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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역사7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10대 산상대제기_두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왕후와 발기의 반란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10대 산상대제기 두번이나 왕후가 된 우씨 왕후와 발기의 반란 산상대제의 이름은 연우이다. 혹은 위거라고도 한다. 신대제의 서자이고 어머니는 주태후인데 황룡과 몸을 교합하였다가 그날 밤을 같이한 연후에 태어났고 태어나서 바로 사람을 바라보았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우후가 산상대제를 좋아해 남몰래 상통하고 고국천제가 죽으나 상이 났음을 숨긴 채 몰래 산상대제를 궁중에서 맞아드리고 가짜 조서를 세워 고국천제가 죽었음을 알렸다. 고국천제의 동생인 발기는 연우의 적형이므로 제위에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기에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두고 싸웠다. ▣第十世紀 제10세기 帝, 諱, 亦曰, 之別子也. 母, 太后, 夢黃龍纒其身而交之. 奇其夢, 而當夕.. 2024. 1. 26.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9대 고국천제기_고구려 최초의 국상 을파소의 중용과 진대법 실시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9대 고국천제기 고구려 최초의 국상 을파소의 중용과 진대법 실시 고국천제의 이름은 남무이다. 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 신대제의 둘째아들인데 어머니는 목태후인 목도루의 딸 수례이다. 을미년(AD155) 4월에 황룡이 몸을 얽은 꿈을 꾼 후에 아들을 낳았다. 키가 9척이고 늠름한 외모에 가마솥을 들을만큼 힘이 셌다. 정치에 있어서 아량과 엄격함에 중용을 알았다. 임금의 형은 현태자인데 선하지만 용감하지 못하여 신대제가 고국천제를 후사로 삼은 것이다. 이제 형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나에 있었다. 현태자는 "예로부터 현명한 이가 제위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고는 해산에서 선을 즐기러 갔기에 서도의 황단(난대)에서 즉위하였다. 第九世 故國川.. 2024. 1. 25.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8대 신대제기_국상 명림답부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좌원 전투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제8대 신대제기 국상 명림답부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좌원 전투 신대제의 이름은 백고인데 태조대제의 별자이다. 어머니는 상온의 딸 천화인 상태후이다. 의표가 영특하여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워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제가 무도하자 백성과 신하들이 친하게 지내기를 꺼렸다. 화를 당할까봐 백고도 맥부에 사자로 갔다가 산속에 피했었다. 이때 차대가 백고를 의심해서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의 자식인가?"라고 묻자 상후가 仙帝의 자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차대가 화를 내어 백고가 태어났을때 그대는 상황 태조의 총애를 받던 후였는데 어찌 백고가 仙제의 자식이 될수있냐고 하였다. 그래서 상후와 멀리 떨어져 있던 백고는 위급해졌고 상후는 명림답부에.. 2024. 1. 24.
추모왕(주몽)의 고구려 최초 도읍지_졸본성은 환인 오녀산성이 아니라 중국 대륙 산둥성에 있었다! 추모왕(주몽)의 고구려 최초 도읍지 졸본성은 환인 오녀산성이 아니라 중국 대륙 산둥성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최초로 졸본이 등장하는 졸본성은 700년의 장대한 역사를 가진 고구려 왕조의 첫 번째 수도로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이후 제2대 유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40여 년간 초창기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동명성왕 고주몽은 세 현자를 만나 신하로 삼은 뒤, 아래의 선언을 하며 공식적으로 국가 건설에 나섰지만 북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궁전을 지을 겨를이 안되어 졸본천 비류수 가에 초가집을 지어 임시로 거주했다고 합니다. "난 경명(景命)①을 받들어 원기(元基)②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급하게 궁실(宮室)을 만들지 않고 단지 초가집을 지어 비류수(沸流水.. 2023. 12. 6.
고구려 건국시조 고주몽 죽음의 미스터리_중국 왕망에게 처형당한 고구려후 추(騊)는 추모왕이었을까?유리왕일까? 중국 왕망에게 처형당한 고구려후 추(騊)는 추모왕이었을까?유리왕일까? 고구려 건국시조 고주몽 죽음의 미스터리 맨몸으로 부여를 탈출하고 고구려를 창업한 불세출의 영웅 고주몽은 추모왕이 되어 고구려 700년의 기틀을 다지고 40세의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합니다.같은 해 부여에서 자신을 찾아온 아들 유리에게 태자의 지위를 준지 5개월만으로 이 급작스러운 추모왕의 죽음은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광개토대왕릉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 2023. 12. 5.
고구려 왕 계보 미스터리_유리왕은 추모왕의 진짜 아들이었을까? 고구려 왕 계보 미스터리 유리왕은 추모왕의 진짜 아들이었을까? 고구려는 기나긴 역사만큼 뛰어난 왕들이 많이 배출된 나라이지만 그만큼 긴 역사 속에 고구려 왕들의 계보에는 수많은 미스터리가 있기도 합니다.특히 고구려를 창업한 주몽 추모왕과 그 뒤를 이은 유리왕은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추모왕과 유리왕의 혈통에 대한 의문점 역시 존재하기도 합니다.삼국유사 왕력 유리왕 부분에 ‘유리왕의 성은 해씨(解氏)이다.’라는 기록도 있는데 동명성왕은 고씨이고 유리왕은 해씨이므로 동명왕과 유리왕은 혈통이 다르다는 견해가 있습니다.해씨 고구려설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지만 반면 동명성왕이 원래 해씨였으나 부여를 탈출하고 고구려를 세우면서 고씨로 성을 바꿨고 아들인 유리왕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부여에 남아.. 2023. 12. 4.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대 시조 추모대제기_주몽의 정복전쟁으로 바라본 고구려의 초기 영토 남당유고 박창화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 제1대 시조 추모대제기 주몽의 정복전쟁으로 바라본 고구려의 초기 영토 남당유고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초(高句麗史抄)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박창화가 1933년 ~ 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서릉부(일본 황실 도서관)에서 촉탁(계약직)으로 근무했는데, 서릉부에는 일제가 규장각 등에서 약탈해 간 비공개 고서가 많이 있었고 10여년간 여러 책들을 읽고 손으로 옮겨 적었다고 합니다.광복 이후에는 교사 생활을 했으며, 제자 김종진, 김준웅 형제를 가르칠 때 화랑세기 필사본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 당시 박창화 자신이 직접 일본에 가서 일제강점기 동안에 약탈해 간 고서들을 되찾아 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정부는 그의 .. 2023.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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