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아닌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의 또 다른 이름
스티브 잡스가 아닌 워즈니악 이야기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아이폰의 창조자, 우린 흔히 스티브 잡스를 떠올린다.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이름에 가리워진 진정한 애플의 두뇌인 스티브 워즈니악,애플 공동 창업자이자 잡스의 오랜 절친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지난 3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세계 경제와 미래포럼 2011'에 참석, 스티브 잡스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했다.워즈니악은 대형 컴퓨터들이 주류였던 20대 초반에 작은 컴퓨터를 만들어봤고,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며 '혁명'을 기다리고 있던 중 잡스의 "40달러에 팔자"는 제안을 받고 같이 회사를 차렸다고 설명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당시 HP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새 컴퓨터 설계에 대한 제안을 5번이나 거절당했다"며 "엔지니어들은 익숙해져 있는 것을 바꾸려하지 않는다"며 "HP 근무와 잡스와 차린 회사 운영을 병행했다"고 설명했다.돈 한푼 없었지만 일단 대출을 받아 부품을 사고 제품을 만들고 이를 팔아 갚으면서 사업을 했고, 점점 돈을 벌게 됐다는 얘기다. 이후 컬러 화면을 구현하는 '애플2'라는 혁신적 제품 개발에 성공, 투자를 받고 기업 공개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애플까지 왔다.다른 이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지속했던 워즈니악의 엉뚱함과 이를 놓치지 않고 빚을 얻어가며 상품화 시켰던 잡스의 무모함이 전세계인의 일상을 바꿔버린 애플이란 기업을 만들게 된 것이다.워즈니악은 애플을 창업하게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설명하며 "나는 천재 엔지니어라 불렸지만 괴짜였다"며 "당시 메인프레임같은 거대한 컴터가 주류였는데 TV처럼 작은 컴퓨터가 사람들의 삶에 혁명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또 "사람들은 TV가 잘 안나오면 무조건 때리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어렸을때부터 TV든 뭐든 뜯어보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컴퓨터를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라며 "변화를 두려워 하지말고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시도하라"고 강조했다.워즈니악은 연설이 길어지자 "그만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금방 끝내겠다"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는 세션이 끝나고 몰려드는 대학생과 직장인 팬들로부터 쇄도하는 싸인 요청에 모두 응해주는 친절함을 보이기도 했다는데 솔직히 강연이 길어지면 그 열정과 정성에 탄복해야 마땅한데 시간이 길어지니 빨리 끝내라고 하는 무식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라는,스티브 잡스에 비해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스티브 워즈니악은 어떤 인물일까?마케팅에 관한한 스트브 잡스가 천재라면 워즈니악은 엔지니어로써 천재이다.애플에게 있어 이 두 인물의 시너지 효과가 지금의 아이폰을 만들었겠지만 대중의 관심과 찬탄을 한 몸에 받는 잡스에 비해 워즈니악은 비교적 무관심속에 있었다. 물론 일반 대중속에서는 단서를 달아야 겠지만,짧은 글속에 워즈니악의 전부를 살펴볼 수 야 없겠지만 잠시 스티브 워즈니악을 살펴보기로 하자.
스티브 잡스라는 천재에 가려진 또 다른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은 1976년에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 컴퓨터를 세웠다. 이어서 1970년대 중반에 애플Ⅰ과 Ⅱ를 세상에 선보인 그는 퍼스널컴퓨터의 발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워즈니악과 애플 컴퓨터는 엔지니어로서 쌓은 경험과 더불어 발견에 대한 집요한 의지로 세상을 바꿔 놓았다. 이후 워즈니악은 거물 투자자로 변신했으며, US페스티벌을 통해 콘서트를 홍보하고 자선사업에도 힘써왔다.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고, 국립기술훈장과 하인츠 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스티브 워즈니악은 잡스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이다.워낙 부끄러움이 심해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직업은 애초에 바라지 않았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는 접근법으로 차별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다.컴퓨터는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다. 고등학교 가서는 컴퓨터 설계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칩을 더 적게 쓰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를 개발하는 걸 자신만의 게임으로 삼았다. 원래 목적이 아닌 용도로 칩을 사용할 정도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개발하려고 주말마다 노력하다보니저절로 실력이 쌓였다. 그러면서 굉장히 독특한 솔루션을 찾아냈다.
