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김태리 주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조선인 미 해병대장교 유진 초이
실존 인물 고(故) 황기환 애국지사
2018년 제작비 430억이 투입된 24부작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현재는 넷플릭스에서 독점 작품 형태로 전 세계 넷플릭스 서비스 국가를 대상으로 스트리밍하기도 합니다.태양의 후예,도깨비의 김은숙 작가와 이응복 PD가 3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주연배우로는 이병헌과 김태리가 유진 초이와 고애신 역할을 맡았으며 제작비 430억의 70%정도인300억을 넷플릭스에서 투자했습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적 배경은 구한말로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얻는 조건으로 조선을 일본의 손아귀에 넘겨버리는 밀약을 체결합니다.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날개를 단 일본은 마침내 거친 야욕을 드러내고, 애신(김태리 분)의 조선은 힘없이 부서져 내립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을 맞아 제작,방송한 시대극으로 미국의 이권을 위해 조선(朝鮮)에 주둔한 검은 머리의 미 해병대장교 유진 초이(Eugene Choi)와 조선의 정신적 지주인 고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애신 애기씨의, 쓸쓸하고 장엄한 모던 연애사이며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무명의 의병(義兵)들.노비로 백정으로 아녀자로 유생으로 천민으로 살아가던 그들이 원한 단 하나는 돈도 이름도 명예도 아닌, 제 나라 조선(朝鮮)의 주권이었습니다.제국에 흔들리고 부서지면서도 엄중한 사명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의,애달프면서 통쾌하고 묵직한 항일투쟁사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자기 구성원들에게 고통을 준 사회라고 해도 그 구성원들이 나서서 지킬 가치가 있는가?'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침략자인 일본 제국은 매우 악랄하고 교활한 세력으로 묘사되지만 그 피해자인 조선(대한제국)도 결코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조선의 억압적인 실상과 후진적인 사회 구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며 조선의 인물들도 선인이든 악인이든 하나같이 구시대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로 나옵니다. 그나마 청렴한 충신으로 묘사된 이정문이나 고사홍마저도 유진이나 동매의 과거를 듣고 안쓰러워하기는커녕 그를 "천출의 자식", "출세를 위해 조국을 배신한 자", "백정 놈의 자식"이라 부르며 구시대적인 인습에 사로잡혀있음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당장 노비 문서를 태워 백지화시키고 백정 등 천민들의 대우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폐정 개혁안을 조선 조정에서 받아들인 전주 화약이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에서 불과 10년쯤 전 동학 농민 운동 때 일이며 그 과정에서 함께 진행된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신분제는 공식적으로나마 철폐됐습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조선에는 백정이나 천민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당시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적 모순이 몇 년짜리 개혁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뿐더러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기 더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드라마 미스터 썬샤인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조선의 전근대적 체제 때문에 상처 가득한 과거를 지닌 인물들로 주인공인 유진 초이는 사회의 최하층 계급인 노비였던 바람에 부모를 잃고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기를 겪다가 이국으로 건너가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했으며 구동매 역시 최하층 계급인 백정으로 태어나 온갖 차별과 학대에 시달리다가 일본으로 도망가 장성했습니다. 쿠도 히나도 아버지에 의해 일본인 부호에게 팔려갔었으며 고애신의 스승이자 의병인 장승구도 조선에서 아버지를 잃고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과거가 있습니다.억압에서 자유로웠던 이들조차 한 가지씩 마음의 짐과 족쇄를 지니고 있었는데 유진 초이와 더불어 또다른 주인공인 고애신은 조선의 최고 기득권층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 진출은커녕 기본적인 자기계발이나 교육의 혜택도 눈치 보며 받아야 했으며 김희성도 역시 최고 기득권층에 속하지만, 그 지위를 남용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 조부와 친부 때문에 깊은 죄책감에 시달립니다.드라마 미스터 썬샤인 속 인물들의 과거와 그로 인한 상처가 조명되면서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는데 유진 초이가 고애신에게 얼어붙은 강 한복판에서 건네는 질문은 드라마의 또다른 주제의식을 함축적이면서도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대가 구하고자 하는 조선은 노비도 백정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오?"물론 이 의문이 제기되는 선에서만 끝나지 않고 드라마 후반부에 이를수록 그 대답과 결론이 분명하게 제시되는데 결국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모두 끝내 조선을 위해 싸우기로 결정을 내립니다.여기서 그들이 본질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조선은 '왕정국가 조선'도 '사회로서의 조선'도 아니며, 다만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조선이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유진과 동매는 국가이자 사회인 조선으로부터 버림 받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신 주변의 공동체에 머무르며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그들과 그 공간만큼은 지키고자 결심하는 것입니다.