 신라 말의 백성에게 그야말로 미륵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세력이 커진 궁예는 철원으로 그 거점을 옮긴 후 개성 출신 왕건을 부하로 맞이합니다.훗날 가장 신뢰하던 부하 혹은 동료에게 배신당한 결말까지 궁예와 대너리스는 무척이나 닮은꼴이기도 합니다.미륵을 자처하며 왕위에 오른 궁예의 통치를 전제적 신정주의라고 명명한 연구자의 견해를 따르자면, 신정이었기에 백성의 신임을 얻었고, 전제였기에 백성에게 버림받은 이가 궁예였다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엄청난 성공 끝의 피로감을 그는 끝내 이겨내지 못한 것일까.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道)라고 부르게 하였고,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변덕에 가까운 그의 통치 스타일은 처음 그가 지녔던 동고동락과 공평무사의 이념과 거리가 멀었으며 끝내 지방 호족들의 반발과 왕건의 배신을 불러 일으키며 궁예라는 이름 석자를 실패자로 낙인 찍히게 합니다.오늘은 왕좌의 게임 속 가장 강력한 인생역전 스토리의 주인공 대너리스 타르가르옌과 실제 역사 속 빼다 닮은 쌍둥이같은 인물들-헨리 7세,아브드 알라흐만 1세 그리고 궁예등을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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