수줍음 많은 소년의 천재적 재능
스티브 워즈니악은열 살 때는 컴퓨터 로직으로 삼목三目,Tic-Tac-Toe용 ‘컴퓨터’를 만들었다. 삼목 게임 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해보면서 공식을 만들었다. 칸마다 1부터 9까지 숫자를 붙이고, X가 1과 3에 있고 2가 비어 있으면 2를 선택한다는 공식을 만들었다. 일련의 공식을 개발하면서도 여전히 삼목 게임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그 기계를 설계하고 있었다. “이것과 이것이 참이라면 이곳으로 간다.” 나는 창조적이 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고 싶었다."그 다음에는 덧셈-뺄셈 기계를 만들었다. 논리회로로 구성된 덧셈 기계와 뺄셈 기계의 디자인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들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작업을 거듭한 끝에 나만의 게이트를 추가함으로써 회로를 거의 변경하지 않고도 덧셈과 뺄셈을 모두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말 창조적인 작업이었다. 어느덧 나는 기존 설계를 베끼는 차원을 넘어선 설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문제를 파악해서 그 해결책을 내 힘으로 알아냈다. 그때가 열두 살 무렵이었다.부모님은 내삶에서 가치를 형성하는 데 크나큰 영향을 주셨고, 도움이 필요하거나 컴퓨터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길때면 아버지는늘옆에서설명을해주셨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혼자서 처리할 수 있게 됐다.휴펫패커드Hp와 디지털이큅먼트DEC를 비롯한 몇몇 회사에서 미니컴퓨터가 출시되고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워즈니악 자신이 컴퓨터 설계를 직업으로 갖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그냥 재미 삼아 했을 뿐이다. 동기는 내면에 있었다. 이 작은 게임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려고 안간힘을 썼던 이유는 승자의 기분을 맛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일로 보수를 받고, 명예를 얻고, 심지어 상을 타거나 요트를 소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즐거웠고, 그 일이 컴퓨터 설계였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부품으로 더 뛰어난 컴퓨터를 설계할 수 있을까?”
그는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필두로 칩의 가격이 떨어지면 컴퓨터 값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을 먼 미래로 상정하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일로생각했다.나는 설계 실력을 이용해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회사나 돈을 위해 그 실력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회로도를 그냥 줘버렸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도록 목록 일람표를 여기저기 돌렸다. 적정한 가격에 원하는 작업을 처리해주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공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워즈니악은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고 구태의연한 방식은 원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은 느리고 불편하며 목표 달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40년 동안 컴퓨터가 만들어졌던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저렴한 컴퓨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엔지니어라고해서 전부 발명가는 아니다. 발명가는 끊임없이 새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실생활에서 구현하려 한다. 짬만 나면 그렇게 하며, 그것을 삶의 열정으로 간직한다. 최선을 추구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발명가는 대체로 혼자서 작업하길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편이다. 작업실에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아이디어를 입증하고 싶어한다.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는데 좀 도와주겠어? 나는 이걸 할 테니 넌 저걸 맡아.”
이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내게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그걸 설계해서 칩들을 보드에 끼우고 연결했으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만들었다. 그 누구와도 상호작용할 필요가 없었다.