실제 역사속에서도, 의병 초기에는 '복벽주의(왕정복고)'가 목표인 의병단체들이 많았고 같은 의병들간에도 신분차별이 있었으나, 이들은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 한계에 부딪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결국 왕정국가가 목표는 아닌 자들이 중심이 되어 1945년 해방 직전까지의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삼균주의 등의 사상을 내세운 바 있습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주한 미8군사령부 작전부사령관 패트릭 도나호 소장이 자신의 트위터에 한국에 올 사람이라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꼭 보라며 추천 글을 올렸으며 주한미군사령관 로버트 에이브람스도 이를 리트윗하며 '의무는 아니지만 강력히 권장한다'며 추천했습니다.한국에 올 사람 뿐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드라마 미스터 션싸인은 분명 봐야할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싸인 속 중요인물 유진 초이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는데 어릴 적 미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 해병대장교로 다시 조선에 오게 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그리고 드라마 속 유진 초이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실존했었다는 사실입니다.물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유진 초이와 실존 인물 황기환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은 유진 초이는 구한말에서 국권 침탈 직전까지 활동한 반면, 실존인물 황기환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시점에서 주요 활동을 펼쳤다는 것입니다.둘의 공통점을 따지자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것 정도입니다.드라마 속 유진 초이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전했지만 실존인물 황기환은 1차 세계대전 참전자라는 것이 다릅니다.황기환은 애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로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던 분으로 포상자 공적조서(출처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황기환은 평안도 순천군(현 평안남도 순천시) 출신이지만 드망즈주교 일기 (1920년 3월 12일자)에 따르면, 황기환은 188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그의 가계가 어땠으며,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생애가 어땠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서 알 수 없다고 합니다.황기환은 1904년경 미국으로 건너갔고, 1906년 6월까지 공립협회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는데 특정 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걸 볼 때 아마도 독학으로 학업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미스터 썬샤인 유진 초이 실존인물 황기환_조선인 최초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하자, 황기환은 여기에 지원해 유럽전선으로 파견되어 기독교청년회 소속으로 미국 병사들을 구호하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그가 미군에 지원한 동기는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미국인으로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인 듯합니다.황기환이 유럽전선에 있던 1918년 5월 9일 징집법이 공포되면서, 누구든지 전쟁 때 군복무를 하면 미국시민이 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가 개정된 징집법의 수혜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프랑스 파리에 남아있던 그는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미군 지휘관에게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 파리로 이동했으며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황기환은 김규식에 의해 한국대표부 서기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황기환의 미군 복무와 파리의 한국대표부 합류 사실은 중국신문 신민일보 1919년 8월 14일자 기사에도 보도되었습니다.
▒미스터 썬샤인 유진 초이 실존인물 황기환_파리의 독립운동가
황기환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한국대표부 일원으로서 대유럽 홍보 활동 및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꾀했는데 김규식이 1919년 8월 8일 미국으로 떠나면서 부위원장 이관용에게 위원장 대리직을 맡겼지만, 이관용은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여하느라 스위스 제노바로 떠났고 한국대표부는 사실상 황기환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졌습니다.1919년 8월 23일, 황기환은 프랑스 신문 라 프티 르프브리크(La Petit Republiq)와 인터뷰했는데 황기환은 한국인이 요구하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자치나 개혁이 아니라, "한국에서 일본 행정의 철수, 일본이 강탈한 권한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또한 한국인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절대적인 독립을 얻기 위해서이고, 한국인들은 일본정부가 한국에 도입하려는 개혁은 무엇이든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과 일본이 화해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한국이 독립하고 양국 사이에 좋은 이웃 관계가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미국에서 간행된 한글신문 신한민보 1919년 9월 23일자 기사에 소개되었습니다.1919년 8월 25일, 김규식은 워싱턴에 도착한 직후 구미위원부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이와 동시에,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은 정식 서기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위원장 유고시 위원장 직무를 대리할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황기환은 부위원장 이관용이 파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9월이 되어도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고, 황기환은 이관용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이관용은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도 할 수 있었던 반면, 황기환은 프랑스어 구사 능력이 없어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자신이 없었고 게다가 한국대표부가 지불해야 할 고지서들이 쌓여갔지만, 이관용이 돌아오지 않아서 돈을 갚을 여력이 되질 못했습니다.여기에 이관용의 발언이 문제를 야기했는데 그는 루체른의 라 파이예예(La Feui)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자유롭게 해결할 수 있는 한 일본·중국 혹은 다른 어떤 나라의 지배 아래 있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조소앙은 파리에서 이관용을 비난했고, 황기환 역시 김규식에게 편지를 보내 이관용의 발언은 잘못 되었으며, 신문기사가 오보이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김규식도 이관용의 발언이 '절대 국수적 독립정신'에 위배된다는 답신을 보냈습니다.결국 이관용은 여러 문제로 인해 파리위원부 내 인사들과 마찰을 빛다가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이유로 부위원장직을 사임했으며 홀로 파리위원부를 이끌게 된 황기환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어떻게든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했습니다.황기환은 런던에 고창일을 보내 대유럽홍보를 담당하게 하려 했지만, 김규식은 인력과 자금이 없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고창일은 윤해와 함께 한국의 독립과 평화, 자유한국 등을 프랑스어로 발표한 뒤 1920년 5월 상하이로 돌아갔습니다.이처럼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황기환은 1920년 1월 8일 인권옹호회와 오랜 동안 의논 중이던 한국문제대연설회를 중국문제와 함께 파리지리연구회에서 개최하였습니다.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된 연설회는 프랑스 하원 특파로 한국과 중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파리 대학교 교수 샬레(Félicien Robert Challaye)의 한국독립운동 목격담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참살당한 인물들을 수록한 슬라이드 상영, 사동발(謝東發) 박사의 한국근세사(韓國近世史) 보고로 이어졌습니다.황기환은 뉴욕 헤럴드 파리지부와 인터뷰했는데 인터뷰에서, 한국문제는 한국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고, 한국인은 자유와 자결을 위해 제국주의와 싸우는 중이며, 이천만 한국인의 요구는 절대 독립으로 어떠한 강압도 한국인의 기백을 꺾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황기환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드망즈(Florian Deman)주교와 면담했는데 드망즈 주교는 황기환이 당시 32세이고, 서울에서 천주교 신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세례성사를 받았고, 12년 전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으며,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2년간 프랑스에서 전쟁을 하였으며, 동원이 해제된 후에도 계속 남아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황기환이 그를 방문한 이유는 드망즈 주교로부터 한국 상황을 정확히 전해듣고, 선교회의 지원을 받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없어서 분명하지 않습니다.
▒미스터 썬샤인 유진 초이 실존인물 황기환_런던의 독립운동가
1920년 김규식은 파리대표부를 영국 런던으로 이전시켜 구미위원부 런던지부로 삼기로 결정,황기환에게 편지를 보내, 이 결정은 프레더릭 매켄지와 이승만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과 상의한 결과라며, 2달 이내에 런던으로 옮기라고 지시했습니다.황기환은 파리사무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허사가 됩니다.결국 1920년 9월 2일,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런던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런던에서 김규식의 의뢰를 받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영국 정치인들에게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W. L. 윌리엄스에게서 런던 업무를 인수했습니다.또한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창립대회에서 연설했는데 자신이 런던에 온 이유는 영국이 민주주의의 원천이며 세계의 고통 받는 민족들의 등대이기에, 그리고 1883년 한영조약 체결 이후 좋은 친구였으니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으며 런던의 자유교회, 세례교회, 예수교연합회에서도 한국의 참상을 보고했습니다.1달 후 파리로 돌아온 황기환은 1920년 1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연맹 개회식에 공식대표로는 아닐지라도 개인적으로라도 참석하기를 희망하였지만 김규식의 부재 중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 직을 수행하고 있던 현순으로부터 불가 통보를 받았고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못합니다.