애플 컴퓨터, 드디어 세상으로 나오다!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이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때였는데, 둘은 다른듯 하면서 공통점이 많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전자공학과 음악을 얘기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곧 친한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 나는 HP에서, 그는 아타리Atari에서 일했다.머잖아 애플이라는 이름을 달고 진짜 PC가 나오기 전까지 동적 메모리를 이용하는 컴퓨터 디자이너는 나뿐이었다. 동적 메모리를 아무도 쓰지 않은 이유는 설계에 손이 더 많이 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모리에 데이터를 계속 보관하려면 ‘재생회로’라는 것도 설계해야 했다. 설계 작업이 더 늘어나긴 했어도 칩의 양은 줄었다. 동적 메모리는 저장량이 네 배여서 칩이 4분의 1만 필요했고, 가격은 절반이었다. 그러니 내게는 옳은 선택이었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컴퓨터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죄다 허울뿐이었고, 실상은 정적 메모리를 사용한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스티브 잡스는 함께 회사를 차리자고 나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PC보드라고 불리는, 컴퓨터의 기인쇄회로Preprinted circuit를 만들자고 했다. 20달러로 만들어 40달러에 팔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동의했고, 일하고 있던 HP에서 허가를 받았다. HP는 그 프로젝트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원래는 애플Ⅰ을 독자적으로 설계한 다음 회로를 모두에게 공개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회사를 설립하려니 어딘가 이상했다. 몇 주가 지났을 때 스티브는 ‘사과 과수원’에 다녀오더니 우리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기계 냄새 나는 이름보다 애플 컴퓨터가 듣기도 좋고 더 창조적이라고 주장했다.얼마 후 인근 컴퓨터 상점에서 내 컴퓨터 시연을 보고 완성품 보드 100개를 주문했다. 이제 큰 거래-5만 달러 주문-의 물꼬를 튼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부품을 30일 외상으로 사다가 열흘 만에 제품을 만들어 납품한 것으로 현금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업이 시작되었다.그때 워즈니악은 스물다섯이었고, 잡스는 스물한 살이었다.가끔은 설계한 것을 구동하는 중에 뭔가를 발견할 때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이 설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미리 알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충분히 생각하고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을 담은 후에 종이에 그리기 때문이다.회사를 세우고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애플Ⅱ를 설계했다. 애플Ⅰ을 대폭 개선한 제품이었다.
시스템 메모리에서 텍스트와 그래픽, 그리고 색을 이용해 설계했다. 키보드, 모니터, 게임 컨트롤러, 사운드가 함께 작동하는 최초의 PC였다. 그리고 가격이 낮았다. 그건 내가 처음부터 철저하게 모든 걸 설계한 진짜 컴퓨터 1호였다.애플Ⅱ에서 색이 제대로 구동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이전의 색 처리 방식과 너무 달랐고, 나는 컬러 TV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저 컬러 TV와 흡사해 보이는 신호를 넣어봤는데, 그게 작동됐을 땐 그야말로 유레카의 순간이었다! 스티브 잡스와 나는 엄청난 거물이 나오리라는 걸 직감했다.HP의 엔지니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체 화면에 색과 그래픽과 동영상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는 걸 보고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엄청난 물건이 우리 앞에 있었고, 이제 스티브와 나 둘이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애플Ⅱ제작을위해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물론이고 가족과 친구들도 워즈니악이 HP를 그만 두기를 원했다. 스티브의 집과 워즈니악의 아파트를 오가며 일하던 우리는 캘리포니아 쿠페르 티노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경쟁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애플Ⅱ는PC의혁명을일으켰다. 자료를 카세트테이프에 저장 하던 것에서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로 이동한 것은 사업용 프로그램 구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갑자기 컴퓨터가 한 달에 1만 대씩 팔려나갔다. 우리는 1980년에 주식 공개를 했고, 하룻밤 사이에 백만장자를 여럿 만들어냈다.수줍은 성격 탓에 애플이 생산하고 만들어 내는 그 모든 업적은 잡스에게 돌아가고 있지만 진정으로 오늘날의 애플을 탄생 시킨 원동력은 "스티브 워즈니악"이라는 이름이다.컴퓨터 거대 기업 IBM이라는 거대 공룡의 틈 바구니에서 워즈니악 같은 창의적인 엔지니어가 없었다면 잡스의 무모함과 도전 정신 역시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서글픈것은우리나라에도분명워즈니악같은창의적인인물이있었을것이고훗날에도분명나올것이지만 한국적 기업 풍토나 문화에서는 쉽사리 사장될 것이기에 안타까울 뿐이다.우스갯말로 "발명왕 에디슨도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전파상 주인으로 일생을 썩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강물은 흘러 바다로 간다.멈추어 있다면 옹달샘처럼 고이고 고여 썩을 것이다.우리 나라의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인재들이 제 실력의 100%, 150%를 발휘하게 할 수 있는, 고이지 않고 늘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사회가 된다면 대기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 기업 이름 없는 인재들도 제 2의 잡스와, 워즈니악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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