황기환은 런던과 파리를 오기며 대유럽 홍보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20년 4월 23일 이탈리아 샹레모에서 열린 평화회의 최고회의에 한국독립안 토론 요구를 갱신하는 취지의 전보를 보냈으며, 5월에는 잡지 자유한국 제1호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1,000부 발행했는데 자유한국은 1921년 5월까지 발행되어 유럽의 각 언론기관과 정부 및 저명인사들에게 보내졌습니다.1920년 12월에는 구주의 우리사업을 간행하여 설립 이후부터 추진한 파리위원부의 대유럽 외교화동을 정리했는데 이 책자의 언어는 국한문 혼용이었는데, 그것은 이 책자가 미주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관심을 두었던 한국인들을 열람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이 책자에서, 영국은 지리와 언어 등에서 유럽 대륙과 특수한 관계에 있으므로 對유럽홍보활동 중심기관을 영국에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영국은 유럽 대륙과 지리적으로 떨어져있고 영어를 사용하므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대륙에서는 프랑스어로 홍보활동이 가능하기에, 어떤 난관이 있을지라도 파리사무소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미주, 영국, 프랑스 등 3곳에 기관을 鼎立하고 독일에도 기관 설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황기환은 국내 인사와도 연락을 시도하였는데 1921년, 황기환은 그해 2월에 귀국한 길이라는 청년으로 하여금 경성에 사는 김 베시를 방문하도록 하였는데, 소식이 없다며 그 청년을 방문하라고 김 베시에게 영문편지를 보냈습니다. 일제가 중도에 가로채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전달된 뒤 1921년 8월 12일 외무부에 보고된 편지에 따르면, 황기환은 영일동맹 갱신을 막고자 노력했고, 영제국대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홍보하기 위해 소책자 영일동맹과 한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그러던 1921년 4월, 그는 런던경찰국에 소환당했는데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가 영국을 방문하려는 동안 암살하려 한다는 혐의였으며 이에 황기환은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한국인은 암살자가 아니다"라는 항의 서한을 보냈고, '더 스타', '데일리 익스프레스' 등 언론사들에도 한국인들은 일본왕자 암살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일본 당국자들이 그러한 소문을 퍼뜨렸음이 분명하다는 항의서를 보냈으며 1921년 6월 12일, 황기환은 영국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사람의 청원'이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배부하는 동시에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에게도 보냈습니다.소책자에는, 4200년의 한국역사, 한영조약, 포악한 힘에 의해 맺어진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일제의 압제, 만주와 한국에서 상업권을 농락하고 한국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것 등이 언급되었지만 성과는 크게 없었습니다. 또한 1921년 6월 23일 프랑스의 한국친우회 결성식에 참석한 그는 매우 서툰 프랑스 어로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짤막한 연설을 하였습니다.황기환은 홍보 활동과 더불어 파리에 온 한국인들을 돕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파리위원부는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있던 한국인노동자 500여 명을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1919년 10월 4일 프랑스 노동부와 교섭을 시작하고 이 사실을 무르만스크에 통지하였습니다. 무르만스크에서 철수하던 영국군의 보호로 500여 명 중 200명이 영국 에든버러(Edinburgh)에 도착 예정이라는 통지를 받은 황기환은 10월 15일 영국 런던을 거쳐 에든버러로 가서 한국인노동자 200명을 방문하였습니다.그러나 영국 외무부는 주영 일본대사관으로부터 한국인들을 중국 청도로 데려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이송시킬 수 없다고 대답했으며 500명 노동자를 고용하겠다고 구두로 승낙한 프랑스 노동부에서도 프랑스인들이 동양노동자를 배척하기에 한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다고 통지하였습니다.황기환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200명 중 대부분은 동양에 보내졌고 홍재하 등 35명 만이 프랑스로 이송되어 11월 11일 파리에 도착하여 공장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들이라도 프랑스로 가서 노동할 수 있었던 것은 황기환이 적극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한국인노동자들은 노동을 시작한 11월 19일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를 조직하였는데 재법한국민회는 적십자회를 위해 850프랑을 모아 본부에 보내도록 황기환에게 위탁하였고,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6개월 동안 모음 60프랑을 파리위원부에 기부하기도 합니다.또한 황기환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일자리 알선에 나섰으며, 유럽에 온 한국인 유학생들도 적극 후원했습니다. 신한민보 1920년 12월 16일자 파리통신부 간청 기사에서는 황기환은 파리에 온 학생 임장춘이 여비 부족으로 미주에는 가지 못하고 한달 동안 노동을 하다가 병을 얻어 8~9개월 동안 입원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도 없으니 300달러 여비를 마련할 수 있독록 도와달라고 신한민보 구독자들에게 요청하기도 합니다.
▒미스터 썬샤인 유진 초이 실존인물 황기환_젊은 죽음
런던과 파리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황기환은 1921년 8월경 워싱턴 회의를 준비해야 하니 와달라는 이승만의 부탁으로 미국으로 향했지만 대신 대유럽홍보활동을 전개할 이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황기환은 워싱턴 회의 기간 동안 민찬호 목사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협조하는 등 구미위원부의 구성원으로서 적극 활동했지만 워싱턴회의는 파리강화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문제를 외면했습니다.이후 그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외교선전활동을 지속했습니다.그러나 1923년 4월 18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때 황기환의 나이 35~37세로 너무나 젊은 나이의 죽음이었습니다.그의 유해는 퀸즈 메스패스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황기환의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2013년, 국가보훈처는 황기환의 묘를 처음 발견한 뉴욕한인교회의 요청을 받고 뉴욕에 실사단을 파견, 황기환의 유해를 현충원에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황기환은 생전에 제1차세계대전에서 미군 소속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해서는 뉴욕주법원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던 것입니다.황기환 유해 봉환은 예상과는 달리 차일피일 미뤄졌는데, 그 이유는 국가보훈처가 뉴욕주법원에 승인을 요청하면서 제출한 서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국가보훈처는 황기환의 영어 이름이 EARL K. WHANG인데도 'karl k. WHANG'이라고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효성 뉴욕총영사가 이 서류에 서명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정작 박효성은 서류가 도착했을 당시 총영사직을 이임한 뒤였기 때문에, 서명 위조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황기환 사후 100년만인 2023년 2월 봉환이 결정되었으며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NARA에 보관돼 있던 황기환 지사의 미 육군 참전 및 사망자 공식 명부 발견
황기환 애국지사(1886~1923년)가 미국 국적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기록이 극적으로 발견됐는데 10대에 미국에 간 이후 주로 프랑스·영국 등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황 지사는 출생 연도나 미국 내 활동 이력이 명확하지 않았는데, 미 정부 공식 문서로 이 같은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입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황기환 지사의 미 육군 참전 및 사망자 공식 명부가 확인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평안남도 순천 출신인 황 지사는 1886년 4월 4일 태어났으며 18살인 190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이듬해 1905년부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민족운동 단체인 미 공립협회의 오리건주(州) 레드랜드지부 부회장을 맡아 항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공식 기록 확인 결과 황기환 지사는 미국에서 얼(Earl)이란 이름으로 살았는데 고국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의 싹이 피어나고 있던 1918년 5월 18일, 황 얼 기환(Whang Earl Keewhan)이란 이름으로 미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했다는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일리노이주(州) 시카고의 육군 소속 14 기지병원(당시 세인트 루크스 병원)의무분견대에서 이등병(private) 계급으로 복무를 시작했고, 곧 유럽 서부 전선에 파견됐습니다. 그해 11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장에서 중상자들을 구호했다고 합니다.
황기환 지사 사망 명부에 따르면 황기환 지사 아버지의 이름은 Jemo(황재모로 추정), 어머니의 이름은 Kue Hein(구혜인으로 추정)으로 적혀 있었지만 당시 황기환 지사의 부모가 살아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부인이나 자녀도 없었기에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지만 유족이 없어, 아무 연고 없는 뉴욕 퀸스의 공동묘지에 계속 묻혀 있었다고 합니다.황기환 지사 묘소는 사망한 지 85년이 지난 2008년에야 발견됐는데 뉴욕 퀸스의 한 공동묘지에 있는 높이 50㎝ 남짓한 자그마한 비석엔 대한인 황긔환(황기환)지묘, 민국오년사월십팔일영면이란 글귀가 한글로 쓰여 있었습니다. 민국 오년은 임시정부 수립 5년 차라는 뜻으로, 비석을 세운 동포들과 황기환 지사의 독립 염원이 이 문구에 담겼습니다.현재 우리나라는 한류라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문화강국으로 거듭나고 있고 세계인들이 한국의 문화를 보고 들으며 흠모하고 있지만 120년전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암흑 중 암흑이었으며 전 세계가 깡패가 되어 남의 집을 노략질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던 시대에 여기 저기에서 속수무책으로 강탈을 당하며 나라를 잃고 백성들은 일제의 노예가 되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생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뜻이 조금씩,조금씩 현재에 모아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유진 초이의 실제인물 황기환 지사는 드라마보다 더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이 다하는 날까지 투쟁해온 인물이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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